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中人)의 역사 편찬20101435 이 예 원1. 들어가며조선말기의 중인 계층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육두품(六頭品), 고려 말 조선 초의 향리층(鄕吏層)에 대비되는 계층으로 이들이 우리 역사의 전개과정 상 지배계층의 차계층(次階層)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 계층이다. 이 계층은 고착된 신분의 벽을 깨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아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였고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조선 성리학의 내재적 극복 논리로 북학 운동을 제시하는 등, 양반 사대부들이 완고한 체질을 고수한 반면 구시대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기에 재빨리 변신하여 이미 적응력을 키워 온 계층답게 상공업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본 발표에서는 이러한 중인층의 신분변동, 그들이 주장했던 문화·문학운동과 더불어 중인층의 대표 편찬서인 와 을 통하여 중인사학의 역사적 성격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중인계층의 신분변동과 문화·문학운동조선후기의 중인신분은 좁은 의미의 중인으로 불리던 고급기술관 이외에 양반에서 탈락된 서얼(庶孼), 그리고 향리(鄕吏) 신분인 이서(吏胥)를 통칭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중인 이하에서는 의역중인(醫譯中人)을 가장 높은 계층으로 인식하여 의관(醫官)과 더불어 역관(譯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정옥자,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일조각, 1988, 190~191쪽.중인층 중에서도 향리는 고려전기에 확립된 이래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이르기까지 천년 이상을 존속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지속적인 중앙집권화 시책과 치자집단(治者集團)의 지방 이주 등으로 말미암아 향리들의 지위는 계속 낮아졌다. 그러나 향리제도는 신분적·사회적 서열관계를 중시하고 이를 통하여 지방통치를 도모한다는 사회운영 원리의 한 형태로서 장기간의 생명력을 지녔다. 향리집단이 통치구조 상의 위계질서에 상응하여 서열관계를 이루고 이것이 세습과 배타적인 통혼권(通婚圈)을 통하여 차등구조를 확립하면서 지방통치에 대한 중앙정부의 기대와 통제력은 일정 , 1990, 255쪽.중인계층의 성장과 문화운동의 문제는 사회변동 내지 문화변동이 진행되던 조선사회의 발전적 자기극복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성리학은 이미 시대사상으로서 생명력을 다하여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정치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사대부들이 그 한계상황을 직시하여 실학사상으로의 전이를 꾀하기도 하였지만 양반사대부의 역할은 이미 끝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대적 상공업사회에 적합한 세습의 기술과 일선행정능력을 겸비한 중인계층이 새 시대의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사상(北學思想)을 수용하여 주도계층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8세기부터 궤도에 오른 위항문학운동(委巷文學運動)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 활동. 18세기부터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상인·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한문학 활동이 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까지 이른다.을 통한 지적 기반의 확대와 사대부에 필적되는 시(詩)·서(書)·화(畵)의 교양을 쌓으면서 신분상승운동을 벌여 시사(詩社)의 조직, 공동 시집·공동 전기(傳記)를 발간하여 결집력을 키우게 되었다. 특히 김정희(金正喜) 문하에는 위에 말한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예인(藝人)이 무수하게 배출되는데 그들 중의 다수가 중인계층인 점에 주목하여 그들 중인계층의 범주에 있는 위항인(委巷人)들이 그 이전 시대부터 추진한 위항문학운동과 어떠한 연계선상에서 만나고 있는가 그 전승(傳承)과 인적 맥락관계를 집중적으로 검색하여, 결국 북학풍(北學風)은 중인계층에 위항시사(委巷詩社)를 매개로 하여 조선말기인 1880년대 초반까지 접맥되고 있었다. 위항문학운동이 경아전(京衙前) 조선시대 때 중앙관청에 딸린 이속(吏屬). 중인계급에 속하는 낮은 벼슬아치로서 원칙적으로 품계를 갖지 않으며 녹사(錄事)ㆍ서리(胥吏)ㆍ조례(隷)ㆍ나장(羅將) 등으로 크게 구분됨.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서얼들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편승하여 18세 『조선후기 문학사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149쪽.18세기에 여러 부면에서 기반을 다진 이들 중인층은 19세기 전반에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새로운 시대사상인 북학사상을 자신들의 학문으로 수용·전수하여 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이 북학적(北學的) 소양에서 유래한 시무(時務) 그 시대에 중요한 정무나 사무.에 대한 인식과 밖에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방적 사고는 개화사상으로 발전되어 19세기 중반 개화서(開化書)의 도입과 1870년대 개항·개화정책으로의 방향전환 및 개화당(開化黨)의 형성에 촉매제로 작용하였으며 1880년대 초기개화운동의 막후세력 내지 추진력이 되었다. 이러한 중인층의 성장과 활동은 전기에 문학운동으로, 후기에 개화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사회전체의 변화와 진전에서 기인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들은 미처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정치주도층이 되기도 전에 외세의 물결에 함몰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체질적 한계성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대한 물결을 헤쳐 나갈만한 능력을 키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막후세력 내지 주변세력의 위치에서 핵심세력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시대사상으로 받아들인 북학의 자기화(自己化)와 심화과정이 필요하고 결집력을 확대시켜 나가야 했는데 일제의 침탈로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이들이 문화운동의 기수로 등장하여 일제의 문화정책에 호응, 제반 사회문화계의 주도층이 되어 신분상승의 꿈은 이룰 수 있었으나 나라가 망한 한계상황 속에 제한된 성취란 오히려 사슬과 멍에로 작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옥자, 앞의 책, 269~270쪽.3. 의 편찬과 역사적 의의는 서얼의 역사를 적은 책으로, 1859년 대구의 달서강사(達西講舍)에서 편찬·간행되었다. 서얼들이 18세기 이래 통청운동을 일으킨 후 계속적인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여 19세기에 그 요구가 국가적으로 수용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 힘의 결집이 이 책으로 나타난 것이다. 16세기 후반 이미 서얼대기 부분과 전기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연대기 부분은 1413년(태종 13)부터 1859(철종 10)까지 실록(實錄)의 서얼관계 기사를 뽑아 엮은 것이다. 서술방식은 강목체(綱目體)를 체택하여 주요 내용을 요약한 강(綱)과 부연 설명한 목(目)으로 되어 있다. 전기 부분은 이라 하여 고려의 정문배(鄭文培)로부터 조선시대 최몽룡(崔夢龍)에 이르기까지 59명의 전기를 실었는데, 뒤에 누락되었던 인물 6인의 것을 추록하였다. 전기라기보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표기하여 놓은 것이다.의 편찬 취지는 책의 서문에 요약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임금을 향한 충성심은 적자·서자의 차이가 없는 법인데, 충성할 수 있는 기회, 즉 관직을 양반사대부와 동일하게 부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연대기의 내용도 서얼차대와 그 철폐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이다. 의 발문에도 그러한 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우선 현인록의 목적이 서얼 충신의 저명인사를 발췌·과시하여 인물이 많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이에 추가될 인물이 계속 배출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얼 인물이 정적(正嫡)의 인물에 결코 손색이 없으므로 유능한 인재가 차별대우를 받고 있음을 지적하고 “입현무방 유재시용(立賢無方 惟才是用)”이라는 선정신(先正臣)의 기본 방향을 준수하여 달라는 요구였다. 이들은 서얼차대를 철폐하려는 구체적 운동을 이미 영조 때부터 시작하여 1724년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하여 시위를 한 이래 계속 통청운동을 전개하였다.서울을 중심으로 한 명문의 서얼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구호를 내세웠다.①동통사로(同通仕路): 벼슬길을 사대부와 같게 하라.②승계권(承繼權): 경국대전 입후조(立後條)대로 후계권을 인정하라.③호부호형(號父號兄): 아버지와 형을 호칭하게 하라.지방 서얼의 요구는 향안동록(鄕案同綠; 향안에 함께 올려 달라),과 향교에서의 서치(序齒; 나이순으로 좌석을 정하라) 문제였다. 이상의 요구에서 핵심은 동통사로(同通仕路)로서 청요직(淸要職) 감찰의 임무를 맡은 대관(臺官)과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의 임무를 맡 걸친 서얼들의 줄기찬 허통 요구는 부분적으로 국가에 수용되다가 1851년(철종 2) 서얼의 문과 합격자가 승문원에 분관됨으로써 통청이 실현되었다. 는 이러한 서얼층의 신분상승운동이 기초가 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결집하는 단계에 이른 결실이다. 정옥자,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 183~185쪽.4. 의 편찬과 특징은 경상도 상주의 향리가 문인 경주 이씨 이진흥가(李震興家)의 5대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다. 이진흥이 편집한 필사본과 증손 이명구가 목활자(木活字)로 1848년(헌종 18)에 찍어 낸 간행본은 그 내용상 출입이 있어 같지 않다. 필사본이 1776~1777년쯤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사이 3대 70여년간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계속된 교열·추가 작업의 결과였을 것이다. 3권 1책으로 간행되었고, 그 주요 항목은 권 1 경국전(經國典), 이직명목해(吏職名目解), 불복신벌정록(不服臣罰定錄), 사족강리록(士族降吏錄), 제소(諸疎) 및 복호헌의(復戶獻議), 연조기담(曹奇談), 권 2 관감록(觀感錄), 권 3 관감록(觀感錄), 추부(追附)로 구성되어 있다.‘경국전’은 에서 향리에 관계되는 항목만 모은 것이다. ‘이직명목해’는 향리에 관계되는 용어 해설집이다. ‘불복신벌정록’과 ‘사족강리록’은 조선왕조 초기 향리로 전락한 사례집이다. 그 다음의 여러 소장과 헌의는 향리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문서들을 수집하여 놓은 것이다. ‘연조기담’은 향리에 대한 기담들을 권성보(權誠甫)가 편집해 놓은 것을 이경번(李慶蕃)이 수집해서 이 책에 편입한 것이다. 2권의 ‘관감록’은 고려시대 향리 열전으로 항목은 78항이지만 한 항에도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많은 인물이 편입되어 있다. 3권의 ‘관감록’은 조선시대 향리 열전이다. 두 편 모두 이진흥(李震興)이 편찬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향리의 사적 중 감동할 만한 기록이나 향리의 출세담, 또는 원래는 귀족 신분이었지만 정치사회적 상황 변화에 대처하던 대응에 따라 신분하락하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