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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구석기 유적2
    구석기 유적2
    구석기 유적2●경기도의 구석기 유적경기도의 구석기 유적에는 경기도 고양시 도내동 유적과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등이 있다.경기도의 구석기 유적고양시 도내동 유적고양시 탄현동 유적연천 전곡리 유적경기도 고양시 도내동 유적에서는 서울에서 문산 사이의 구간에서 4만 년 ~ 7만 년 전 주먹도끼, 슴베, 찌르개, 격지 등 대규모의 다양한 구석기 유물들이 총 4만 7천여 점으로 발견되었다.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유적에서는 2007년 일산임광진흥아파트 조성시에 6만 5천 년 ~ 4만 8천 년 전의 학술가치가 아주 높은 후기 구석기 유물 307점 및 문화층 출토●연천 전곡리 유적경기도 연천에 있는 전곡리 유적은 동북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된 유적이다.전곡리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이전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인도 부근까지 묶는 아슐리안계 양날 주먹 도끼 문화권,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동아시아식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던 모비우스 학설이 뒤집히게 되었다.●충청도의 구석기 유적충청도의 구석기 유적에는 공주 석장리 유적을 비롯하여 청원의 두루봉 동굴, 충북 제천 점말 동굴, 단양 금굴등이 있다.충청도의 구석기 유적공주 석장리 유적청원의 두루봉 동굴제천 점말 동굴단양 금굴청원의 두루봉 동굴에서는 석회석 광산 개발이 진행되면서 파헤쳐진 동굴지대에서 구석기인들이 사용했던 돌연장과 더불어 이미 멸종된 동물과 열대지방 동물인 코끼리 상아, 동굴곰, 쌍코뿔이, 하이에나, 큰 원숭이, 사자, 꽃사슴 등 무려 46종의 화석과 동물뼈가 출토됐다.이미 멸종된 동물과 열대지방 동물인 코끼리 상아, 동굴곰, 쌍코뿔이, 하이에나, 큰 원숭이, 사자, 꽃사슴 등 무려 46종의 화석과 동물뼈가 출토된 청원 두루봉 동굴의 발굴은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 연구의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두루봉 동굴 지역은 학계의 관심을 받으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는데 이곳에서는 원시인의 유골도 나왔다.1차적으로 선사시대 유물 2백여점이 발굴됐고 1981년 1월 19일에는 열대성 기후에 살았던 동물뼈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사람 머리뼈 같은 흥수동굴마치 사람의 머리뼈 같은 흥수굴에서 인골 두개와 여러종류의 석기가 발굴됐는데 발굴당시 그모습 그대로 보존됐으면 좋았지만 석회광산 개발로 파괴되었다흥수아이석회석 동굴서 발굴되어 고증을 거쳐 청동으로 복원된 흥수아이 키는 1m 20cm정도로 5세 정도의 나이로 추정되는데 흥수는 광산 전무인 김흥수씨가 발견해 흥수아이라 했다.지난 1976년 8월 7일부터 1980년 8월 8일까지 모두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연인원 2,756명이 투입되었다.이곳에서는 약 2만의 유물을 발굴했는데 모두가 구석기 유물로 밝혀졌다.석회동굴서 발굴된 상아 두루봉 석회동굴서 발굴된 코끼리 상아뼈, 이뼈는 20만년이 지났어도 형태가 그대로 남아 그 당시 우리나라가 열대기후였음을 입중하였다두루봉이 있는 청원군은 상당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남한강, 서쪽에는 금강이 흐르는데, 금강 수계는 금강의 중류에 속하고 평지를 흐르기 때문에 유량이 풍부한편이고, 남한강 수계는 남한강 상류의 평지가 좁은 곳을 흐르기 때문에 하천 쪽이 좁고 유속이 빠른 편이다. 이 강들은 완만하고, 많은 강굽이 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제2굴은 1차 조사 시 연세대 박물관과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였으나, 2차 조사부터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단독으로 조사하였는데 모두 40.48㎡를 발굴하였다.석회암 채취로 많은 부분이 없어진 2굴은 6개의 석회마루층 밑에 있는 문화층(7층)에서 3문 7강 15목 28과 37속 46종의동물상과 3아강 10목 13과 12종의 식물상이 밝혀졌다.쌍코뿔이·크로쿠타 크로쿠타·하이에나·큰원숭이 등 멸종된 짐승이 발굴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종의 짐승이 보고된 것이어서,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의 구석기 동물상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불땐자리에서 출토된 숯 조각은 오리나무로 밝혀져, 이를 땔감으로 불 피웠음을 알게 되어 당시 사람들의 불땐자리를 중심으로 한 생활 자료를 확인하였다. 또한 굴 모서리에서 찾은 진달래 꽃가루 1 57개는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인간이 일부러 갖다 놓은 의식에 따른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의 행위로 평가되고 있다.이들은 사슴 정강이뼈에 홈파기로 만든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든 예술품도 찾아져 당시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의식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가장 많이 잡힌 사슴과의 이빨 분석으로 사냥 행위는 9·10월에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나, 계절에 따른 사냥 행위를 해석할 수 있다. 전체 발굴된 뼈 화석을 통하여 인구 고고학 방법으로 그들의 동굴 생존 일수를 계산하면 278일 나온다.짐승의 크기와 마리 수에 따른 고기의 열량을 계산하여 이곳에서 살았던 날수를 연구한 결과 곧선사람 5명이 50여 일 동안 살림을 꾸렸던 것으로 보인다.1차 발굴(제 2굴)은 충북대와 연세대가 공동으로 했고, 2차부터는 충대 박물관이 단독으로 두루봉동굴내 제 15굴·새굴·처녀굴·가지굴·흥수굴 등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그 과정에서 흥수아이와 각종 동물뼈화석 외에 매우 많은 수량의 뼈연모(골각기), 석기연모 등도 출토됐다.이중 두루봉동굴 제 2굴에서는 사람의 손질이 간 연모가 긁개 9백90여점, 쑤시개 1백95점, 밀개 1백79점, 째개 1백62점(이상 뼈연모), 석기연모 15점 등이 출토된 것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충북 제천 점말 동굴구석기시대 동굴 유적인 북 제천 점말 동굴은 조선계 석회암지대에 형성되었으며 용두산 동남향 사면 중간쯤의 병풍바위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충북 제천 점말 동굴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전기·중기·후기 구석기문화의 뚜렷한 3개의 문화층이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충북 제천 점말 동굴 유적에서는 털코뿔이·동굴곰·짧은꼬리 원숭이 등의 동물화석 20종과 석기·뼈연모·예술품 및 식물화석 등 풍부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석기·뼈연모·예술품 및 식물화석 등 풍부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던 충북 제천 점말 동굴은 2001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충북 단양 금굴
    인문/어학| 2026.06.29| 5페이지| 2,000원| 조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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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고려후기의 역사5
    고려후기의 역사5
    고려후기의 역사5고려와 원나라간의 관계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면서 항전을 하였다.그러나 오랜 몽고의 침입에 시달린 고려는 원나라와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를 하였다.고려는 원과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곧 새로운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고려의 항복을 얻은 원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병선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원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병선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는 가운데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단행되었다.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단행되었지만 원정은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다.일본 정벌을 위하여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이 실패한 뒤에 원과 고려와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원은 화주에 쌍성 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였다.1258년에 몽골의 별장이 동여진을 경유하여 장성 이남을 침공했는데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로 이동하였다.그러나 한양부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 등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 화주부사 김선보를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몽골에 투항했다.●쌍성총관부 설치몽골은 새로 점령한 이 지역을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는데 쌍성총관부가 설치된 이후 초대 총관으로 조휘가 임명되었고, 탁청은 천호에 임명되었다.이후 쌍성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증손 조소생이 이어받았고, 천호도 탁청의 후손이 세습하였다몽고가 설치한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가 관할하던 영역은 곧 회복되었으나, 쌍성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원의 지배 밑에 있었다.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와 왕실에서 쓰는 용어도 격을 낮추게 되었고, 여러 가지의 명목으로 물자를 징발당하여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고려와 원 사이에 문물이 교류되어 고려의 상류 계층에서 몽고어와 몽고식 의복 등이 유행하였다.고려의 상류 계층에서 몽고어와 몽고식 의복 등이 유행하는 가운데 원에서도 고려양이라 하여 고려식 생활 풍습이 유행하였다.●권문 세족무신 정변 이후 고려 사회의 지배층에는 변동이 일어났다.고려 초기 이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문벌 귀족들은 무신 정변을 계기로 몰락하였다.이러한 가운데 고려 후기에는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서 원나라와 결탁한 세력인 권문 세족들이 성장하였다.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와 결탁한 권문 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농장이었다.원나라와 결탁한 권문 세족들은 대농장을 경영하였는데 권문세족들의 농장 확대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는 가운데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원나라와 결탁한 권문 세족들은 관직을 차지하는 가운데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가운데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권문세족들은 친원적인 성격을 띤 보수 세력인데 보수세력인 이들은 새로운 개혁을 반대하였다.●농장의 확대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중심을 이루는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문벌 귀족들이 함부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의종시기에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에는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토지의 소유 현상이 더욱 심해져 전시과 제도는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몽고와의 항쟁이 끝나고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시기에 시작된 귀족들이 대토지 소유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권문 세족들은 토지를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급여받거나 개간에 의해 확대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강제로 차지하였다.권문세족들의 대농장 경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농민들은 권문 세족의 가혹한 수탈에 견딜 수 없어 가족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의탁하기도 하였다.권문세족들이 차지한 농장은 각종 조세와 역을 기피하였으므로 국가 재정의 궁핍을 가져오게 되었다.●고려 말 토지 제도고려말기에 이르러 토지 대장이 불분명하는 가운데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었다.이러한 가운데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토지인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시를 삼는 경우가 많았다.●공민왕의 개혁공민왕 시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권문 세족의 정치적, 경제적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신진 사대부들의 개혁 운동은 공민왕의 후원으로 본격화되었다.공민왕 시기에 이르러 원은 새로 일어난 명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공민왕은 이 틈을 타서 원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공민왕은 먼저 정동행성의 기능을 폐하여 원의 간섭을 물리쳤다.정동행성의 기능을 폐하여 원의 간섭을 물리쳤던 공민왕은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던 공민왕은 관제를 복구하고, 또 몽고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한 공민왕은 원나라와 결탁한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정동행성의 기능을 폐하여 원의 간섭을 물리쳤던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 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많은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노비를 해방시켰다.공민왕의 영토 수복과 과감한 개혁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공민왕의 개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크게 환영을 받았지만 친원 세력인 권문 세족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신진 사대부고려말에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 계층이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나고 있었다.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은 정치적 권력과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보수적 집권층이었다.정치적 권력과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보수적 집권층이었던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개혁 정치를 주장하는 신진 사대부 세력이 대두하였다.
    인문/어학| 2026.06.29| 5페이지| 2,000원| 조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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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강원도 삼척에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
    강원도 삼척에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
    강원도 삼척에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이승휴는 고려후기 우정언, 우사간, 전중시사 등을 역임한 인물인데 1224년에 태어났다.고종시기인 1224년에 태어난 이승휴는 충렬왕 시기인 1300년에 사망했다. 1252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몽고의 침략으로 삼척 두타산에서 농사를 짓고 지냈다.이승휴1224년에 출생1300년에 사망제왕운기를 저술몽고의 침략으로 삼척 두타산에서 농사를 짓고 지내던 이승휴는 이장용의 천거로 경흥부서기에 보임된 후 도병마녹사가 되었다.이장용의 천거로 경흥부서기에 보임된 후 도병마녹사가 되었던 이승휴는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에 대해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는데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에 대해 간언하다가 파직된 이후 강원도 삼척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서사시인데 운문체 역사서로서 당대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敍事詩)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 신진사류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드러낸 자주적 역사서라는 평에서부터, 유교사관을 내세워 원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를 합리화하는 운문체 역사서이다.제왕운기의 상권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였고 제왕운기의 하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하였다.이승휴는 삼척의 두타산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불서를 보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는데 고려사에는 이승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다.이승휴(李承休)는 자(字)가 휴휴(休休)이며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嘉利縣)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배움에 힘써서 고종(高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두타산(頭?山) 구동(龜洞)에 들어가 직접 밭갈이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지낸지 10여년 만에 안집사(安集使) 이심(李深)이 개경(開京)에 올라올 것을 힘써 권하였다. 〈뒤에〉 이장용(李藏用)과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에 임명되었다. 삼별초(三別抄)의 반란 때 반적(叛賊)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왕이 있는 곳에 오자 원종(元宗)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승휴가 이로 인하여 계책을 바치며 말하기를, “적이 반쯤 착량(窄梁)을 지날 때를 기다려, 정예(精銳)한 〈군사들〉을 보내 적선(賊船)을 가로질러 끊어버리고 강도(江都)를 굳세게 수비한다면, 앞선 자들은 세력이 약해질 것이고 뒤에 남는 자는 근거지를 잃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므로 적을 가히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양부(兩府)에서 의논하게 하였으나 우물쭈물하다가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군수품(軍須品)이 잘 공급되지 않아서 안팎으로 마구 징발하였으며, 토목공사[營繕]를 크게 일으켜 민(民)이 매우 고통스러워하자 이승휴가 글을 올려 그 폐단을 극론(極論)하였다. 후에 죄가 아닌 것으로 파직당하여 장차 고향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마침 왕이 순안공(順安公) 왕종(王悰)을 원(元)에 보내어 황후와 태자의 책봉을 하례하려는데, 양부에서 이승휴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승휴가〉 늙었다고 하며 사양하자 왕이 말하기를, “경오년(1270)에 그대의 이름을 벼룻집에 써놓은 것이 지금도 서안(書案) 위에 있으니 그대는 힘써 거행하시오!”라고 하며 백금(白金) 3근(斤)을 하사하여 보냈다.〈원〉 황제가 이미 하례를 받고 잔치를 베풀며 의복을 내렸는데, 이승휴가 글을 올리며 사례하니 문장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날마다 관반(館伴)인 한림학사(翰林學士) 후우현(侯友賢)과 함께 창화(唱和)하였는데, 후우현은 5세에 5경(經)을 통달하여 황제가 불러 학사(學士)로 삼고 신동(神童)이라 불렀던 사람으로, 이승휴의 시와 표문(表文)을 보고 마음으로 감복하여 번번이 그것을 외웠다.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쌀 30석(石)을 하사하였고, 그가 지은 시문(詩文)을 가져오게 하여 읽어보고 찬탄하였다. 왕이 훙서(薨逝)하자 다시 서장관으로 원에 가서 고애(告哀)하고 왕의 유언을 세자에게 전하였다. 이승휴가 생각하기를, “세자는 부마(駙馬)가 되어 군복[戎服]을 입고 일을 한 지 이미 오래인데, 복장을 예법에 맞추는 것이 스스로 결정하기가 어려운 형세이겠구나.”라고 하고, 드디어 세자에게 알려서 본국의 의관(衣冠)과 전례(典禮)의 시말(始末)을 황제에게 말씀드리도록 하였다. 황제가 승상(丞相)에게 칙서(?書)를 내려 이르기를,“경(卿)은 이미 작위를 이어 왕이 되었으므로, 〈경의〉 나라로 돌아가서 무릇 경의 조종(祖宗)이 제정한 제도를 조금도 없애지 말고 이전대로 행하시오.”라고 하였다.〈이승휴는〉 귀국하여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와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하였다. 왕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묻자, 이승휴가 15가지 일을 조목별로 올렸다. 여러 관직을 거쳐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고, 〈외직으로〉 나가 양광(楊廣)·충청(忠淸) 2도(道)의 안렴사(按廉使)로 파견되어 장리(贓吏) 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망과 비방이 자못 커져서 얼마 후에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자,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고 불렀다. 잠시 후에 불러들여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하자 10가지 일을 조목별로 늘어놓았으며, 또 상소(上?)를 올려 〈나라의〉 이해관계를 극론하였는데 왕의 뜻을 거역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구동(龜洞)의 옛 은거지(隱居地)로 돌아갔다. 따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불서(佛書)를 보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그렇게 산 지 10년 만에 충선왕(忠宣王)이 선위(禪位)를 받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내가 듣기로, 왕이란 어진 이를 구하는 데 부지런하고 사람을 얻어야 편안하다고 한다. 따라서 무릇 한 가지 능력이나 한 가지 재예(才藝)가 있는 자면 반드시 불러들이고자 하는데, 하물며 경과 같은 사람이랴? 글재주와 행정 능력이 있는데 그치지 않으니 지금 시대에는 드물고, 충성과 굳은 절개가 능히 왕의 마음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을 만하다. 때를 잘 만나지 못하여 대각(臺閣)에서 쫓겨나 시골[岩谷]에서 헛되이 늙어가고 있으니 내가 일찍이 이를 민망하게 여겼다. 지금 내가 덕망도 없이 외람되게 선위(禪位)를 받았으므로, 옛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며 만기(萬機)를 함께 다스리려고 한다. 안찰부사(按察副使) 유자우(庾自?)로 하여금 그대를 힘써 설득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나의 측근 자리를 비워둔 뜻을 잘 알아서 나이가 늙었다며 사양하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다시 그의 아들 권지교서랑(權知校書郞) 이임종(李林宗)에게 명령하여 아버지를 부축하여 개경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였다. 이승휴가 글을 올려 늙고 병들었다며 사양하자, 왕이 다시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과인(寡人)이 본디부터 경의 이름을 듣고 〈나라를〉 함께 다스릴 것을 생각하고, 이제 경을 사림시독 좌간의대부(詞林侍讀 左諫議大夫)로 임명하고 사관수찬관 지제고(史館修撰官 知制誥)로도 임명하니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일어나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이승휴가 〈개경에〉 도착하자 왕이 함께 이야기하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민간의 이해와 시정(時政)의 득실을 묻고 조용히 들으며 받아들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이승휴가 〈왕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 늙은 신하를 불러들인 까닭은 기묘한 계책을 내서 큰 공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숨김없이 직언(直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臣)이 어찌 남은 생애를 아까워하며 전하의 은혜를 홀로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때마침 원의 사신이 와서 〈왕을〉 힐책(詰責)하자, 왕이 묻기를, “선생을 부르자 마침 이러한 일이 생겼는데,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이승휴〉가 대답하기를, “난세(亂世)에서 시작하여 치세(治世)에 이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하늘이 혹시 전하(殿下)로 하여금 〈덕을〉 닦고 반성하게 하여 길이 태평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갑자기 판비서사 첨자정원사(判秘書事 僉資政院事)로 임명되자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나이 70세가 넘어서 현관(顯官)에 임명된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미천한 신하로 인하여 선왕(先王)의 제도를 고친다면 저의 죄가 큽니다. 은혜로운 명령을 거두어주시기를 요청하나이다.”라고 하자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생은 다른 사람과 견줄 바가 아니오.”라고 하며 관직에 오를 것을 독촉하므로 이승휴가 억지로 취임하였다. 겨우 10여 일이 지나자 다시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매우 간청하였다. 〈왕이〉 부득이 이를 따라서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 監察大夫 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충렬왕〉 26년(1300)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이승휴는〉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 구하는 바가 없었으나, 불법(佛法)을 몹시 좋아하였다.
    인문/어학| 2026.06.28| 5페이지| 2,000원| 조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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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풍수 사상과 문학
    고려시대의 풍수 사상과 문학●풍수 지리설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 풍수 지리설도 크게 성행을 하였다.민간에서 크게 성행을 하였던 풍수 지리설은 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 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이다.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 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인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고려 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지금의 평양인 서경은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지맥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뒤에 묘청에 의해 서경 천도 운동에 이용되기도 하였다.묘청을 비롯한 서경파 귀족들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도참설고려시대에는 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 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인 풍수지리설과 함께 도참 사상도 유행하였다.도참사상은 길흉 화복을 예언이나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신비적, 미신적 성격이 짙었다.길흉 화복을 예언이나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도참사상은 풍수 지리설과 결부되어 풍수 도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풍수 도참 사상은 정치, 사회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풍수 도참 사상은 특히 도읍지나 궁궐 터와 같은 중요한 터를 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려시대의 문학고려시대에는 신라에 비하여 문학부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신라에 비하여 문학부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가 점차 쇠퇴하였다.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가 점차 쇠퇴하였던 고려시대에는 향가대신에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고려 초기까지는 향가가 이어졌는데 고려초기에 지어진 균여전에는 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가 전하고 있다.고려초기에 지어진 균여전에는 향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다.우리 동방으로 말하자면 마사(摩詞)와 문칙(文則)과 체문(體文)이 공문을 개척한 우아한 시편이 있었고, 원효(元曉)와 박범(博凡)과 영상(靈爽)이 원음(圓音)을 본보기로 삼았다.혹 정수(定猷)와 신량(神亮)의 어진 분들이 한갓지고 다급한 시편(詩篇)을 남기었고, 순의(純義)와 대거(大居)의 준들이 우아한 시편을 지었으나, 모두 벽운(碧雲)으로 얽지 않음이 없지만, 그 맑은 시편을 맞볼 수 없으며, 백설(白雪)로써 묘한 소리를 전하여 들을만 하였다.그러나 시(詩)는 당나라 말로 얽음으로써 오언 칠구(五言七句)로서 탁마(琢磨)를 하고, 가(歌)는 우리말로써 배열하여 삼구(三句)과 육명(六名)으로써 가다듬는다.어성(語聲)을 논하면 어긋나기 삼성(參星)과 상성(商星)과 같아서 동서를 분별하기 쉽고, 이치를 의논하면 적대하기 창과 방패 같아서 강약을 가리기 어렵다. 비록 사봉(詞鋒)을 마주 드날렸으나, 족히 한 가지 의해(義海)로 돌아갈 줄 알았고, 저마다 제자리를 얻은 것이니 내 어찌 좋다고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재자(才子)와 명공(名公)들은 당나라 글귀는 읊을 줄을 알지만, 저 땅의 거유(巨儒)와 대덕(大德)이라도 우리 노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당나라 글은 제망(帝網)과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읽기 쉽지만, 우리 글을 마치 범서(梵書)로 연철한 것 같아서 저 땅에서는 알기 어렵다. (중략) 대저 이와 같으므로 팔구행의 당문(唐文)으로 서(序)한 것은 뜻이 넓고 글이 풍부하지만, 11수의 노래는 사(詞)가 맑고 구(句)가 곱다. 그 지은 바를 일컬어 사뇌(詞腦)라 한다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 중에서 예경제불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ㅁㆍㅿㆍㅁㆎ 부드루ㄱㅡㄹㅣㅅㆍㄹㅸㅡㄴ 부텨 前에저ㅥㅜ온 모ㅁㆍㄴ法界 ㅁㆍㅅㄷㆍ록 니르가라塵塵마락 부텻 刹이刹刹마다 뫼시리ㅅㆍㄹㅸㅡㄴ法界 ㅊㆍ샨 부텨九世 다아 禮ㅎㆍㅅㆍㄼ져아으 身語意業 无疲厭ㅇㅣㅇㅔ 브즐 ㅅㆍㅁㆍㅅㄷㅏㄹㅏ마음의 붓으로그리는 부처 앞에절하는 몸은法界 두루 이르거라티끌 티끌마다 부처의 절이요절 절마다 둘러 모시는法界에 가득 차신 부처九世 다하여 禮敬하련다아아 身 語 意業에 지치거나 滿足함 없이이에 부지런히 삼으리라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 중에서 예칭찬여래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ㄴㆍㄹ 주비ㄷㆍㄹㆎ南无佛이여 ㅅㆍㄹㅸㅡㄴ손 혀아ㅇㆎ无尺辯才ㅅ 바ㄷㆍㄹ一念악ㅎㆎ 솟나가라塵塵虛物ㅅ ㅁㅚㅅㅣㄹㅣㅅㆍㄹㅸㆍㄴ功德ㅅ身ㅇㅡㄹ 對ㅎㆍㅅㆍㄼ디ㄱㆍㅿ ㅇㅓㅂㄴㅡㄴ 德ㅂㅏㄹㆍㄹㅎㆍㄹ西王ㄷㆍㄹㄹㅜ ㄱㅣㄹㅣㅅㆍㄼ져아으 비록 一毛ㅅ 德두몯ㄷㆍㄹ 다아 ㅅㆍㄹㅸㅗ뇌오늘 모든 무리가南无佛이여 사뢰는 혀에无尺辯才의 바다一念에 솟아나거라티끌 티끌의 虛物에 드리우신功德의 몸을 對하시어끝없는 德의 바다를부처로서 기릴 것이로다아아 비록 한 터럭 德도못 다 아뢰나이다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 중에서 광수공양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문/어학| 2026.06.11| 5페이지| 2,000원| 조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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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독립협회와 독립신문●독립협회1896년 7월 설립된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에는 개화파에 속하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와 윤치호 등이 주도했다.개화파에 속하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와 윤치호 등이 주도했던 독립협회의 창립에는 이완용과 안경수 등 정부 고위관료도 참가했다.독립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미국으로 망명했다.독립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서재필이상재윤치호이완용안경수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는 가운데 미국에서 국내로 귀국해 1896년 4월에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는 가운데 미국에서 국내로 귀국해 1896년 4월에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내걸고 독립협회를 창설했다.●독립협회의 활동서재필이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단체인 독립협회의 활동은 자주국권을 비롯하여 자유민권과 자강개혁 등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는 외세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가운데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국권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는 민중의 힘으로 외세의 내정간섭을 배격하기 위해 1898년 3월 대중집회 형식의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군사교련단과 재정고문단을 철수시켰다.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는 개인의 생존권과 재산의 자유권, 국민의 평등권 등 자유민권을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민 참정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헌의6조의 제4조에서 ‘중대 범죄를 공개 재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쟁취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외세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가운데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국권을 지킬 것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는 또한 자강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서구식 의회의 설치를 제안했다.자강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서구식 의회의 설치를 제안했던 독립협회는 1898년 11월 관선 25명, 민선 25명으로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했다.서구식 의회의 설치를 제안했던 독립협회의 주장은 시장 개방과 이권 양여를 통한 열강의 세력 균형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지키겠다는 ‘보호중립론’의 한계를 지녔다.말로는 국민 참정권을 외쳤지만, 이들이 주장한 중추원의 개편방향을 보면 조선 민중의 정치적 무능력을 전제로 개명(開明) 관료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데 치중했다.민중의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 보니,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는데도 실패했다.당시 수구파들은 1898년 가을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는데 이것이 익명서(匿名書) 사건이다.이 보고는 뒷날 무고로 판명됐지만,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명령을 내리고 이상재 남궁억(南宮檍) 등 17명을 구속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11월 9일부터 익명서 사건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헌의6조 실시 등을 요구하며 경복궁 앞에서 상소운동 등 정치투쟁에 나섰다.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수천 명의 보부상을 서울로 끌어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황국협회의 방해활동이 꾸준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독립협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독립협회는 1896년 7월(고종 33)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로, 출범 이후 자주독립, 자강개혁, 자유민권 등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1896년 아관파천 이후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학적 사회단체인 독립협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와 남궁억등은 개신 유학자들을 포함, 이상재의 타협과 조정으로 1896년 7월 이 단체를 조직했다.독립협회는 초기에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성격으로 출발했다.협회는 출범 이후 자주독립, 자강개혁, 자유민권 등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활동을 전개했으며, 외세 의존과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국난 극복과 민권신장 및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했다.또 독립문과 독립관 등의 독립 기념물을 건립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다.독립관 등의 독립 기념물을 건립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던 독립협회는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하여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민중을 계도하였다.●만민공동회 개최독립관 등의 독립 기념물을 건립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던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등을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발표하는 등 민중의 정치참여를 도모하였다.이후 1898년에는 정부 대신들까지 참여한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정 개혁안인 '헌의 6조'를 결의하고 고종의 승낙을 받아내기도 했다. 여기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서구식 의회를 설립하려고 시도했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 세력들은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종은 보수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해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군대를 투입하여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독립신문은 급진 개화파 서재필이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돌아와서 창간한 신문이다.서재필은 신문을 통해서 정치개혁과 구습 타파를 외치면서 국민을 계도했고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국가 홍보를 담당했다.한글 전용과 구독료를 싸게 책정하여 신문의 대중화를 촉진하면서 정부의 잘못과 관리들의 무능 부패를 비판하고 외세 침탈에 저항하는 언론의 전통을 세우는 기초를 닦았다.●민간신문인 독립신문독립신문은 개화운동의 선각자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이다.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가 폐간된 이후에는 주간으로 발행된 한성주보가 그 뒤를 이었다.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관보로서 발행이 되었다.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민간인이 발행한 최초의 신문인데 민간인이 발행한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은 내용과 운영방식에서 한성 순보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인문/어학| 2026.06.11| 5페이지| 2,000원| 조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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