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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진기행 읽고나서
    을 읽고나서나는 이번학기에 한국현대문학 소설 중 에서 김승옥의 이라는 작품을 선택해서 읽었다. 이것은 해방 후 1960년대의 작품이고 그 시대의 모습을 쫌 느꼈다. 그 시대는 전후 문학의 음울한 분위기나, 사회참여나 고발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역사와 현실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던 '개인''나''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김승옥은 1960년대 한국 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작가이다. 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에 깐 인간의 보편적 심성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잘 그려 낸 작품이다. 김승옥의 그 특유의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은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으로 시작했다. '나'는 무진으로 가는 버스에서 시찰원들의 무진의 명산물이 뭐냐는 대화를 무심히 듣고는 무진의 명산물은 안개라고 생각한다. 전무 승진을 앞두고 아내와 장인의 권유로 잠시 쉬기 위해 고향 무진으로 내려가게 된 '나'는 무진행 버스에서 어둡던 청년시절을 회상한다. 이것은 작품의 발단이다. 그 전개는 평소 '나'를 존경하는 후배 '박'과 세무서장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중학교 동창 '조'의 집을 밤중에 방문한 '나'는 그곳에서 성악을 전공했다는 하 선생을 만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함께 걷던 하 선생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무료한 무진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그녀로부터 암울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낀다. 절정 '나'는 성묘길에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를 목격하고 그로 인해 수없이 자살을 꿈꾸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는 그녀는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낀다. 바닷가에서 하 선생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그녀의 조바심을 통해 순수했던 과거를 다시 접하게 된 '나'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 막지마 결말 다음 날 아침,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과거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난 '나'는 하 선생에게 '사랑한다. 당신을 햇볕 속에 끌어 놓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가 찢어 버린다. '나'는 과거를 배신한 채 무진을 떠나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이 작품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두지지 있다. 무진이 라는 공간과 무진에 명산물 안개다. 여기서 무진이라는 공간은 두 개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서울로 표상되는 일상의 공간 세속적, 현실적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무진이라는 탈일상의 공간 몽환적, 탈속적의 의미로 했다.또 안개에 통해서 나는"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이 문단이 읽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처음에 무진이라는 공간이 몽환적, 탈속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안개가 이상적으로 희망, 민족의 미래의 의미로 생각했다. 희망, 민존의 미래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아침마다 보일 수 있다. 또한 희망은 언제나 인생에서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다음 자료를 찾아보니 이 뜻이 아닌 것 같아. 무진과 안개는1) 나른하고 축축한 몽환의 세계2) '나'의 젊었던 시절의 삶의 공간, 즉 무진의 골방 안에서의 불면의 밤과 수음, 담배 꽁초와 편도선 등?젊은 시절의 고뇌의 감상(感傷)과 어두운 추억을 암시.3) 현실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의 공간4) '나'가 기억 저편의 공간으로 묻어 두기로 한 회한과 절망의 공간그래서 희망 이라는 뜻은 내가 잘 못한 것 같았다.앞에서"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여기는 주인공의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구절이다. 비록 차에 탄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명산물은 아닐지라도 무진하면 안개가 연상되는 만큼 특징적인 것이기에 그러한다. 무진이라는 지명 자체에 '안개(霧)'가 들어 있음을 참조한다. 언제나 안개가 껴 있어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이는 특정한 공간. 당대 사회의 한 특성을 함축하도록 설정된 공간. 다시 말하면 '안개'가 버스에 탄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명산물은 아니지만, 무진 하면 자욱한 안개가 먼저 떠오르는 만큼 '안개'는 무진의 명산물임을 '나'는 강하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무진'이라는 지명 자체에 안개 무(霧)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끼는 안개를 단지 자연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어떤 감정을 지닌 형체로 보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 '안개'를 '여귀의 입김'에 직접 맞대어 표현한 직유법의 표현이다. 짙게 끼어 있는 안개를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을 지닌 형체로 보고 감정을 이입하여 드러내고자 하였다.
    인문/어학| 2014.06.08| 3페이지| 1,0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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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대의 불교와선
    당대의 불교와선1,당대의 불교당조는 수나라를 계승하면서 수가 완성한 통일의 기초위에 성립괸 당(唐 618~907)은 중국 전역과 중앙아시아에까지 미치는 거대한 국가를 이룩하였다. 황실에서는 지신들이 노자의 자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선호하였지만, 정부에서는 모든 종교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종교적인 관용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대의 불교는 수나라에 이어 종파적으로도 대성을 보게 된다.남북조시대의 수입 불교 영역에서 벗어나 중국불교의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 왕실의 불교보호정책과 함께 고승석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 지의대사가 성립한 천태종부터 현장, 규기의 법상종, 신수 혜능의 선종. 법장이 화엄종, 도선의 남산율종, 선무의 금강지. 불공의 밀교, 도작. 선도에의 한 정토교, 길장의 삼론종 등이 팔대종파 중에서 천태종이외에 다른 종파 모두 당대에서 독립되고 대성한 것들이다. 이들은 독특한 중국적인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적인 특성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멀리 떨어진 산속의 사원들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의 부유한 절에서도 지적인 열정에 넘친 승려들이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일반적으로 보아 당대의 불교는 더 중국적인 성격을 띠었고, 국가와 더 밀접하게 일체화되었으며,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승려와 사원에 관계된 행정을 담당한 승단의 관리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일반적으로 세속 관리의 감독하에 있었다.당 왕실은 불교를 어용종교로 삼고 일일이 천하통치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고조는 무덕 원년(618) 무차대회를 열어서 승도 69명을 태극전에 모아놓고 7일간 수행케 하였고, 태종은 전관 2년(628) 전몰자를 위하여 수도의 여러 절에 명을 내려 칠일칠야재를 올리고 참회를 행하게 하였으며 5월에는 선조들의 기일을 기하여 장경사에서 재를 지냈는데 이를 영식이라 하였다. 7월에는 백곡이 성숙할 때이므로 수도와 전국 각 주의 사관에 조칙을 내려 칠일칠야 독경 수행케 하였으며, 정월과 7월에 행하는 것을 정례화시켰다. 다음해 3년에는 국가안녕을 빌기 위하여 수도의 승려들에게 명하여 매월 27일마다 과 을 독경 수행케 하였다. 현종은 개원 18년 (730) 천하의 사관에 칙명을 내려 천장절에는 축수도량을 세우고, 같은 해 27년(739)에는 천하의 승도에게 칙명을 내려 국기일에는 용흥사관에서 재를 올리게 하고 천추절과 삼원일에는 개원사관에서 수행하게끔 하였다.또한 내도량이라 하여 궁정에 도량을 세우고 항상 승려들을 출입시켰는데국가의 기도와 황제의 기일, 그리고 탄생일에는 이들로 하여금 독경 수행하게 하였다. 이것은 궁정과 불교와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측천무후 때부터 성행하여 현종 때의 불공은 이 내도량을 중심으로 내외에 위세를 떨쳤다. 숙종 때는 내도량의 공양승이 수맥 명에 이르고 새벽에 염불독경하는 소리가 궁궐 밖에까지 들렸다고 전해지고 있다.다음의 대종 때는 내도량의 최전성기로서 매년 강탄절에는 고승대덕들을 청하여 공양을 올렸는데, 이를 내재라고 불렀다. 내도량에는 항상 백 여 명을 상주시키면서 독경염송케 하였는데 궁궐출입의 위의도 왕공귀족 이상으로 화려장엄하였다. 또한 서번이 침입했을때는 많은 승려들에게 명하여 을 독송하게 하여 이를 좇았고, 우란분회 역시 성대히 열었다. 한때 내도량제도와 내제제도가 중지될 때도 있었지만 황제들의 대부분은 이 제도를 따랐다.위에서 보았듯이 불교는 국가치세를 위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남불조 이래로 문제가 되어온 사문의 군친 불배 문제가 당대에 와서도 제기되었다.태종 정관 5년(631)에 조칙을 내려 승려는 부모를 공경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승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취소되었다.당대의 국가불교적인 차원에서 볼때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모순점으로 지적될 수 있지만 당나라 초기에는 귀족 정치 시대였고 귀족계급의 세력하에서는 불교 역시 이 귀족들과 교섭을 가지면서 귀족불교적인 색채로 흘러갔기 때문이며 더욱이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국가와 불교와의 대립양상으로 볼수 잇으며 유교사상과의 충돌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불교의배척이나 승려사태의 한 원인이 잠재되어 있다.당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불교교단 내의 골칫거리는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출가한 승려들이었다. 즉 사도승의 범람과 위람승의 횡행이 그것이엇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먼저 시험제도를 마련한 것이 그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먼저 시험제도를 마련한 것이 시경도승으로 중종 무렵부터 칙명으로 제정되었다. 나아가 엄중하게 승적을 고나리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이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것은 현종 때의 일인데 이 승적을 기준으로 상서성의 사부에서도 도첩을 발급하였으며, 이로써 정식 승려임을 증명케 하였다. 이를 사부첩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마음대로 횡행하던 사도승, 위람승들을 일소하고자 노력하였다.이전의 왕조에서는 승려가 저지른 죄 가운데 살인과 같은 큰 죄는 국법에 따라 다루어 졌으나 작은 죄는 승단의 계율에 따라 처리되었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와 승려가 저지fms 모든 죄가 국법에 따라 심판되었다. 당대 초기에는 승려들이 스스로를 빈도(貧道) 또는 사문(沙門)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760년 육조 혜능 (六祖慧能)의 제자인 신회(神會)가 스스로를 신(臣)이라고 부른 이후 이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이는 승려들이 스스로를 국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확고한 징표이다.당대에 불교는 일반 민중에게 어느 정도로 이해되고 어떻게 신앙되었나? 각 종파마다 주장하는 고원한 불교교학들이 과연 어떤 상식으로 대중의 종교로서 받아들여졌을까? 인간의 욕망은 장수, 행복, 명예와 이익 그리고 그 밖에도 한 없이 많다. 현세의 행복과 안녕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이것을 영속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불교를 신앙하게 된 것이 중국의 일반대중 종교로서의 불교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불교사상은 주로 선악 인과법인 인과응보, 윤회전생의 사상이었으며, 조사조상(造寺造像), 독송사경, 그밖에 여러 가지의 공덕을 닦음으로써 현세의 행복을 얻는 것은 물론이요. 내세에도 정토에 태어나 정각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사후심판의 사상이 생기고, 시왕(十王)심판의 신앙형태가 만들어졌으며 천당과 지옥사상이 유행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사상은 미타신앙인 정토교에 있어 가장 이해하기 쉽고, 신앙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대 사회에서의 미타신앙은 상당한 지지기반을 얻어서 폭넓게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또한 불교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각 사원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강석이 마련되고, 승속의 문도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석은 대부분이 전문적인 것으로서 일반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달리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여 통속적인 불교보급을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 다음에 말하게 될 속강(俗講)이다. 이밖에도 각 지방을 다니면서 교화에 전념하는 유학승들의 활약 또한 컸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일반 대중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여 믿었다.2, 당대의 선종양나라 때 보리달마에 의하여 전래된 선종은 그로부터 달마를 중국선의 초조로 삼고 있는 선가에서는 서천(인도)28조설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그 후에 혜가, 승찬, 도신, 홍인에게 전해지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신수, 혜능 등이 출현하여 비로소 선종이 확립되었다. 뿐만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고승석학들이 이 계통에서 배출되어 선종의 일파는 융성해졌다. 당나라 말기부터 여러 종파들은 차례로 쇠퇴하여 갔으나 선종만은 전성기를 맞아 이후 중국불교는 선종으로 대표되기 까지 하였다. 그것도 이후의 선종은 거의가 육조 혜능계통이 맥을 잇는데 당대에는 신수 계통인 북종선과 혜능계통인 남종선이 공존하면서 불교계에서 활약하였다.
    인문/어학| 2014.06.08| 5페이지| 1,000원| 조회(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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