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 사상 및 내용 요약루카치는 베버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일부는 비판하며 대조적인 이론을 내놓았던 후세대 철학자이다. 그는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르주아로 살다가 역사의 변혁 속에서 우여곡절의 지적 여정을 겪고 난 후, 맑시즘을 수용하면서 사회주의적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 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퍼질 때 본국인 헝가리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데 기여를 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어 오스트리아 빈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의 지적 여정은 더욱 변화무쌍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는데, 레닌도 루카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등 유라시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회주의 사상가이지만, 그는 소련의 스탈린 위주의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지배에 저항하기도 했던 ‘인문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상가였다.루카치의 사상에 기저를 이루는 것은 바로 ‘인간 소외’이다. 맑스 사상을 베버의 시각에서 해석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맑스 사상을 받아들여 사상을 확립했기 보다는 베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 소외’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베버의 주장과 같이, 그는 인간 소외가 경제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의식의 영역에까지 확산되었음을 강조한다. 루카치 사상의 특별한 점은 인간 소외를 야기하는 병리를 ‘사물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 관계를 다 사물들의 관계로 치환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상황은 곧 인간 소외를 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물화 된 상황을 극복할 것인가? 바로 ‘주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단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를 극복할 변혁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내야 한다. 어떻게 주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 수동적인 상황에만 머물러 살면서 불평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힘을 꺾는 즉 마찰을 각오할 정도의 힘의 필요성을 깨닫는 ‘자기확신’을 가져야만 프롤레타리아들은 주체를 구성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자기확신이 계급의식이라는 것이다. 당시 프롤레타리아들은 평생을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부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자기 노동의 결과물을 처참하게 빼앗기면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의식에 투철한 것이지만, 프롤레타리아들은 ‘계급의식’이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데는, 저항하면 나만 해고되고 끝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해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유도한 사회 현실의 영향이 크다. 루카치는 이러한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공황에 직면하면서 부르주아들은 권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러한 틈에서 주체가 되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사물화 현상인간들은 모임을 이루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데, 그런 관계는 사라지고 사물화 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루카치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사물화 현상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상품 구조’에서 온다. 상품 구조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자본의 증식을 궁극 목적으로 하며, 상품이 생산되고 판매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근간은 상품 구조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상품 구조가 확산되면서 사물화가 초래되고, 사물화가 보편화되면 합리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루카치의 논리 전개는 베버와는 정반대이다. 베버는 관념주의자로써 합리화된 에토스에서 발현된다고 진단했다면, 루카치는 사물화에 대한 사유의 파생으로 합리화가 나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품 구조는 사회의 객관적인 형식이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상품 구조에 의해서 규정돼 있고 조직돼 있다. 이에 따라, 인간들의 주관적 의식도 사물화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 물건처럼 사람들을 대하고 물건처럼 사회를 대하면서, 그 속에서 인간은 원자화 되고 고립화 되고 급기야 홉스의 본능이 자극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를 바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항상 사물화 된 현실에 적응하면서 생존해야 한다는 강박에 더 깊숙이 빠지게 된다.그렇다면 이러한 사물화는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는가? 필요에 의해 주변부에서 상품 유통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무역으로 발전하고 사회 전체가 점차 교환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교환 경제가 일상화 됨에 따라, 상품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규칙화 되는 단계로 넘어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사물화’ 된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교환의 규칙성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도 물건 교환 형식에 따라 규정하게 되면서, 소외 현상은 만연해졌고 노동 과정은 합리화되었다. 사람이 생산과정의 일부인 기계로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계산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감성은 더욱이 통제되었다. 인간은 영혼까지 규율 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더 이상 비판의식을 가지고 저항하지 않고 직접성에 갇혀 정관적 태도로 주어진 현실에 임하게 되면서, 베버가 말했던 ‘아이언 케이지’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학문들 조차도 ‘자본의 증식’에 초점을 맞추어 기능 수행에 걸맞게 전문화됨에 따라 더 이상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며, 법학, 언론, 결혼까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물화에 함몰돼 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비판적인 학문인 ‘철학’마저도 형식주의에 갇혀버리고, 급진적(인간적)인 면모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리화 된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곧 맞이할 ‘공황’이었다. 자연법칙처럼 여겨지던 것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회가 법칙화 돼 있지 않고 우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합리성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본의 증식에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가 공황 상태를 탈피하기 위해 기본 소득과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되면서 무너지고, 그들의 계급의식은 허약해지게 된다.부르주아 사유의 이율배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사유란, 사물화 된 의식구조에서 탄생한 사유를 말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사유가 이율배반에 빠지고 만다고 보았다. 즉 사물화 된 형식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결국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도저히 현실에서는 총체적인 사유를 해낼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주관적인 영역에서만 가상적으로 변혁된 삶을 그려볼 뿐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 속에서도, 직접성에 매여 있던 프롤레타리아가 직접성에서 거리를 두고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 매개를 파악하려 나선다면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 이러한 시도는 곧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이 형성되는 첫걸음이 되고, 총체성을 지향하는 사유를 통해 ‘새로운 현실’ 즉 ‘객체’를 새로이 재조립하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사물화 된 현실에서의 경험에 있어서 부르주아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들 만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돼 있다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루카치는 자동적으로 변혁은 일어나지 않으며 의식을 가진 주체가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 사상의 한계점 또한 역시 존재한다. 왜 꼭 프롤레타리아만이 주체의 가능성이 있는가? 인종 차별, 젠더 차별, 소수민족 차별과 같은 다양한 차별 기제가 현재 작동하고 있고, 이 때문에 사회의 변혁이 추동 되고 있기 때문에 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에게만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는지 루카치에게 비판적 질문이 제기된다.
막스 베버 사상 및 & 내용 요약막스 베버는 앞서 살펴본 사상가들과 달리 다소 독특한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그는 독일인으로, 프로이센 제국,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는 대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가장 온전한 사회 분석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결국 목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의 ‘합리성’이라는 관점으로 사회를 분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합리화가 진행되고 심화되면서 거스를 수 없는 경향이 될 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이러한 고민 없이 합리화의 물결에 쓸려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소외되어 ‘쇠창살’과 같은 병리적인 현실 속에 갇히고 만다고 보았다. 이러한 ‘쇠창살’같은 현실을 뒷받침하는 요소 중 하나로, 법칙을 내세우는 ‘결정론’을 들었다. 즉, 물질적인 법칙성에 따라 사회를 규정하려 드는 당시의 실증주의적 관점을 배격하여, ‘인간의 행위’, ‘인간의 주관성’을 통해 현실에 맞서 변화를 야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과학’이라는 학문은 현세적인, 실증주의적인 방향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초월적 이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을 통한 합리성의 증진을 긍정하는 한편, 그는 종교 및 주술을 反지성이라 일컬으며 자유로의 진전을 가로막는 수단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과학주의를 긍정하는 한편, 이를 절대화 하려는 시도, 과학주의에 경도된 풍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을 구성하는 것도 인간이며,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합리화의 경향에 그대로 편승하게 된다면 인간으로의 가치가 망각되고, 결국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병리화 된 현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행태로, ‘관료주의’가 있다. 관료주의는 수단의 합리성을 위주로 사회를 이끌어 가면서, 체계의 전횡 즉 수단에 매몰되고 인간이라는 자유로운 존재로의 여지는 없어져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막스 베버의 대표 저서로써,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상관관계를 증명한다. 유독 프로테스탄트가 거주하던 지역에서 자본주의는 빠르게 확산됐으며, 궁극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정신 및 관념은 자본주의라는 경제현상을 야기했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그는 이러한 경제 현상을 고찰할 때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다고 일반화하지 말고, 하나의 역사적 개체로서 고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1920년 판본에 이르러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현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논조로 강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저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에토스의 차이가 사회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직업 소명설을 믿고 영리활동을 긍정했다. 여기서 에토스의 차이가 발생했고, 자본주의 정신을 북돋는 토양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늘리는 데 협조해야 한다. 공장을 지어 대규모로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된 물품의 수익의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주고 대부분은 자본가들이 가짐으로써 자본가들은 부를 차곡차곡 축적해가는 이러한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 방식이다. 이러한 풍조가 카톨릭 지역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편,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직업에서 성공하는 것이 신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라는 직업소명설, 구원예정설을 강조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싹 트게 된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 모두 ‘금욕주의’를 강조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신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금욕주의보다 ‘영리활동’을 더욱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경제와 사회1 또한 막스 베버의 대표적인 저서로써,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배’의 유형을 세 가지로 이념화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지배’는 사회의 안정성과 관련이 있으며,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지배의 유형을, 법을 근간으로 한 ‘합법적 지배’, 과거부터 축적해온 견고한 에토스에 기반한 ‘전통적 지배’, 그리고 대격변을 일으킴으로써 발생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지배인 ‘카리스마적 지배’로 정리했고, 이러한 지배 유형들은 혼재되어 현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상 이처럼 지배의 유형을 분석하는 것은, 모든 지배를 극복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루소나 맑스의 급진 민주주의와는 다소 상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몇 발자국 후퇴하여 어쩔 수 없이 지배는 존재하고, 그 지배를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정당성의 타당성지배가 안정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해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가망성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각 개인의 관심과 이해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여기서 베버의 독특한 점은, 그러한 지배가 오래 존속되기 위해서는 ‘행정간부’, 즉 ‘관료’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베버는 정치가가 이러한 관료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에 입각한 지배가 되어진다는 확신 즉 ‘물질적 동기’, 지배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감성적 동기’, 그리고 ‘가치’에 따른 복종의 동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세 가지 동기가 충족되는 동시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어질 때 카리스마적 지배가 성립되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관료들도 카리스마적 지배에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성’이다. 만약 이러한 ‘정당성’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논의되지 않고 사라진다면, 관료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는 점점 쇠창살에 갇히게 될 것이다.합법적 지배규칙에 입각해서 직무와 그에 관한 관할권을 부여하고 승진체계가 만들어짐으로써 관료제가 정비되어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체계로 발전하게 되면, ‘합법적 지배’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지배에서의 합리화 과정은 자본주의 뿐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이루어진다. 사회 체제를 막론하고 공통된 시대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베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하지 않고, 관료제 즉 합리화의 달성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시대를 진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료제로 권력을 잡은 관료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평준화되고 금권화 되기 쉬워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항상 어떤 수단의 도입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약속 받고 그 결과는 화폐의 보상에 따라가게 된다면, 비인격성과 형식주의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관료제로 전문 지식집단의 지배를 합법화하고 그들의 합리적 지배가 더욱 팽배해지면, 그들이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전문 직무지식을 통해 일반인들을 배제하고 그 누구도 관료들을 건드릴 수 없게 되어 일반인들 조차도 관료의 지배에 종속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전통적 지배전통적 지배는 원시 시대의 추장과 같이, 관료제가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지배 형태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우두머리가 그 신성한 권위에 입각해서 지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술이나 합리적이지 않은 지배 방식이 관철될 여지가 많아진다. 이러한 비합리성이 고도화되면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서 지배하게 되는 전제군주가 나타나거나, 신분제를 도입하여 귀족 계층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킴으로써 지배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결국 전통적 지배 유형 또한 지배자의 자의적인 지배를 뒷받침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 유형은 자본주의가 확대 및 재생산됨에 따라 그 자체의 동력이 커지게 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 지배 유형은 관료주의에 입각한 ‘합법적 지배’로 넘어가게 된다.카리스마적 지배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팽배해진 관료적 지배로 인해, 개인의 삶이 수단 합리성에 예속돼 버리면서 쇠창살과 같은 소외 현상이 만연해지고 사회는 야만스러워진다. 이러한 병리화 된 현실의 대안으로 베버는 ‘카리스마적 지배’를 설명한다. ‘카리스마적 지배’란, 선지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로 사람들을 이끄는 형태의 지배를 말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혁명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객관적 검증장치 없이 추종하는 사람들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희생하려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속박돼 있던 사람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부터 자유의 실현을 확신하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목적 수단의 합리성을 초월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일으킨다. 이처럼 현실을 완전히 전복시키게 되면, 관료들 또한 처음에는 저항할 지라도 점차 충성을 바치게 되면서 카리스마적 지배는 점차 강화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느끼며 쇠창살은 깨지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따라서 베버는 자꾸 정치지도자에 기대와 갈망을 가지면서 영웅주의에 예속된 모습을 보인다. 과연 사회 변화가 이러한 영웅이 출현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시민들은 약하고 항상 자본주의적인 수단 합리성에 붙들려 힘이 없고, 영웅적인 지도정치자가 나와야만 그러한 병리화 된 현실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베버의 이러한 사상은 소극적이고 소시민적인 관점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사상 및 내용 요약‘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포에르바하, 칸트, 루소와 같은 독일 철학의 맥락 속에서 등장한 19C 철학자 맑스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힌다. 그가 살았던 당대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들이 혁명에 전면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는 좌절을 경험했다. 이에, 맑스는 그러한 실패에 대한 원인으로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이 자유롭지 못하게끔 사회 구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사회라는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인데,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빨려 들어 감에 따라 그 관계를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관계’로 완전히 규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사상을 더 심층적으로 고찰해보기 위하여 라는 텍스트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첫 번째 초고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이 노동하는 기계로써 작용할 수밖에 없는 병리화 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해당 초고의 각각의 절에서 사회 부가 분배되는 영역으로 구분해 그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 영역으로, ‘노동임금’, ‘자본이윤’, ‘지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노동임금노동자는 하나의 상품이 돼 버렸다. 그 노동자라는 상품에 대한 수요는 자본가의 기분에 달려 있다. 결국, 노동은 인간 삶의 토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러한 불평등을 제도화한다. 국민경제학에서 예찬하는 ‘분업’ 또한 애당초 자본가들이 도입하고자 하는 제도적 일환이기 때문에 사회에 해악을 가져온다. 노동자들이 분업을 하게 되면 맡은 업무에만 전문화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다른 일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따라서 자본가가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예속화 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님에 따라 적정한 시장 가격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인데, 분업이 심화되면 그러한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사회의 부가 증가하고 감소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고통을 로 전망했다.-자본이윤사유재산은 노동자들을 이용해서 번 막대한 재산이다. 소수의 사람이 자본을 독점하고, 이를 지켜 내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의 공권력, ‘실정법’을 필요로 한다. 자본가의 이익과 권위주의적인 국가의 이익은 근본적으로 일치하여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력함으로써 사회 불평등을 더욱 심화한다. 자본은 권력이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살 수 있는 권력, 또 그 노동의 생산물을 점유할 수 있는 권력인 것이다. 사람들은 생존에 내몰려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하의 자본은 ‘명령’, ‘권력’이다. 자본가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해, 노동임금을 최저로 만듦으로써 최고이익률을 달성하여 더 많은 자본을 끌어 모은다. 독점을 하거나, 정치적인 권력과의 유착을 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사용하고, 그러한 사용은 사회적이지 않다. 자본가들은 사회의 필요한 바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고, 철저하게 자본 증식의 목표에만 매몰되어 반사회적, 몰사회적으로 자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국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자본가들 중에서도 소자본가들은 몰락하여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대자본가들만이 경쟁에서 승리하여 그들의 자본 독식은 멈출 수 없는 고리에 빠진다. 이 과정에서 과잉생산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공황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이런 식의 주기적인 공황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맑스의 분석이다.-지대노동자들이 토지로부터 생산한 ‘지대’는 지주들이 가져간다. 지주의 권리는 약탈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땅은 자원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지대는 그러한 지주들의 독점의 대가로 얻게 될 뿐이다. 지주는 모든 사회의 이익을 착취해 감으로써 더 큰 지주가 되고, 소토지 소유자들 역시 그러한 경쟁 속에서 결국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토지 소유자들 또한 대자본가들과 경쟁함에 따라 일부는 그들도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위 중산층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한편,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다는 공황이론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두 가지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아무리 공황이 와도 정부가 여러 임시방편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신시키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체계의 위기로써 몰락한다는 후자의 생각보다 전자의 생각이 오늘날에는 더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소외된 노동맑스의 핵심 개념은 바로 ‘노동’이다. 헤겔은 노동이 인간의 정신과 이성이 바깥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노동의 외화’를 설명하는 반면, 맑스는 현실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 또한 그대로 외화 되지 못하고 왜곡되어 발현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극복할 현실의 주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자연 속에서 살다가 결국 자연 속에서 죽게 돼 있는 유물론적인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연과 교류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즉, 노동은 인간의 본질인 정신과 이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병리화 된 현실로 인해서 왜곡되고, 노동은 상품화된다. 인간은 그 노동이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예속되어, 타인으로부터 본질의 표출이 통제되고 타율적인 요청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상품화되어 누군가의 손에 예속돼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그렇게 현실의 모든 사물들이 상품화돼 있는 세계 속에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몫은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없는 배제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바로, 노동이 소외된 것이다.따라서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본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요구, 즉 투쟁을 해야 한다. 노동활동 안으로 들어가면, 노동자들은 똑같이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휴식을 취하는, 자율성이 배제되어 거의 ‘기계’에 준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그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서 노동을 한 그들은 연예, 오락과 같은 문화산업을 통해서 해방감, 안도감을 찾는다. 이에, 인간의 의식에는 짐승과 다른 ‘이성’이라 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노동의 소외로부터 벗어나 해방될 수 없으며, 이는 오히려 병리화 된 현실의 심화인 것이다. 특정한 소수의 손에 사유재산이 집중된다면 그 속에서 발생하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항상 병리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맑스는 지속적으로 증가된 부는 사회적 부로 귀속돼야 하며, 인간은 이러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여 사회적 관계를 반드시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극복된 모습은 어떠할까?사유재산과 노동‘사유재산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노동가치설은 당시 18-19C 유럽의 패러다임이었다.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결국 부를 소유해야 할 사람은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국민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또한 ‘부’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맑스는 이를 올바른 통찰(“루터가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난 것과 유사하다.”)이라고 보면서도 ‘위선적’이라고 평가한다. 결국 그는 국민경제학자들이 ‘노동자들이 부의 원천이다’ 라고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나중에는 그 위선을 벗어 던지고 노동자들에게 냉소적 시선을 던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유재산이 현재 자본가들의 손에 있지만, 애당초 노동자들에 의해서 산출된다는 점을 맑스는 끊임없이 강조했다.사유재산과 공산주의맑스는 소유와 무소유의 관점에서 부를 바라보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심화된 현실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의 위력에 예속돼 있는 노동이 소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지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가 공산주의를 성립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소유권은 애당초 사회에 우선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 사회에 부여된 소유권을 구성원들이 공유할 뿐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는 사회의 관계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사회의 소유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러나 맑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달랐다. 공산주의라고 해태이므로, 인간적인 감성으로 변모되어야 공산주의가 유의미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종교로 그러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을까? 맑스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종교는 병리적인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조건도 달지 않고 신을 믿으면 꿈 같은 천국에 간다, 혹은 무조건적으로 신이 도와줄 것이다 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병리화 되면 될수록 인간은 소외되고 그 결과의 한 양상으로서 종교가 발한다.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단 속에서 해방될 수 없다.욕구, 생산과 분업자본주의는 자본의 이득을 도모한다. 이득 증대를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고, 사람들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배와 예속 관계 속으로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소비주의는 만연하게 되고 사람들의 감각은 한없이 조야 해진다. 인간이 향락에 빠지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 작동에 있어 중요한 속임 기제이다. 소비는 유행을 끊임없이 창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에 예속되게 만들고, 결국 자기 자산을 있는 대로 모두 탕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분업도 자본주의 작동에 있어서 중요한 속임 기제이다. 자본가들이 이득 증대를 위해 분업이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분업을 통해 발생하는 사람들 간의 ‘재능의 차이’를 만들어 일부 개인에게 엘리트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특권의식, 차별의식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본성, 능력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구조화된 사회에 의해서 떠받들어 지는 보상책일 뿐이다.화폐화폐를 통해서 인간의 감각은 병리화 된다. 인간화 된 감각이란 무엇일까? 절대 획일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가 만족하는 바가 모두 다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와 감각은 획일화돼 있다. 맑스에 따르면, 이는 이미 인공적으로 인위적으로 조작된 감각이라는 것이다. 또한 감각은 타인과의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향유하게 되는 것이므로, 고립된 한 개인으로서 쾌락다.
루소 사상 및 내용 요약루소는 프랑스 18C 사상가로, 시민혁명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혁명이 일어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려운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루소의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그의 사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인위적인 제도나 문명에 의지하지 말고, 인간 자신으로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평등으로서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부여되야 한다는 사실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도 공감하는 바였지만, 루소는 그 자유가 ‘평등’한 자유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차별화된 자유, 그리고 그러한 차별에 순응하며 살아야만 하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며,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고 지적인 권위로부터 해방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등’한 자유는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루소의 이러한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던 때는 바로, 디종 할리먼에서 주관하는 논문 공모전에서 이라는 논문이 채택이 되어 수상하게 되면서 다. 그는 해당 저서에서, 문명은 인간에게 이롭지 않다고 비판함과 동시에 인간은 자연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를 통해 그는 지성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이후 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는 ‘불평등’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워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게 된다. 에서 그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분석하고 묘사하는 한편, 홉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자. 문명을 떠나자.’고 주장한다. 사회라고 하는 문명화된 관계는 병리적이라며, 결국 인위적인 구체제를 전복시키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사회는 일반의지에 기초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일반의지란, 계약에 대한 동의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위반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자유의지를 갖고 출발한다. 그러나 때로는 불완전한 자유의 실현으로, ‘전체의지’가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항상 돌아와야 할 근원적 토대는 ‘일반의지’라는 것이다.그렇게 ‘전체의지’가 형성되어 문명화된 사회와 문명인을 끊임없이 비판하는데, 여기서 ‘문명인’이란 무엇인가? 문명인은 귀족과 부르주아를 지시한다. 반면에 루소는 자연인을 찬미한다. 자연인이야 말로 인간의 본래 모습이고, 퇴락한 모습이 문명인이라는 것이다. 문명인들의 주된 특징은 욕구가 허구적이며, 자기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비교가 내재화돼 있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평가하고 안심하는 과정에 따라, 그들은 경쟁심이 아주 커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충동의 승인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유로운 충동이라는 것은, 바로 ‘자유’를 의미한다. 이를 승인하는 사람들이 자연인이고, 이를 억압하면서 사회적으로 부과된 요구에 맞추는 사람들을 문명인이다. 궁극적으로 루소는 욕구가 정신화 된, 변질된 계급인 ‘문명인’ 계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기 자신을 개선할 능력이 있다. 루소가 말하는 자기개선능력은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개선해 나가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바로, ‘자연인은 자기애를 갖고 있고, 연민의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다르다. 홉스가 말하는 이기심은, 루소에 따르면 이미 사회상태를 전제하는 것이다. 반면, 자기애는 단지 자연상태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념의 반영이다. 또한 루소는 다른 생명체 특히 동류의 생명체에 대한 공감하는 마음, 즉 ‘연민’이라는 정서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자기애와 연민의 정서가 서로 상호작용함에 따라 자기보존 충동을 완화하여 인간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비로소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홉스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며, 이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나 루소는 그러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는 바로 문명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반론한다. 그렇다면 문명화된 사회에서의 불평등은 왜 출현하게 되었는가? 그는 불평등의 원인이 바로 ‘사적 소유’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사적 소유를 갖기 전에는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소유권이 도입되면서 인간 간의 차이를 만들면서 불평등이 발생하고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모든 인간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을 부여하되, 공동체의 소유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도, 공동체가 인정하는 바탕에서의 사유재산이어야 한다. 덧붙여, 그는 ‘토지를 선점’하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넓이의 토지만 소유하며’, ‘노동과 경작을 통해서 직접 사용하고 점유하여야’ 비로소 공동체로부터 소유권이 참된 권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당대 18C 유럽 사회는 문명인(부르주아, 부자)이 소유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쥐면서, 결국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까지 도달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루소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온갖 시중을 다 받으면서 여유롭게 살아가고, 욕망을 어떻게 실현할지 궁리하는 문명인은 항상 타인이 본인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아 가지는 않을까 항상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결국 점차 나약해지고 병리적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신분제를 통해 사회적 차별까지 이행하고, 온갖 차별을 촘촘하게 제도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루소는 피지배자들 가운데 야심에 감염되기 쉬운 이를 고용하여 완장을 채워 충성을 바치게끔 하는 당시 지배 계층의 모습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당시 지배 계층과 한 계약은 자유에 의한 계약이 아니라 강요된 공포에 짓눌려서 한 굴복이며, 그들이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므로 전쟁, 노예제, 힘과 같은 사회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상태에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체인 주권체가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있으려면, 루소는 공공의 자산이 있어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공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일반의지에 의해 표출된 주권체로서의 사회가 탄생하면, 다수가 억압하는 통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가장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마지막으로, 루소는 홉스의 ‘도덕의 기원은 힘’이라는 주장은 지배계층의 주장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홉스의 말에 의하면,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어 도덕이 갱신된다면 안정된 삶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도덕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힘은 도덕의 기원이 아니라, 힘은 힘의 기원일 뿐이다. ‘도덕’은 보편성이 담겨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도덕의 기초는 ‘평등’이다. 평등은 ‘자유’를 함유한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도덕의 기초이자 내용이어야 한다.
하버마스 사상 및 2권 요약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에 속하는 하버마스는 파시즘으로 물든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이후 독일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재건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고민했던 지성인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에서 대대적인 사회적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데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하버마스의 사상 배경하버마스는 루카치가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객동일자로 설정한 것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면서, 역사 변혁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들에만 한정될 수 없고 다양한 자유로운 시민들로 개방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렇게 그는 루카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 철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주창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이성의 다른 번안으로써, 언어적 전환을 수용하여 언어 행위인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합리성을 마련하고 그를 통해 생산되는 생활세계에서 연대적인 힘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당대의 의식철학적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하버마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공론장’이라는 철학적 개념 때문이었다. 공론장이란, 자본의 위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들이 논의를 하는 가시적, 비가시적인 장을 말한다. 이러한 공론장에 참여하는 시민들로부터 정책 및 제도가 논의되면서, 비판적 지점은 수용되어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의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검증된 타당성을 중심으로 반성적 차원에서 담론, 즉 의사소통 행위가 이루어져야 함을 피력했다(담론윤리학). 이후, 하버마스는 하나에만 안착하지 않고 항상 현실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서 이론을 기꺼이 변화시켜 나갔다. 그의 철학 자체가 바로 현실과의 소통의 산물이었던 것이다.언어적 전환‘언어적 전환’은 하버마스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형성하는 개념이다. 그는 단순히 언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는 언어 속에서 언어와 더불어 따르면 상호주관성이 원초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호주관성이 실현되어 있는 무형의 연결망이 바로 생활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드는 하버마스로부터, 목적 합리적 행위의 패러다임을 의사소통적 행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미드는 ‘체계’를 소홀히 취급한다는 한계점 또한 가진다. 체계는 정치권력, 행정권력, 자본주의 등과 같이 지배에 동원되는 힘을 말하는데,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요소는 별도로 분명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세계만을 중심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게 되면 이상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의사소통 행위와 체계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양자는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는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 뒤르켐의 사상에 따르면, 사회통합의 유형과 체계통합의 유형, 이 2가지 방식으로 통합이 가능하다. 사회통합이란 생활세계 내 사람들 간에 긍정적 의미의 연대감이 바탕이 되어 통합되는 것을 말하며, 체계통합이란 분할 노동과정에서 요구하는 바에 따라 통합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체계통합은 사회통합이 먼저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하며, 사회통합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합의식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 집합의식은 개인으로 하여금 어떤 집단 행위에 무조건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동기로써, 개인 간의 사회적 연대를 생성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이러한 집합의식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이것이 상실되면 체계통합으로만 사회가 통합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아노미 상태가 발생한다. 아노미 상태에서는 연대감은 사라지고 인간은 모두 체계에 입각해 이기적인 활동행위로 축소되어 살아가게 되면서, 결국 사회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로 전락해버린다. 그렇다면 집합의식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뒤르켐은 의식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종교현상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집합의식이 형성된다고 보았는데, 이에 하버마스는 ‘순환논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생활세계는 장애가 발생한다. 따라서 생활세계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일상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 몇몇 이론가들은 기능들 가운데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이는 전체 기능의 조화관계를 놓치기 때문에, 3가지 기능을 모두 공히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의견이다.생활세계의 재생산에서 이해지향적 행위가 하는 기능이해지향적 행위란, 학습을 통해서 잘못을 교정하고 그러한 방향성을 좇는 행위를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해지향적 행위의 경향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라는 3가지의 생활세계의 형식을 고려하여 학습의 과정을 거쳐 나감으로써, 재생산을 기능에 맞게 올바르게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 신성한 것의 권위를 끌어들여 기능을 마음대로 재단함으로써 이해지향적 행위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면서, 생활세계는 장애가 발생하여 위기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병리 현상을 바로잡고 재생산을 올바르게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합의 가능한 타당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적 재생산’ 기능을, 정당한 질서를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통합’의 기능을,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해줌으로써 ‘사회화’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적 재생산’ 기능의 경우에는 의미 상실이 발생(ex. 창조론, 천동설)하고, ‘사회통합’ 기능의 경우에는 특정 계층이 부와 권력을 세습하면서 아노미 현상이 일반화되며, ‘사회화’ 기능의 경우에는 좌절감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는 등의 심리 이상증세가 발생한다. 따라서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반드시 위의 3가지 기능이 정상화되는 방향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생활세계를 사회와 동일시하는 이해사회학의 한계베버류의 관념론적 사회학을 주창하는 이해사회학은 해석학적인 접근방식으로 생활세계를 투사하는데, 이에 하버마스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와 생활세계를 동일시하여, 인간을 상대화 하지 않회 문화적인 생활세계로 구성되는 것이다. 즉 생활세계가 전부인 사회인 것이다. 이는 강한 집합의식을 가진 환절적 사회로, 제도, 세계관, 개인 사이에 호응도가 높고 항상 공통된 체험을 통해 유지된다. 또한 이들은 혈통, 계보를 좇으며, 다른 부족사회와의 교류를 위해서 족외혼을 통해 그 경계를 유연하게 만들기도 하고, 종교적인 영향력을 통해 제식 공동체로 묶임에 따라 유대가 해제되지 않고 존속될 수 있다. 그러나 점차 분업적 협동이 발달하게 되면서, 이러한 조직 권력과 교환 관계가 제도화될 필요성이 발생하고 새로운 형태의 부족사회로 이전하게 된다.2.자기 조절 체계로서의 부족사회초기의 부족사회에 중심이 발생하고 사회가 유기적으로 운용이 되면서, 더 큰 복잡성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족외혼에서 귀중품을 서로 교환하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때로는 부채를 짐으로써 상하관계가 발생하기도 하며, 사회에 가장 공헌을 많이 한 사람이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신분은 세습화 되어 수직적인 계층화가 형성된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단계는 아직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돼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3.체계분화의 4가지 메커니즘우리는 4가지의 메커니즘으로 역사적인 변화를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수평적 부족 사회, 두 번째 위계화 된 부족사회, 세 번째 조직화가 강화된 국가 조직, 이렇게 볼 수 있다. 체계 분화를 야기하는 요인은 교환과 권력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 그리고 네 번째 단계로 나아가면 교환관계가 더 복잡해지면서 화폐를 더 많이 소유한 지배계층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계층이 나뉘어 계급사회가 형성된다. 정치권력은 중심적 지위를 상실하고, 그 대신에 조절매체로서 법이 사회통합의 기제로 격상된다. 이전에는 정치권력을 좇으며 군주의 자의적인 결정으로 사회 전체 운영이 좌지우지됐다면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경제의 자율성을 더 많이 부여하는 매체인 실정법이 그를 대체하는 것이다. 체계는 이러한 4가지 메후퇴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언어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실정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합의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합리화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일상 언어에 있어서의 소통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당성에 대한 승인을 받은 사람들은 공론장에서 치열한 논쟁을 수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6.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그리고 물화명제의 재구성‘상호이해 형식’은 하버마스 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루카치의 대상성 형식에서 비롯된 개념인데, 대상성 형식이란 상품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 형식은 단순히 일원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일 뿐이며, 이원론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 상호이해 형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체계의 압박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풍요로운 정신과 접맥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활세계의 공론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호이해 형식’이라는 것이다. 체계의 압박이 커져 생활세계의 고려가 위축되게 되면 상호이해 형식은 변질되고 의사소통을 왜곡시킨다. 그 변질되는 현상이 바로 ‘물화현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저항하고 싸울 수 있는 주체라 본 루카치와 달리,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소통행위자들이 상호이해 형식의 변질과 투쟁하여 의사소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보았다. 생활세계에서의 의사소통 행위, 체계에서의 목적 수단 행위가 어느 하나에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며 ‘상호작용’해야 비로소 생활세계에서 타당성이 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활세계의 합리화와 병행하여 체계가 중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체계는 생활세계로부터 규정된 정당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논의를 통해서 타당성이 산출되지 못하면(변질된 상호이해 형식), 오로지 체계에 의해서 사회가 작동하게 되면서 물화, 병리화, 더 나아가 생활세계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는 식민화에까지 이르게 된다.-결론: 파슨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