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제 1부 마르틴 루터의 생애 .... 4제 2부 종교개혁의 배경1. 종교개혁 시기의 유럽 ... 52. 종교 개혁의 원인 ... 73. 5대 솔라(Five Sola) .. 94.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숙되기까지 ...... 10제 3부 루터의 생애와 사상1. 어린 시절 및 종교적 체험 ... 112. 루터 수도사가 되다 ... 133. 비텐베르크대학교 입학 ... 154. 루터의 로마여행 .... 165. 종교적·신학적 의문과 번민 . 166. 루터의 탑실체험과 깨달음 . 20제 4부 루터의 95개조 의제(논제) 발표1. 95개 논조 발표 배경 .... 232. 교황청의 반응 ...... 34제 5부 종교개혁에 따른 논쟁들1. 하이델베르그 논쟁(하이델베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성격 (Unverfuegbarkeit) 이 손상될 위험에 빠졌다.롬바르두스의 교의학 공부는 1509년 가을 루터가 조직신학사(Sententiarius)가 됨으로 일단락 되었다. 롬바르두스 연구와 함께 그는 이제 어거스틴을 연구했고, 어거스틴의 소책자들 외에도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과 신의 도성 (De civitate Dei) 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 저서들을 아직은 연구하지 않았다4. 루터의 로마여행(로마 교회 부패에 대한 회의)1510년 11월 경 루터는 수도원내 다른 동료 한 사람과 더불어 로마에 파송되었다. 어거스틴 엄수파 독일지부 총 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가 주도하는 규율의 통합, 즉 좀 더 강한 규율의 추진과 작센지역의 헤이해진 수도원들의 수도사 통합을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름으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이에 대한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의논하기 위해 대표로 로마로 파견된 2명의 수사 가운데 일원으로 루터는 1510년 11월에서 1511년 4월까지 로마 방문 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여행은 루터의 일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었다. 로마에서 개최된 수도원 총회에서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러한 반박은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각되었다 루터는 4주간 로마에서 체류했다루터에게 로마는 어떤 도시였는가?루터는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도시들을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땅에 엎드려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진실로 거룩한 도시 로마여!” 하고 인사했다. 로마에 한 달 동안 머무르는 동안 루터는 교황의 자문을 받는 사무를 마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를 구원하는 일에 바쳤다.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렸고, 카타콤과 유적들을 방문하면서 루터 역시도 여느 사람들처럼 로마 순례를 앙모했다. 루터는 성자들의 공로 축척으로 구원을 이루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신부와 승려들이icult thing, even for the most learned theologians, to exalt before the people the greatriches of indulgences and, at the same time, the necessity of true contrition.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40. True contrition seeks and loves punishment, while the ampleness of pardon relaxes it and causes men tohate it or at least gives them occasion for them to do so.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하며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41. Apostolic pardons ought to be purchased with caution, lest the people falsely suppose that they are to bepreferred to other good works of charity.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42.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it is not the mind of the Pope that the buying of indulgences is to be inany way compared with works of mercy.면죄증의 속죄를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한다.43.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he who gives to a p이 루터의 스승인 투르트페터 (Trutvetter)와 우징겐 (Usingen)을 설득할 수는 없었으나, 비텐베르크 신학의 사안을 지지하는 브렌쯔 (Brenz), 빌리칸 (Billikan), 에프너 (Ebner), 쉬네프 (Schnepf) 그리고 마틴 부처 (Martin Bucer)와 같은 남부독일 출신의 젊은 신학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2. 카예탄 추기경과의 논쟁(아우스부르크의 심문 1518년)5월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1518년 5월 19일 에크의 오벨리스키 (Obelisci)에 대한 대응저서인 아스테리스키 (Asterisci)를 잉골스타트로 보내주었다. 얼마 전에 칼스타트는 406개의 논제를 출판했고, 여기서 그는 루터와 상관없이 요한네스 에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루터는 오히려 에크에게 칼스타트를 거칠게 대하지 않고, 이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해에 루터는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라틴어로 출판했고, 1516년 5월에 처음으로 편집했던 독일신학 2판을 발간했다. 이 책은 독일 신비주의에 의해서 나온 것이며, 아마도 1400년 프랑크푸르트 독일기사회(Deutschherrenhause)의 익명의 한 사제에 의해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타울러가 독일신비주의를 보듯이, 루터도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이라는 사상을 강조하며,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외에도 루터는 독일어로 쓰인 이 글에서 라틴어로 쓰는 로마의 신학적 사고방식과 대립되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그래서 그는 독일신학(Theologia deutsch)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우리의 적들은 언제나처럼 우리가 독일신학자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고자 한다. 나와 그들이 여태까지 라틴어로도, 희랍어로도, 또한 히브리어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하나님을 내가 독일 말로 듣고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이 작은 책자가 알려지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일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1521년 4월 18일 루터가 브롬스(the Diet of Worms)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Luther's Works, vol. 32, pp. 112-113)이런 루터의 완강한 태도에 대해 보름스 의회는 즉시 어떤 처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퇴장할 대 그는 독일인에게 둘러싸였다. 그러나 루터는 군중을 위로하면서 숙소로 갔다. 프레데릭 선제후는 후에 루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마르틴 박사는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훌륭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너무 대담했다.”그가 엄청난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카를5세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하여 마틴 루터를 로마법의 보호로 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로 규정(법익 박탈)하고 그의 저작들을 판매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그와 함께 마틴 루터는 파리대학교, 루뱅대학교, 콜로뉴대학교의 신학부로 부터 정죄당하고 교수직도 파면당한다.이 칙령은 일생 동안 루터에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루터의 운동에 족쇄를 채웠으므로 그의 편을 든 선제후가 한동안 루터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1521년 4월 24일 트리어 대주교 숙소에서 루터에 대한 특별재판이 한 번 더 벌어졌고, 여기서도 그는 다시금 취소를 거부했다. 1521년 4월 25일 저녁, 루터는 모든 경고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조처를 취하겠다는 황제의 통보를 받았다. 4월 26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났다. 작센 의원들의 암시로 그는 도중에 어디론가 가서 숨게 될 것임을 준비했다.프리드리히 현제는 루터를 보호하고자 그의 지역 어디엔가 루터를 숨기려는 계획에 동의했었지만, 그 자신도 만일 황제가 루터의 소재를 물을 경우, 떳떳해야 했기에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비텐베르크로 귀환도중 루터는 도중에 사로 잡혔고, 기사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에서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숨어 지냈다.보름스에서는 그러는 사.
믿음의 조상이 된 룻 룻 기(RUTH)믿음의 조상이 된 룻 룻 기(RUTH)성경에서 사사 시대는 넓게 계산할 경우에도 가나안 정복전쟁 후 요셉의 해골이 세겜 땅에 묻힌 주전 1390년부터 사울 왕이 즉위한 해인 주전 1050년까지로, 340년이 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사 시대의 연대를 직선적으로 계산하면 410년이 되므로, 사사 시대에 중복된 기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B.C. 1378-B.C. 1043년까지의 약 330여 년에 걸친 사사 시대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압제, 그리고 회개와 새로운 평안의 도래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불신앙의 시대요, 혼란의 시대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앙적 환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들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면면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본서 '룻'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룻기'는 좋지 못했던 때에도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평화스러운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본 서론은 이러한 상황들의 역사적인 배경과 룻기의 특징, 그리고 목적과 정경으로서의 가치 등을 밝힘으로써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고자 하는 그 분의 뜻을 좀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탈무드'(Baba Bathra 14b)는 '사무엘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그리고 룻기를 기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노만 L. 가이슬러'(Norman L. Geisler)와 같은 학자들은 이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본서의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서의 저자를 '사무엘'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서의 4:22절에 '다윗'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죽었으므로(참조, 삼상 25:1), 사무엘을 다윗 시대까지 언급한 본서의 저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다윗이 명군으로 이름을면하기 위해', 또는 '여인의 현숙함을 위해'라는 잘못된 해석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들은 본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러 가지 교훈들 중의 하나일 뿐 본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본서의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방의 보잘것없고 비천한 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반열에 들게 되었으며, 마침내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무가치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룻기의 목적을 '역사적인 목적'과 '교훈적인 목적', 그리고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역사적 배경3. 기록 목적*1) 역사적인 목적룻기의 역사적인 목적은 족보의 기록에 있었다. 즉 룻기는 단순히 한 신앙의 여성이 겪는 고통이나 좌절하지 않는 믿음, 또는 축복만을 서술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애를 통해 다윗 왕의 조상이 누구였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장차 그의 후손으로 탄생할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설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룻기의 클라이맥스는 룻기의 족보 기록이라 할 수 있다.2) 교훈적인 목적룻기의 교훈적인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이스라엘의 풍습에 대한 증거이다. 즉 룻기는 그렇듯 짧은 지면에 비해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풍습들인 추수 장면, 친족의 권리와 의무, 결혼 풍습 등 많은 것들에 대한 풍습과 법도를 보여 준다. 둘째는 다윗 왕조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동시에 부모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효도가 어떤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 준다. 즉 '룻'의 지극한 효성은 물질적 축복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영적인 축복까지도 수반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3) 기독론적인 목적룻기 전체의 주제인 '구원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흐름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것이 본서의 기독론적인 목적인 동시에 주된 목적이기도 하다. 즉 본서는 한 이방 여자의 구원을 통해 무가치한들은 다음과 같다.첫째, 솔로몬이 기록되지 않은 다윗 왕조의 족보이다.즉 만약에 본서가 다윗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솔로몬의 재위와 그 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 빠질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족보에는 다윗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사실은 본서의 기록 연대가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둘째, 본서에 기록된 풍습의 증거이다.*역사적 배경다윗의 족보에 의하면 본서에서 룻의 친족으로 등장하는 보아스와 다윗간의 격차가 4대밖에 안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룻의 시대적 배경이 다윗으로부터 4대 위의 시대, 즉 사사 시대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시대적 배경은 성경의 증거 그대로 사사 시대인데 본서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속에서도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5. 배경첫째, 본서의 시대적 배경이 사사 시대임을 선언한 룻 1:1절의 말씀이다.베들레헴을 제외하고는(1:1), 이 책에서 언급되는 지역은 모압이 유일하다. 룻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1), 곧 주전 1370-1041년경에 있었던 일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사사시대 와 왕정기를 이어주고 있다.둘째, 다윗의 족보를 기록한 4:18-22절의 말씀이다.*역사적 배경룻기의 이야기는 대략 11-12년 기간에 걸쳐 전개된다. 1:1-18에 나오는 모압에서 흘러간 10년(1:4) , 1:19-2:23에 나오는 보아스의 들판에서 흘러간 여러 달 (4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1:22-2:23), 3:1-8에 나오는 베들레헴에서 보낸 하루와 타작마당에서 보낸 하루 밤, 4:1-22에 나오는 베들레헴서 흘러간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주 무대이다.6. 무대*2. 내용분해Ⅰ. 내용 개관1장 사사시대의 영적 혼돈기에도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는다. 비극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어진다. 어디나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연속적으로 이어)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20)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암으로 이주함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암으로 이주함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 경로*내용분해2장 . 룻과 보아스의 만남과 보아스의 선대 룻의 봉양(1-7)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어 나오미를 봉양함 보아스가 룻에 대하여 알게 됨 보아스가 룻을 선대함(8-16) 룻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일부러 이삭을 남기게 함. 나오미를 봉양하는 룻을 칭찬함(11)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 나오미가 룻이 계속 보아스의 밭에 가게 함(17-23) 보아스는 기업을 무를 자임(20)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라(22)내용분해3장 . 룻과 보아스의 기업 무를 자의 언약 나오미가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나아가게 함(1-13) 그 누울 때에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4) 보아스가 다음 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하겠다고 함. 룻이 다음 날 집으로 돌아 감(14-18) 보리 여섯 되를 가지고 나오미에게 돌아와 이야기 함.*내용분해4장. 오벳의 출생과 다윗의 족보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됨(1-12)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 같게 하실 것이다(11)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12)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음(13-22)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14)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 함.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이다(17) 베레스-헤스론-람-암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18-22)모압1234모압1234가정이민룻과보아스의만남사랑의 시작사랑의 완성*3. 룻기의 모형론룻기는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도 많은 상징들과 상징적 인물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을 크게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값 주고 사셨을 뿐만 아니라(참조, 고전 6:20), 우리의 맏형이 되셨다(참조, 롬 8:29; 히 1:6). ② 고엘은 상실한 유산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풍족하실 뿐만 아니라(참조, 엡 1:7), 완전한 것이었다(참조, 히 9:12). ③ 고엘은 그 상실한 유산을 기꺼이 되시고자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렬히 원하신다. ④ 고엘은 죽은 친족의 처와 결혼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었던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는 데 주저 하지 않으신다.3. 오르바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복음을 듣기는 했으나 믿기를 거부하는 대부분의 이방세계를 상징한다.'아처'가 말한 '고엘'의 자격과 그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형론은 다음과 같다.*룻기의 모형론4. 나오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이러한 사실에 대해 '메릴 F. 엉거'(Merrill F. Unger)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장한다. ① 나오미는 엘리멜렉과 결혼을 하고 가나안에서 축복을 누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②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주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 ③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음을 당한다; 분리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한다. ④ 오르바가 모압에 남을 것을 선택하였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거부한다. ⑤ 룻은 유다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신앙적인 유대인들이 주를 기억해 낸다. ⑥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회개한다. ⑦ 보아스가 룻과 혼인한다; 구원받은 자들이 축복 받은 안식의 나라로 들어간다.*4. 룻기의 신학룻기에는 결코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기독교의 신학 두 가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전파되어야 하며 누구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사기(JUDGE)*주요 목차사사기의 역사적배경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관계 사사기의 연대와 시작에 대한 연구 사사시대의 특징 사사기의 내용분해 사사시대의 시대적 위치 사시시대의 성격 사사기의 통치형태에 대한 이해 사사기의 영적 암흑기 사사기와 룻기의 연결고리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사기(JUDGE)행할 때 삶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왕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각자'그 소견에 옳은 대로(삿21:25)'*1. 사사기 (Judges)의 역사적 배경1. 명칭1) 히브리 맛소라 성경 :2) 70인역,불가타역경 :2. 저자즉 이 시대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구하던 때'(참조, 삼상 8:5)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때는 오직 사무엘이 사역할 때밖에 없으므로 본서의 저자를 '사무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가 '사무엘'이라는 신빙성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본서의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어도 정확히 사무엘이라고 지적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서의 저자는 사무엘, 또는 사무엘 시대에 존재했던 무명의 저작자라고 추측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편 본서의 사무엘 시대와의 역사적 연관성은 본서의 저작 연대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게 된다.많은 구약의 역사서들의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본서의 저자 역시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유대의 전승과 초대 교회의 신학자들, 그리고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의 저자를 '사무엘'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본서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참조, 삿 17:6; 18:1; 19:1; 21:25)라는 표현 때문이다.본서의 히브리 명칭을 !yfip]/v ; 40세였고 (참조, 수 14:7),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의 1차 정복(수 1-12장)을 끝낸 때의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 (참조, 수 14:10).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하여 가나안의 1차 정복을 마친 때까지의 기간은 45년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하여 '세렛 시내', 즉 '시혼'과 '옥'을 점령한 요단 동편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이 38년이었으므로(참조, 신 2:14) '세렛 시내'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1차 정복 사업은 45년에서 38년을 뺀 7년의 기간이 소요된 후였고 그 연대는 B.C. 1406에서 7년을 뺀 B.C. 1399년이라 할 수 있다.2. 사사 시대의 시작에 관한 연구*여기까지의 연대를 결정한 후에 생각하여야 할 마지막 문제는 여호수아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죽음이 바로 사사 시대의 장을 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은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다는 증거만을 제공해 줄 뿐(참조, 수 24:29) 그 외의 증거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론 가능한 사실들을 근거로 한 하나의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호수아'의 나이가 '갈렙'의 나이보다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이 무리는 아닌데 그 이유는 갈렙이 자기의 소유를 여호수아에게 청원할 때 매우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였으며(참조, 수 14:6-12), 이스라엘이 2차 정복을 시작할 당시, 즉 갈렙이 85세인 B.C. 1399년에 모세의 나이 90세, 또는 100세라고 생각할 때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B.C. 1399년에서 10년, 또는 20년 후인 B.C. 1389년에서 B.C. 1379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사사 시대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때로부터 옷니엘이 최초의 사사직을 수행할 때까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로 들어가는 준비와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여 운다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남방 유다와 북방 요셉이 모두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 선언을 듣고 소리 높여 우는 모습이 제 1 서곡의 주요 음조라고 할 수 있다. 제 1 서곡의 주제가 애가의 음조를 띠고 있으니 사사기전체의 그림이 비창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복선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바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사기의 처음 출발은 그래도 상서로왔다. 유다 단락 (3-21) 이나 요셉 단락 (22-36) 모두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의 승리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사기 내용분해*3) 삿 1:1-21 의 구조여호와께서는 승리의 약속을 주시면서 유다가 먼 올라갈 것을 지시하였다유다가 이 약속을 믿고 올라가서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인다. 이때 그 왕 아도니 베섹을 사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는 이야기가 나온다이 때 옷니엘이 드빌을 취하고 그 대가로 아내인 악사를 얻고, 결혼 축하금으로 밭과 샘물을 얻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 단락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사사기 내용분해특별히 유다 단락 (1:1-21) 은 유다 지파의 성공을 다루고 있기에 낙관적이다.처음에 이스라엘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까”라고 묻자,여호와께서는 2절 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인들을 진멸하였다.*A. 전 망 : 유다 승리의 약속 2절B. 유다 - 시므온 동맹 3절X1 올라가서 (4절; 아도니베섹 이야기) 4-8절X 유다의 성공 정복전쟁X2 내려가서 (9절; 갈렙과 악사 이야기) 9-16절⇕A' 회고: 야훼께서 유다와 함께 하심 19a 절C' 부록: 유다와 베냐민의 부분 실패 19b-21절B' 유다-시므온 동맹 17절사사기 내용분해*4) 유다 지파 : 전체 사사기에서의 기능아니나 다를까? 불행하게도 사사기를 살펴보면 유다는 초반의 강력이러한 이방 악습을 따랐으며, 그로 인해 70명의 아들이 거의 몰살당하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9:5).11장. 입 다*[인적 사항][서자 출신의 사사]1. '입다'는 '하나님께서 여신다'라는 뜻2. 길르앗 사람으로,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임(삿11:1).3. 이스라엘의 열 번째 사사.[시대적 배경]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이 지파별로 가나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쫒아내지 못한 가나안인들과 더불어 살던 B.C 1100-1040년경의 사사시대[입다의 서원]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 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 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금지된 것이기 때문이다 (레 18:21, 20:2-5; 신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 밀곰 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13장. 삼 손*[긴 머리털을 가진 장사][인적 사항]1. '삼손'은 '태양의 사람'이라는 뜻.2. 소라 땅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소생.3. 이스라엘 사사시대 말기의 사사.[시대적 배경]가나안에서 블레셋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B.C.1055년경에 이스라엘 사사로서 20년간 활동했다.[생 애]1. 수태치 못한 모친의 서원기도로 태어나 일평생 나실인으로 바쳐짐.2.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취함.3. 레히로 쳐들어온 블레셋인 천명을 나귀 턱뼈로 죽임(삿15:9-20).4. 소렉에서 사귄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꾐에 빠져 힘을 상실하고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됨(삿16:4-21).5. 최후의 순간까지 다시 힘이 회복옮겨 간다는 것이다.그것은 이스라엘 내의 중심적인 위치가 요셉지파에서부터*그런데 장자의 명분이 여전히 요셉지파에게 있지만 그러나 통치권은 유다지파에게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족보를 맨 먼저 기록한다고 되어있다. 성경의 이런 말씀들을 읽어보면,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사사시대의 성격을 좀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편 78편에 보면 사사시대에서 역사의 흐름이 요셉지파 중심의 역사흐름에서 유다지파에게로 이행하게 된 경위와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9절을 보면 에브라임지파에 대한 불신앙, 불순종에 대한 책망이 나온다. 그 내용은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돌아섰다)고 되어 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60절에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요셉지파를 버리고 유다지파를 택하셨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78편에서 취급하는 역사는 사사시대라고 짐작 할 수 있다. 이 사사시대에 에브라임이 전쟁의 날에 활을 가졌으면서도 등을 돌렸다라는 것은 그 당시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 곧 지도자적인 역할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는 가나안에서 대적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정착케 하는 사명을 받은 시대, 즉 전쟁을 수행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하면 전투하는 교회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이런 전투의 사명을 교회(이스라엘)가 감당하는데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지파가 요셉지파(에브라임지파)였는데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 책임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어겼다고 이야기한 다음 그 이하에 보면 사사시대의 지도적 역할을 맡은 그런 사람이 제대로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그 책임을 포기해 버리니까 결국 그 영향이 온 이스라엘에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정복세대로서의 책무를 감당하지 못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배역한 역사에 대해서 그 이후에 쭉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서 실ow}
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목차 • 루터의 생애 • 당시 중세시대의 배경 • 95 개조 논제발표배경 • 95 개조 논제발표 • 95 개 논제내용의 함축적 의미 • 로마교황청의 초기반응 • 하이델베르그논쟁 •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 프리에리아스의 루터공격 • 아우스부르크의 심문 ( 카예탄추기경과의 논쟁 ) • 라이프찌히논쟁 - 에크와 루터의 논쟁 • 루터의 파문과정 • 루터의 대응과 로마교황청 • 루터의 종교개혁 3 대 논문 • 또 하나의 저서 “ 선행론 “ • 보름스 제국회의 • 바르트부르크체류 • 비텐베르크의 소요 • 비텐베르크복귀후 루터활동 • 농민전쟁 • 마르부르크 회담 • 루터의 말년 • 루터의 신학사상1. 마르틴루터의 생애 유럽 근대 초기의 종교개혁자 프로테스탄티즘의 창시자 법사상사 루터 _ 생애 Martin Luther2. 마르틴루터의 생애 연도 내용 1483 년 11 월 10 일 Eisleben 에서 출생 1501 년 -1505 년 에르푸르트대학 1505 년 7 월 2 일 슈토하이렘 근처 벼락사건 1505 년 7 월 17 일 성 어거스틴 수도원 가입 1508 년 비텐베르그대학 입학 1510 년 로마 방문 , 스칼라상타 계단 1516 년 설교중 면죄부 비난 1517 년 10 월 31 일 95 개 신학 논조게시 1518 년 4 월 26 일 하이델베르그 논쟁 1518 년 10 월 12 일 -14 일 아우스부르크 심문 1519 년 7 월 4 일 -14 일 라이프찌히 논쟁 1521 년 보름스 제국 회의 1522 년 독일어 성서번역 1525 년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 1529 년 성만찬 논쟁 1546 년 6 월 13 일 Eisleben 에서 63 세에 사망3 . 당시 중세시대 배경 1.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1451-1506) 2. 토마스 모어 (1477-1535) 3. 미켈란제로 (1475-1564) 흑사병 창궐 끊임없는 전쟁과기근 그리고 홍수로 인한 식량감소로 의식주문제발생 사회변화갈망과 구원의 갈증으로 순례 , 성물숭배 , 고해성사 15 세기라 스크립투라 ; 오직 성경 ) b a 베드로 성당 건축 반대 b 교황이 연옥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 반대 1) 3 대 솔라 2) 95 개 논조 3 대요약 6 . 95 개조 논제내용 함축적 의미 c Sola Gratia ( 솔라 그라티아 ; 오직 은혜 ) Sola Fide ( 솔라 피테 ; 오직 믿음 ) c 면죄부 제도의 해로움 지적7. 로마교황청의 초기반응 잉골스타트 ( Ingolst dter ) 의 신학부 교수였던 요한 에크 (Johann Eck ) 가 작성 반박논제 1518 년 1 월 도미니크교단총회에서 논의 – 텟첼이 제안하고 콘라트빔피나가 작성 날카로운 기둥들 ( Obelisci ) and 면죄부논쟁에 대한 두 개의 날카로운 공격 -1518 년 3 월 비덴베르크대학에서 반명제 사본 불태움 작은 별들 ( Asterisci ) 이라는 글로 조목조목 반박8. 하이델베르그 논쟁 일시 : 1518 년 4 월 26 일 주최 : 어거스틴 수도원 총회 개최 이유 : 스타우피츠 ( 에르푸르트 어거스틴 수도원 원장 / 독일지부 총책임자 ) 에 의한 소명기회 부여 루터의 논제 게재 - 28 개의 신학적 논제와 12 개의 철학적 논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소개 결과 ; 어거스틴 교단은 루터 옹호하지만 작센의 도미니크파 회원들은 이단혐의를 씌워 로마에 고소9. 십자가신학과 영광의 신학 영광의 신학 예수 그리수도가 없는 … 로마카톨릭의 영광의 신학은 신학이 아니며 , 그리스도도 모르고 , 십자가의 가치도 모르는 무지라고 언급하고 , 로마카톨릭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규정함 구원 = 십자가의 은혜로만 “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 그 십자가를 통해 계시한다 . 십자가 신학 영광의신학 VS10 . 프리에리아스의 루터공격 1) 교황 레오 10 세 - 교황청소속 신학자인 프리에리아스에게 루터의 논제를 심사 할 것을 명령 2) 프리에리아스의 루터 공격 - 초점을 면죄부에 두지 않고 교황의 권위에 두고 선언 3) 내용 a. 보편적 교회는 않았기에 비성경적이라 비판 에크 : 위클리프와 후스의 오류를 따른다는 말인가 ? -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 루터 : 로마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희랍사람들도 구원을 받았다 . 후스를 정죄한 콘스탄스 공의회를 비난 에크 : 후스와 위클리프의 입장을 변호한다면 이단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루터 : 종교회의도 잘못을 범한다 … 성경으로 무장된 평신도가 교황보다 낫다며 공의회의 권위를 부인 12. 라이프찌히 논쟁 - 루터와 에크의 논쟁 (1519 년 7 월 4 일 -14 일 )2) 두 번째 논쟁 – 연옥 (purgatory ) 에크 :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속량하셨기에 그들이 죄에서 벗어났다고 주장 ( 마카비 2 서 12:45) 루터 : 마카비서는 정경에 속하지 않고 외경이므로 권위가 없다고 반박 루터는 이 논쟁에서 교황과 종교회의 그리고 외경의 권위를 부정 3) 세 번째 논쟁 – 면죄부와 고해 ( 면죄부 자체에 대한 토론은 없었음 ) 에크 : 교회가 전부 잘못했고 당신은 아니란 말인가 ? 루터 : 내가 믿는 진리를 죽기까지 변호하기로 작정 13. 라이프찌히 논쟁 - 루터와 에크의 논쟁 (1519 년 7 월 4 일 -14 일 )14. 루터의 파문과정 1) 쾰른의 신학자들 – 교황의 우위권에 대한 루터의 8 개 항목의 문구를 정죄하고 책자의 소각을 요구 2) 뢰벤의 신학자들 –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고 책자의 소각을 요구 3) 로마교황청 – 쾰른과 뢰벤의 신학자들의 평가를 근거로 파문교서 “ 주여 분기하소서 ( Exsurge Domine ) ” 공포 (1520 년 6 월 15 일 ) 4) 이 교서를 통하여 루터의 작품과 설교내용 중 41 개 조항을 지적하며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단죄하고 루터의 책들은 루뱅에서 소각 ---- 60 일이내에 철회하지 않을 경우 파문 당할 것임을 경고 밀팃즈의 레오 10 세에게 편지 보낼것을 권고 루터 : “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 ” 전달 … 성서를 근거로 교황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 프레드리히의 보호아래 바르트부르크로 피신 ) 결과 ; a. 파리대학교 , 루뱅대학교 , 콜로뉴대학교의 신학부로부터 정죄 당하고 교수직 파면 b. 보름스 칙령 가결 (1521 년 5 월 26 일 )… 루터와 그를 보호하는 모든 사람을 법의 테두리 밖으로 추방 19. 보름스 제국회의 - 1521 년 4 월 17 일 -19 일왕성한 저서 활동 … 시편 68 편 , 21 편 , 22 편 , 37 편 주해 , 마리아 찬가 주해 완성 Antilatomus 집필 … 뢰벤의 신학자 라토무스를 반대 ( 저서 불태울 때 방어해 준 인물 ) … 핵심내용 )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의 문제 … 원죄는 은총으로 완전히 용서되나 경험적으로 인간은 매일 후회 와 참회로 남아있는 죄의 통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 은총이 인간의 인격을 의롭게 한다면 동시에 인격속에 남아있 는 죄의 세력에 대항해야한다 대주교인 마인쯔의 알브레히트 … 할레에 성유물 전시관 개관하여 방문자와 예배자에게 일괄 면죄 약속하며 신자들을 초청 “ 할레의 우상숭배를 반대하며 " 논문 ….. 대주교의 굴복 “ 수도사의 서원에 대하여 " 완성 …. 나는 그리스도외에 어떤 누구도 알지 못한다 . 나는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이다 ….. 최고의 자유 …. 1524 년 10 월 4 일 수도복을 벗음 . 20. 바르트부르크 체류 (1521 년 – 1522 년 )1) 비텐부르크의 급진적인 개혁운동 전개 … 칼슈타트와 쯔빌링 , 멜랑히톤에 의해 2) 빵과 잔을 다 배분하는 양종성찬의 성례거행 …1521 년 10 월이후 개인미사 폐지 … 루터의 입장 미사의 폐지나 성상제도 , 독신제도의 부당성인정 .. 점진적개혁희망 3) “ 미사의 남용에 대해 ” (1521 년 11 월 ) 저술하여 로마교적 미사교리 반대하고 , 희생제사와 은혜의 구별 강조 … 히브리서 “ 단 한번의 십자가 희생 ” 을 증거로 내세움 4) 비텐베르크 5 일 방문 … 폭력행위 목격 5) 바르트부동자 , 농민 모든 권리의 박탈과 노동 착취 그리고 중과세 2) 발생 : 1524 년 6 월 지방영주들에 대한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의 서부 , 남부 지역으로 확대 독일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 3) 쉬바비아 농민들의 12 개조 요구조건발표 (p59) -- 1525 년 2 월 27 일 -3 월 1 일 …. 루터의 호응 ( 서명 ) 을 기대 루터의 반응 …“ 평화에의 권면 ” 슈바비아 농민들의 12 개 조항들에 대한 대답이라는 권고문 발표 내용 ; 영주들은 학정 중단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줄 것을 촉구 국가 권력에 대한 항거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항거이다 …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치 말라 4) 루터의 권고 ; 개혁이란 혁명이 아니라 설교된 말씀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라야 한다 . --- 농민운동은 복음의 진수와는 거리가 멀다고 압축 5) 농민들은 결국 뮌져와 같은 과격한 개혁자를 따라 폭력적으로 변함 이에 대해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호의에서 태도를 바꿔 농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1525 년 5 월에 “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 " 라는 글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6) 영주들의 농민운동 제압 … 사망자 수만 10 만명 7) 농민운동의 결과 …. 루터의 개혁운동사의 전환점이다 …. 많은 지지기반 약화1 2 3 24. 마르부르크 회담 독일에서 루터파가 이단으로 탄압받자 스위스 쯔빙글리와의 연대 필요성 대두 성만찬 토론 ….. 루터파와 쯔빙글리파 마 26 장 :26 의 “ 이것은 내 몸이다 ” 에 대한 말씀 해석문제 공통점 …. 로마교황청의 화체설이 잘못되었다는 의견 다른점 …. 루터파 공재설 : 믿음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 . …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믿음으로 존재 . 쯔빙글리파 기념설 : 단지 기념일 뿐이다 . 참고 화채설 : 떡과 포도주가 실재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설 ( 성채 변환설 ) 영적임재설 ( 칼뱅 ) : 디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서 우리의 영혼이 된다는 설1 2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