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이모 저모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이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었고, 평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을 이루었다.고려시대에 농민은 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였다.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였던 고려시대 농민은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졌다.고려는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고,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도 갖추었다.고려 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와 유교 의식, 토속적인 풍속이 있었다●고려시대 농민의 생활고려시대에 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던 고려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생산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조세, 공납, 역에 대한 농민의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이다.고려시대의 농민은, 사유지인 민전에 있어서도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로 부담하고 있었다.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로 부담하였던 농민은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였다.농민은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는 가운데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거둬들이는 일도 있었다.이외에 농민들은 권세가들에게 의해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자기의 사유지를 잃고 남의 토지만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떨어지거나 농지를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고려시대의 상공업고려시대의 경제 생활은 농업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의 형태였으므로, 화폐의 유통은 부진하였다.고려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고려시대에는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로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 생산된 수공업품으로는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장신구, 직물, 종이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졌는데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는 가운데 개경을 비롯한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국내의 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졌다.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지는 가운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는 송, 왜 및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가 자주 드나들었다.●고려시대의 화폐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도 만들어졌다.최초로 화폐가 주조된 것은 성종시기인데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성종 때에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한 후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었다.이후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는 가운데 곡물이나 삼베가 교환 수단으로 쓰여졌다.고려시대에 화폐의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주로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적인 경제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려 시대의 사회 시설고려시대에는 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고려 사회는 이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을 비롯하여 상평창 ,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다.의창은 곡식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인데 의창에서는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상평창에서는 곡식이 쌀 때에 사 두었다가 비쌀 때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였다.●고려시대의 보고려시대의 보는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을 말하는데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을 말하는 보에는 학보를 비롯하여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고려시대의 보 중에서 제위보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제위보는 빈민과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고려 시대에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제위포라고도 부른다.보는 원래 일정한 기금을 모아 그것을 늘려 감으로써 사업을 운영하는 일종의 공공단체였다. 제위보는 963년에 설치되어 잉여 곡식이나 돈을 비축했다가 대출해주어, 그 변리를 가난한 사람이나 의지할 데 없는 나그네를 구호하고 질병을 치료해 주는 데에 사용하였다.문종대에 직제를 정비하여 부사(副使) 1명(7품 이상), 녹사 1명을 두었고, 뒤에 사(使) 1명을 추가하였다. 중기 이후로 그 기능이 약화되고 1391년에 폐지되었다● 혜민국과 대비원고려시대에는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치료와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대비원은 고려 때 의료를 주로 한 구제 기관인데 설치 연대는 알 수 없다.고려 문종 시기에 개경의 동·서에 두어서 동쪽의 것을 동대비원, 서쪽의 것을 서대비원이라 하였고, 이들을 동서대비원이라 합칭했다.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인 대비원은 환자의 치료를 주요 업무로 하고, 굶주리고 헐벗어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나 의지할 곳 없는 몹시 궁핍하고 외로운 사람을 수용하였다.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인 대비원은 조선 태종 14년에는 활인원으로 개칭되어 이어졌다대비원 이외에 고려시대에는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혜민국은 고려 시대의 시약을 맡은 의료 및 구제기관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백성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 곳이었다. 충선왕 때 사의서 관할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년) 혜민전약국으로 개칭하였다.혜민국에는 판관 4명을 두었는데, 본업(本業)과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아치를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케 하였다.본업(本業)과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아치를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케 하였던 혜민국은 조선 개국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고려시대의 풍속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행사의 주요 내용은 불교적인 것이 많았다.그려시대의 대표적인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것인데 연등회와 같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불교 의식이었다.고려시대에는 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채택을 하였다.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한 고려 사회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나 상례 등을 장려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의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조선후기의 문학과 예술조선 후기에는 문화의 모든 분야가 새롭게 변화해 가는 추세에 맞추어 그림·건축·글씨 등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문화의 모든 분야가 새롭게 변화해 가는 추세에 맞추어 그림·건축·글씨 등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던 조선후기의 그림에서는 17세기 인조 대에 궁정화원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이징의 그림이 정교하면서도 격식을 탈피하여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필치로 인물과 산수를 그려내어 충격을 주었다.궁정화원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이징은 달마와 같은 선승과 신선을 주로 그렸는데 17세기 초의 이단 사상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화단의 이단이었으며, 명나라 저장 지방 화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그러다가 17세기 말 이후로 청초 남종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반청감정을 가진 중국 남방인들의 남종화가 역시 반청북벌 사상에 젖어 있던 한양문인들에게 호소력을 준 까닭이었다.18세기의 영·정 시대에 들어가면 남종 문인화를 한민족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추어 토착화하는 또 다른 화풍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진경산수(眞景山水)’이다.진경산수의 등장은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의궤와 국방 지도 제작에 화원들이 참가하여 한국의 산수를 그려 넣는 과정에서 개성 있는 화풍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가는 정선이다.정선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가18세기 중엽에 천기·진기주의 문학을 강조하던 김창업, 김창협, 김창흡의 후원은 받은 영조대의 정선이 진경산수의 대가로 등장하게 되었다.양반 출신으로서 화원이 된 정선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한양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날카로운 바위산은 선묘로, 부드러운 흙산은 묵묘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정선의 대표작에는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금강전도와 통천문암도가 있다.정선의 대표작인왕제색도금강전도통천문암도●김홍도와 신윤복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 경지를 열어놓은 화원은 정조 때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는 현감을 지낸 양반이었으나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김홍도는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병풍, 행렬도, 의궤 등 궁중 풍속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기록화의 의미를 지닌 까닭에 활발하고 간결한 필치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를 더 필요로 하였다.신윤복은 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은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1대손이며, 아버지 신한평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다.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은 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고루 잘 그렸으나,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특히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모두 잘 그린 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은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화법을 일부 수용하되,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의 대표작으로는 여속도첩과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있다.여속도첩에는 조선 후기 기녀와 아낙이 여섯 폭에 나누어 표현되어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은 총 30면으로 구성된 풍속화첩으로, 당시 시정인의 유흥과 남녀 간의 춘정, 도시에서 호사스러운 생활과 향락을 즐긴 왈짜의 행태가 표현되었다.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모두 잘 그린 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은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하여 도시 풍정의 세련되고 감각적 분위기를 표현했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조선후기에는 서민문화가 발달을 하는 가운데 한글 소설이 크게 유행을 하였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한글 소설로는 흥부전을 비롯하여 심청전과 춘향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등이 있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한글 소설인 흥부전, 심청전과 춘향전은 모두 판소리로도 각색이 되었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흥부전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놀부네 갔던 흥부가 몽둥이로 실컷 맞고 돌아오니 그것을 본 흥부 마누라, 바깥으로 뛰어나가선 덜컥 주저앉으며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시 때렸을까.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 잘 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판소리로도 각색이 되었던 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춘향전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사또께 아뢰리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사또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도적에게 굴복하여 두 임금을 섬기리이까?소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열녀의 마음을 따를 것이오니, 길을 헤아려 처분하옵소서.남원의 기생인 춘향은 자신의 지조를 밝히면서사또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사또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도적에게 굴복하여 두 임금을 섬기리이까라고 하였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흥부전에서 놀부는 장손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나온다.장자에게 제사의 책임을 맡기고, 그에 따라 차남이나 딸들과 재산 상속에서 차별을 두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한글 보급의 확대세종시기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한글은 창제 이후 조선후기에는 서서히 확산이 되었는데 18세기 들어 급격히 서민들에게 전파됐다.조선시대의 문학은 한글을 자발적으로 익히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조선시대에는 가사문학 등이 발달하면서 한글의 운율과 리듬을 발전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문학이 풍성해 진 것도 한글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근대의 민족운동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의 민족 수난기이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국채보상운동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부터 1908년 7월까지 국채를 국민적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기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는 영남지방 상인들의 인식에서 시작되었다.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가 되었다.나라를 구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 중 의병전쟁은 구국을 위해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했던 무력투쟁이었다.의병전쟁이 구국을 위해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했던 무력투쟁이었던 반면에 애국계몽운동은 구국을 위해 신교육구국운동과 산업진흥운동, 그리고 국민계몽운동으로 전개된 문명개화운동이었다.애국계몽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교육과 산업, 그리고 국민계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경제·문화운동이었다.지방도시인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이었다.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열기도 매우 높았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참여는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물산 장려 운동조선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물산장려 운동을 추진한 기구는 조선물산장려회였다.조선물산장려회의 의사결정 기구는 지방대의원대회 · 총회 · 이사회로 구성되었다. 지방대의원대회는 본회와 지회 간의 활동 방안을 심의 · 결정하는 기구였고, 총회는 1년에 한 번 개최되어 주요 사업과 활동 방침을 논의 · 결정하였다. 이사회는 사업 전반을 집행하였는데, 산하에 경리부 · 조사부 · 선전부를 두었다.조선물산장려회는 사업의 확대를 위해 주요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조선물산장려회 지회규정에 따라 ‘거주하는 회원인 30인 이상’일 경우 지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1922년 12월 경상남도 진주의 자작회 발기회를 시작으로 북부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지회가 설립되었다.지역 물산장려운동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지역 청년 단체 그리고 기독교 청년 단체와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지방 지회들은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고, 조선물산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소비조합을 설립하고자 하였다.조선물산장려회의 대표적인 사업은 선전 활동이었다. 선전의 방법은 선전 행렬 · 강연회 · 가정선전반 조직 등 다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음력 정월 1일 회원들이 모여 서울 시내에서 실행한 선전 행렬이었다.●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가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가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를 비롯하여 신간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이상재와 홍범도, 김좌진,여운형, 김규식, 이상설등이 있다.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김좌진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던 인물이고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을하였던 인물이다.이상설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이 되었다가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일제강점기에 의거를 일으켰던 인물로는 안중근과 윤봉길, 이봉창등이 있다.●김구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데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다.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간 김구는 중국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주석으로 활약을 하였다.중국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주석으로 활약을 하였던 김구는 8 · 15 광복 후에는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8 · 15 광복 후에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김구는 1949년에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김구가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쓴 일기가 백범일지이다.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고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백범일지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 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1947년 국사원에서 백범일지를 출판할 때 춘원 이광수가 윤문을 하였는데, 김구가 쓴 백범일지의 서문을 참조하여 부록으로 첨가하였다.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 있는 나의 소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고려의 대외관계고려는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가운데 문화·경제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이외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고 금나라와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 외교와 무역을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금나라 등 북방 세력과는 군사적 충돌과 외교적 협상을 병행하며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였다.고려를 세운 왕건을 후세의 왕들에게 조언한 훈요십조에서 거란과는 적대관계를 가질 것을 분명히 하였다.이러한 가운데 거란은 고려의 성종과 현종시기에 고려를 침입하였다.●고려와 송나라고려는 개방적 정책을 통해 송나라와 활발한 외교와 문화 교류를 추진하였다. 송나라를 "문화의 중심국"으로 인정하고 사신을 파견하며 유교·불교 경전, 의학서, 농서, 공예 기술 등을 수입하였다.고려는 금, 은, 인삼, 직물, 청자 등을 송나라로 수출하였다.송나라와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였다. 당시 벽란도에는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활발하게 왕래를 하였다.송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는 고려의 학문, 종교,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거란이 세운 국가인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몽고 지역을 장악한 후 고려와 국경 문제로 충돌하였다.고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요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거란이 침입하는 가운데 993년 서희의 외교로 제1차 침입을 막고 강동 6주를 확보하였으며, 이후 요의 성종이 개경을 공격했을 때 현종은 볼모를 보내고 친조를 약속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거란이 마지막 침입인 3차 침입때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통해 요의 군사적 위협을 종식시키며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고려와 금나라고려는 초기에는 금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금나라와 초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려는 금이 요를 멸망시킨 후 외교적 긴장이 발생하였다.고려는 금의 압력 속에서도 북방 영토를 방어하고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고려는 숙종과 예종시기에 여진정벌을 단행을 하였는데 당시 여진정벌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은 윤관이다.여진정벌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인 윤관 여진정벌을 위하여 별무반을 조직하였는데 여진정벌을 위하여 조직된 별무반은 신기군과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이 되었다.별무반의 구성신기군신보군항마군●고려와 일본고려는 몽고에 항복을 한 이후 원의 강요로 일본 원정을 두 차례 수행하였다.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하여 추진된 일본정벌은 바다에 심한 폭풍우가 일면서 실패를 하였다.고려말에는 국력이 쇄약해진 틈을 타서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국력이 쇄약해진 틈을 타서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최영과 이성계등은 왜구를 토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거란의 침입고려는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아 세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고려와 거란간의 전쟁은 993년에 1차 전쟁이 있은 후 1010년에 2차 전쟁이 있었고 1019년에 3차 전쟁이 있었다.거란은 요나라를 세운후에 고려를 침입하였는데 2차 침입때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면서 고려를 위협하였다.거란의 1차 침입때에는 서희가 외교담판을 벌여 압록강 남쪽에 있던 강동6주를 획득하였다.강동육주는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있던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이다.이 지역에는 고려가 건국될 당시 서북면의 압록강 유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993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고려왕의 입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철수하였다.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점유권을 인정받았다.이후 고려는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6개 고을을 설치하였다. 거란은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며 두 차례 침략하였으나 고려는 양규와 강감찬의 활약으로 북방 영토를 지켰다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거란과 고려의 3차에 걸친 전쟁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의 침입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하면서 마무리가 되었다.1010년(현종 1년)에 요나라는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요 성종이 직접 침입하였다.거란의 3차 침입때에는 강감찬이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거란의 1차 침입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은 거란의 침입을 야기하게 되었는데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것을 견제하면서 고려를 침입하였다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 때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송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편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려로 하는 가운데 고구려를 잇고자 했다.고려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은 거란을 자극했는데 압록강 유역에 살고 있던 거란은 고려가 송과 군사 동맹을 맺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려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척 경계했는데 거란이 고려와 친해지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굶겨 죽였다.성종 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는데 대신들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 주자고 했다.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외교가였던 서희는 적진으로 들어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지었다.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외교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진만 물리치면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설득했다.소손녕은 서희의 말을 들어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의 땅을 개척하여 강동 6주를 세웠다.
백제와 고려의 문화재●백제금동대향로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이 되었다.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다.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도교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백제금동대향로는 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는 가운데 독창적인 조형으로 백제 문화와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이 밖에 백제금동대향로에는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경기 파주 용미리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이다.경기 파주 용미리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천연 암벽을 몸체로 삼아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2구의 대형 석불이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용미리에 있는 마애이불입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고려 시대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8, 9번지에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가운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은 것은 경상북도 경산에 있는 갓바위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가 있다.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가운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하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불성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인데 오른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왼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은 합장한 손 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서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얽힌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 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 설화가 있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안에 위치한 고려 시대에 제작된 탑으로, 8각의 기단 위에 9층 탑신이 올라가 있는 다각 다층 석탑이다.지붕돌의 여덟 귀퉁이 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매달려 있고, 지붕돌 위에는 금동 머리 장식이 얹혀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국보 48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8-8, 월정사에 위치하고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이다.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창건한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 탑신을 올린 뒤,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 주도록 하였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불상을 모셔 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고려의 대표적인 석탑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개성 현화사 7층 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 있다.고려시대 석탑은 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다.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던 고려시대 석탑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층수가 많고 높이가 높은 탑이 특징이다.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던 고려시대 석탑은 일반적으로 5층, 7층, 9층 탑이 많이 세워졌다.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으로 짝수 층과 화려한 장식을 갖춘 탑도 등장했다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과 불일사 오층석탑이 있다.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며, 불일사 오층석탑은 고려전기의 석탑의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과 불일사 오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불교와 문화적 풍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