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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말선초의 정치세력변동과 토지제도의 변화
    여말선초의 정치세력변동 · 토지제도목차 Ⅰ. 머리말 Ⅱ. 여말선초 정치 · 사회적 혼돈 1. 신진 사대부의 성장 2. 위화도 회군과 고려 멸망 Ⅲ. 여말선초 시대의 토지제도 개혁 1. 권문세족의 사전 · 농장 확대 2. 과전법의 성립과정 1). 과전법의 내용 2). 과전법의 의의 Ⅳ. 맺음말 ♠참고문헌♤1. 머리말 백성의 삶이 피폐해짐 세력 다툼 개혁Ⅱ. 여말 선초 정치사회적 변동 공민왕 사후의 고려조정의 혼란 권문세족의 재집권 도평의사사를 통해 권력 행사 . 정치개혁 보다는 권력유지 . 원∙명 양단외교로 인해 권문세족 친원파 , 신진사대부는 친명파 로 대립 . 왜구의 약탈∙백성으로 부터 토지 약탈 .근년에 ( 토지를 ) 검병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 이 주 · 군에 걸치는 규모로 겸병하고 산과 강을 표식으로 삼아 모두 조상 때부터 전래된 토지라고 우기면서 서로 빼앗으니 , 한토지의 주인이 5,6 명이 넘고 한 해에 조세를 8,9 차례나 거두고 있습니다 . ···( 그리하여 ) 불쌍하게도 우리 무고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고려사 』 식화지 녹과전조의 우왕 14 년 6 월 대사헌 조준 등 상서 ) 권문세족들은 대농장을 소유 . 대농장이 토지에 대한 수조권으로 조성 .근년에 와서 전쟁이 계속되고 수재 , 가물이 연이어 일어나서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빛이 어리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데다가 한 토지의 땅 주인은 2 ∼ 3 명씩 되어 제각각 조세를 징수하여 민심 ( 民心-백성들의 재산 ) 을 쪼개어 가고 있는데 해당 지방 관청들과 안렴사와 찰방 ( 察訪 ) 사들이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가련하고 고독한 백성들은 누구에게 의지하며 누구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 고려사 』 식화지 조세조의 우왕 9 년 2 월 좌사의 권근등 상서 )사전 · 농장의 확대는 고려 후기 이전부터 시작 . 몽고항쟁 · 원 간섭기에 기득권층의 토지개혁에 소홀 . 고려 말 정치문제로 토지개혁이 대두 .!! problem1 . 신진사대부의 성장정치적 입장 무신란 이후 문신 관료들의 행정 말단 실무 담당하던 서리 · 향리 들 . 주로 과거제도 를 통한 관직 진출 . 가문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고 , 조상의 관직 권력은 화려 하지 않음 . 고려 왕실의 측근세력 ∙ 원나라의 힘을 이용하는 부원세력인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차별성 . 성리학적 이념을 통한 비판적인 시점으로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세력 .경제 ∙사상 적 입장 경제기반은 중소지주 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문세족과는 다르게 불법적인 농장을 소유 하지 않음 . 권문세족의 농장을 개혁 ∙ 혁파 주장 . 사상적으로 13 세기 말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고려의 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 . 성리학의 보급으로 신진관인의 등용과 학벌형성 이색 , 정몽주 , 정도전 , 권근종합적인 입장 신진사대부들은 경제적 조건과 교육의 기회를 통해 신진관료가 되어 중앙에 진출 . 여말 선초 시기의 정치 ∙사회에서 각종 개혁의 영향력을 행사 . 권문세족의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는 정치세력으로 등극 .2 . 위화도 회군과 고려 멸망위화도 회군 신흥 무인세력 이성계의 성장 + 권문세족 최영 ⇒ 권문세력을 제거 !!! 대외적으로 권문세족 집권기에 북원 (元)의 수교 ∙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지속 . ⇒ 우왕 14 년에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인하여 최영 : 요동정벌 , 이성계 : 4 대 불가론에 의한 요동정벌 반대작은나라로써 대국을 섬기는 것이 보국의 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 대군을 동원하여 멀라 원정을 나가면 왜적의 침입을 예상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가능성 .위화도 회군 신흥 무인세력 이성계의 성장 + 최영 장군 ⇒ 권문세력을 제거 !!! 대외적으로 권문세족 집권기에 북원 (元)의 수교 ∙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지속 . ⇒ 우왕 14 년에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인하여 최영 : 요동정벌 , 이성계 : 4 대 불가론에 의한 요동정벌 반대 . 이성계는 ∙ 우왕 : 유배 , 이성계∙신진사대부 : 창왕 옹립 . ⇒ 고려의 실권을 장악 , 대외적으로는 친명정책을 택함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의 정치 ∙사회∙경제∙군사 전반의 개혁 . 토지개혁에서 신진사대부들은 급진 개혁파 vs 온건 개혁파 분화 . ⇒ 온건개혁파가 정치일선에서 사라짐 , 폐가입진 ( 廢假立眞 ) 을 주장하며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 . ( 정도전 , 이방원 ) ( 이색 , 정몽주 ) 신진사대부 안에서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급진세력 vs 고려 왕조 테두리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 세력 으로 다시 분화 . ⇒ 정몽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온건 세력은 귀양∙처형 , 고려왕조는 475 년간의 종언을 고하였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새 나라를 개창 .Ⅲ. 여말선초 토지개혁1. 권문세족의 사전 고려 후기 사전은 수조권자가 국가 규제를 벗어나 개인적인 권리 가 강화 . ☞ 현직관료∙직역 담장자는 사전을 분급 받지 못함 . ☞ 사전이 겸병과 탈점화 되어 농장을 형성 . ⇒ 수취제도의 문란 , 국가재정의 약화 , 전시과체제의 붕괴 , 농민의 몰락고려 전기의 사전은 국가 통제에 의한 관수 관급제가 였지만 , 고려 후기 에는 사전의 주인이 개인적으로 토지를 조사∙ 수조하는 구조로 변화 . ☞ 경작민에 대한 수탈 강화 . ☞ 사전의 민전화가 진행 . ☞ 사전의 황폐화 초래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농장 개간 , 탈점 , 사패 , 매득 , 장리권문세족의 농장 수조지 형태 농장 ☞ 토지의 탈점을 보여주며 농장의 확대를 잘 확인 시켜주는 형태 사적 소유지 형태 농장 ☞ 매득 , 장리 , 개간을 이용해 형성 ☞ 농장주가 불법적으로 국가에 바쳐야 하는 조세를 포탈 . ☞ 농민을 사민화 시켜 조∙용∙조 일체 납부 x ⇒ 고려 후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 , 신진사대부의 토지개혁을 주창 .과전법의 성립과정 신진 사대부의 사전 개혁 토지 겸병으로 토지제도가 약화로 인해 도평의사사 ∙의 장전 , 처전을 회수하여 요물고 소속 . 사전으로 탈점된 토지 회수 기 사 양 전첫째 , 권세가의 농장이 원래의 소유자에게 반환 , 이를 통해 지방행정제도를 개편 . 둘쨰 , 양전과 작정 ( 作丁 ) 방식의 변화 ☞ 토지에 점유자의 성명을 쓰는 것이 아닌 천자문 ( 千字文 )』 의 글자 순서로 하는 자정제 ( 字丁制 ) 도입→ 과전법체제에서는 5 결 단위로 정착 ⇒ 고려 전기의 전정연립제 소멸 , 공전과 사전으로 토지를 구분하여 수조액을 매기는 방식에서 1/10 로 수조율이 같아짐 . ⇒ 토지의 성격이 일원화 , 고려의 전시과체제 폐기 ,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가 실소유자에게 반환 . 기사양전 조준의 전제개혁 3 차 상소를 바탕으로 공양왕 2 년에 과전을 받은 수급 대상자에게 전적 ( 토지문건 ) 을 나누어주고 , 9 월에 낡은 공전과 사전을 불태우면서 고려후기 사전제는 폐지 . 과전법 공양왕 2 년 9 월에 시가 ( 市街-개성의 거리 ) 에서 공사 ( 公私 ) 의 전적 ( 田籍-토지 문서 ) 를 불 태웠는데 그 불이 수일간 계속 붙었다 .( 고려사 권 78 식화지 1 전제 녹과전 공양왕 2 년 9 월조 )과전법 수조지에 대한 규정 및 조세 수탈에 대한 규정을 설정 . ☞ 국가 수조지의 확대와 개인 수조지의 감소 . ☞ 모든 토지의 수조율은 1/10 로 통일 . ☞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가 경기지역으로 축소 . ☞ 양반 관료는 경기지역에 한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가짐 . ⇒ 과전법은 양반관료의 경제적 기반 . 국가 실무 수행 , 국왕에게 충성 대가로써 이어졌음 .수조지에 대한 원칙적 규정경기지역의 범위를 확장하여 사전의 불법화 단속 . ☞ 사전의 불법적인 확대를 예방 , 국가 중앙집권화 달성 . 1 품에서 9 품까지의 유품관리 부터 산직 ( 유품 이외의 관리 ) 에게 18 과에 나누어 분급 . 특수한 사전의 일종인 군전을 설정하였고 , 이를 위해 양계에는 과전과 군전을 설정하지 않음 . ☞ 토지 분급과 무관하게 수취하도록 규정 , 특수직역층 이을 이루어냄 . 사원전의 팽창을 막기 위해 개인들이 사원∙신사에 토지기부를 금지 ☞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으로 강화 .토지 관리의 규정 경기지역의 사전이 민전 일 경우 ☞ 토지를 함부로 팔거나 증여 x If. 경작자가 사망하거나 토지가 고의로 황폐화 ☞ 수조권자가 마음대로 처분 , 토지에 대한 소유권 규제 . ⇒ 전주의 수조권의 보호 , 국가가 농민층을 보호하는 목적 .등급에 해당하는 것보다 과전을 적게 받으면 죄를 짓은사람 ∙ 사망하여 자손이 없는 사람∙ 많이 받은 사람의 과전을 몰수하여 지급 . cf. 실직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도 경기지역의 과전 지급 . 군전을 받은 자가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경우 군전을 버리고 과전을 수여 . 관리의 등급에 따라 나누어지는 수조지를 많이 받고 , 공전∙사전을 침탈하는 자는 토지를 몰수 하여 체급 . 무당 ∙승려 ∙점치는 맹인 등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 수조지 지급이 안 됨 .과전법의 의의 고려 전기 전시과 제도와는 달리 과전법은 수조율 1/10 세로 제정 . 대부분 누락된 토지를 국가가 장악하면서 수조지에 대한 배분이 원활하게 이루어짐 . 국가가 수조권자의 수조권 보호와 농민을 보호하는 양면정책 개인에 대한 토지의 국가적 분급제로서 마지막 단계 . 신분과 토지를 결합한 중세적 토지지배관계의 마지막 제도 . 조선 초 세조 12 년 직전법 시행될 때 까지 고려 말 ~ 조선 초까지 이어지는 토지제도 .Ⅳ. 맺음말♠참고 문헌♤ 이익주 ,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혼돈과 신흥사대부의 성장」 , 한국사 시민강좌 35, 일조각 , 2004 박용운 , 『 고려시대사 』 , 일지사 , 1998 위은숙 , 「조선 건국의 경제의 경제적 기초로서의 과전법」 , 한국사 시민강좌 35, 일조각 , 2004 박시형 , 『 조선토지제도사 ( 중 )』, 신서원 , 1994 국사편찬위원회 , 『 한국사 24 -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국사편찬위원회 , 1994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19- 고려후기의 정치와 경제 』, 국사편찬위원회 ,
    인문/어학| 2017.01.18| 32페이지| 3,500원| 조회(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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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의 역사
    우리나라의 의료기관목차 삼국시대 이전 삼국시대 및 통일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1. 삼국시대 이전 주술적이며 정령적 , 마술적 의료의 성격 제사를 주관한 무당이 의사로써 기능 주술사 존재 : 주술로 질병과 재난을 피하게 할 수 있다 생각 단군신화 환웅천왕이 인간과 질병 360 가지를 다스렸다는 내용 삼국지 위동이전 (= 위서동이전 ) 우리 민족이 의복을 청결하게 입고 , 더러운 것을 싫어했다고 기록2.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전래된 중국의학 + 우리나라 고유 의학 의료체계 형성 질병 및 역병에 대한 대응 방식 재이론적 사상 – 정치적 차원 무속적 사상 - 샤머니즘 의술적 측면 – 삼국유사 ( 승려 혜통 – 당나라 의술로 신문왕 등창 시료한 기록 )삼국시대 각 나라 별 특징① 고구려 최초의 왕실치료 담당 시의 ( 侍醫 ) 제도 최초 의료서적 ( 평강왕때 오나라에서 전래 ) 무술 숭상 , 군사력 보강 – 국가적 보건기구 존재 추측② 백제 삼국 중 비약적으로 의료기관 발전 약부 ( 藥部 ) : • 백제의 중요의료기관으로 왕과 귀족 의료업무 담당 . • 의약에 관한 일체의 업무 관리 기관 의박사 ( 醫博士 ) : 의학을 담당 채약사 ( 採藥士 ) : 약초 관련 업무 담당 주금사 ( 呪噤師 ) : 금주로서 질병 제거 백제신집방 편집 : 중국 약방문 의존 하지 않은 경험을 통한 요법 기록 일본에 채약사 , 의박사 파견 의 ( 醫 ) 와 약 ( 藥 ) 을 분업화③ 신라 승의 ( 僧醫 ) : 불교의 융성함에 따라 활동이 커짐 법탕 : 일본 의학에 큰 영향을 미침 묵호자 :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고 신라 왕녀를 치료 ( 삼국사기 법흥왕 15 년 ) 선덕왕 때 의 백고좌회 ( 百高座會 ): 의술 , 기도 , 불교의 방법으로 100 명의 승려로 하여금 “ 인왕경 ( 仁王經 )” 을 읽게 함으로서 치료 . → 7 세기 부터 치료를 위해 종교 ( 불교 ) 적 방법을 시행 통일신라에서도 이어짐『 삼국유사 』 에 나타난 승의 고구려 승려 아도 – 무당과 의원에 차도가 없자 승려 아도 가 2 않음 . 질병 치료법과 처방전을 묶어 놓은 책이었던 것 추정④ 통일신라 약전 ( 藥典 ) : 의료행정 담당 기관 ( 지방의 약재와 중국의 약재를 수납 , 보관 , 보급하는 기관 ) 공봉의사 ( 供奉醫師 ) : 약전에서 직접의료에 종사하는 의사 수가 정해져 있지 않음 공봉복사 ( 供奉卜師 ) : 약전 소속 , 질병예방 주술사 ( 백제 주금사 역할 ) 내공봉의사 ( 內供奉醫師 ) : 왕실의 진료 맡은 시의 국의 ( 國醫 ), 승의 ( 僧醫 ) : 당시의 명의를 일컬음제도화된 의학교육 ( 효소왕 -691 년 ) 『 본초경 』, 『 갑을경 』, 『 소문경 』, 『 침경 』, 『 맥경 』, 『 명담경 』, 『 난경 』 2 명의 박사가 실시 → 통일신라의 의학 생도는 의학이론 , 진맥법 , 약물요법 , 침법 등을 학습 → 의학교육 , 왕실제도 , 약을 관리하는 관청의 시스템 완비 .삼국시대의 의료기관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왕실의료 시의 약부 ( 藥部 ) 내공봉의사 ( 內供奉醫師 ) 행정의료 X 약부 ( 藥部 )∙ 채의사 ( 採藥士 ) 약전 ( 藥典 ) 의학교육 X 의박사 ( 醫博士 ) 의학 ( 醫學 )고려시대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도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 상당 전염병에 관한 기록 20 회 → 실제 유행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 전염병은 임금의 부덕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 의학적 측면보다 초자연적이고 관념적인 힘에 의한 치료 ( 신심의료 ( 信心醫療 ) 에 의존 )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일반적 구료 대책 , 정부차원의 제사 But ⇒ - 중앙 고위층 독점기구에서 국가주도의 의료기구로 전환 - 광종 때 의관을 배출하는 동시에 왕을 치료하는 상의원 기구 창설 - 고려 성종 때 보건의료제도 개선고려시대 중앙의료기관 상의원 - ( 고려의 독자기구 ): 왕과 고승을 치료하는 의료기구 태의감 ( 太醫監 )- 중앙에 의약행정 총괄 ∙ 의학교육과 의관 선발 ( 원 간섭기 : 사의서 ( 司醫署 ) → 전의시 → 태의감 → 전의시 개칭 ) 상약국 ( 尙藥局 ) - 궁중에 어약 ( 御藥 )자비 정신에 입각한 무의탁 환자의 진료를 주로 한 국립 구료기관 정종 2 년 (1036 년 ) 동대비원과 서대비원으로 하는 이중구조로 대민의료 상위기관 초창기 : 가난하고 병든사람 수용 . 명종 때 구휼을 당당 • 독거노인 수용 ↓ 무신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동서대비원의 의료 기능이 약화혜민국 ( 惠民局 ): 의약 ( 醫藥 ) 으로 일반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업무 ( 오늘날의 보건소 역할 ) 예종 때 구제도감을 수리하여 혜민국으로 고침 ( 임시기구로 존재 ) ( 구제도감 : 임시조직 , 병자 치료 , 빈민구제 목적 기구 ) 충선왕 때 사의서 ( 司醫署 )→ 고려 말 혜민전약국 ( 惠民典藥局 ) 으로 개칭고려시대 지방의료기구 약점 : 보건소 역할 , 인구에 비례하여 약점사 ( 藥店史 ) 배치 공납 약제의 납부와 국왕이 하사하는 약재의 관리 , 치료와 진휼 담당 930 년 ( 태조 13 ) 지방에 의학원 ( 醫學院 ) 세우고 동경 ( 경주 ), 남경 ( 서울 ) 에 의사 배치고려시대 의학서적 13 세기 현존한 가장 오래된 의학서 민간에서 이용되었던 질병에 대한 응급 조치법들을 모았음 . 고려 중기의 의약적 지식을 고찰하는 자료 향약구급방 ( 鄕藥救急方 )신집어의촬요방 ( 新集御醫撮要 方 ) - 고려 고종 13 년 (1226) 에 최종준이 저술한 의학서책 - 약방은 전통적으로 중국 의 약방을 따름 - 약제 사용방법은 고려인들 자신의 독자적인 경험을 활용 제중입효방 ( 濟衆立效方 ) - 고려 인종 or 의종 때 신라 및 송나라의 의서를 참작하여 편찬 - 당시 병 치료에서 효과 있는 처방과 민간 요법을 묶어 놓은 책고려시대 의학교육 고려의 의학교육은 송의 영향을 많이 받음 . 예종 연간에 파견된 송의 한림의관은 1 년간 고려에 머무르면서 의료인 양성 . 의과는 광종 9 년 (958) 복업 , 지리업과 함께 3 년에 한번 씩 잡업으로 실시 . 광종 ~ 성종까지 의과를 통해 의관이 된 인원은 7 명에 불과십학교수관 ( 공양왕 원년 (1389)) 의학은 십학 중 원 ( 醫院 )· 의학교수관 ( 醫學敎授官 ))· 의학원 ( 醫學院 ) 을 지방에 따로 설치 전염병학 분야가 발달하고 의학의 전문화가 이루어짐 침술 치료와 더불어 외과의에 대한 학문도 배웠다고 함 형사재판에 법의학적 지식을 요하는 검시제도를 실시조선시대 중앙의료기관 내의원 ( 內醫院 )( 세종 25 년 (1443) 고려의 상약국 ( 尙藥局 ) 을 계승 병원과 약국을 겸비한 일종의 궁중의료기관 의원들이 임금과 왕비 및 왕자들의 약을 조제하여 달이던 곳 종친 및 2 품 이상 고관의 치료도 담당전의감 ( 典醫監 )( 태조 원년 설치 ~ 성종 때 완성 ) ( 국가 의료기관의 중추적 기관 ) 고려의 전의사 ( 典醫寺 ) 를 계승 사여약재 ( 賜與藥材 ) 의 관리 · 약재의 재배와 채취 · 외국약재의 구입과 판매 · 의서편찬 · 의학교육 · 취재 등 국가의 의료사업 을 모두 관장 구급약 ( 청심원 ( 淸心圓 ), 보명단 ( 保命丹 ) 의 제조 의학교육 및 의과고시의 직무까지 겸행 국가의 중심 의료기구의 의료정책의 입안과 시행까지도 주관제생원 ( 濟生院 )( 태조 6 년 )→ 세조 6 년 (1460) 혜민국에 병합 고려의 제위보 ( 濟危寶 ) 를 계승 국가에서 쌀을 담보로 약을 구입하여 병자들을 치료하는 기구 혜민국 ( 惠民局 )· 전의감 ( 典醫監 ) 과 함께 일반서민들의 질병을 구료함 동서대비원 ( 東西大悲院 ) 처럼 구호사업에도 관여하여 조선 초기 의학 발전 이바지 편찬사업으로 『 향약제생집성방 ( 鄕藥濟生集成方 )』 편찬 의녀제도를 신설하여 의녀에 대한 교육을 담당동서활인원 ( 東西活人院 ) : 고려시대 동서대비원을 계승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구휼 관장 ↓ 1709 년 ( 숙종 35 년 ) 에 혜민서 ( 惠民署 ) 로 이속 , 영조 19 년에 폐쇄 혜민서 ( 惠民署 ) : 고려의 혜민전약국 ( 惠民典藥局 ) 을 계승 의약의 전매 • 일반서민의 치료 담당 변천 : 1392 년 ( 태조 1) 혜민고국 ( 惠民庫局 ) → 1414 년 ( 태종 14) 혜민국 ( 惠民局 )→( 書 ) 習讀官 ) 을 신설하여 지방의 양반 자제들에게 의학교육 조선시대 지방의료기관조선시대 의학교육 전의감 ( 典醫監 ), 혜민국 ( 惠民局 ), 지방의 관아에서 실시 전의감의 직제에는 의학교수와 의학훈도가 있으며 , 습독관 30 명 구성 의학 생도와 여의 ( 女醫 ) 는 제조 ( 提調 ) 가 매월 시험의서습독관 ( 醫書習讀官 ) 의학에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한 관원 태조부터 시작되어 태종 때 의서습독 ( 醫書習讀 ) 을 실시하여 의학교육이 부족한 의원들의 지식 확충 전문인들을 양성하기 위해 의서습독관 ( 醫書習讀官 ) 설치 의생들과 달리 의서습독에 전념하여 조선시대의 의학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함 이들 나중에 내의원 , 전의감 , 혜민국 등에 의사로 채용 주로 종합의서인 『 향약집성방 』, 『 의방유취 』 읽었고 , 전문의서로 』『 창진집 』 ( 瘡疹集 : 피부과 의서 ), 『 태산집요 』 ( 胎産集要 : 산부인과 의서 ), 『 구급방 ( 救急方 )』 을 중심으로 의학연구조선시대 의과시험 초시 과목 찬도영 ( 纂圖詠 : 집맥에 관한 의서 ), 동인경 ( 銅人經 : 침구 ( 鍼灸 ) 에 관한 의서 ), 송원대 ( 宋元代 ) 의 의서인 직지방 ( 直指方 ) 과 득효방 ( 得效方 ), 부인대전 ( 婦人大典 : 부인과 의서 ), 창진집 ( 瘡疹集 : 피부과 의서 ), 태산집요 ( 胎産集要 : 산부인과 의서 ), 구급방 ( 救急方 ), 화제방 지남 ( 和劑方 指南 : 처방전 ) 을 암송 본초강목 ( 本草綱目 : 약물학 ) 과 경국대전 ( 經國大典 ) 은 책을 보면서 시험 복시 의과 초시에 합격한 사람 예조 ( 禮曹 ) 와 전의감의 인사 (9 명 ) 들이 추천 시험내용은 초시와 동일 전의감에서 실시 의과시 험은 초시와 복시 의과 초시는 18명을 선발조선시대 의학서적 향약집성방 (1433, 세종 15) - 향약구급방 ( 고려 , 1236 의방유취 (1445); 동양최대 의학백과사전 동의보감 ( 허준 )- 선조 (1596) 때 시작하여 광해군 (1613}
    의/약학| 2017.01.18| 44페이지| 5,000원| 조회(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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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三國史記』와『三國遺事』Ⅰ.『三國史記』『三國史記』는 한국 고대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소중한 자료이다.『삼국사기』는 국가에서 편찬한 史書로 국가 발전 및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하여는 그 어떠한 역사서보다도 중요한 기본 역사서이다. 비록 이에 실린 내용의 소략, 삼국초기에 관한 사료로서의 신빙성문제, 이에 관한 사관의 성격 등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를 극복 보완하는 새로운 역사서를 발견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삼국사기』의 편찬은 김부식外 10人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경에 편찬한 삼국시대의 正史로 총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本紀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통일신라 7권), 志 9권, 表 3권, 烈傳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本紀 : 本紀는 주요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대개 왕의 치적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본 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이 있다.정치에는 축성과 궁실 수리 등 인력동원을 기록, 순행기사, 관리의 임명이나 관청의 설립, 종교적 사건이나 기타의 내용을 기록.志 : 제사와 복식, 마차, 옥사, 지리 등을 기록한다.表 : 박혁거세 즉위년부터 경순왕까지 연표를 만듦.列傳 : 10권중 김유신 열전이 3권, 나머지 68인을 7권에 포함시켰다.을지문덕, 거칠부 장보고, 사다함, 박제상, 온달, 최치원 설총, 연개소문 등이 기록됨.이중 10권은 궁예와 견훤에 대해 기록.紀傳體 : 분야별, 사마천의 사기부터編年體 : 년대별, 사마천의 사기 이전에도 사용, 고려?조선왕조실록1. 편찬동기進三國史記表에 나타난 편찬동기를 살펴보면, 학사대부들이 유교경전과 중국역사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를 개선하려는 것이었고, 고기는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고 내용이 소략하여 바람직한 역사적 교훈을 주지 못하는 점에서이다.2. 편찬배경고려국초에 편찬 이시기에 국제화되고, 안정화 되어 합리적인 경향이 진점됨으로..)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남을 진압한 당시의 정치적 세력의 변화 등으로.(반란으로 귀족사회의 동요와 금나라의 새로운 발흥으로 새로운 국제관계가 조성 되고, 반란으로 무너진 국가의 기강을 바라잡기 위하여)3. 김부식의 생애김부식은 신라왕실의 후예로 그의 증조부 김위영은 고려 태조 때에 경주가 경순왕의 식읍으로 설치되면서 경주의 州長이라는 戶長에 임명되어 할아버지 때까지 경주에 살았다. 김부식은 문종 29년(1075)에 경주에서 태어나 이후 이 곳에서 자랐다. 14-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22세 되던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가 젊은 시절을 경주에서 보냈고 또한 왕의 후예였던 점은 그로 하여금 신라사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게 하였다고 생각한다.불교와 유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4. 김부식의 삼국에 대한 태도①『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만 쓰고, 삼국 이전의 역사를 서술하지 않은 이유로 자료의 부실을 들고 있지만 이는 변명이고 원래 이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쓰려는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위하여 사료의 수집에 큰 힘을 들인 일도 없었다. 그리고 발해사를 우리의 역사에서 배제하였다.(발해를 우리 역사로 서술할 경우 고려의 정통성을 고구려에 둘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그러나 삼국에 대하여 형식적으로는 本紀라는 형식을 취하여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려 하였고 고구려 백제의 역사에서 중국측 자문을 인용하면서도 고구려, 백제로 표현된 것을 我라는 1인칭의 표현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②『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적으로 서술된 것은 당시에 전하는 자료의 많음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음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삼국사기』의 편자는 고려왕조는 왕실의 혈통에서도 신라와 연결됨을 강조하고 있듯이 고려가 신라의 계승국가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라본기의 서두에서 신라는 조선의 유민집단이라 서 강등시키는 태도를 편찬자는 견지하였다. 왕의 죽음을 崩으로 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薨으로 기록하고 대왕이라는 표현도 모두 왕으로 고쳐 쓰고 있는 점도 그 예이다. 김부식은『삼국사기』기록 여러 곳에서 삼국에서는 독자적인 연호가 부당하다거나, 중국의 풍속을 수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이러한 편찬자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고대인의 세계관과 역사상을 올라보 전하지 못하고 중세적인 관점에서 굴절시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역사를 쓰는 사람이 원사료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역사의 올바른 서술이라 할 수 없듯이 그 편찬자의 역사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편찬자에게 민족적 자주성이 결여된 점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비판하여서는 올 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고려 중기 당시의 문화는 중국 문화의 수용이 선진화의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6. 김부식의 역사관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동기는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하나는 역사를 통하여 정치적 교훈을 유교의 견지에서 주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역사를 고문체로 쓰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고려왕조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서술을 신라의 계승국가였음으로 바꾸어 쓰려는 것이었다.7. 三國史記 板本에 대하여..1차간본 : 인종의 사후(1146)명종4년(11740사이로 추정된다. 이 초판본은 동경이었던 경주 지방에서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2차간본 : 2차 간본은 언제 어디에서 판각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44권에서 50권까지 성암고서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보물 722호로 지정되어 있다.3차개간본 : 태조 3년에 3번째 판각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경주에서 판각되었다고 하나 근 례에는 아니라는 견해도 제기된다.4차간본 : 삼국사기는 1512년 正德7年(壬申 中宗7年)에 경주에서 판각되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본이다. 이 때 삼국사기는 삼국유사와 함께 경주와 경상도 관내 여러 읍에서 나누어 판각되었고 판각된 목판을 경주로 옮겨와 여기서 책을 인쇄하였음을장서가 있었다.8.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위치『삼국사기』는 근대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사대적인 역사서로 혹평된 이래 지금까지도 이런 평가는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김부식이 혼자 책임져야할 문제가 아니라 한국중세사라는 시대적인 문제로서 이는 오히려 고대의 자존적인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국제적 관점이란 보편주의의 견지에서 고대사학이 극복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중세의 역사관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족주의적 잣대로 이를 평가하여서는 올바른 평가라 할 수 없다. 그 시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기를 사대적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 한다『삼국사기』에서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이 소략한 것을 삼국사기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 또한 잘못이다. 이는 백제의 기록과 고구려의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고 인멸된 데에 주원인이 있다.『삼국사기』의 결점은 자료의 수집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일연이 사료의 수집에 일생동안 노력한 삼국유사에 비하여 삼국사기는 이 점에서는 커다란 큰 차이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김부식을 위대한 역사가라 할 수 없는 점이 여기에 있다.進三國史表金富軾臣富軾言 古之列國 亦各置史官 以記事 故孟子曰 晉之乘 楚之?? 魯之春秋 一也 惟此海東三國 歷年長久 宜其事實 著在方策 乃命老臣 ?之編集 自顧缺爾 不知所爲 中謝伏惟聖上陛下 性唐堯之文思 體夏禹之勤儉 宵?餘閒 博覽前古 以謂 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 不知其始末 甚可歎也 況惟新羅氏 高句麗氏 百濟氏 開基鼎峙 能以禮通於中國 故范曄漢書 宋祁唐書 皆有列傳 而詳內略外 不以具載 又其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是以 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露 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如臣者 本匪長才 又無奧識 ?至遲暮 日益昏蒙 讀書雖勤 掩卷卽忘 操筆無力 臨紙難下 臣之學術 蹇淺如此 而前言往事 幽昧如彼 是故 疲精竭力 僅得成編 訖無可觀 祗自?耳 伏望聖上陛下 諒狂簡之裁 연의 청년시절에 시작하였으나 집필은 말년 84세 죽기까지 군위 인각사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연 당시에 출간되었는지는 불명확하며, 제자 무극이 1310년에 간행한 것이 전해져오고 있다.이 책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부터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일관되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조선초기 이후 많은 역사책에 인용되어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있다고 평가된다. 오늘날 삼국유사는『삼국사기』유교적 사관에서의 역사서가 아니라는 점과, 한국고대의 역사, 지리, 문화, 종교, 언어, 민속, 미술, 고고학 등 총체적인 보고의 사서로 보고 있다.『삼국유사』의 내용은 고조선의 건국신화부터 시작하여 주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역사사실을 수록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제목에 따라서는 그의 관련된 사실이 고려조의 중엽사 실에까지 미치고 있다.『삼국유사』는 그 표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봉건시대의 역사서적을 유별하는 표준에서 볼 때에 소위 정사가 아니요. 야사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의 대상자료, 편년체계, 서술방향 등에 있어서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삼국유사』의 편찬에 있어서 지정된 집필제강이나 전통적인 편찬절차이나 고전적 편집 양식에 제약됨이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많은 경우 정사가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남겨둔 자료들(遺事)을 추려모아 자기의 대상으로 삼은 개인 저작이라는 점으로부터 이 문헌이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으로서의 장점들을 찾게 된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이 같은 역사 고전들로부터 추구하는 중심목표가 결코 해당문헌이 가지는 형식적 편집체재나 화려한 문장이나 저자의 역사관을 있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라도 그것은 자료적 가치측면에서 평가 되여야 하기 때문이다.『삼국사기』가 유교문화를 교조주의적으로 떠받들던 봉건 왕조로서 반드시 갖추어야할 사서의 편찬목적, 절차, 양식, 자료의 선별표준, 문장표현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전통적 규범에 복종하는 것을 편집제강으로 삼았던 문헌이라면 이『삼국유사』
    인문/어학| 2015.05.19| 6페이지| 1,000원| 조회(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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