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112988 김치영왜 임시정부에 대하여 배워야 하는가? 대한민국 헌법에 언급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6.29선언 이후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며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만 하여도 정부는 임정을 철저히 배척하였으며 현재의 명칭은 이승만이 무단으로 도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김구의 후광을 이용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계획에서 사용된 것이 대한민국이란 명칭이다. 이승만은 독립국이자 황제국의 상징인 대한을 포기하기 아까웠기에 이를 도용한 것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명 전에 앞서 그 당시 존재하였던 다양한 정부설립방법론에 대해 알아보겠다. 왕의 유무로 나눠보자면 충의 실현을 강조하는 복벽주의와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안창호로 대표되는 공화주의가 존재하였다. 어떻게 독립을 할 것이냐의 입장에서 보자면 게릴라, 정규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독립 전쟁론과 한말 계몽 운동 계열에 영향을 받은 실력양성론, 조선 멸망이유를 외교적 실패로 보는, 이승만과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외교 독립론이 존재하였다. 어떤 조직 형태로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에 따라서도 사회조직, 정부, 정당 이렇게 3개의 의견을 주장하는 파로 나뉘었다.이러한 다양이 주장이 나오는 가운데 공화주의, 외교독립론, 정부 주도의 독립 운동을 방략으로 하여 임시정부는 설립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강화에 조선도 참여해서 외교로 독립을 인정 받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를 위해선 정부 조직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 국외 독립 운동가들은 활발한 도시, 일본에게서 안전한 상해에서 자주 모이게 된다. 처음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이 아닌 민주 공화제를 지지하며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신한청년당으로 출발한다. 임정세력은 이 시기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의 상해 방문에 접촉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데, 김규식이 정부대표가 아니기에 무시당하자 조선의 대표임을 보증하기 위해 국가를 만든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초기에 임정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삼았는데, 1919년 이승만의 독립운동가, 정치가로서의 위상은 상당한 것이였다. 10년간의 미국유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조선왕실 관계자. 미국 대통령과 아는 사이라는 등의 이야기로 인하여 이승만이라는 그 이름 자체로 권위를 갖고 있었다.임정의 외교독립론은 실패하였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추축국 식민지에 대한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문제 때문에 미국(국제 연먱)측과 영국 프랑스 등과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아 임정과 외교독립론은 큰 타격을 입게된다. 하지만 아태지역 일본견제를 위해 미국주도로 워싱턴 회의가 열리게 되자 다시한번 외교독립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주장했던 미일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일본과 미국의 파트너쉽이 체결되고 아시아지역에 대한 일본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자 외교독립론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이후엔 임정이 대분열이 일어나게 되며 독립 전쟁을 주장한 이동휘 등이 탈퇴하며 세력이 약화되어 간다.
3.1 운동112988 김치영3.1 운동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일제의 식민으로 인한 지방 기존 세력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겠다. 기존의 지방정치 체제가 왕이 파견한 수령(군수)과 이, 향이 행정, 사법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이 파견한 면장이 행정, 사법권을 갖고 면사무소를 통해서 근대적인 시스템으로 지방을 관리 하였다. 이는 기존 세력의 불만을 일으켰으나, 기존 세력들은 물리적 대응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세계 1차 대전 때 유럽 민족 간 충돌이 전쟁을 촉발했단 의식이 만연하게 된다. 이에 1918년 1월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연설하게 된다. 국제 연맹을 만들 것이며, 폴란드 , 핀란드, 세르비아 문제 등 유럽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 유럽 민중에겐 자결권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소식은 조선 내에도 퍼지게 되는데 총독부는 이 사상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 질지 모르고 방관 하였다.내적 요인으로는 고종의 독살설이 퍼지게 되는데, 이는 당시 유교적 의식을 갖고 있던 민중에겐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 왔으며, 영향력을 많이 끼치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이뤄진 민족대표 33인은 비폭력주의를 표방한 독립청원(선언)을 계획한다. 여기서 이 비폭력의 의미를 친일로 간주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시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원래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을 하려고 하였으나 소문이 퍼져 군중이 모이게 되었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 결국 중국 요리집에 가서 자기들 끼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주인의 신고(자진 신고)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은 끝난다.이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파고다 공원의 군중들 중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삽시간에 만세운동은 퍼지고 만다. 선언서 낭독 이후 민중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대한문, 미국 공사관, 조선 총독부 이렇게 3갈래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이에 놀란 조선 총독부는 헌병대를 출동시켜 해산을 시킨다. 하지만 운동은 끝나지 않고 처음 독립에 참여한 사람의 경험담이 퍼져 나가며 지방민들 까지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5월까지 이어졌다.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과연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의 개념과 민중들의 그것과의 차이이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한일 병합의 이전 상태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민중의 독립에 대한 인식을 보자. 민중에게 독립이란 개념은 거의 없이 친구따라 강남가듯 만세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지방으로 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비폭력화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총독부에 투석을 하는 등의 행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자연발생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방민들에게 3.1 운동은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되며 독립 투쟁으로서의 성격으로 변모 했다 할 수 있다. 당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로 인해 자극을 받은 엘리트 들에 의해 운동이 시작되었다면 실제론 이 사람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반 민중에겐 스트레스 탈출구로 작용이 되면서 독립 투쟁으로서의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지방 면사무소에 의한 移葬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이로 미뤄보아 지방의 3.1운동을 근대적 정책에 의한 항거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