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자료 2,828
검색어 입력폼
  • 판매자 표지 총독부 기관지
    총독부 기관지
    총독부 기관지총독부 기관지에는 경성일보를 비롯하여 매일신보·서울 프레스가 있다.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이후 총독부는 한국어로 된 매일신보와 일어로 된 경성일보가 있고 영어로 된 기관지인 The Seoul Press등 3개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였다.총독부 기관지는 일제 강점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매일신보는 1938년에 독립된 주식회사로 분사할 때까지 경성일보에 통합되어 일본인 사장이 경영했다.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행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행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었다.경성일보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이후 패망한 후에도 1945년까지 일어로 발행되었다.●총독부 기관지한일 강제합병 후 조선총독부는 3개 언어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조선총독부가 발행한 3개 언어의 기관지는 일어로 된 신문인 경성일보와 한국어로된 신문인 매일신보가 있고 이어서 영어로된 신문인 서울 프레스를 발행했다.일어로 된 신문인 경성일보와 한국어로된 신문인 매일신보, 영어로된 신문인 서울 프레스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별개의 신문사로 창간 운영되다가 합방 후에는 통합과 분리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선전, 홍보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기사를 실었다.일어로 된 신문인 경성일보와 한국어로된 신문인 매일신보, 영어로된 신문인 서울 프레스는 한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한일합방 직전에 일제는 한말 최대의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여 합방 직후에는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고 기존의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에 통합하여 두 신문을 함께 관리했다.일제 강점기에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차지하는 위상은 막강했다.●경성일보에 통합된 매일신보경성일보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1906년에 창간이 되었다.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1906년에 창간된 경성일보는 일본어 신문인데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는 통감 시대에 창간되어 총독부를 거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약 4개월간 발행되었다.통감 시대에 창간되어 총독부를 거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약 4개월간 발행되었던 경성일보는 1945년 12월 10일에야 폐간되었다.통감 시대에 창간되어 총독부를 거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약 4개월간 발행되었던 경성일보는 40년 가까운 기간 한국 침략과 식민지 통치를 선전 홍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1906년 창간 당시에는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2종을 함께 발행했는데 한글판을 구독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한글판 발행을 중단하는 대신 일어판에 총력을 기울였다.한일 강제합방 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의 언론계를 식민지 통치에 유리하도록 활용할 대책을 강구한 끝에 '신문통일정책'을 폈다.경성일보에서는 한·일 두 개 언어의 신문을 발행하였다.●매일신보의 변신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이 창간을 하였다.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이 창간한 매일신보는 항일 민족지였으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이후 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에 통합되어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이 매일신보의 편집을 총괄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1910년대 무단정치 기간에 매일신보는 유일한 조선어 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무단정치 기간에 매일신보는 유일한 조선어 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렸지만 1920년에 민족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가 등장하여 독자들의 호응이 높아지게 되었다.이러한 가운데 무단정치 기간에 독점적 지위를 누렸던 매일신문은 민간지와 경쟁하는 입장이 되었다.매일신보는 중요한 시사문제에 관해서 민간지와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중요한 시사문제에 관해서 민간지와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매일신보는 민간지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도쿠토미는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 경성일보 사옥을 지어 1914년 11월에 입주했다.서울의 심장부인 현 서울시청과 그 뒤편에 위치한 20층 건물 프레스센터는 일본 언론 침략의 본산이 서 있던 자리였다.1920년대 이후에 경성일보는 정치적 비중이 컸는데 총독부로부터 관보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받으면서 활동을 했다.●매일신보의 독립1938년 4월부터 매일신보는 독립된 주식회사가 되었다.매일신보는 독립된 주식회사가 된 후 경성일보에서 분사하여 경성일보와 별개의 신문사로 운영되었다.매일신보가 독립된 주식회사가 된 후 경성일보에서 분사하여 경성일보와 별개의 신문사로 운영되는 가운데 후 사장은 최린이 맡았다.최린은 3·1운동 후 3년 간 복역한 뒤 천도교 교령에 추대되어 교세 확장에 힘썼으나 1934년 친일로 기울어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최린의 후임으로 매일신보의 마지막 사장은 충남 도지사를 지낸 이성근이 맡았다.매일신보의 마지막 사장인 이성근은 1941년 6월 16일에 취임했다.●매일신보의 자매지 발간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주간신문과 잡지 등의 자매지를 발행했다.주간신문과 잡지 등의 자매지를 발행했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발행한 자매지로는 월간매신을 비롯하여 국민신보와 매일신보사진특보, 경일소학생신문등이 있다.경성일보는 경일소학생신문 외에도 연성화보, 조선연감과 여러 종류의 단행본도 발간했다.●서울 프레스의 대외홍보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는 1905년 6월 3일 영국인 존 위클리 하지가 창간했는데 영국인 존 위클리 하지는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를 일주일에 한번씩 발간이 되는 주간신문으로 창간했다.1905년 6월 3일 영국인 존 위클리 하지가 창간했던 서울 프레스는 이듬해 12월에 통감부가 매수하여 일간으로 발전시켰다.통감부가 매수하여 일간으로 발전시킨 후에는 1937년 5월까지 발행되었다.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배설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자매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와 호머 헐버트의 월간지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의 항일언론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침략정책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영어신문 발행을 계획했다.
    인문/어학| 2026.08.12| 5페이지| 2,000원| 조회(2)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중국의 근대 시대
    중국의 근대 시대
    중국의 근대 시대중국의 근대 시대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말한다.명나라는 원나라에 이어 등장한 한족이 세운 국가이고 청나라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중국의 지배한 왕조로 만주족들이 세운 국가이다.명나라의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은 청나라 시대에는 지정은제도로 발전을 하게 된다.지정은제 청나라 때 시행된 조세제도로, 정세 를 지세에 합쳐 지세만 납부하게 한 은본위제 조세제도이다.명나라의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은 정세와 지세를 합하여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은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지정은제를 시행하기 전에 청나라는 지세와 정세 모두를 징수하는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을 따랐다.청나라는 초기에는 지세와 정세 모두를 징수하는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을 따랐지만 호구조사의 부정확과 탈세를 위한 인구수 은닉이 행해지며 정세 부과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호구조사의 부정확과 탈세를 위한 인구수 은닉이 행해지며 정세 부과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가운데 청나라의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수를 기준으로 하고 그 이후의 조사로 증가한 인구에 대해서는 정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지정은제는 지세와 정세를 통합하는 동시에 조세를 은으로 납부하는 제도였는데 지정은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세금을 은으로 냈기 때문에 세금을 내기 위한 은 수요가 증대하였다.1800년대 초기에 중국에 밀수된 아편으로 인하여 유출된 은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인 지정은제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ㅇ르 하였다.●만주족이 중국에 세운 국가인 청나라청나라는 만주지역에서 생활하던 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에 세운 국가이다.만주족이 중국에 세운 국가인 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전통왕조이다.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로, 17세기 초에 시작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할 때까지 중국을 지배한 제국이다.만주족 정복왕조인 청나라는 한족 왕조였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한 뒤, 다민족 제국을 형성했습니다.1616년 후금에서 시작한 청나라는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하였다.후금에서 시작한 청나라는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중국의 통일 왕조로 자리잡았는데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중화민국이 수립이 되면서 청나라는 멸망을 했다.1644년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중국의 통일 왕조로 자리잡았던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 3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전성기로 본다.강희·옹정·건륭 3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보통 강건성세라고 한다.강건성세강희·옹정·건륭제 시대청나라의 전성기강희·옹정·건륭제 시대에 청나라는 영토가 유라시아 동부 전역으로 크게 확장되었습니다.역사상 네 번째로 큰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수억 인구를 지배했다.광대한 영토와 수억 인구를 지배했던 청나라는 몽골, 티베트, 만주, 한족 지역을 포함한 다민족·다지역 제국으로 여러 조공국을 거느렸다.몽골, 티베트, 만주, 한족 지역을 포함한 다민족·다지역 제국으로 여러 조공국을 거느렸던 청나라는 19세기 이후 아편전쟁, 불평등 조약,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청나라는 신해혁명을 계기로 멸망을 하였는데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시작된 신해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청나라는 멸망을 하였다.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인 동시에 근대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지막 왕조이다.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인 청나라는 1636년에 건국되었는데 건국이후 통일국가를 수립하면서 1644년부터 1912년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 대륙을 통치하였다.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인 청나라는 만주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에 의하여 세워졌다.만주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가문 인물인 누르하치는 북원의 옥새를 발견하여 몽골족들을 만주족 군인에 편입시켰다.북원의 옥새를 발견하여 몽골족들을 만주족 군인에 편입시킨 누르하치는 만주족과 몽골족을 포괄하는 군대인 팔기군을 창설하였다.팔기군만주족과 몽골족을 포괄하는 군대만주팔기몽고팔기한군팔기만주족과 몽골족을 포괄하는 군대인 팔기군은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누르하치는 만주족과 몽골족을 포괄하는 군대인 팔기군을 창설한 뒤 분열되어 있던 만주족들을 통일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였다.팔기군은 청나라 팔기제에 포함된 군사조직으로, 8개의 깃발 체계를 기준으로 편성·운용된 군단이다.8개의 깃발 체계를 기준으로 편성·운용된 군단인 팔기군은 초기에는 만주족 중심이었으나 이후 몽골·한족 병력이 편입되며 만주팔기·몽고팔기·한군팔기 등으로 확장되었다.만주팔기·몽고팔기·한군팔기 등으로 확장되었던 팔기군은 19세기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1616년에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는 명나라 군대를 랴오둥반도에서 물리치고 1636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다.1636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던 홍타이지는 청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8남으로 태어났으며 이후 후계자가 되어 후금의 제2대 군주로 즉위했다.첫째가 아닌데도 후계자가 된 것은 홍타이지의 모후가 당시 해서여진 예허부의 수장 양기누의 딸이었기 때문에 혈통이 좋았기 때문이다.부황인 누르하치는 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집안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예허부의 명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처로 예허부의 공주를 맞아들였다.누르하치의 장남 추연은 예허부 공주와의 결혼에 반대했고, 이후 다른 사건으로 숙청당했다.누르하치의 장남 추연아 숙청당한 후 홍타이지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되었다명나라가 갈수록 국력이 쇠하고 멸망의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이자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는 망하고 만주족이 중국의 주인공이 되었다.● 베이징의 함락명나라 말엽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1644년에는 명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였다.1644년에 명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였던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이후 청나라 군대는 만주족 군사들을 이끌고 베이징를 점령하여 명나라 한족 귀족들을 랴오둥 반도의 후금으로 끌고 갔다.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군대는 팔기군이었다.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군대는 빠르게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황제를 사로잡았고 명나라의 황후를 포함 많은 한족 여성들을 사로잡아 후금의 수도 심양에 끌고가 노비로 삼았다.●청나라와 대립한 명나라중심도시인 베이징을 잃은 명나라는 수도를 다시 난징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대립하였다.
    인문/어학| 2026.08.12| 5페이지| 2,000원| 조회(3)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고려시대의 이모 저모
    고려시대의 이모 저모
    고려시대의 이모 저모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이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었고, 평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을 이루었다.고려시대에 농민은 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였다.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였던 고려시대 농민은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졌다.고려는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고,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도 갖추었다.고려 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와 유교 의식, 토속적인 풍속이 있었다●고려시대 농민의 생활고려시대에 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던 고려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생산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조세, 공납, 역에 대한 농민의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이다.고려시대의 농민은, 사유지인 민전에 있어서도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로 부담하고 있었다.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로 부담하였던 농민은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였다.농민은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는 가운데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거둬들이는 일도 있었다.이외에 농민들은 권세가들에게 의해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자기의 사유지를 잃고 남의 토지만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떨어지거나 농지를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고려시대의 상공업고려시대의 경제 생활은 농업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의 형태였으므로, 화폐의 유통은 부진하였다.고려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고려시대에는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로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 생산된 수공업품으로는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장신구, 직물, 종이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졌는데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는 가운데 개경을 비롯한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국내의 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졌다.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지는 가운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는 송, 왜 및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가 자주 드나들었다.●고려시대의 화폐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도 만들어졌다.최초로 화폐가 주조된 것은 성종시기인데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성종 때에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한 후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었다.이후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는 가운데 곡물이나 삼베가 교환 수단으로 쓰여졌다.고려시대에 화폐의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주로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적인 경제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려 시대의 사회 시설고려시대에는 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고려 사회는 이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을 비롯하여 상평창 ,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다.의창은 곡식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인데 의창에서는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상평창에서는 곡식이 쌀 때에 사 두었다가 비쌀 때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였다.●고려시대의 보고려시대의 보는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을 말하는데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을 말하는 보에는 학보를 비롯하여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고려시대의 보 중에서 제위보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제위보는 빈민과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고려 시대에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제위포라고도 부른다.보는 원래 일정한 기금을 모아 그것을 늘려 감으로써 사업을 운영하는 일종의 공공단체였다. 제위보는 963년에 설치되어 잉여 곡식이나 돈을 비축했다가 대출해주어, 그 변리를 가난한 사람이나 의지할 데 없는 나그네를 구호하고 질병을 치료해 주는 데에 사용하였다.문종대에 직제를 정비하여 부사(副使) 1명(7품 이상), 녹사 1명을 두었고, 뒤에 사(使) 1명을 추가하였다. 중기 이후로 그 기능이 약화되고 1391년에 폐지되었다● 혜민국과 대비원고려시대에는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치료와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대비원은 고려 때 의료를 주로 한 구제 기관인데 설치 연대는 알 수 없다.고려 문종 시기에 개경의 동·서에 두어서 동쪽의 것을 동대비원, 서쪽의 것을 서대비원이라 하였고, 이들을 동서대비원이라 합칭했다.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인 대비원은 환자의 치료를 주요 업무로 하고, 굶주리고 헐벗어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나 의지할 곳 없는 몹시 궁핍하고 외로운 사람을 수용하였다.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인 대비원은 조선 태종 14년에는 활인원으로 개칭되어 이어졌다대비원 이외에 고려시대에는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혜민국은 고려 시대의 시약을 맡은 의료 및 구제기관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백성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 곳이었다. 충선왕 때 사의서 관할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년) 혜민전약국으로 개칭하였다.혜민국에는 판관 4명을 두었는데, 본업(本業)과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아치를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케 하였다.본업(本業)과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아치를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케 하였던 혜민국은 조선 개국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고려시대의 풍속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행사의 주요 내용은 불교적인 것이 많았다.그려시대의 대표적인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것인데 연등회와 같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불교 의식이었다.고려시대에는 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채택을 하였다.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한 고려 사회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나 상례 등을 장려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의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인문/어학| 2026.07.26| 5페이지| 2,000원| 조회(19)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조선후기의 문학과 예술
    조선후기의 문학과 예술
    조선후기의 문학과 예술조선 후기에는 문화의 모든 분야가 새롭게 변화해 가는 추세에 맞추어 그림·건축·글씨 등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문화의 모든 분야가 새롭게 변화해 가는 추세에 맞추어 그림·건축·글씨 등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던 조선후기의 그림에서는 17세기 인조 대에 궁정화원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이징의 그림이 정교하면서도 격식을 탈피하여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필치로 인물과 산수를 그려내어 충격을 주었다.궁정화원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이징은 달마와 같은 선승과 신선을 주로 그렸는데 17세기 초의 이단 사상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화단의 이단이었으며, 명나라 저장 지방 화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그러다가 17세기 말 이후로 청초 남종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반청감정을 가진 중국 남방인들의 남종화가 역시 반청북벌 사상에 젖어 있던 한양문인들에게 호소력을 준 까닭이었다.18세기의 영·정 시대에 들어가면 남종 문인화를 한민족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추어 토착화하는 또 다른 화풍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진경산수(眞景山水)’이다.진경산수의 등장은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의궤와 국방 지도 제작에 화원들이 참가하여 한국의 산수를 그려 넣는 과정에서 개성 있는 화풍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가는 정선이다.정선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가18세기 중엽에 천기·진기주의 문학을 강조하던 김창업, 김창협, 김창흡의 후원은 받은 영조대의 정선이 진경산수의 대가로 등장하게 되었다.양반 출신으로서 화원이 된 정선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한양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날카로운 바위산은 선묘로, 부드러운 흙산은 묵묘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정선의 대표작에는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금강전도와 통천문암도가 있다.정선의 대표작인왕제색도금강전도통천문암도●김홍도와 신윤복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 경지를 열어놓은 화원은 정조 때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는 현감을 지낸 양반이었으나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김홍도는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병풍, 행렬도, 의궤 등 궁중 풍속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기록화의 의미를 지닌 까닭에 활발하고 간결한 필치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를 더 필요로 하였다.신윤복은 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은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1대손이며, 아버지 신한평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다.조선 후기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은 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고루 잘 그렸으나,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특히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모두 잘 그린 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은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화법을 일부 수용하되,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의 대표작으로는 여속도첩과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있다.여속도첩에는 조선 후기 기녀와 아낙이 여섯 폭에 나누어 표현되어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은 총 30면으로 구성된 풍속화첩으로, 당시 시정인의 유흥과 남녀 간의 춘정, 도시에서 호사스러운 생활과 향락을 즐긴 왈짜의 행태가 표현되었다.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모두 잘 그린 직업 화가였던 신윤복은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하여 도시 풍정의 세련되고 감각적 분위기를 표현했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조선후기에는 서민문화가 발달을 하는 가운데 한글 소설이 크게 유행을 하였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한글 소설로는 흥부전을 비롯하여 심청전과 춘향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등이 있다.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한글 소설인 흥부전, 심청전과 춘향전은 모두 판소리로도 각색이 되었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흥부전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놀부네 갔던 흥부가 몽둥이로 실컷 맞고 돌아오니 그것을 본 흥부 마누라, 바깥으로 뛰어나가선 덜컥 주저앉으며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시 때렸을까.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 잘 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판소리로도 각색이 되었던 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춘향전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사또께 아뢰리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사또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도적에게 굴복하여 두 임금을 섬기리이까?소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열녀의 마음을 따를 것이오니, 길을 헤아려 처분하옵소서.남원의 기생인 춘향은 자신의 지조를 밝히면서사또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사또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도적에게 굴복하여 두 임금을 섬기리이까라고 하였다.조선후기의 한글 소설인 흥부전에서 놀부는 장손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나온다.장자에게 제사의 책임을 맡기고, 그에 따라 차남이나 딸들과 재산 상속에서 차별을 두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한글 보급의 확대세종시기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한글은 창제 이후 조선후기에는 서서히 확산이 되었는데 18세기 들어 급격히 서민들에게 전파됐다.조선시대의 문학은 한글을 자발적으로 익히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조선시대에는 가사문학 등이 발달하면서 한글의 운율과 리듬을 발전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문학이 풍성해 진 것도 한글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문/어학| 2026.07.24| 5페이지| 2,000원| 조회(26)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근대의 민족운동
    근대의 민족운동
    근대의 민족운동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의 민족 수난기이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국채보상운동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부터 1908년 7월까지 국채를 국민적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기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는 영남지방 상인들의 인식에서 시작되었다.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가 되었다.나라를 구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 중 의병전쟁은 구국을 위해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했던 무력투쟁이었다.의병전쟁이 구국을 위해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했던 무력투쟁이었던 반면에 애국계몽운동은 구국을 위해 신교육구국운동과 산업진흥운동, 그리고 국민계몽운동으로 전개된 문명개화운동이었다.애국계몽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교육과 산업, 그리고 국민계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경제·문화운동이었다.지방도시인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이었다.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열기도 매우 높았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참여는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물산 장려 운동조선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물산장려 운동을 추진한 기구는 조선물산장려회였다.조선물산장려회의 의사결정 기구는 지방대의원대회 · 총회 · 이사회로 구성되었다. 지방대의원대회는 본회와 지회 간의 활동 방안을 심의 · 결정하는 기구였고, 총회는 1년에 한 번 개최되어 주요 사업과 활동 방침을 논의 · 결정하였다. 이사회는 사업 전반을 집행하였는데, 산하에 경리부 · 조사부 · 선전부를 두었다.조선물산장려회는 사업의 확대를 위해 주요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조선물산장려회 지회규정에 따라 ‘거주하는 회원인 30인 이상’일 경우 지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1922년 12월 경상남도 진주의 자작회 발기회를 시작으로 북부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지회가 설립되었다.지역 물산장려운동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지역 청년 단체 그리고 기독교 청년 단체와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지방 지회들은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고, 조선물산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소비조합을 설립하고자 하였다.조선물산장려회의 대표적인 사업은 선전 활동이었다. 선전의 방법은 선전 행렬 · 강연회 · 가정선전반 조직 등 다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음력 정월 1일 회원들이 모여 서울 시내에서 실행한 선전 행렬이었다.●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가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가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를 비롯하여 신간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이상재와 홍범도, 김좌진,여운형, 김규식, 이상설등이 있다.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김좌진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던 인물이고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을하였던 인물이다.이상설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이 되었다가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일제강점기에 의거를 일으켰던 인물로는 안중근과 윤봉길, 이봉창등이 있다.●김구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데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다.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간 김구는 중국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주석으로 활약을 하였다.중국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주석으로 활약을 하였던 김구는 8 · 15 광복 후에는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8 · 15 광복 후에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김구는 1949년에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김구가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쓴 일기가 백범일지이다.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고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백범일지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 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1947년 국사원에서 백범일지를 출판할 때 춘원 이광수가 윤문을 하였는데, 김구가 쓴 백범일지의 서문을 참조하여 부록으로 첨가하였다.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 있는 나의 소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문/어학| 2026.07.24| 5페이지| 2,000원| 조회(25)
    미리보기
  • 고려의 대외관계
    고려의 대외관계고려는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가운데 문화·경제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이외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고 금나라와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 외교와 무역을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금나라 등 북방 세력과는 군사적 충돌과 외교적 협상을 병행하며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였다.고려를 세운 왕건을 후세의 왕들에게 조언한 훈요십조에서 거란과는 적대관계를 가질 것을 분명히 하였다.이러한 가운데 거란은 고려의 성종과 현종시기에 고려를 침입하였다.●고려와 송나라고려는 개방적 정책을 통해 송나라와 활발한 외교와 문화 교류를 추진하였다. 송나라를 "문화의 중심국"으로 인정하고 사신을 파견하며 유교·불교 경전, 의학서, 농서, 공예 기술 등을 수입하였다.고려는 금, 은, 인삼, 직물, 청자 등을 송나라로 수출하였다.송나라와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였다. 당시 벽란도에는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활발하게 왕래를 하였다.송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는 고려의 학문, 종교,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거란이 세운 국가인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몽고 지역을 장악한 후 고려와 국경 문제로 충돌하였다.고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요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거란이 침입하는 가운데 993년 서희의 외교로 제1차 침입을 막고 강동 6주를 확보하였으며, 이후 요의 성종이 개경을 공격했을 때 현종은 볼모를 보내고 친조를 약속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거란이 마지막 침입인 3차 침입때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통해 요의 군사적 위협을 종식시키며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고려와 금나라고려는 초기에는 금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금나라와 초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려는 금이 요를 멸망시킨 후 외교적 긴장이 발생하였다.고려는 금의 압력 속에서도 북방 영토를 방어하고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고려는 숙종과 예종시기에 여진정벌을 단행을 하였는데 당시 여진정벌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은 윤관이다.여진정벌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인 윤관 여진정벌을 위하여 별무반을 조직하였는데 여진정벌을 위하여 조직된 별무반은 신기군과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이 되었다.별무반의 구성신기군신보군항마군●고려와 일본고려는 몽고에 항복을 한 이후 원의 강요로 일본 원정을 두 차례 수행하였다.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하여 추진된 일본정벌은 바다에 심한 폭풍우가 일면서 실패를 하였다.고려말에는 국력이 쇄약해진 틈을 타서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국력이 쇄약해진 틈을 타서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최영과 이성계등은 왜구를 토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거란의 침입고려는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아 세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고려와 거란간의 전쟁은 993년에 1차 전쟁이 있은 후 1010년에 2차 전쟁이 있었고 1019년에 3차 전쟁이 있었다.거란은 요나라를 세운후에 고려를 침입하였는데 2차 침입때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면서 고려를 위협하였다.거란의 1차 침입때에는 서희가 외교담판을 벌여 압록강 남쪽에 있던 강동6주를 획득하였다.강동육주는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있던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이다.이 지역에는 고려가 건국될 당시 서북면의 압록강 유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993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고려왕의 입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철수하였다.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점유권을 인정받았다.이후 고려는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6개 고을을 설치하였다. 거란은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며 두 차례 침략하였으나 고려는 양규와 강감찬의 활약으로 북방 영토를 지켰다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거란과 고려의 3차에 걸친 전쟁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의 침입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하면서 마무리가 되었다.1010년(현종 1년)에 요나라는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요 성종이 직접 침입하였다.거란의 3차 침입때에는 강감찬이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거란의 1차 침입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은 거란의 침입을 야기하게 되었는데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것을 견제하면서 고려를 침입하였다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 때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송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편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려로 하는 가운데 고구려를 잇고자 했다.고려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은 거란을 자극했는데 압록강 유역에 살고 있던 거란은 고려가 송과 군사 동맹을 맺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려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척 경계했는데 거란이 고려와 친해지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굶겨 죽였다.성종 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는데 대신들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 주자고 했다.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외교가였던 서희는 적진으로 들어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지었다.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외교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진만 물리치면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설득했다.소손녕은 서희의 말을 들어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의 땅을 개척하여 강동 6주를 세웠다.
    인문/어학| 2026.07.24| 5페이지| 2,000원| 조회(12)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백제와 고려의 문화재
    백제와 고려의 문화재
    백제와 고려의 문화재●백제금동대향로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이 되었다.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다.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도교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백제금동대향로는 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으로 이뤄져 있는 가운데 독창적인 조형으로 백제 문화와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이 밖에 백제금동대향로에는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경기 파주 용미리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이다.경기 파주 용미리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천연 암벽을 몸체로 삼아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2구의 대형 석불이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용미리에 있는 마애이불입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고려 시대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8, 9번지에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가운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은 것은 경상북도 경산에 있는 갓바위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가 있다.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가운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하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불성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인데 오른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왼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은 합장한 손 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서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얽힌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 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 설화가 있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안에 위치한 고려 시대에 제작된 탑으로, 8각의 기단 위에 9층 탑신이 올라가 있는 다각 다층 석탑이다.지붕돌의 여덟 귀퉁이 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매달려 있고, 지붕돌 위에는 금동 머리 장식이 얹혀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국보 48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8-8, 월정사에 위치하고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이다.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창건한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 탑신을 올린 뒤,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 주도록 하였다.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불상을 모셔 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고려의 대표적인 석탑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개성 현화사 7층 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 있다.고려시대 석탑은 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다.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던 고려시대 석탑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층수가 많고 높이가 높은 탑이 특징이다.불교 신앙의 확산과 왕실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던 고려시대 석탑은 일반적으로 5층, 7층, 9층 탑이 많이 세워졌다.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으로 짝수 층과 화려한 장식을 갖춘 탑도 등장했다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과 불일사 오층석탑이 있다.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며, 불일사 오층석탑은 고려전기의 석탑의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과 불일사 오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불교와 문화적 풍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인문/어학| 2026.07.22| 5페이지| 2,000원| 조회(18)
    미리보기
  • 삼국의 성립과 발전2
    삼국의 성립과 발전2●고구려의 국가 체제 정비고구려는 주몽이 부여 계통의 유이민 세력과 토착민 세력의 결합으로 건국하였다.부여 계통의 유이민 세력과 토착민 세력의 결합으로 건국하였던 고구려는 처음 졸본에 도읍을 하였다.이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며 체제 정비를 시도하였고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던 고구려는 태조왕때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하여 옥저를 정복하였고 계루부 고씨의 왕위 독점적 세습을 확립하였다.계루부 고씨의 왕위 독점적 세습을 확립하였던 태조왕은 주변 군장 세력을 부족적 성격의 5부 체제로 발전시켰다.태조왕은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국가 기틀을 확고하게 다졌다.고국천왕때는 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하고 형제 상속의 왕위 계승을 부자 상속으로 바꾸었다.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하고 형제 상속의 왕위 계승을 부자 상속으로 바꾸었던 고국천왕은 족장의 중앙 귀족화로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에 큰 진전을 이루었으며 점차 간접적인 통치에서 벗어나 지방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3세기 초반 동천왕 때는 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 후 위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구사하였으며 압록강 입구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과 낙랑의 통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백제의 국가 체제 정비고구려 계통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다.고구려 계통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은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던 고구려 계통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은 고이왕때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정치 체제를 정비한 백제는 관등제와 관복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의 국가 체제 정비신라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던 신라를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사로국이라 하였다.박혁거세에 의하여 건국된 신라는 석탈해 집단의 이주로 박·석·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신라는 처음에는 거서간이라는 지배자 칭호를 사용하다 이후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를 이사금으로 추대하였다.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던 신라는 내물왕 때 진한 지역을 차지하고 김씨의 왕위 계승권을 확립했으며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내물왕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으로 왜를 격퇴하고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용하며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가야 연맹가야 연맹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이 되었다.연맹 왕국이었던 가야 연맹의 맹주는 김수로가 건국한 금관 가야였다.낙동강 하류 변한 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 발달을 바탕으로 3세기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낙동강을 배경으로 하여 발달을 하였던 가야는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그 중 벼농사가 특히 발달하였다.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가 발달을 하였으며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낙동강을 배경으로 하여 발달을 하였던 가야는 농경 문화가 발달하는 가운데4세기 초 백제와 신라의 팽창으로 약화되었다.금관가야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중심 세력이 해체되면서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금관가야가 멸망한 후 후기에는 대가야가 연맹의 중심 국가로 성장하며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게 되었다.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대가야는 지산동에 굉장히 큰 가야시대의 무덤들을 많이 남겼다.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들은 대가야 박물관에 잘 보존이 되어 있다.가야의 대표적인 고분에는 합천 옥전·번계제고분군을 비롯하여 산청 중촌리고분군, 함양 산백리·백천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장수 삼고리 고분군 등이 있다.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질과 양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유물들을 통하여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남 위례성의 위치백제의 첫 도읍지는 하남 위례성이었다.위례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밀려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옮길 때까지 초기 백제의 첫 도읍이었다.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옮길 때까지 초기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은 한성이라고 불려졌다.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서울의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고구려식 돌무지 무덤이나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을 통해 이 일대가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다.하남 위례성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최근의 발굴로 풍납토성이 가장 유력하게 인정된다.사적 제11호로 지정된 풍납토성은 한강변 평지에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으로 추정된다축조 시기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로 추정되며, 일부 학자들은 고이왕·근초고왕 대로 보기도 한다성벽은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 약 2.7~3.5km였으며, 판축 기법과 식물 유기체, 자갈 등을 활용한 독특한 축성 기술이 적용되었다풍납토성은 원래는 둘레가 3.5㎞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유실되어 지금은 2.1km정도만 남아있다. 발굴조사에 의해 성벽 기초부는 너비가 43m, 높이가 11m가 넘는 대규모의 토성으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중심부 하단에 뻘흙을 깔아 기초를 다진 후 그 안팎으로 진흙과 모래흙을 다진 판축기법으로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가며, 일부에 식물유기체를 깔거나 자갈을 이용하여 토루를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성기술을 동원하였다.1925년(을측년) 대홍수 시 중국제 청동자루솥, 허리띠장식 등 상류층이 사용한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 주목받아왔다. 1936년에 조선고적(제27호)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63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000년도 경당지구 발굴조사를 거치며 한성백제시대 첫 도읍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발굴조사가 지속되며 풍납토성이 백제의 최초 도성이었음은 학계의 정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인문/어학| 2026.07.22| 5페이지| 2,000원| 조회(21)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고려 시대의 인물과 문화재
    고려 시대의 인물과 문화재
    고려 시대의 인물과 문화재고려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이다.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고려는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다.통일신라 말엽에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고려는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를 남겼던 고려는 대외적인 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가운데 고려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는데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다가 1392년에 이성계에 의해 멸망했다.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원래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으나 후고구려를 세운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송악 지방의 호족이었으나 후고구려를 세운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던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해 한반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는데 고려를 세운 왕건은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왕건은 훈요십조에서 고려는 부처의 힘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고 하였다.●고려의 제4대 임금인 광종왕건이 죽은 이후 고려의 국가체제를 확고하게 정비한 왕은 광종이다.광종은 고려의 제4대 임금인데 925년에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에 임금이 되었다.925년에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에 임금이 되었던 광종은 왕건의 혼인 정책으로 인해 세력이 커진 호족들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고려의 4대왕인 광종은 925년에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에 임금이 되었던 광종은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949년에 임금이 되었던 광종은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가운데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 등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노비안검법은 고려 광종 7년(956년)에 실시된 법제로서, 원래 노비가 아니었는데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법이다.광종을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도 얻었다.노비안검법의 실시는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보다 중요한 동기는 당시 호족 세력의 세력 기반을 억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수입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하나의 정책이었다.이로써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가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 더 안정되었다●광종의 불교 장려광종은 불교도 크게 장려를 하였는데 광종시기에 건립된 대표적인 불교문화재로는 관촉사 석조 미륵입상이 있다.광종시기에 건립된 대표적인 불교문화재인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은진미륵이라고도 한다.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높이 18.12미터, 둘레 9.9미터로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국내 최대의 석불인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중생대 쥐라기의 반상 화강암 암반 위에 허리 아랫부분, 상체와 머리 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바닥에서 어깨까지는 11.62미터, 어깨에서 보관까지 4.07미터, 보관높이 2.43미터, 귀길이 1.8미터, 입 1.06미터이다.하체는 원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던 원석으로 만들었고, 상체는 계룡석으로 논산시 연산면 고적리 쇠머리에서 가져왔다.관촉사 사적비 내용에 따르면 혜명스님을 비롯한 백공(석공) 100여명이 건설하였다고 한다머리에는 구름무늬 같은 머리카락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윗부분의 관까지는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고, 관은 8각형으로 깎았다. 그 위에 2중의 보관을 올리고 관의 네 귀에는 청동제 방울을 달았다.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역제형(사다리꼴)으로 눈이 옆으로 길게 돌아갔고 코, 입, 귀는 모두 크고 토속적인 느낌이다.●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으로는 월정사 8각 9층 석탑을 비롯하여 고려청자, 나전칠기, 금속활자와 대장경등이 있다.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강원도 평창군의 월정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강원도 평창군의 월정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탑인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월정사의 대웅전 앞뜰에 있다.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서 주로 유행했던 다각다층 석탑 중 하나인데 현재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월정사 8각 9층 석탑평창군의 월정사에 위치국보 제48호다각다층 석탑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목조건물로는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있다.경상북도 안동의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통일신라 대 신문왕 능인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봉정사를 세운 능인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다.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인문/어학| 2026.07.22| 5페이지| 2,000원| 조회(23)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조선후기의 학문
    조선후기의 학문
    조선후기의 학문조선후기에는 성리학 중심의 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현실 문제 해결을 지향한 실학이 등장을 하였다.조선후기의 실학은 청나라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아 성립이 되었는데 실학사상가는 크게 중농학파와 중상학파, 국학파로 구분이 된다.우리나라의 것을 탐구한 국학파에는 우리나라의 언어를 탐구한 학자들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탐구한 학자들이 있었다.우리나라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에는 안정복과 한치윤, 유득공등이 있었다.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였고 한치윤은 해동역사를 저술하였으며 유득공은 발해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발해고를 저술하였다.●실학의 발달조선시대에 발달한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가운데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정치와 생활의 보편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었다.조선에서는 학자는 물론이고 정치가들까지도 성리학에 몰두하여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러한 성리학 중심의 인식론에 의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경시하였다.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을 가지는 문화가 팽배한 가운데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성리학 중심의 학문 활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청에서 실증적인 학풍을 중시하였던 고증학이 전해지면서 실학의 연구는 그 깊이가 더해졌다.청나라의 유학인 고증학은 우리나라 실학사상의 바탕이 되었다.조선후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조선 후기의 사회상황조선 후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붕당 정치가 파탄에 직면하고 노론의 장기 집권이 행해지면서 노론의 몇몇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많은 양반들이 몰락하였다.농촌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재산을 많이 가진 부농이 생겼다.농업 기술의 발달로 재산을 많이 가진 부농이 생겨나는 가운데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도 없는 지경이 되어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조선후기에 도시에서는 대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지배하고 부를 축적한 반면, 영세 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났다.영세 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나는 가운데 사회 현실을 개혁하고자 실학이 대두하였다.조선후기의 사상인 실학은 정치?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하였다.이러한 가운데 일부 집권 세력도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일부 집권 세력도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정권에서 밀려났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왔다.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던 실학자들의 연구 대상은 그 밖에도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역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이 있다.동사강목은 안정복이 지은 강목체의 역사서이다.안정복은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는 마한이라고 하면서 마한 정통론을 제기 하였다.안정복은 우리나라의 정통왕조는 고조선에 이어서 마한과 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안정복은 동사강목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을 하였다.동방의 역사도 갖추어 있다. 기전체(紀傳體)로는 김 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의 《삼국사기》와 정문성(鄭文成 문성은 정인지의 시호)의 《고려사》가 있고, 편년체(編年?)로는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와 최금남(崔錦南 금남은 최 보(崔溥)의 호)의 봉교찬(奉敎撰)인 《동국통감》이 있고, 이를 따라서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과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이 있으며,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의 책이 있어 빈빈하게 성하다.그러나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틀리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의례(義例)가 어그러짐이 많고, 《여사제강》과 《동사회강》은 필법이 혹 어그러진 것이 있다.오류로 인하여 오류를 답습하고 잘못으로 잘못 전한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내가 그것을 읽고는 개연히 바로잡을 뜻이 있어, 동국의 역사 및 중국의 역사에서 동국의 일에 언급한 것을 널리 가져다가 산절(刪節)하여 책을 만들되, 일체 자양(紫陽)이 이루어 놓은 법을 따라 사삿집의 상자에 잘 간직해 두고 고열(考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뿐이요, 감히 찬술로 자처한 것은 아니다.대저 역사가의 대법(大法)은 통계(統系)를 밝히고, 찬역(簒逆)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忠節)을 포양하고, 전장(典章)을 자세히 해야 하는 것인데, 여러 역사책이 여기에 실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으므로 약간 손질을 가하고, 오류가 심한 것에 있어서는 별도로 부록(附錄) 2권을 만들어 아래에 붙여 놓았다.책이 이루어진 지 20여 년이 되도록 정서하지 못하였더니, 병신년(1776, 영조 52) 겨울에 호남의 수령으로 나가서, 공무를 보는 여가에 비로소 1본(本)을 쓰고, 이어서 그 사유를 적어 가숙(家塾)의 자제에게 준다안정복은 동국통감의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기전체 역사서로는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있고 편년체 역사서로는 조선시기에 지어진 동국통감이 있다고 하였다.●실학의 선구자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 김육 등이었다.광해군 시기의 인물인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화 전통을 폭넓게 정리하였다.실학의 선구자이수광김육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가 있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1614년 이수광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인 지봉유설은 그의 아들 성구와 민구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에 출간되었다.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인 지봉유설은 총 3,435조목을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고 있다. 인용한 서적은 육경을 비롯하여 348명의 글을 참고하였다.
    인문/어학| 2026.07.21| 5페이지| 2,000원| 조회(18)
    미리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8월 15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3:13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