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심리의 여행 중간과제 리포트경기대학교식품생물공학과201411676정선일군 입대를 마치고 복학 뒤, 확실한 생각 없이 막연하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인간심리의 여행을 수강하며 삶의 목표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학교를 다니고 있고, 10년 후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까? 중간고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후, 하루 종일 고민하기 시작했다.나의 비전은 거창하지는 않다. 평범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비전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워라밸이 보장되는 삶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느정도 현실과 타협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크게 보았을 때 내가 행복할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곡차곡 내가 하고싶은것들과 해야될것의 균형을 잘 맟춰야 할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거울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고 한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하고자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참 멋있고 의미있는 말인 것 같다. 매일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에게 후회가 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거울속의 자신에게 답을 물어본다면 더욱 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할 것 중 스스로 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할 것을 먼저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한다.남들과 똑같이 살아오면서 꿈이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렸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다시 생각을 차근차근 해보니 동기부여가 되었다. 사실 나는 지금과의 전공과는 거의 연관이 없지만 어렸을적부터 컴퓨터를 좋아했었고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하여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 꿈이였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어느 순간 떨어졌었고 대학교 진학시에도 컴퓨터공학과와 현재 내가 재학중인 식품생물공학과중 고민을 하긴 했었지만 결국 현재의 지가 대부분 지방이라는 단점에 비해 비교적 수도권이기 때문에 큰 메리트가 있지만 대학원 2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과연 그것을 버틸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따라서 현재는 품질관리쪽에 목표를 두고 관심과 정보를 찾아보는 중이고 대학원은 좀 더 심도있게 고민있게 해야 될 문제 일 것이고 R&D쪽이든 품질관리든 내가 원하고자 하는 회사에 가기 위해서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현재 가장 먼저 준비하고 있는 것은 토익스터디이다. 해외영업이나 R&D 부문이 아닌 다른 분야는 회사에서 어학성적을 그렇게 크게 보지는 않지만 앞으로 내가 관심있는 분야가 바뀔수도 있고 식품회사의 경우 국내 수입도 중요하지만 해외시장 또한 큰 매출풀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회사에서 어학성적이 높은 사람을 우대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약간 더 높은 단계인 level 7을 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익점수도 900을 넘기는 것도 올해 목표중에 하나이다. 작년부터 준비해서 이미 850점을 넘겨서 대부분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점수는 충족하고 있지만 남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좀 더 높은 것이 준비된 자세라고 생각하고 뿐만 아니라 오늘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서는 기본적인 어학능력은 실생활에서도 쓸일이 많고 나중에 회사에서 출장을 가거나 따로 여행을 갈 시에도 큰 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중이다. 또한 이번 여름방학에는 아르바이트 보다는 식품회사에서 인턴 지원 또한 준비중이다. 많은 식품회사의 채용 트렌드를 보면 신입공채는 예전보다 적게 뽑는 편이고 경력직을 선호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신입을 뽑되 경험이 없는 신입사원을 뽑기 보단 실무 경험이 있는 신입사원을 뽑고 싶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턴이 필수는 아니지만 인턴을 함으로써 얻는 실무경험은 기업에게 어필할수 있는 큰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SPC나 동원 같은 식품업계에서 인지도 있는 회사에서 인턴경험을 어느정도 쌓을 것이다. 자격증에서는 활동하고 싶다. 사실 식품기술사라는 자격증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식품기술사에 대해 안 것은 올해 초에 자격증 관련 강연을 듣던 도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강연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기업쪽에서 일하다가 식품기술사를 취득하여 강연을 다니거나 식품전문가로 활동하시는 분들이였다. 기술사 자격증의 경우 응시조건이 기사취득후 5년이상의 실무경험이다. 따라서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며 시험 자체의 난이도도 매우 높기 때문에 응시하는 지원자중에는 주로 과장,부장급인 사람들이 많다.따라서 회사에서 어느정도 경력을 쌓은 후 기술사에 응시하여 식품기술사를 취득한 후 강연을 다니거나 식품전문가로써 활동할 것이다.나의 비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듯, 하고싶은 것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행복할수 있는 일도 해야 행복할것이다. 힘들 때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중 하나는 음악이다. 중학생 시절 우리 반에 한 조용한 아이가 있었다. 평소에 존재감이 없던 그 아이가 학교축제 날 베이스를 메고 있었다. 반 아이들이 연주를 해보라고 하자, 학교 체육관에서 기타를 연주하는데 그때 들은 베이스소리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아버지에게 부탁해 시험성적을 올린 보상으로 베이스를 구매했고, 현재까지도 나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막막하고 두려워 보이기만 하던 연주곡들을 연습하며 어느 순간 능숙하게 연주를 할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베이스를 치다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밴드동아리에 가입했고 큰 즐거움이 되었다. 단순히 혼자서 연주하는 취미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합주를 하고, 나아가 발성과 퍼커션 등 을 배우며 공연까지 하니 정말 뜻깊은 경험이 되었다. 협동심을 배우고, 인내심과 열정을 알게 해준 동아리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때 가게 된 새터 공연이었다. 1주일동안 밤낮을 새가며 연습하면서 동아리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끼게 되었고, 방학 때도 끊임없이 연습하고 준비해 온 곡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공연했을 ㅇ엄청난 희열감을간인 2달동안 인바디 점수 전후를 비교하여 가장 높은 향상폭을 보여준 병사에게 포상휴가를 수여하기로 했었고 나는 운동을 열심히 할뿐만 아니라 휴가또한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하고 몸을 가꾸었었다. 평소 좋아하던 군것질을 일체 끊었었고 평일에는 1시간 30분, 주말에는 2시간이상을 운동에 투자했었다. 그 결과 인바디 점수가 7점이 올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당당히 포상휴가를 받게 되었다. 군시절 통해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누구든지 열심히 운동을 하면 누구나 몸이 좋아질수 있고 건강해 질수 있으며 몸뿐만 아니라 정신또한 맑게 하는 정말 좋은 취미였다는 것이다. 또한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절제하는 법도 배웠기 때문에 나는 운동을 취미로 시작한 것을 정말 잘 한일이라고 생각한다.여유가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대학에 진학 시 대학에 가게 된다면 봉사동아리에 들어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나는 군전역후 한 봉사연합동아리에 들어가 약2년간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해왔다. 이뿐만 아니라 나는 어렸을때부터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많이 해왔다. 교육재능기부 하기도하고 교회에서 겨울에 불우이웃들을 위한 연탄나르기 봉사도 해왔다. 군입대 전에는 유니세프에 가입하여 한 달에 만원씩 후원금을 지불하기도 했다. 가장 군 생활이 힘들었던 이병 시절, 유니세프에서 인터넷메일이 왔었다.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먹지못해서 배가 나왔지만 미소를 띄고 있는 그 아이가 나의 소박한 후원을 통해서 전보다 더 배고픔을 잊고 행복할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때 나는 봉사하는 일이 정말 뜻깊은 일이라고 다시한번 느꼈다. 물론 내 가치관은, 희생하는 것이라기 보단, 내가 여유가 있을 때 할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방향을 선호한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그 사람이 나의 베품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행복을 찾았을 때의 뿌듯함은 내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좋은 마해서 여행가는 것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가 여행을 갈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여행은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걸 좋아하는만큼 결혼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구속하고 싶지는 않다. 자녀를 키우면서서 많은 부분이 힘들 것이다. 나는 내 배우자든, 자식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 사람에게도 가슴을 띄게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여유가 되어서, 그 꿈을 막지 않고 충분히 지원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사랑스러운 아들 혹은 딸이 자라면서,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찾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봐주며 길잡이가 되는 것이 나의 가정관이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도록, 가족들과 해외를 자주 여행갈 것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닌 완전 다른 문화권에서 자녀들은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것이고, 영감과 열정이 싹틀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어렸을적 남태평양에 타히티라는 곳에 해외여행을 갔었다. 학교수업이 끝난뒤 학원을 가고, 피시방을 가고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던 나에게 타히티는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기후부터 우리나라와 전혀 달랐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야자수와 코코넛 열매가 수많은 곳에 있었고, 도로의 대부분이 비포장도로였다. 바다는 초록색 보석빛이었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졌고, 항상 여유가없는 우리나라사람들과 다르게 걸음걸이가 느리고 여유가 넘쳤다.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중에 하나는 ‘피시앤칩스’였고 너무 맛있었어서 아직도 그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모두가 하교 뒤에 학원을 가는 것이 아니며, 럭비를 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였다. 작년 겨울방학 때는 가족이 아닌 친구와 처음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공항에서 티켓을 발급하고, 입국 심사를 한뒤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왠지 모르게 세상은 정말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나 관광지를 찾기 위해 지도어플을 이용하였
1)고조선 시대한국 최초의 국가라고 할수 있는 나라는 청동기 시절에 세워진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를 이루었고 청동문화를 중심으로 아사달에 나라의 터를 세웠으며 이후 철기문화로 발전하면서 주변 세력을 규합하였고 큰 연맹국가를 이루게 되었다.고조선이 중국과 한반도에 걸쳐 세력을 규합하고 있을 때, 중국은 여러 나라를 거쳐 한 초기시절이였다. 고조선은 여러 주변국가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조선이 위상을 떨치고 있을 때 국가라고 할수 있는 정도의 위상을 갗춘 나라는 중국 뿐이였다. 고조선은 고대중국의 순임금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고조선의 위성국들 중 중국과 유인,청구 등의 나라가 중국과 교류했던 기록이 남아있다.이후 주나라의 세력은 매우 세퇴하게 되고 중국은 매우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국면하게 되며 양국간의 관계는 악화된다. 당시 중국의 강대국이였던 제나라는 고조선이 지배하던 나라중 하나인 고죽을 침공하였다. 이처럼 당시 시대상 중국과 고조선의 투쟁은 매우 잦은 편이였다. 이후 위만은 조선으로 넘어와 당시 왕이였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위만조선은 정복사업에 주력하여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관료형 조직을 유지하였고 주변 국가의 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고조선과 중국(한)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였고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게 된다.즉, 고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는 초반에는 우호적이고 협력하였지만 중국이 춘추 시대에 국면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게되고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과 중국은 한자와 같은 언어 교류는 매우 활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은 경제측면의 교류도 완만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양국의 무역은 사신을 통해 행해졌고 과거 고조선의 영역이였던 지역에서 발굴되었던 유물을 살펴보면 중국 화폐(명도전,포전)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고조선이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행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2)삼국시대1)고구려한족과의 전쟁 과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고구려는 유리왕 시절 중국의 신나라와 전쟁을 할 정도로 크게 번영하였다. 이게 그치지 않고 고구려는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타 중국의 위나라를 공격하는등 강력한 국력을 과시한다.고국천왕 이후 자식들간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었으나 중국과의 관계는 다소 유하게 대처하였고 신라와는 대립적인 구도를 유지하였다.이러한 정복전책의 결과로 고구려는 넓은 토지와 군비를 점유하였고, 5부 개편등 국가 체제를 다시 정비하였고 4세기 경에는 율령제를 시행하여 국가의 발전을 이루었다.5세기경에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찾아오게 된다. 광개토 대왕은 북진정책을 시행하여 요동을 완전히 정복하였고 요서지방 또한 일부 진출하여 당시 삼국정세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한다.그러나 6세기 중반이 되자 주변국의 침략에 시달려 국력이 크게 쇠퇴하게 된다. 589년 세워진 수나라는 여러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을지문덕이 이끄는 살수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수나라의 침략을 막을수 있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주변국의 공격을 잘 방어했으나 이 과정에서 국력은 점점 더 쇠약해졌다. 마침내 668년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2) 백제양국의 교류는 중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중국이 먼저 시도하였다. 중국은 중국중심의 동북아지역 지배 질서를 위해서 당시 한반도에서 강력했던 백제와의 교류가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이 삼한(백제)와 교류했던 것은 고구려의 중국진출을 방어할뿐만 아니라 삼한에서 이탈한 주민들이 유입되고 중국의 문화가 파고들어 기술과 문물들을 교류하게 된다. 이때 백제는 해상경험이 풍부했던 이주민을 이용해 중국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흡수하여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싶었던 백제는 개로왕 시절에 이르러서는 사신에게 관작을 요청하여 더욱더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백제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매우 우세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으며 백제의 주변국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나라의 힘을 길렀다.이후 4세기 후반에 이르자 백제는 중국의 요서와 산둥지방까지 진출하여 더욱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삼국은 중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면서도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중국의 제도,문화,종교등은 선택적이지만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삼국은 중국의 혼란한 정세를 영리하게 이용하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백제의 중국과의 교류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초점을 맟추었던 것이다.3) 신라신라는 삼국중 중국과 가장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삼국중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지 못하였다. 내물왕 시기에 신라와 중국은 처음 교류를 맺게 되는데, 신라의 영토에 왜구가 출몰하게 되고 이를 쫒아내기위한 구실로 신라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이를 통해 신라는 중국의 문물을 최초로 고구려에 의해서 수용하게 되었고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다.5세기경은 고구려가 삼국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나.제 동맹을 결성하였고 법흥왕 시절 백제의 소개로 인해 중국의 남조와 양나라 등과 친교를 맺게 된다. 또한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빼았겼던 한강유역을 다시 수복하게 된다. 그후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유지하지않고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신라가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수복한 이후 중국과의 교류는 더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신라는 황해를 통해서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유지한다. 이후 신라는 백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 고구려와의 동맹을 꾀하였으나 성립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을 맺어 나당연합군을 통해 나머지 두 국가를 차례대로 멸망시켰다. 이후에는 신라는 나당연합군을 파기한 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어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3. 고려고려는 건국후 이듬해에 사신을 오월에 보내게 된다. 중국은 후백제에 그치지 않고 신라,발해와도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월과의 교류를 통해 고려가 이러한 외교에서 고립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뒤 태조는 후량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 후백제보다 외교에서 우위를 꾀할수 있었다.이후 고려는 후백제를 정복한후 후삼국시대를 통일시키게 된다. 고려는 송나라와 친교를 맺었고 우수한 선진문물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하게 되면서 이런 관계에 파탄이 생기게 된다.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여 요나라의 지배아래에 두고자 하였다.이에 따라 10세기말 거란은 고려를 지배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인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되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하게 되었고 거란과 친교를 맺고 송과의 교류를 끊겠다고 말했으나 문화적으로 후진국이였던 거란에 대해 성의있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으며 송과의 친교는 유지했다. 이러한 모순을 빌미로 11세기 초 거란은 고려를 침략였다. 그러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선전으로 거란의 기세를 꺾었고 이후 거란은 강화를 맺은뒤 물러갔다. 그러나 그 이후 거란은 다시 한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후퇴하던 도중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대패하게 된다.지속적으로 고려와 침략해오던 여진은 만주일대를 정복한후 12세기경 금나라를 건국하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게 된다. 이로인해 고려는 많은 갈등이 생기게 되고 혼란을 겪게 된다. 여러 분쟁 끝에 고려는 마침내 금나라의 군신관계 요구를 받아 들이게 된다.13세기경 유목민족이였던 몽골족은 금나라를 멸망시킨후 원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후 원나라는 30년간 고려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게되었고 전쟁 끝에 고려는 강화를 체결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그결과로 고려의 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고려의 6대 왕들은 원나라에 충성심을 보인다는 의미를 요구하는 ‘충’자를 붙이게 하였다.14세기 후반 원의 여러 가지 내외적 사정으로 인해 쇠퇴하게되였고 반원정책을 내세운 공민왕에 의해 원의 내부간섭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않고 공민왕은 이전과는 다른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한 개혁을 꾀하였으나, 권문세족에 의해 개혁이 방해되고 살해되면서 개혁은 성공하지 못한채 끝이 난다. 이후 반원정책은 거두어졌으며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인 근거리 외교 정책을 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