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감호제도는 과연 망양보뢰(亡羊補牢)인가?Ⅰ. 서론최근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행하는 범죄가 잦아지고 있다. 2018년 4월 충북 진천군에서 30대 정신질환자가 가족을 부양하던 친동생을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2018년 7월 8일 경북 영양군에서 40대의 조현병 환자가 흉기 난동 끝에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등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사고에 많은 사람이 공포와 불안함에 떨고 있다. 한편, 2015년 8월 대전광역시와 2017년 8월 전남 나주시, 2018년 7월 9일 광주광역시에서는 치료감호 중인 정신장애 범죄자가 도주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이는 곧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국가의 관리 부실, 치료감호법에 대한 비판여론으로 이어지면서 치료감호제도의 실효성과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대한 논쟁이 불거진 상황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된 정신장애 범죄자의 실태를 파악하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치료감호제도의 정의와 시행현황을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또한, 범죄학 이론을 바탕으로 치료감호제도에 대해 다방면으로 접근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Ⅱ. 정신장애 범죄자와 치료명령제도1. 정신장애 범죄자의 정의 및 실태정신장애 범죄자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 대다수 사람은 유영철, 강호순 등의 연쇄살인범, 혹은 잔인무도한 사이코패스(psychopath)를 떠올리곤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이미지는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함과 동시에 부정적으로 편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정신건강 체계와 사법체계에서는 정신장애가 상이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장애 범죄자에 관한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정신장애 범죄자(mentally disordered defendants)는 정신장애가 있으며 불법적인 행동에 연루된 개인을 의미하며, 이들은 정신적으다. 2012년 5,378명이었던 정신장애 범죄자는 2013년에 5,937명, 2014년에는 6,301명, 2015년에는 7,016명이었으며 2016년에는 8,343명으로 2012년 대비 약 55.1%나 증가했다. 2016년 범죄통계에 따르면 정신장애 범죄자의 형법 범죄는 절도가 2,148명(25.7%), 폭행이 1,023명(12.3%), 상해가 676명(8.1%)으로, 2012년에서 2016년까지의 수치 중 형법 범죄의 순위에는 다소 변동이 있지만 절도와 폭행, 상해, 성폭력이 전체 형법 범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특별법범죄의 경우 정신장애 범죄자 중 마약류관리법위반이 360명(4.3%),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이 92명(1.1%), 화학물질관리법위반이 63명(0.8%),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이 36명(0.4%)으로 집계되었으며, 이는 전년(2015년) 대비 19.5% 증가한 수치다.한편, 정신장애 범죄자를 생활환경별로 구분할 경우 2016년 파악된 정신장애 범죄자 중 하류층은 77.9%, 중류층이 21.1%, 상류층이 0.8%로 하류층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정신장애 범죄자의 전과 현황은 초범의 경우 2012년 1,824명에서 2016년 2,964명으로 62.5%가 증가했으며, 1범의 경우 2012년 752명에서 2016년 1,220명(2012년 대비 62.2% 증가)으로, 9범 이상의 경우 2012년 855명에서 2016년 1,420명(2012년 대비 66.1% 증가)으로 최근 5년간 정신장애자 중 초범은 물론 전과가 있는 범죄자의 인원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또한,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검찰처리 현황에 따르면 정신장애 범죄자 처리 인원 7,935명 중 4,072명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였으며, 기소율은 2012년 54.1%에서 2016년 51.3%으로 소폭 감소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체 범죄자의 기소율(38.8%)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다. 이때 정신장애 범죄가 검찰에서 처리된 주요 죄명을 살펴보면 살인(95.7성폭력범죄(34.0%)로 나타났다.2. 치료감호제도의 이해와 시행현황치료감호제도는 치료감호 선고를 받은 자를 치료감호시설에 수용하여 치료를 위한 조치를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자유 박탈적 처분이다. 치료감호제도는 형벌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성격을 지니며, 범죄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처벌과는 달리 정신장애 범죄자의 치료 혹은 성격적 장애의 개선을 목표로 한다. 1980년 사회보호법상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치료적 개입을 목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사회보호법의 이중처벌기능에 따른 국민의 기본권 침해 등의 문제에 따라 2005년 사회보호법이 폐지되면서 이에 대한 대체입법으로 치료감호법이 제정되었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치료감호제도와 치료명령제도는 이에 따르고 있다. 즉, 치료감호제도는 범죄자에 대해 형벌을 과하는 것은 부당하며, 범죄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범의 위험성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부득이 격리수용하는 보안처분이라고 할 수 있다.최근 5년간 검찰에서 치료감호를 청구한 인원은 2012년 244명에서 2016년 118명으로 감소추세를 보이며, 죄명에 따른 치료감호청구 현황에 따르면 기타범죄를 제외했을 시 2012년에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이 17.2%, 2016년에는 절도와 살인이 각각 7.6%으로 가장 높다. 피치료감호자의 수용은 2007년 686명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2016년 기준 1,093명에 도달하였으며, 이때 주된 감호원인은 살인죄가 343명(3104%), 성폭력이 272명(24.8%), 폭력죄가 137명(12.6%) 순으로 높다. 또한, 매년 초범이 60% 이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2016년의 경우 초범은 728명(66.6% 이상)에 달한다. 피치료감호자들의 병명을 살펴보면, 2007년 이후 지속적으로 조현병이 다수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2016년의 경우 조현병이 507명(46.4%), 정신치제가 97명(8.9%), 조울증이 85명(7.8%)이며 그 외에도 성격(인격)장애와 간질, 약물중독 등의 이유로 정신장애 진단을 받았다.한편, 피함과 동시에 직업재활센터를 설치하여 치료의 촉진과 출소 후 사회적응능력을 배양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외래진료제를 운영하여 치료감호의 종료 후에도 지속적인 통원치료를 제공함으로써 정신질환의 재발과 그에 따른 재범 가능성을 최소화하고자 하며, 약물중독자의 전문적 치료를 위한 약물중독재활센터 역시 운영하고 있다.Ⅲ. 치료감호제도에 대한 견해위와 같은 치료감호제도에 대해 사회 대다수의 비판적인 시선과 우려가 적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치료감호제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대부분 치료감호제도가 범죄자에게 범행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억제이론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억제이론에 따르면 범죄에 대한 처벌은 확실성과 신속성, 엄격성을 충족할 때 범죄가 억제되며, 국가의 처벌은 본보기로 작용하여 일반인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야 하며, 상습범에게는 선택적으로 가중처벌정책을 시행하거나 유죄판결과 양형의 확실성 제고, 체포율을 높이기 위한 경찰력의 강화 등을 주장한다. 범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억제이론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치료감호제도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여론 역시 정신장애 범죄자에게 더 강한 처벌이 내려져야 함과 동시에 치료감호제도의 실효성 또한 찾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정신장애 범죄자들의 특수성을 간과한 단면적 주장에 불과하다. 정신장애 범죄자들의 형법 범죄에서 절도와 폭행, 상해 비중이 높은 것과 정신장애 범죄자 중 하위 계층에 속한 이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고려해보면 정신장애 범죄자의 대부분이 사회경제적 여건이 악화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Merton의 긴장이론에 따르면 문화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 간의 괴리가 발생할 때 아노미 상태가 나타나는데, 모든 사람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적 경향에 따라 긴장이 발생할 때 이를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즉, 정신장애 범죄자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하위 계층으로, 범문화적으로 추구되는 부,ton은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여 사회적 소외계층의 아노미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치료감호제도에서 컴퓨터, 건축시공, PC정비, 제과제빵 등의 직업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출소 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과 부합한다. 한편, Gottfedson과 Hirschi는 범죄는 낮은 자기통제력에 기인한다는 자기통제이론을 주장했는데, 자기통제이론에 따르면 낮은 자기통제력의 근원은 잘못된 자녀양육이나 학교 및 사회제도처럼 비효과적이고 불완전한 사회화이며, 정신장애 범죄자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장애와 비정상적인 측면에 적합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해 낮은 자기통제력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할 수 있다.이와 더불어 정신장애 범죄자의 기소율이 전체 범죄자의 기소율보다 높다는 점과 정신장애 범죄자의 전과 인원이 최근 5년간 가파르게 증가하는 현상은 낙인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낙인 이론에 따르면 개인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거울자아(looking-glass self)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개념, 가치와 태도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상징적 상호작용이 범죄와 비행행위에 적용될 경우 ‘범죄자’, ‘마약 중독자’ 등의 부정적 낙인이 범죄와 일탈 행동을 촉진하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 즉, 전체 범죄자보다 정신장애 범죄자의 범죄율이 현저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기소율이 높은 것은 ‘정신질환자’라는 낙인과 그에 수반하는 부정적인 편견들이 작용하여 정신질환자들을 범죄자로 더 쉽게 간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낙인의 주체가 경·검찰, 법원, 교도소 등의 사회 및 법규범을 집행하는 공식적 기관일 때 개인은 이에 저항할 힘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국가기관에 의해 범죄자로 낙인찍힌 정신장애 범죄자들이 사회의 부정적 반응과 낙인에 의해 지속적인 범죄를 행하게 되는 2차적 일탈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신장애 범죄자들에 대한 치료보호제도와 이를 통한 치료적 개입, 그리고 외래진료제, 약물중독재활센터있다.
서평 ? 오제연 교수님사학과 20120228 전영선현재와 60년 전 대한민국의 이념적 매개체, 삐라《적을 삐라로 묻어라》를 읽고이 책은 한국전쟁 당시에 뿌려졌던 삐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미군의 삐라살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심리전에 주목하며 삐라의 생산과정과 전쟁 당시 삐라의 기능, 전쟁 이후에 삐라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설명하고 있다.제1장에서는 미국의 심리전 정책과 기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당시 미국이 ‘심리전’을 선호한 이유, 한국전쟁을 거치며 체계화된 심리전의 양상 등을 논하고 있다. 제2장은 심리전을 수행한 미국과 남한의 군사조직과 조직에 따른 삐라 내용의 차이 등을 분석해 삐라가 단순한 선전물이 아닌 전술적 수단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3장에서는 삐라의 내용과 삐라 속에 존재하는 기호적 장치를 분석하였으며 제4장과 제5장은 삐라 속에서 형성된 이념적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재생산되고 도덕적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삐라(선전물)을 접한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 책의 제목과 표지는 강렬하면서도 자극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투박하면서도 자극적인 내용의 삐라가 그려져 있는 표지는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고, ‘적을 삐라로 묻으라’는 제목 역시 공격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 책의 제목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물량공세’ 심리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했음을 알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책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내용에 주목할 때,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에 생산된 삐라 속 상징장치와 이념적 도구들이 휴전 후에도 한국 사회에 잔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심리전의 주체와 전개양상, 심리전에 이용된 이념적 가치 등을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박힌 보수적인 이념과 끊임없는 약육강식과 경쟁 체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평소 내가 사회에 갖고 있던 많은 의구심 중 일부를 이해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한민족이며 나아가 평화적 통일을 도모해야 하는 공존의 대상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나에게 북한은 매우 친근하고 가까운 이미지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평소 나는 보수적인 여론이 주장하는 북한의 무자비함과 보수 정권의 대북방침에 대해 괜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당시의 삐라가 반공 · 반소 사상을 기반으로 생산되었으며, 삐라에 내재된 ‘아군=선=인간, 적군=악=비인간’ 등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극한의 상황에 몰린 민간인과 군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되면서 현재 보수 세력의 주장을 약간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 대한 반감을 표하는 대다수의 보수 계층은 전쟁을 직접 겪은 냉전 세대다. 그들은 전쟁 당시 팽배했던 반공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에 따라 형성된 가치관이 전쟁 후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견고해져 결국 현재의 ‘레드 콤플렉스’의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 아닐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언론의 통제 역시 은연중에 사상을 주입하고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삐라와 일맥상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한편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철저히 미국의 입장과 이익만을 반영한 삐라 속의 이념체계가 현재 우리나라에도 존재함을 언급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저자의 주관적 견해에 기반하고 있어 객관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물론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가치판단이 우호적으로 변하였고, 급격하게 미국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문화적·이념적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끝없는 경쟁구도의 사회와 물질적 가치관의 팽배,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지배당하는 현대 사회가 전적으로 삐라에 내포된 미국적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의 전개 역시 허술한 면이 있다.이와 같이 저자의 개인적 견해를 분명한 사실인 양 일반화하는 실수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3장 중 삐라 속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적 던 당시 사회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성역할을 부여하는 당시의 통념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취급하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저자의 주장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제시된 자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했을 때 전쟁 후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과 신여성적인 행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을 내세운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느껴졌다.한편 이 책은 내가 삐라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삐라는 북한에서 남한 민간인과 군인을 대상으로 한, 일방적으로 배포된 선전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또한 북한으로의 투항, 월북 종용과 북한의 우월함을 선전하고 남한 사회를 선동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제1장에서 삐라를 생산하기 위한 미군의 조직적인 움직임과 삐라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읽고 나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삐라는 전시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전쟁 작전 중 하나이며, 북한의 일방적인 선전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을 알게 되어 매우 놀랐다. 삐라에 대해 가졌던 경직되면서도 공격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향수를 자극하고 달력을 그려 넣는 등 호감을 심어주고 감성적으로 설득, 회유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 역시 흥미로웠다.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시각적 자료가 매우 풍부해 읽는 동안 색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책 전반적으로 도표와 그림 및 사진 자료, 선전 문구 등을 인용하는 등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 점은 당시의 상황이나 심리전 등에 대해 빠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아 매우 유용했다. 또한 실제로 접하지 못했던 삐라를 그림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의 민간인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살포한 삐라를 인용한 부분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전쟁 중 삐라를 통한 심리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대비한 미국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탁월에 이러한 수치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기 어려워 내용을 이해하는데 약간 힘겹기도 했다.저자는 책을 서술하면서 한국전쟁이 냉전의 장기화와 현실화를 보여줌을 강조한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국제적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을 일컫는 것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첨예하게 지속되던 갈등이 한반도를 배경으로 폭발해 결국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이 많은 이득을 얻었음을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미국의 심리전은 전쟁을 겪으면서 체계적인 조직으로 발돋움하였고, 전술적 수단으로서의 심리전을 본격적으로 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미군’의 원조가 아닌 ‘유엔·유엔군’의 원조 및 참전을 강조한 점은 국제 여론의 비난을 회피함과 동시에 전쟁에 개입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미국의 태도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결국 전쟁 후 미국은 명실상부한 갈등을 조정하고 평화를 주도하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 한편 국제 사회에서도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내용과 연계되어 한국전쟁 발발의 국제적 배경과 의의 등에 대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그리고 미국이 삐라를 통해 매우 강조했던 유엔의 물질적·군사적 원조는 교과서나 방송매체, 인터넷 서핑을 통해 많이 접해왔던 사실이었는데 정작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원조비용은 삐라를 제작하고 살포하는 비용에 비하면 극히 적은 정도임을 알고 실망 아닌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전인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 원조가 아니라 국익과 국제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원조였다는 점과 원조의 규모 역시 생색내기에 불과했다는 점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모든 행보가 철저히 이익을 기반으로 해 이루어진 검은 속내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저자는 책을 서술하면서 삐라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수행되었던 미국의 심리전을 분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에 내포된 미국의 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저자는 미국만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전쟁 당시 양 측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편향된 입장이 많이 아쉬웠다. 물론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을 둘러싸고 많은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미국이 개입했다는 설 역시 많은 학자들에게 동의를 얻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선제공격과 한국전쟁의 근간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국제적 힘겨루기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미국 이외에도 다른 외세의 개입과 그 영향 역시 비판하는 것이 보다 형평성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살포된 삐라의 수가 약 40억장임을 강조하면서 제목과 책 내용의 부분마다 적의 무릎까지 쌓일 만큼 눈처럼 수북히 쌓인 삐라의 양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책의 후반부에서 삐라의 무분별한 생산과 살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과잉생산과 소비를 닮았음을 지적하며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쟁 당시의 여러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물론 끊임없이 동일한 가치관을 담은 메시지에 노출되고 이에 세뇌를 당한다는 점에서는 방송매체와 인터넷에 노출된 현대인이나 삐라에 노출된 그 당시의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현대와 달리 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전파 방송의 송신을 중단하는 등 전파방송매체의 비활성화와 송·수신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전시상황에서 항복을 유도하고 심리적으로 세뇌를 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은 삐라가 유일했다. 40억장이나 생산하고 이를 살포하는 것이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점에서는 비판할 수는 있지만 전시상황이 갖는 특수성과 삐라, 선전물이 갖는 탁월한 효과와 중요성을 간과하는 실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저자는 무지막지하게 살포된 삐라의 수적 양만을 강조하고 부정적 이미지만을 제시하면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삐라는 미국과 남한뿐만 아니라 소련, 있다.
《독일사 속의 갈등과 화해》- 16세기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을 중심으로목차Ⅰ. 서론1)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부터 1618년까지의 국제 정세Ⅱ. 본론 - 30년 전쟁 (1618-1648)1) 30년 전쟁의 원인(1) 내부적·간접적 원인(2) 외부적·직접적 원인2) 30년 전쟁의 전개 - 갈등 양상(1) 1기 (1618-1620)(2) 2기 (1625-1629)(3) 3기 (1630-1635)(4) 4기 (1635-1648)3) 갈등의 해소 -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Ⅲ. 결론Ⅳ. 참고문헌 - 한해정 교수님사학과 20120228 전영선Ⅰ. 서론1)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4세기 무렵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함께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중세 교회의 권위가 하락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났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의 수집과 정리,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찾고자 하는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신항로 개척을 계기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탈리아와 달리 북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연구와 더불어 초기 크리스트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 개혁의 경향이 강하였다.독일 역시 북유럽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었다. 독일은 ‘교황의 젖소’라고 불릴 만큼 교황청의 착취와 권력의 남용이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면벌부 판매는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할 수 있다.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증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서 면벌부를 판매하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Luther, Martin 1483-1546)가 이에 반발하여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오로지 신앙을 통해(sola fide), 오로지 성서를 통해서(sola scriptura) 구원 받을 수 있다”게 되었고,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교회, 즉 프로테스탄트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부터 1618년까지의 국제 정세독일에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내부적으로 평화를 맞이했으며 가톨릭과 루터 교파 세력 간 권력의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는 심각한 종교 갈등이 그치질 않았는데, 이러한 종교 갈등의 기저에는 루터의 교리가 아닌 과격한 칼뱅이즘이 있었다. 칼뱅파의 신도들은 루터와 달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이 믿는 신앙의 진리를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며, 칼뱅파 신도들에게 신앙의 박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의무나 다름없었으며, 이는 곧 시민전쟁까지도 치룰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실제로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종교 간의 무력 갈등이 빈번히 일어났다. 1562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notten)라고 불리웠던 칼뱅파 신도들은 무력 저항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약 20년 동안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한편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북부의 7개 주에서도 신교로 개종한 귀족들의 주도로 마드리드의 반종교개혁적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1567년 이래 이들이 펼쳤던 스페인과의 전쟁은 종교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해방전쟁이자 시민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1555년부터 1618년까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던 독일과 달리 외부적으로는 잔혹하고 치열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Ⅱ. 본론 ? 30년 전쟁(1618-1648)에서 나타나는 갈등 양상1) 30년 전쟁의 원인(1) 간접적 갈등 원인16세기 초에 이루어졌던 루터의 종교개혁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당대의 가톨릭을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구교, 즉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protestantism)도 인정하는 종교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독일 내부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독일의 정치적 노렸다는 점에 주목할 때, 종교개혁을 통해 황제의 권위와 요구에 저항하고 더 나아가 권력을 강화하려 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한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갖는 한정적인 성격이 갈등을 초래한 면도 있다. 신앙의 자유가 제후들에게만 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파에만 국한되고 칼뱅파를 비롯한 다른 신교 종파는 제외됨에 따라 많은 불만을 야기해 결국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2) 직접적 갈등 원인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에도 갈등 요소가 있었지만 발칸 지역을 정복한 투르크가 동부 국경 지대를 압박하고 있는 현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표면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구교와 신교는 종교적 갈등의 축적과 외교적 조정자가 부재하던 국제 정세에 맞물려 무력으로 충돌하게 되었다.1608년, 신교 도시인 도나우뵈르트에서 가톨릭교도들의 신앙 활동이 금지되자 황제가 도나우뵈르트를 제국에서 축출하고 바이에른 영주가 강제로 가톨릭의 신앙 활동을 보장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칼뱅파는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중심으로 신교 연합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 가톨릭 측은 그 이듬해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 연맹을 결성하였다. 신교와 구교 간의 대치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1617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를 탄압하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그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면서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무력으로 표출된 것이다.기원후 5세기부터 약 1천년 동안의 중세 시대 동안 교회 권력과 크리스트교는 유럽 통합의 구심점으로 작용했지만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권위를 잃고 추락하면서 유럽 세계에는 외교적 조정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국제 관계의 중재자가 부재상태에 놓이면서 프랑스와 같이 이미 국민국가를 이루고 영토 확장과 국제 정세를 주도하려는 욕심을 내보이는 국가가 등장했다. 이 국가들에게 당시 내부적 갈등에 따른 혼란으로 민족국가 형성에 뒤쳐졌던 독일은 국익 달성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종교를 명분으로 일어절대 신앙을 강요하려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 인들은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1620년 바이서베르크 싸움에서 패배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2) 제2기 (1625-1629)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신교도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으나 황제군의 장군 발렌슈타인과 틸리에게 패배하여 1629년 양측은 뤼베크 조약으로 화해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는 배상령을 내려 종교제후의 영지 회복과 루터파의 공인을 선포하였다.(3) 제3기 (1630-1635)그러나 이듬해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신교를 옹호하고 프랑스의 후원을 얻어 다시 독일에 침입했다. 스웨덴군은 황제군을 브라이텐 펠트전투(Battle of Breitenfeld)에서 격파하고 틸리를 전사시켰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도 전사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1634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이 모반혐의로 암살되자 1635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화의가 성립되었다.(4) 제4기 (1635-1648)프라하의 화의 직후인 1635년, 1631년 이래 배후에서 신교 세력을 밀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에스파냐에도 선전을 포고, 스웨덴과 연합전선을 폈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전황 속에 끌어가다가 1637년 황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1644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지지부진하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성립되어 30년간의 종교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3) 갈등의 해소 ? 베스트팔렌 조약30년 동안 무의미한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쟁 관련국들은 이 전쟁을 통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스웨덴은 포어포메른과 브레멘을 흡수하여 발트 해의 강자가 되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 서약 공동체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 반면에 네덜란드를 상실한 에스파냐는 유럽 대륙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다.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영토 문제가 결정된 한편,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종교 문제에 대한 결정은 보다 분명해지면서 종교 분쟁의 불씨는 사라지게 되었다.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 신민의 종교가 결정된다는 원칙이 다시 한 번 확정된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뱅파가 루터파와 동등하게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영방 군주들의 특권과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었으며, 각 영방은 독자적인 주권, 영토권과 외교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제국 내에서 황제의 영향력이 유명무실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의 영향력도 완전히 축소되어 가톨릭 영방에 한해서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이들 가톨릭 영방과의 관계도 각 영방과 개별적으로 협상해야만 하는 정치 구조가 형성되었다.Ⅲ. 결론16세기에 이루어졌던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앙지상주의와 성서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타락했던 구교를 개혁하고 일반 시민들도 신앙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독일어 표준의 기틀을 마련해 독일의 민족의식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북부는 루터교(신교)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남부는 가톨릭(구교)으로 양분되면서 내전이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분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남북의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개최했지만 이 또한 루터파와 지도층에만 국한되는 등의 한계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의 종교적, 정치적 단절을 초래했다.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에 내재된 갈등 요소들은 결국 1618년 보헤미아 신교세력의 봉기를 시작으로 30년 전쟁이라는 큰 비극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