1. 종교학이란 학문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학문적 배경-종교학이란 학문이 근대 학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된 것은 불과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종교학이란 학문이 등장하게 된 시기는 18c-19c계몽주의시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중세의 어두움이라 표현되는 신앙중심이 아닌 인간의ㅣ 이성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자 라는 생각으로 종교연구가 실시되었고, 신의 힘이 아닌 인간의 감성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종교연구에 있어서 기본 모토가 되었던 인식은 “종교를 알아야 인간을 알고, 문화를 알 수 있다.”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이시기에 종교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연구되었고, 자리했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서 기독교가 아닌 그 나라만의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을 파송해 알아가면서 연구했다. 마지막으로는 근대학문을 연구했던 연구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면서 연구했다.2. 종교를 통해 인간과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에 의미-종교를 통해 인간과 문화를 이해한다는 말은 종교의 보편성을 얘기 하는 것 같다. 종교의 보편성은 종교가 없던 시대도 없었고, 종교가 없는 곳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 옛날 구석기 시대부터 종교는 계속해서 인간과 함께 했었다. 그 단편적인 예로 단군신화에 곰을 숭배했던 토테미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종교가 없었던 시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종교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항상 존재하면서 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런 점을 보면 종교는 보편적이다. 이런 보편성은 종교가 인간의 생활, 문화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종교는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런 면에서 종교를 통해 인간과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 세계 다양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를 연구하고, 또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종교연구는 계속해서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느낀다.3. 종교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종교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가장 먼저 종교를네명의 종교학자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좀 더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여 종교를 연구했다는 점과, 신의 현상이 아닌 오로지 종교적 인간의 현상으로 종교를 연구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으로는 먼저 는 루터교 교인인점과 인도의 영향으로 자유롭게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뮐러는 인간의 사고에 좀 더 중점을 두었고, 종교는 계속해서 변화하기에 그에 맞춘 방법론이 생겨나야 한다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했다. 는 정교회가 배경이 되었고, 성현을 중요시 했다.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우주적 결합으로 보았고, 새로운 휴머니즘을 만들자. 라고 주장했다. 는 종교경험을 3가지 표현방식으로 설명하였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였기에 학문적으로 적들이 많았다. 심리학 연구가 종교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나중에는 종교해석학으로 추구되었다. 엘란게 대하게 입학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은 진보적 성향으로 변화했고, 인간을 이해하는데 선험적 감정으로 성스러움을 얘기하였고, 후에 평화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의례개혁을 강조했다.5. 막시 뮐러의 비교의 방법과 역사적 연구-뮐러는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하며 종교를 연구하는 방법을 두 가지 제안했는데 그 중 위의 말은 ‘비교종교학’ 을 설명하면서 쓰인다. 뮐러의 ‘비교 연구방법’은 모든 종교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연구하는 방법이다. ‘비교연구방법’ 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의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연구해야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말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역사적 연구방법’이다.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종교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배경에는 뮐러의 언어적 연구와 신화적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 언어의 역사적 전개과정, 언어의 신화화를 ‘역사적 연구방법’의 증거로 제시하였다.6. 멀치 엘리야데의 성현의 의미와 사례-엘리야데가 주장한 성현은 종교인에게 나타난다. 시공간을 성스럽게 생각하고 여기는 들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종교경험은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다른 경험들과 구별된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기준은 궁극적 실재로 경험된 것에 대한 반응이라는 기준을 설명한다. 궁극적 실재는 우리를 사로 잡는 것, 신에대한 것으로 설명한다. 두 번째 기준은 이 실재에 대한 전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 실재는 인간의 지적인 것, 정서적인 것, 감정적인 것을 모두 반응하여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도덕적으로 사람의 힘으로 결정하고 결심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이러한 반응들로 인해 종교적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인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8. 요아힘 바하의 종교경험의 3가지 표현방법-바하가 말한 종교경험의 3가지 표현방법은 첫 번째 지적표현으로 흔히 사용되는 말로 신, 인간, 우주가 있는데 신은 깨달음 궁극적 존재나 원리에 관한 이론적 표현이고, 우주는 대체로 세상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며, 마무리되는가, 가치는 어떠한가? 라는 문제에 대한 설영이 제시되고 인간은 운명은, 죽은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의 주제를 다룬다. 두 번째 실천표현은 헌신, 봉사, 예배가 이 표현에 포함된다. 하나의 예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행위인 것이다. 마지막 표현은 공동체적 표현으로 종교는 항상 집단을 형성한다. 혈연이나 지연등 자연적인 조건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고 종교행위를 함께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 형성되기도 한다. 그런 공동체를 통해 표현되는 방법이다.9. 루돌프 오토가 얘기한 the numinous의 의미-the numinous는 누멘적 감정에서 파생되어온 말인데 누멘이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대상으로 신성한 것이면서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느낌, 감성, 정서적인 것이다. the numinous는 합리적이기 보다는 비합리적이라 설명할 수 있다. 또 the numinous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시작하여 자연숭배가 나타나고, 계속해서 다신숭배, 일신숭배, 유일신숭배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로 스펜서의 조상숭배론은 타일러의 애니미즘과 그 진화론적 발전을 긍정하면서도 애니마에 대한 규정만 수정했는데, 그는 애니마가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고 주장했다. 즉,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에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프레이저의 주물숭배는 종교가 주술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인데, 이러한 주장은 원시인들을 대상으로 많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원시인들의 지적능력이 차츰 발달하면서 그런 행위가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앞서 말한 종교의 기원이론들은 이미 그 설득력을 상실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이론들을 설명하고 형성하는 자료들이 불충분 할 뿐 만 아니라 부정확하다는 사실이 이미 많은 자료들로 인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진화론적 기원이론들은 원시인들의 지적열등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많은 기원이론들을 제시한 학자들은 종교 연구에 있어서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확한 사실과 한 면만 강조하는 이론들은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결점으로 다가 올 수 있다.11. 종교학도로서 종교를 정의하고 설명-프로이트는 종교를 강박증이라 정의하였고, 마르크스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종교는 다방면으로 정의된다. 아마 합리주의자들은 종교를 미신의 체계화라 정의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정의하는 종교는 원석, 원형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정의하는 이유는 나는 종교를 공부하는 학생임과 동시에 문화콘텐츠를 공부하는 학생이기에 그러하다. 프로이트, 마르크스처럼 나 또한 나의 관점으로 종교를 바라본다면 원형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는 나는 종교행위를 또 하나의 문화이며, 트렌드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등 각각의 종교들이 하나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며, 사람들을 이끌어 모으기도 하고, 그 안에서 행해지 사회의 해체를 막기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종교가 그러한 사회적 통합을 위해 담당하는 역할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라 한다. 즉, 종교가 사회의 분열과 해체를 막는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라고 설명할 수 있다. 종교는 개인이 사회적으로 품은 불만과 갈등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줄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단적인 예만 보아도 종교가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고 통합을 강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해 왔다.13. 종교의 정체성 확립 기능과 통과의례-정체성은 사람마다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 속에서 파악할 수도 있지만, 점차 사회 속에서 직업과 지위, 그리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곧 정체성 확립이다. 정체성의 확립에 종교는 적절히 도움을 주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통해 전통을 이어 왔고, 개인은 그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왔다. 정체성 확립에는 육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성숙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의례를 통해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례를 통과의례라 칭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성인식이다. 어린아이에서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이 의례는 현재는 많이 간소해지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교수님이 보여주신 영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성인식은 성인의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는 중요한 날로, 이 의례를 통해 어린아이는 죽고 성인으로 선택과 책임이 주어진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고 공동체에 소속하여 소속감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기능과 의례는 원시 및 고대문화에서 종교적 전통의 산물이라고 본다.14. 종교의 의미부여 기능과 그 사례-종교의 의미부여 기능은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린 인연이 아니다..
-KBS역사 스페셜 조선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영상의 시작은 겸재 정선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사실 영상을 보기 전 나는 그림이라는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림 볼 줄도 몰라 지루 할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특히 조선의 그림? 내가 아는 그림이라곤.......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건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과제이기에 영상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영상은 재미있었다. 수업시간에 봤던 그림들은 물론 내가 자주 접했던 그림들도 있었고,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시대나, 상황들도 같이 보다보니 집중도 잘되고 재미있게 본 것 같다.영상 초반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을 설명하고,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설명하는 말로 “정선은 우리 설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영상을 대충 보던 나에게 한번 집중해보지? 라는 말로 다가왔다. ‘애정’ 이 단어가 내 귓가를 자극했던 것 같다.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을까 애정이 담긴 그림은 무엇 이길래? 라는 의문을 가지고 영상을 봤다. 이미 알고 있는 그림도 꽤 있었는데 그냥 지나가는 그림이 아니라 애정 담긴 그림이라 생각하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았다. 영상에서는 그림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실제 그 그림에 배경이 된 실사들을 보여줬다. 그림을 보며 실사를 보니 정선의 그림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다.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실제보다 더 아름다웠고, 묘했다. 신비로웠다. 라는 표현이 맞을까? 그런 느낌이었다. 조선의 정신을 담으려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 얼마나 용감했는가. 독창적이고, 창의력이 뛰어났다. 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정선의 그림을 설명한 뒤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영상이 화면전환을 했다.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림이었는데 사실 이 그림은 좀 무서운 느낌이랄까? 얼굴만 있고, 부릅뜬 눈에 여느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지긋하고, 인자한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 이었기에 약간의 거부감도 들었었다, 그러나 숨겨진 모습을 수업시간과 영상을 통해 보면서 여느 초상화와 다를 바 없다. 라는 것을 느꼈다. 귓바퀴부터 시작해서 적외선 카메라로 볼 수 있는 옷깃과, 도포, 상반신의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윤두서의 생략법이라는 그림기법이 그 시대에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또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윤두서의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는데 류하백마도, 주마상춘도를 보면서 너무 신기한 것은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사실적이고 세밀하다는 것이었다. 그림이라 하면 추상적인 느낌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사실적으로 그린 것을 보면서 많이 놀라웠다. 그 후 윤두서가 그린 풍속화에서 양반이 아닌 서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속화를 보면서 그 시대의 생활상을 담고 있어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는 서민들을 등장 시키는 것에 대해 윤두서의 그림이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양반이 아닌 직접 노동에 몸담고 있는 서민들을 그린 것은 그 시대를 풍자하는 느낌도 강하다. 라고 생각했다.그 후 나오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가장 많이 보았던 쉽게 접했던 풍속화들이라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용주사에 있는 후불탱화는 처음 접하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 같았는데, 누가 보아도 단원이 그린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단원의 그림 특징들이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한다. 후불탱화에서 쉽게 볼 수 없다는 인물화라며 설명한다. 불상에만 주력해서 그렸을 텐데 이런 인물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린 모습에서 단원 김홍도가 세밀하고 세심한 성격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과 더불어 이 후 그린 화성원행반차도, 원행을묘의궤도 등 김홍도의 그림의 완성도가 높은 이유는 물론 단원의 성격과 왜 그가 정조에게 신임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원 김홍도로 인해 정조 시대에 서양그림은 물론 그림의 부흥기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라는 느낌이 들었다.
A-story 파헤치기!처음 A-story를 조사하기로 했을 때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는 이유로 조사를 시작했다. A-story에 대한 자료도 많이 없었고, 교수님이 주신 기사, 홈페이지가 전부였다. 다른 기업을 찾아볼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상백 대표의 “한 편의 드라마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이라는 문구에 이끌려 계속해서 A-story를 조사했고, A-story는 내 첫 예상과 같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쉽지 많은 않은 기업이었다. 그저 드라마를 즐기는 마음만 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업이지 않나 드라마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열정 또한 갖춰야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 A-story란?“재미와 감동 그 이상의 드라마를 위하여.......”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 이다. A-story는 2004년에 종합병원, 허준, 상도, 올인 으로 유명한 최완규 작가가가 미국과 같은 집단 집필 체제를 선언하며 설립한 작가 전문회사이다. 최완규 작가가 꾸었던 꿈, 우리도 미국처럼 집단 집필 체제가 필요하다. 라는 말은 꽤 설득력 있었고,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완규 작가의 의견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수현 작가이다. 김수현 작가는 A-story의 출범에 꽤 부정적 입장을 표했다. 이 때만 해도 김수현 작가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작가 시스템으로 미국 드라마는 성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최완규 작가의 실패로 돌아갔다. A-story창업 초반에는 최완규 작가가 직접 집필한 ‘주몽’ 만 약간 빛을 보았을 뿐 그 뒤의 작품들은 뭔가 2% 부족하거나 작가 명성과 걸맞지 않다. 라는 실망스러운 평이 뒤를 이었다. 그 후 대본공장이라는 평도 꽤 많이 있었다. 최완규라는 작가 이름만 있고, 실제 집필은 신인작가들이 했기 때문에 2%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A-story는 실패작이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A-story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A-story는 꾸준히 한계에 도전하며 작가 개인의 재능을 키워 공동 창작 시스템, 공동 집필 시스템 이라는 단어의 자리를 굳혀갔고, 강소기업으로 성장해왔다. 예전에 A-story라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이제는 믿고 보는 시선으로 변화했다. 그 안에는 탄탄하고 안정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 편의 드라마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라는 말에 A-story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사하게 되었다.2. A-story 의 비결A-story는 창립 이후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제작한 대다수의 작품들이 평균 시청률이 15%을 기록했다. 이 작품들 중 2011년에 방영된 SBS 는 아시아 주요국에 판권이 팔렸고, 같은 해에 제작한 SBS 역시 국내 드라마로는 최초로 우크라이나에 수출되는 등 드라마 사상 최다인 30개국에 판권이 판매되었다. 현재 A-story의 대표이사인 이상백 대표는 이러한 비결로 철저한 작품 검증시스템을 꼽았다. 우선 다수의 흥행 작품으로 실력을 검증받은 작가들과 계약을 맺고 매년 5-6개 작품을 준비하고, 절반 이상을 제작/방영하고 있다면서 특히 작품들을 20년 이상 경력의 프로듀서들을 통해 고르고 A-story의 대표작가인 최완규 작가가 최종작품을 선별하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최소화 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비결로는 탄탄한 스토리를 말했다. A-story는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 한다고 한다.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회의를 거쳐 수정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작품하나를 만들기 위해 최소 10개월 이상을 준비한다니 얼마나 스토리를 중요시 하는지 알 수 있다. 이상백 대표는 해외 판권을 위해 아이 돌 스타를 캐스팅하는 등 드라마 업계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A-story의 대표진들은 말한다. 모든 드라마의 기본은 대본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스토리를 강조하고 스토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본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A-story가 강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3. A-story 인재상&조직A-story의 인재상은 개개인의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인 인성, 직무능력, 드라마 한편 한편과 자신의 업무에 대한 열의를 중요시 한다. 조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A-story는 공부하기 위해 그저 하나의 경험으로 생각한다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A-story는 프로로서 제작과 바로 연관 지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드라마를 그저 재미로 즐기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힘들지 않을까?
-여행 안으로 녹아들어온 커피-낯선 곳에서도 평온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어딜 가던 익숙한 향이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 가 커피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여행하던 늘 함께하는 커피, 여행은 평온을 주며, 안정감을 준다. 커피도 그렇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를 구분하지 않고 커피는 함께하며 추억을 만든다. 바늘과 실처럼 뗄 레야 뗄 수 없는 커피와 여행 요즘은 커피를 따라 여행하기도 하고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나는 항상 혼자 하는 여행도 커피만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만큼 여행에 있어서 필수 아이템 커피!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커피와 여행을 함께 찾는 것일까?아마 그 첫 번째 이유는 향기가 아닐까? 커피만의 진한 향 그 향이 자꾸 나를 커피로 이끌게 하고 손에 쥐게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 여행지만의 특유의 향, 한번이라도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그 향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여행을 원하고 여행지 그곳으로 떠나는 것 같다. 두 가지 모두 특유의 향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찾고 즐기는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움과 친근함의 조화이지 않을까? 항상 커피는 더 새로운 메뉴로 조금씩 다르게 사람들을 찾아온다. 하지만 원래의 본질은 원두이기에 그 친근함이 있기에 새로움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여행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커피와 함께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친근한 것이 항상 같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유를 꼽자면 여유와 편안함을 준다는 것이다. 모든 여행이 편안함을 선사하고 여유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여행이라 하면 ‘힐링’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커피 또한 마찬가지 이지 않을까? 외롭고 힘들 때 카페에 가서 앉아 있으면 그 그윽한 향기에 위로를 받곤 한다. 또 한 커피한잔이 나에게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손에 꼭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기도 하다. 위로를 받고, 이야기가 되고 추억이 되는 것은 여행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최근에 떠난 여행이 바쁘게 움직이고 힘들어하는 나에게 잠깐의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커피를 찾아 떠나는 강릉여행이었는데 마음이 따뜻해지고 여유를 선물하는 여행이었다. 여행 내내 커피와 함께하며, 여행 특유의 따뜻함과 힐링을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에 커피 향까지 더해지니 이게 바로 여행의 여유로움이구나. 평온함이구나. 라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정조 대왕 전기문-‘조선의 제22대왕 정조, 오늘날 우리가 정조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정조가 꿈꾸었던 조선, 그가 꾼 꿈은 과거를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며 증오의 마음이 아닌 사랑으로 만들어 나가는 조선이었다. 11살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왕위에 올랐다.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는 결코 그 운명에 굴하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기력이 약해진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 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 조선의 제 22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당쟁이라는 권력싸움 속으로 정조는 걸어 들어간 것이다. 정조는 국왕에 즉위한 후에도 종종 “국왕이 된 것이 즐겁지 않다.” 라는 말을 했다. 국왕이라는 조선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평생 정조의 가슴속에 남은 불행한 의식, 비극적인 운명은 정조의 강한의지로도 완벽히 떨쳐내지 못했다.정조는 즉위 직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윤음을 내리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상을 높였고,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으로 높여 부르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과 더불어 국왕의 아버지로 복원시키려는 정조의 노력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뜻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노론 세력에게 큰 위협이었고, 정조에 대한 반역과 암살 위험으로 돌아왔다. 이 때문이었을까? 정조는 즉위 초기에 마음대로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1. 의리의 주인, 홍국영.가장 먼저 홍국영, 정조는 어렵게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정조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정치개혁,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것, 힘을 기르는 것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즉위 직후 정조는 홍국영의 도움을 받아 즉위를 방해했던 홍인한을 제거하고, 외척들과 결탁해 정치에 간섭한 환관들을 대폭 정리 모역 사건이란 정조의 정치의 반대파인 노론의 자제들이 3가지 방법을 사용해 정조를 몰아내려고 시도한 사건들을 일컫는다. 이 역모사건에 외삼촌이 조카를 살해하고 다른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할 정도로 구 정치세력과 정조의 대립은 치열했다. 정조는 이모든 위협에 홍국영을 내세워 대응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신임했고, 이러한 신임으로 인해 홍국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고, 홍국영의 야망은 계속해서 커져 나갔다. 홍국영의 야망의 시작은 정조2년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고 이때부터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나라의 주요 사안이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의 권력은 엄청났다. 그때의 홍국영은 정조의 뜻을 실행하는 행동대장의 모습이었다. 그 신임이 너무 두터워서 이었을까? 외척세력을 척결해 낸 홍국영은 자기 스스로 외척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라는 정조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에게 있어 홍국영은 형제고, 친구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존재인 홍국영을 그저 사사로운 감정만으로 외척세력이 되어가는 정조의 그 신임을 권력으로 휘두르는 홍국영을 그대로 둔다면 자신의 정치개혁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는 정조3년 원빈 홍 씨가 사망하고, 정조 4년 홍국영을 자진은퇴형식을 빌려 추방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일인지하 권력을 누린 홍국영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자신이 척결해 온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홍국영을 사직시킨 후 정조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불식시키고 비로써 ‘탕평정치’라는 새로운 정치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다.2. 모든 신민을 한 가족처럼 탕평정치, 성왕의 정치."뭇 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탕평정치를 설명할 때 많이 사용되는 설명구이다.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바로 잡힌다. 라는 서류허통절목을 공표하였다. 또 정조는 편당을 제거하고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 공평함을 가지고 정치개혁을 시행하였다. 영조 때부터 이어지던 탕편 정치를 정조는 새롭게 재해석하였고 재해석 된 성왕 론-탕평정치의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성공의 여부를 떠나 그 정책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가 되었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신분제 사회의 개혁의지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개혁의지는 정조22년에 노비 제 개혁문제로 논의되었고, 오랜 시간을 들여 구상과 계획을 세웠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비록 정조가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승하하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개혁정치를 위해 정조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를 알 수 있다.3. 왕실도서관에서 쉽게 침범하지 못하는 연구기관으로.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이다. 역대 국왕들이 직접 쓴 글을 보관하고 도서를 수집하며, 편찬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숙종 때 있었던 작은 기관이 확대 된 것은 정조 때의 규장각이다. 세종에게 집현전이 있다면 정조에겐 규장각이 있다. 라는 식의 해석이 규장각을 이해하는데 가장 빠를 것이다. 정조는 세손시절 정치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집권 이전에 잘못된 현실 정치를 비판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해서이었을까? 정조는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마치 사자가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본심을 숨기면서 자신이 즉위할 경우를 대비해 계속해서 정치개혁 방안을 모색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개혁 기관에 대한 반발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존의 규장각을 활용한 것이다. 왕실의도서관 개념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정조의 재위기간동안 차츰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되었고,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정치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에용되었고 이들은 후에 정조의 개혁정책에 뒷받침이 되었다.4. 숙위소를 거쳐 장용영의 시대.정조12년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군사조직을 창설하게 된다. 왕조 국가의 무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노론, 외척세력의 끝없는 위협 속에서 정조가 자신의 뜻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친위부대가 필요했고, 즉위 초에서는 홍국영이 이끄는 숙위소를 설치했었다. 그러나 숙위소는 홍국영이 생을 마감하면서 숙위소의 정치적 역할로 마감하게 된다. 그 후 정조 8년 국왕 호위군, 기득권층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장용위를 신설하고, 정조12년 인원이 보강되고, 장용영으로 개편되면서 ‘장용영의 시대’ 가 열리게 된다. 장용영 개편과 더불어 정조는 군제개혁에 돌입했다. 우선 조선 초기 오위 체제를 복구하고자 했다. 그는 나뉘어져있는 오군영을 비판하였다. 나누어져있기에 군사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군사적 조치가 번잡하게 되었다고 인식하였고, 오군영 대장들이 아닌 병조판서가 인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조의 이러한 행동은 군대의 조직체계와 명령체계를 하나로 만들면서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신속히 대응하려는 행동이었다.5. 정조의 모든 것 화성으로 통하다.정조의 마지막 키워드 ‘화성’이다. 정조라는 조선의 임금을 얘기할 때 화성을 빼 놓는다면 정조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화성은 정조의 모든 사상들이 깃들어있다. 정조가 이전에 행했던 업적 또한 모두 화성과 연관성을 가진다. 화성은 그저 성곽의 모습만이 아니다. 화성은 안정된 사회 위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당쟁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도세자의 능을 기존의 양주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의 화산으로 이전하며 기존 마을을 팔달산 아래로 수용하는 성을 쌓게 된다. 화성은 정조18년 2월에 시작해서 정조 20년 9월에 완성되었다. 화성건설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내겠다. 라는 정조의 역사적 사명과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추진된 대규모 공사이었다. 이 건설과정에서 정약용, 김홍도, 조심태 등 여러 신하들, 설에 대한 노론세력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화성 건설 자체를 비판하기 보다는 건설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주로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함께하여 정조20년 지금의 화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성 건설로 정조는 개혁정치를 향한 국왕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그와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는 군사적, 경제적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정조는 자신 중심의 정부를 구성하였고, 백성과 국왕의 사이를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화성이 완공되기 전 정조는 도성이 아닌 화성에 행차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게 되는데 이 화성행차로 인해 화성으로 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정치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정조의 화성행차는 기득권 세력에 강한 압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정조는 화성이 새로운 상업세력의 근거지가 될 수 있도록 모든 방법들을 강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노론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과 전면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들의 정조의 정치에 크게 반발하였고, 정조는 그들을 배척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뜻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정조는 위대한 정치가이었으며, 백성들을 놓지 않는 어진 국왕이었다. 정조의 개혁정치들은 조선이 새로운 도약 할 수 있도록 발판이 되었다. 정조의 개혁정치가 그의 돌연 서거로 인해 후대에 온전히 계승되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신/문화적 유산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정통성을 가졌지만 가장 세력이 약할 때 국왕에 즉위했다. 특히 그 시대 가장 큰 세력이었던 노론과는 매 순간순간 적대관계 이었다. 과감히 극단적으로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을 척결하였지만 노론 전체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조가 선택한 방법은 시종일관 탕평정치이었다. 노론세력을 완전히 제거 한다. 라기보다는 자신의 뜻에 노론이 동조하기를 희망하며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나갔다.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