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 Fragile Superpower 판도라의 상자 중국지은이 수잔 셔크(Susan Shirk)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부차관보를 역임하였다. 그래서 중미관계에 있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중국 전문가인 그녀가 쓴 'China: Fragile Superpower'라는 책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중국이 개혁 개방 30년의 성과로 강대국이 되었지만 저자는 중국을 'fragile superpower' 즉 깨지기 쉬운 강대국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갸우뚱하게 만든다. 대개 중국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굉장히 부강하고 튼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중국을 ‘깨지기 쉽다’고 표현했는지, 중국 전문가가 보는 중국은 어떤 나라인지, 또 중미관계는 현재 어떠한 상황인지를 알아보자.저자는 왜 중국을 취약하다고 인식하는가?중국은 외부적으로는 초강대국으로 보일지 몰라도 취약한 나라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이 가져 올 가장 큰 위험성은 중국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닌, 중국 내부의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이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국내적으로 깊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방식에 의해 정권을 잡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여러 가지의 정치적 위험들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지도자가 자신을 몰아낼 수도 있고 대규모 저항운동이 일어나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사회안정’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설득하게 되었다. 결국 이런 설득도 정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서 기인하며 대외관계보다는 내부의 이런 ‘취약성’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중국의 숙제이다. 내부적 도전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한다. 중국의 내부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함께 경제성장과 사회 안정을 흔들 수 있는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저자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1989년의 천안문 사움을 갖게 하였다. 그 후 지도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피하며 언론 통제까지 하였다. 해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정간섭’이라는 말만 거듭하며 이를 무시한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은 정치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세 가지의 방안을 가지고 이 안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첫째는 당지도부의 분열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는 외관상 의견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내부 협의 사안에 대해 비밀을 유지한다. 회의에서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는 누설해서는 안 되며 이는 결국 중국의 강한 ‘언론 통제’를 만들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는 대규모의 사회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사회안정’을 중시하는 이유는 공산당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자리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 공산당의 관료들은 중국과 같이 인구가 많은 나라는 민주주의를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편집증은 그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이며 천안문 사건, 다른 체제의 붕괴, 중국 사회의 엄청난 변화와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증상은 점점 심해진다. 이런 점이 중국이 내부에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이다. 마지막은 군이 당의 편에 서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민해방군은 당내의 엘리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는 공산당의 집권당 지위를 확실하게 지켜주는 역할이 인민해방군의 핵심 임무라고 한다. 즉 대권을 쥐려고 하는 지도자들에게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인민해방군의 개인적 충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의 최고지도자가 신경 써야 할 사항이다. 저자는 이러한 ‘국내적 위협’은 중국의 민족주의가 더욱 확대되게 하였다고 보았다. 또 무분별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마오쩌둥 시대의은 확실하다. 검열기관의 검열관들이 매체에 압력을 가해서 영업을 못하게 한다거나 파산시켜버리면 그 이익의 손실이 엄청나기 때문에 매체들은 정부의 언론 통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반면 뉴스 매체들은 민족주의적 신화를 확대생산한다. 민족주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선전부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민족주의는 시장에서뿐 아니라 검열관들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틀림없는 관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중국을 덮고 있기에 대중들은 일본, 대만, 미국 등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읽은 기사는 민족주의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대립을 불러일으키거나 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만 통제를 하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견은 여전히 나타내서도 안 된다. 특히 천안문 사건, 민주주의, 당, 정부, 고위층의 비리, 대만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도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천안문 사건을 정작 중국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중국 당국의 능력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력은 점점 막강해지고 있다. 이 둘은 위험한 경계에 있고 중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될 것이다. 즉 중국의 ‘민족주의’도 계속될 것이다.저자는 중국이 가야할 길에 대해 어떤 제안을 하고 있는가?중국의 공산당은 국민들을 이전과 같이 감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유는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1억 명이 넘는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였고 중국 노동력이 4분의 3이 정치적 감시를 덜 받는 국유부문 밖에서 고용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비롯한 많은 변화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더욱 언론과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였다. 시민들은 부유층과 자신들의 빈부격차를 이유로 들며 분노하였다. 중국의 국영의료체계는 붕괴되었고 공공의료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응을 할 때가 있는데 자신의 자존심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감정적인 대응은 오히려 국가목표를 교란시키고 중미양국을 곤란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한번 더 생각하고 차분하게 대응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내부적인 자신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 독단적 민족주의에 대한 공식적 지지를 멈춰야 한다. 중국은 천안문 사건 이후 애국주의 교육운동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배타적 민주주의를 부추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감정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시키도록 해야 한다. 이를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중국을 답습하는 일이며 독단적 민주주의를 확산시킬 뿐이다. 다음은 긍정적 민족주의를 배양하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긍정적인 국가정체성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더욱 안전한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에도 덜 위험할 거라고 생각한다. 또 사영기업에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 현재 중국의 외교정책결정은 중앙집권화되어있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에 대해 균형을 맞춰줄 주체가 없다. 중국은 아직 경제개혁에 걸맞은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세계화된 경제와 평화적 외교관계로 혜택을 입은 지방 관리들과 사영기업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다. 또 중국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강화하기도 해야 한다. 국방예산 혹은 민생 프로그램 중 우선순위를 정하는 입법상의 토론을 허용하게 되면 국방 지출에 대한 감독도 가능할 것이며 국내적 필요를 만족시켜 국민들의 지지도 얻어낼 것이라 본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언론에 대한 통제를 푸는 것도 중국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의 기사를 중국인들이 보기 때문에 그들이 민족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지도자들로 하여금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대만 정부와의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다. 있기 때문에 개인적 생각이지만 굉장히 객관적인 7가지의 조언을 한다. 첫째는 ‘미국은 중국의 국제적 행위에 우선적 관심을 두자’이다. 두 나라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많은 문제들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중국의 행동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의 거슬린다고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면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한 사항이다. 그리고 헨리 키신저가 주장했듯이 미국의 지도자들이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단기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을 중국의 민족주의를 부추김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여 손익을 생각해야 한다. 두 나라의 마찰이 줄어들려면 정치적인 변화도 있어야겠지만 미국과 중국 그 어느 나라라도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미국은 늘 중국의 국제 행위에 관심을 둬야할 것이다. 또 앞에서 중국이 지켜야 할 일에도 있었지만 미국도 중국과 대만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중국 지도자들과 대만 독립세력 사이에 대립 상태가 지속된다면 미국의 국가안보에도 위험이 있고 악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과 비공식 회담을 통해 양안문제에 대해 대화를 해야 한다. 이것이 미중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고 중국과 대만 사이에도 평화적 발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토론으로 중국으로 하여금 대만과 정치적인 화해의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국이 모든 수단을 찾아서 도와줘야 한다. 다음은 중국을 존중해 줘야 한다. 중국은 강대국의 미국으로부터의 존중을 기대하며 자신들을 주요 강대국으로 인정해주기를 원한다. 1997년 장쩌민 주석이 워싱턴을 국빈 방문한 것부터 미국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었다. 현재 G2인 중국과 미국이 서로를 인정하며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면 국내적 문제나 중미관계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정치 경제적인 조언의 마지막으로는 미국이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과잉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초강대국의 면다.
문화콘텐츠란 무엇인가문화콘텐츠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논하기 전에 ‘문화’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문화는 한 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남들보다 뒤처지고 남의 것만 모방하는 것도 문화이며 새로운 것을 만들고 리드해 가는 것도 문화라 할 수 있다. 즉 이렇듯이 문화에 대해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미가 다르다. 민족, 시대, 지역에 따라서 문화라는 개념이 각기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화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그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로서 나아가 우리의 삶의 질과도 직결되는 개념이다. ‘문화’라는 개념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좋은 취미로서의 문화이다. 이는 ‘고급스런 취향’이란 의미의 문화로 뮤지컬 관람이나 전시회 관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둘째는 한 사회 및 그 사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문화이다. 이는 서구문화에 많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의미의 문화는 서구에 국한될 뿐만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문화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회가 문화를 계속해서 창조해내고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사회의 크기가 어떠한 지, 그 사회가 얼마나 역사가 깊은지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식과 가치체계로서의 문화이다. 이는 학자, 연구자들이 언급하는 문화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정의내린 문화란 무엇일까. 문화인류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하였다. 또 독일의 문화철학자인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를 고유한 민족혼이자 창조력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정의내린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도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문화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 문화는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게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인간은 그들의 여가생활을 좀 더 풍요롭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이게 된다. 그리고 슈펭글러의 정의로 볼 때 모든 민족과 공동체는 문화가 있으며 이는 그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문명에 의존하는 것은 문화적 몰락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문화 역시 발생, 성장, 쇠퇴, 멸망 등의 과정을 거치며 계속해서 진화해야 하는데 문명에 의존하여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문화가 몰락할 수 있다는 바와 다름없다.그렇다면 문화가 중요해짐에 따라 각광받고 있는 문화콘텐츠산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디지털은 문화콘텐츠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문화는 창작, 창조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창조하는 행위는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콘텐츠산업 또한 미래산업이며 전략산업이라 불린다. 나아가 문화는 경제성장의 동력이고 오늘날 산업과 결합되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21세기에 문화는 확실히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21세기가 국가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기도 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갤럭시 S의 브랜드 가치가 구글 안드로이드를 넘어설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내뿐 만 아니라 갤럭시 S 시리즈는 애플의 아이폰과 경쟁하며 전 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과거 아이폰의 점유율이 갤럭시 S보다 훨씬 높았다면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갤럭시 S 시리즈의 가치를 인정하고 구매하며 이런 점이 갤럭시 S 뿐 아니라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기업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핸드폰이 아닌 다른 물건들로 보았을 때 한국의 물건들은 어떤지, 중국의 물건은 어떤지 등 비교하게 되고 선입견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가 이름만으로도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문화강대국들의 브랜드 가치는 엄청나다. 즉 문화가 국가의 경제 발전을 좌우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문화강대국이 되려면, 분명 사회는 변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화와 기술은 다른 영역처럼 보이고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기술은 물질 영역이고 문화는 정신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은 곧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인터넷은 사이버 문화를 만들었고 휴대폰, 모바일 기술은 엄지족 문화를 만들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은 디지털 문화를 낳는다. 그러므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개념이지만 디지털시대에는 이 둘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은 컨버전스의 시대로 이는 디지털형 문화와 잘 어울린다. 사회과학에서도 언급하는 것이 과거에는 전문화가 중요하여 한 분야에서만 집중하면 성공할 수 있었지만 현대는 여러 분야와의 협업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각 분야의 영역들은 다른 영역과의 경계를 없애고 있으며 이는 일종의 ‘문화적 컨버전스’라고 할 수 있다. 또 디지털이 문화콘텐츠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로는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컴퓨터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유비쿼터스 혁명은 물리적 공간 속에 컴퓨터를 집어넣는 것인데 이는 온, 오프라인에 구분을 없게 하며 새로운 환경과 문화를 발생시킨다. 디지털과 관련지을 수 있는 개념으로는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는 콘텐츠를 표현하고 실현하는 최종창구로 미디어의 차이는 단순한 도구의 차이가 아니라 메시지의 수용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 또한 문화콘텐츠에 차지하는 비중이 큰 편이다. 문화를 향유할 때 콘텐츠를 선택하기에 앞서 미디어를 먼저 결정하며 콘텐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맞는 미디어를 잘 파악하고 미디어 기술의 동향도 숙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술과 문화는 분리될 수 없으며 미디어와 콘텐츠도 분리될 수 없다. 문화콘텐츠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유사한 개념으로 보았을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매체, 즉 디지털이다. 문화콘텐츠산업으로 영화, 게임, 공연, 축제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현대의 문화콘텐츠산업은 모두 디지털과 연결이 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컴퓨터나 핸드폰을 통해서 문화콘텐츠를 접하는 경우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콘텐츠를 접할 수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영화산업이 발달되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영화가 다른 나라에서 상영되고 할리우드 대작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있어 문화콘텐츠가 발전하는 것이고 문화가 있어 발달된 기술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콘텐츠’하면 생각나는 몇 가지 개념 중 디지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삶의 형태를 바꾸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경제는 대량생산에 기반을 두었다면 현대 사회는 One Source Multi-Use, 즉 하나의 소재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온라인화, 디지털화가 되어 문화상품 간의 이동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떠한 소재를 잘 살리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그 하나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원소스 멀티유스(OSMU)의 예를 들어보자면 캐릭터 상품을 들 수 있다. 미키 마우스나 헬로 키티는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상품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가지의 다양한 상품으로 나와서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키 마우스나 헬로 키티 같은 캐릭터 분야의 OSMU가 활발한 이유는 변치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으로 OSMU를 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늙게 되어있어 여러 세대를 아우를 수 없게 된다. 또 캐릭터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상품에도 활용될 수 있다. 문방구에 가면 헬로 키티 샤프부터 수첩, 지우개, 파일, 포스트잇 등 키티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 없다. 또 심지어 키티와 약국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도 약국에 가면 키티 밴드, 젓가락, 치약, 칫솔, 마스크 등 다양한 종류의 상품에 키티가 그려져있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활발한 OSMU로 인해 키티라는 캐릭터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고 다른 새로운 캐릭터나 이미지에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공적인 OSMU를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OSMU는 하나의 근원적 이야기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문화 혹은 현상을 말하므로 어떠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될 경우에는 OSMU와 스토리텔링이 결합했을 때이다. 예를 들어 황순원의 ‘소나기’는 소설로 나왔지만 그동안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해리포터’의 경우에도 책으로 나왔지만 영화화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였다. 이제 문학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영화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매체와 교류하고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스토리텔링은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개념은 문학에 많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기업에서 마케팅을 할 때에도 스토리텔링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또 앞에서 언급했던 디지털과도 결합시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으로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웹 에듀테인먼트 등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스토리텔링으로 하나의 소재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문화로 창조되고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문화는 문화콘텐츠가 되기 때문에 원천소스는 굉장히 중요하고 그것을 여러 종류의 문화로 이어지게 하는 스토리텔링의 역할도 중요하다.
페이스북 커버사진과 실제 감정과의 상관관계페이스북(Facebook)은 당시 하버드대학교 학생들 3명에 의해 2004년에 설립된 소셜 네트워킹 웹 사이트이다. 초기에 하버드대학교 학생들만이 가입이 되었으나 점차적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 페이스북을 만드는 것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페이스북 붐이 불면서 이용자 수는 10만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페이스북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기본적으로 글이나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월(Wall)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또 이용자들에게 친구들의 현재 위치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스테이터스(Status)가 있다. 또 다른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와는 달리 뉴스피드(News Feed)라는 기능이 있는데 이는 나와 페이스북 친구인 다른 이용자들이 올린 글이나 소식을 자동적으로 업데이트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최근이라고 볼 수 있는 페이스북 상의 큰 변화를 찾아보자면 이 레포트에서 가장 크게 다룰 ‘커버사진’을 꼽을 수 있다. 커버사진은 개인의 ‘월’을 꾸며주는 사진이며 이는 프로필 사진과는 별개다. 커버사진을 꾸밀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올려서 이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그렇다면 커버사진은 얼마나 개인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을까. 또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커버사진으로 하여금 현 감정 상태를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있을까. 페이스북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나는 타인의 ‘월(페이지)’를 들여다보다가 이런 점이 궁금해졌다. 먼저 나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내가 설정해놓고 있는 커버사진은 벚꽃이 피어있는 길이다. 내가 이 사진을 커버사진으로 지정한 이유는 그 시기가 봄이었기 때문이고 올해 가보지 못했던 꽃놀이를 사진으로라도 대신하고 싶었으며 또 봄에 맞춰 내 개인 페이스북 공간의 분위기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경우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을 사진을 통해 대리만족하기 위하여 커버사진을 그렇게 설정하였기 때문에 나의 페이스북 커버사진과 감정 간에 상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고 노출되어있는 유명인의 경우는 어떨까. 흔히 유명인이란 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의 사적인 SNS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타인에게 굉장히 큰 영향력을 미치는 그들의 페이스북은 감정과의 연관성이 있을까. 먼저 연예인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룹 샤이니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shinee
황하 문명중국의 황토빛 고원은 녹지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며, 사막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황토고원에는 약 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고 온 마을 사람들이 계단식 전답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또한 높은 산꼭대기까지 온통 밭으로 개간되어서 경작되고 있다. 사람들은 숲을 베어내고 밭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조나 수수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곡식들을 경작했다. 황토고원에 있는 누런 황토 흙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멀리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바람에 의해 이곳으로 쓸려와 쌓인 것인데 언뜻 보기에는 황토 땅이 불모지처럼 보일 수 있으나, 물길을 머금게 되면 풍성한 수확을 낳게 해주는 땅이 된다. 고대 중국 문명들은 풍부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채집된 고대 지층 속의 동물의 뼈나 꽃가루 화석을 통해서 고대의 자연 환경에 대해 조사해본 결과 약 3천 년 전 은왕조시대의 황토지대는 푸른 초목들이 아주 무성하게 많이 자라고 있었고 울창한 산림이 기름진 초원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황토고원을 울창한 숲과 푸른 초원 속에 많은 짐승들과 새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의 땅으로 그려볼 수 있다. 3500년 전 은 왕조 시대의 황토지대 지역은 80% 이상이 푸른 삼림과 초지로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고대에는 이 황토지대가 아주 방대한 자연 삼림지역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의 왕조들에서 항상 이곳에서는 나무를 벌채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왔기 때문에 황토고원은 원시림 상태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중국 문명은 바로 이런 황토 땅에서 태어났다. 중국 오천년의 역사 동안 황토는 수많은 문명을 태어나게 해 그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봐왔다. 과연 중국의 5천년의 역사를 거치며 이뤄낸 황하 문명은 어떤 것일까?중국 문명에 가장 큰 발전을 이뤄낸 인물은 바로 진족의 지도자였던 정이라는 인물인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되는 진시황제이다. 중국의 여러 부족 국가들을 통일한 뒤에 진시황제는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고 한다. 황제라는 말은 찬란하게 빛나는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강을 통제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진시황제는 자기 스스로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진시황제는 그의 사후에도 자신을 위한 것들이 많았으면 하였다. 먼저 기원전 3세기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제는 역대 그 어떤 왕이 만든 능보다 큰 거대한 황릉을 만들라는 칙령을 내렸다. 진시황릉의 동쪽 구역의 땅을 발굴해 들어가면 지하 5m의 깊이에서 아주 방대한 규모의 지하군대가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병마용으로, 병사들과 군마의 형상을 실제 크기와 똑같이 흙으로 빚어 구운 약 8천 개의 병마도용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병마용은 실제 진시황제의 군대를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거라고 한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을 호위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진흙으로 똑같이 만들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88년 8월에는 진시황릉 본분이 기슭 부분에서 또 다른 지하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넓이가 1만 3천 평반 미터나 되는, 기존의 발굴된 병마용과 거의 똑같은 규모의 유적이었다. 이는 진시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경기장으로 이 지하 경기창에서는 이전의 발굴되었던 그 어떤 유물들과는 다른 특이한 물건들이 만들어졌다. 놀라운 것은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 사람의 몸 형태에 딱 맞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갑옷을 만드는데 자그마치 백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러한 갑옷들이 5천 개 이상이 묻혀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것으로 보면 이곳의 작업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정도의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그 시대의 갑옷은 쇠로 만들거나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쇠와 가죽은 땅 속에 묻히면 녹이 슬거나 썩게 된다. 이에 반해 돌 갑옷은 절대 썩지 않는다. 즉, 진시황제는 영원히 변치 않을 불멸의 지하군대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의 병마용은 이곳 황토 땅 아래 새겨진 완전한 지하왕국이었으며, 이것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고대 중국 문명의 유산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22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의 이 황토 땅은 수많은 문명의 흥망과 성쇠를 줄곧 지켜봐왔다. 진시황제가 중국 문명의 부흥을 일으킨 또 다른 이유로는 바로 철을 도입한 데 있었다. 철은 단단하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무기 뿐만이 아니라 각종 연장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데에도 아주 유용한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철기의 도입으로 삼림의 개발은 더욱 더 가속화되었고 심지어 철을 다루는 공식 기구, 즉 철관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황토고원의 남쪽에는 넓게 펼쳐진 관중분지가 있는데 이곳에 진시황제가 전국거라고 하는 관개 시설을 만들었다. 전국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으로 쌓은 듯 보이는 기다란 토벽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판축법을 통해서 쌓아올린 제방으로, 강을 막는 큰 댐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토벽 제방은 총 연장길이가 무려 2650m나 되는 아주 거대한 댐으로, 관중분지를 비옥한 농경지로 바꿔 놓았다. 황토와 새로운 철기 연장들을 이용해서 하는 판축법이 이렇게 전국거와 같은 대규모의 토목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판축법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흙을 쌓고 돌망치로 두들겨서 다지는 방법을 판축법이라고 한다. 입자가 아주 곱고 부드러운 황토 흙은 이런 판축법으로 흙담을 쌓아올리기에 가장 적합하다. 이렇게 흙을 돌망치로 두들겨 다지면 공기가 빠져나가고 입자들이 더 단단하게 뭉쳐진다. 사람들은 황토의 자연적 특성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소중한 땅을 지키는 벽을 쌓는다.과거 은족과 강족은 종종 서로 전쟁을 했다. 은허에서는 은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희생당한 강족 사람들의 유골이 상당수가 나올 정도로 은나라와 강족 간의 전쟁은 매우 치열했다. 은나라를 더욱 강력하게 했던 것은 구리의 발견에 있다. 은나라 사람들은 구리를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었고, 구리에 주석을 섞으면 구리만 쓰는 것보다 몇 배가 더 단단한 합금, 즉 청동이 되었다. 이러한 단단하고 날카로운 청동무기 덕분에 은나라는 강족과의 전쟁에서 놀랄만한 진전을 이뤄내었다. 강족과의 전쟁에서 이긴 은나라는 황하강 중하류 유역의 평원지대를 일컫는 중원지방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고대 중국의 왕조들이 대개 이곳에서 번성하였으며,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은 문화는 그 이전에 유래가 없는 새로운 문화였다. 은나라의 왕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장대하고 화려한 청동기를 만들게 했는데, 그 예로는 정의라고 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청동기, 신들에게 술을 드릴 때 담는 뇌 등등이 있다. 주로 왕들은 청동기에 도철무늬의 문양을 새겨넣게 했는데 가운데의 가는 줄은 코를 나타내고 양쪽에 튀어나온 두 개의 사각모양은 눈을 나타낸다. 이러한 문양은 은나라 사람들이 숭배하였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한 신의 모습이다. 은나라 사람들이 청동기를 만드는데 이용했던 기술은 주형을 만드는데 썼던 황토 진흙이 그 비결로 하는 기술에 의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찰흙 조각은 모두 붙어서 하나의 주형을 만든다. 마른 황토는 높은 고원에서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단단하다. 황토가 청동 주형을 만들기 적합한 재료였던 이유도 이와 같다. 물을 적시면 부드러워지고 마르면 돌처럼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또 황토로 만든 주형은 섭씨 1100도가 되는 뜨거운 열을 견딜 수 있기까지 하다. 이렇게 굉장한 역할을 하는 주형은 한 개로 단 한 개의 청동기 밖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청동기가 은나라 사람들한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은나라의 청동기는 그 사람들에게는 신들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왕국의 번영을 신들에게 비는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은나라 사람들에게 왕과 신이라는 의미는 대단하였다. 은나라 왕은 신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 모든 일의 길흉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었던 춘추 전국 시대를 겪으며 문화의 중심은 점점 신들에게서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춘추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항아리의 표면을 보면 신들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얘기가 새겨져 있다.
인더스 문명4500년 전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대자연의 대지 위를 흐르고 있는 인더스 강의 강변을 따라서 찬란한 인더스 문명을 꽃피웠다. 4500년 전에 있었던 인더스 문명의 도시인 돌라비라는 많은 저수지로 둘러 싸여 있다. 이 시가지에는 거의 2만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도시는 크게 시가지 구역과 성체 구역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성체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모두 네 개의 문이 나 있다. 이 성체는 돌라비라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더스 문명의 많은 도시들은 그 강을 따라 강변에 건설되어 있다. 그런데 돌라비라 유적지는 인더스 강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유적지들이 인더스 강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었을까? 인도의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인도 전역에는 인더스 강, 갠지즈 강, 가하하크라 강 이렇게 세 개의 큰 강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가하하크라 강은 초목이 매우 울창하게 자라고 있고 비가 오는 철에만 물이 흘러서 강이 흐른다고 한다. 평소에는 메마른 땅으로 있다가 우기 철에만 흐르는 것이다. 가하하크라 강은 4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대한 지하수맥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땅 속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유역에는 많은 인더스 강 유적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즉 인더스 강 유역 문명은 인더스 강, 가하하크라 강의 두 개의 큰 강을 따라서 그 찬란한 꽃을 피웠다. 그 예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만들어진 황옥수 목걸이나 인더스 문자가 새겨진 돌 도장을 들 수 있다. 과연 인더스 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의 주거지는 어땠을까? 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파키스탄 남쪽 메마른 땅에는 인더스 강 유역 문명의 유적지 중 가장 큰 모헨조다로 유적지가 있다. 약 1평방 km에 거쳐 건설된 이 도시는 거의 4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인더스 강변에 잘 자리 잡고 있으며 4500년 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건설된 도시이다. 이 도시의 건물들은 구운 벽돌로 지어져 있고 상하수도 시설 또한 잘 갖춰져 있다. 모헨조다로에는 개인 소유로 된 우물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위에서 물을 부으면 오물을 하수도로 흘려보낼 수 있도록 되어있던 것이다. 즉, 수세식 변소가 있었던 셈이다. 하수도는 도시 전체에 깔려 있어 이곳 주민들은 큰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였다. 목욕은 인더스 사람들에게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돌 도장에 대해 살펴보자. 돌 도장은 오늘날에도 발견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다양한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 도장에는 인도의 토종 소의 뿔을 인더스 사람들이 신성시하게 여겨 그 뿔이 달린 머리 장식을 한 사람도 새겨져 있었다. 이 돌 도장은 진흙과 같은 곳에 눌러 찍어 상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 도장에 새겨 있는 인더스 문자는 대부분 미스테리인 것이 많다. 문자가 5~6개에서 많아야 17개이기 때문에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비밀을 풀게 해줄 새로운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곳 역시 인더스 강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야생 조류들의 천국으로 보이며 아라비아 해와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7월이면 강한 남서풍으로 인해 바닷물이 이곳에 밀려든다. 그래서 이곳은 소금밭으로 변해있다. 또 다른 곳은 카디로벳이라는 섬인데 들어가려면 특별한 허가가 필요하다. 이곳은 돌라비라 유적지로 인더스 문명 유적지 중에 최초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곳이다. 이 유적지의 발굴이 1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전 세계의 관심이 돌라비라로 쏠려 있다. 왜냐하면 이곳이 인더스 문명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돌라비라도 모헨조다로와 마찬가지로 상하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지상과 지하로 잘 이어져 있다. 돌라비라는 계획도시로서 인더스 문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거대한 암거 시설이 그 증거이다. 한편, 돌라비라는 어떻게 건설됐는가를 살펴보면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이 지역은 강우량이 아주 적은 곳인데 어떻게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도시 주변의 저수지들을 채우는 데 필요한 그 많은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돌라비라 사람들은 강에 돌을 쌓아 댐을 건설하였다. 강물을 댐으로 막아서 수로를 통해 저수지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라비라 사람들이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곳에서도 농사를 짓고 일 년 내내 물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인더스의 도시, 돌라비라는 가하하크라 강 하류의 한 부분에 세워졌는데 여름 철에는 소금밭의 온도가 50도가 넘는다. 그리하여 돌라비라 마을에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어서 심한 가뭄이 들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돌라비라의 성체 지역에서 모은 물은 우물과 목욕탕으로 갔는데 이 우물은 매우 거대하며 아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 밧줄을 통해 물을 길렀던 흔적이 있고 그 기른 물로 자신들의 몸을 씻었다. 아마도 옛 인더스 사람들은 모든 물 중에서 땅에서 나온 물을 가장 깨끗하고 신성한 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파키스탄에서는 7월이면 비가 많이 내리고 많은 농토를 침수시킨다. 이런 홍수는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데 보통 다음 날 아침이면 물이 다 빠진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홍수가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그 결과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어서 좋아한다. 여름철이 되면 인더스 강의 강물 수위는 높아지는데 나무로 만든 배들은 강 사람들의 것이다. 이 배들을 타고 인더스 강을 오르내리며 많은 물자를 나르고 있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강로를 이용하면 물자를 더 빨리 수송할 수 있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강은 고속도로 같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더스 문명의 각 도시들 간에는 활발한 교역이 있었다. 상인들이 거래를 할 때 쓰이던 돌 도장에는 하라파인들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하라파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이 도시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주로 일상생활에 쓰이던 공예품과 토기들이었다. 홍옥수 목걸이와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항아리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의 장난감도 상당 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유적지에는 주로 중산층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회 체제는 수평 분화적으로 비교적 평등하게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돌라비라에서 인더스 문자들이 발견되었는데 큰 문자들이 쓰인 것으로 보아 하르파 사람들의 시대를 나타낸 가장 오래된 상징이라고 보인다. 새로 발견된 이 열 개의 문자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핀란드의 언어학자인 파플라 교수는 이것들이 그림 같이 생긴 모양을 볼 때 상형문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언어를 나타내고 기록하는 방법적으로 본다면 이 글자는 뜻글자 즉, 세계 최고의 기록 문자라고 말하고 있다. 파플라 교수는 돌라비라의 문자는 권력을 지닌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 하라파 제국은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된 것이 아닌 경제적, 문화적 제국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권력자들의 권력의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인더스 강 유역 문명에서 뿔 달린 장식이 그 상징이었다. 또, 이 도시를 통치하던 사람들의 권력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돌라비라의 한 가운데는 국영으로 운영된 공방이 있었던 터가 있다. 이 공방은 홍옥수나 기타 다른 석재들을 절단하고 매끄럽게 가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돌라비라의 장신구들은 홍옥수나 기타 여러 원석들의 자연적인 무늬가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인더스 강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건너에서 발견된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이 아니면 홍옥수 기념품들은 대다수가 왕릉에서 발견되었다. 그만큼 홍옥수를 비롯한 장신구들이 권력자들의 권력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