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와 독립문을 다녀와서…중,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서울역사문화기행이라는 교양수업을 통해 서울에 있는 유적지 중 한 곳을 정하여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장소를 방문할 지 고민을 하던 찰나에 서대문 형무소가 문득 떠올랐다. 평소 서대문 형무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대문 형무소는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사용 되기도 하고 또한 평소 자주 들어 보기는 했지만 가보지 않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대문 형무소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교과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독립문도 덤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서울역사문화기행 강의를 통해서 일제수탈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이 생각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겨서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과거사규명 문제 등이 여론화 됨에 따라 일제 시대 그리고 독재정권 하의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진심을 담고 있는 곳을 물색하던 중 서대문 형무소가 이에 일치한다고 판단되어 이곳으로 답사 장소를 선택하였다.5월 5일 공휴일인 어린이날 여자친구와 데이트 겸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 하기로 했다. 마침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독립문역에 도착 후,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저 멀리 교과서에서만 보던 독립문이 보였다. 독립문에 대하여 조사해보기 전까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한 반일의 의미로 건립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사실을 알고 나서 내가 가진 역사적 지식이 너무나도 창피했다.독립문은 원래 영은문의 자리였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치고 속국을 자처하였다. 그래서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후에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반일의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되어 독립문의 건립 이유를 잘 못 알고 있을 것이다. ‘나’라도 제대로 된 역사 사실을 알고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독립문은 사실 지금의 위치가 본래의 위치가 아니다. 1979년 독립문 위로 지나가는 구조의 성산대로 고가를 짓게 되는 바람에 그 당시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가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당시 굳이 독립문의 위치를 옮겨가면서까지 고가도로를 건설해야 했는지가 의문스럽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우리의 유산에 대한 가치를 많이 두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해 보존처리공사과정에서 서대문구가 자격이 없는 업체에 일을 맡겨 녹물과 백화 흔적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독립문을 다시 원위치로 복원을 하겠다고 성산대로 고가를 허문다는 것은 말도 안되겠지만, 현재 상태에서라도 제대로 된 보존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독립문을 보고 나서 안쪽으로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니 붉은 벽돌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담장이 헐어져서 밖에서도 서대문 형무소가 잘 보였는데 공원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잘 조성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입구를 찾아 표를 끊고 들어갔는데 입구는 정말 평소 생각하던 교도소 모습 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무언가 공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전시관 이였다.전시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소개 되는 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였다.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 되었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수감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사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 순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렀던 곳이다. 사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 때에 우리나라의 민족투사들만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순국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일제는 한국의 식민지배를 위해 한국민을 감금하고 탄압할 시설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1908년, 적국의 8개 주요 도시에 본 감옥과 그 산하 8개 도시에 분 감옥을 설치하여 전국에 16개소의 감옥을 설치∙운영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직후 21개소, 1920년 이후에는 평균 30여 개소 내외의 감옥을 설치∙운영하였다. 이들 감옥은 전국 철도 ∙ 도로망을 따라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 한국 전역을 거대한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고 폭압적인 식민 지배를 자행하였다.1945년 광복 이후에 서대문형무소는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고, 대한민국 정부의 교도기능을 수행하였다..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였다. 이후 1988년 문화재청에서 제 10∙11∙12 옥사와 사형장을 국가사적 324호로 지정하였으며, 1998년 서대문구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좌우익의 이념문제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 정치∙사회적 문제의 현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진보당사건(1958), 민족일보 사건(1961), 동베를린간첩단(동백림) 사건(1967), 인혁당재건위 사건(1975)의 피해자들이 수감되거나 사형당하였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희생당하여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서대문구와 독립운동가 후손 및 역사학자, 시민운동가들이 ‘역사 교훈의 현장’으로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서대문구의 주도로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여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 되치∙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을 지배하는데 유화책을 쓰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강압과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력적 통치 방식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방식과 비교해 보아도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륜적 행위였다.고문 종류로는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이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물 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손톱 찌르기 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 넣어 마구 흔들며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는 ‘상자 고문’, 벽에 관을 세워두어 그 안에 사람을 감금하여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벽관 고문’ 등 하나 같이 모두 잔혹한 고문들이었다. 이러한 고문들을 관람하는데 마치 독립운동가들의 고통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가슴이 쓰라렸다.지하 고문실을 다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몰랐는데 마침 전시관을 나오자마자 관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어서 편하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관람 방향을 따라서 우리는 옥사로 향하였다. 옥사는 파놉티콘 형태라고 해서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하여 간수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감시∙통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각 감방에는 ‘패통’이 것이 설치 되어있었는데 위급상황 발생시에 안에서 버튼을 누르면 버튼에 의해 나무 봉이 밖으로 밀려서 밖에서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그리고 ‘타벽 통보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감방 벽을 딱딱 두드려 미리 정해 놓은 암호로 수감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이다. 또한 독방도 볼 수 있었는데, 전기와 변기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1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이였다. 이러한 곳에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 등 갖은 악형을 일 삼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밖으로 나와서 좀 더 둘러보니 ‘격벽장’ 이 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나도 눈을 감고 미루나무에 손을 올려 보았는데, 애국지사들의 원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통곡의 미루나무를 끝으로 답사를 마쳤는데, 나는 서대문 형무소를 관람하면서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떠올랐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잘 보여 주는 곳이다. 나치와 히틀러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나치에 반대했던 정치인과 지식인, 예술인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로 이곳에 수용했다. 수용된 사람 중 일부는 살아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마저 받아 보지 못하고 강제 노동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30개 나라에서 강제로 끌려온 4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펴보면 일제가 우리나라에 세운 서대문 형무소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시기적으로도 비슷하고 두 시설 모두 얼마나 인간이 잔혹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후세에 알리고, 교훈으로 삼게 하려고 박물관으로 전시를 해놓았다는 것이다.현재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5년 해방 이후 1947년에 희생자 박물관으로 꾸며졌으며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서대문 형무소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최근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하시마섬’ 과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 편지 333점에 대한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서대문 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더욱더 자극 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유네스코의 기본 정신을 조롱하는 일이며, 서대문 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은 이러한 일본의 역주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의미한 대응방안이라고 생각한다.이번 서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