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1. 들어가는 말소설의 사전적인 의미를 검색해보면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간 산문체의 문학양식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작품 속에서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이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요소들이 작가라는 매개체를 거쳐서 작품에 반영되기 때문에 일부라도 작가의 견해가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반영되기 마련이다.우리나라에는 토지 란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1957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경리란 작가가 있다. 2008년 타계 전까지 무수히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냈고 한편으로 작품들마다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이나 인물이 포함된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란 매개체를 거쳐 작성된 작품들에는 하나에 공통점이 생기는데 그것은 통영에 대한 언급이다. 작가의 환경, 사회, 전기적 측면을 살펴보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작품 내 빈번한 통영의 언급은 해당 장소가 작가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어림짐작 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이번 기회를 통해서 작가에게 영향을 준 통영이란 곳과 박경리 사이에 상관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2. 박경리의 생애1) 생애박경리 작가는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 지금의 통영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로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5년 김행도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으나 6.25 전쟁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그 후 1955년부터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단편 「계산(計算)」 과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1980년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고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으며,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선비의 성품을 지닌 김봉제는 김 약국의 주인으로 부유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그의 동생 봉룡은 충동적이고 격정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봉룡은 아내 숙정이 출가 전 그녀를 사모했던 송욱이 찾아오자 극단적으로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만다. 숙정은 간부를 두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사태로 숙정의 집안 식구의 보복을 피해 봉룡은 탈가하여 자취를 감춘다. 봉제에게 맡겨진 봉룡의 유일한 혈육인 성수는 봉제의 아내인 송 씨의 손에 의해 자라나게 되지만, 죽은 동서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녔던 송 씨는 그 화살을 성수에게 돌려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사냥터에서 독사에 물려 사망한 봉제의 뒤를 이어 성수는 김 약국의 주인이 된다. 성수는 딸 다섯을 두지만 전혀 지식이 없는 어장 사업에 손을 댐으로써 가산이 조금씩 기울게 된다.장녀 용숙은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아들 동훈을 치료하던 의사와 불륜을 맺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둘째 용빈은 교육을 받아 똑똑하여 교원이 되나 애인 홍섭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된다. 셋째 딸 용란은 관능적 미모를 갖추었으나 지적인 헤아림이 부족해 머슴과 놀아나는 바람에 지탄을 받고, 넷째 딸 용옥은 애정이 없는 남편 기두와 별거하다가 뱃길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용란도 다시 나타난 머슴의 아들 한돌과 함께 있다가 남편인 연학에게 발견되어 한돌과 어머니 한실댁이 연학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결과를 맞는다. 그 충격으로 용란은 정신 착란자가 된다. 계속되는 집안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김 약국(성수)도 위암으로 죽는다. 결국, 용빈과 용혜는 통영을 떠나면서 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한다.작품은 욕망과 운명에 의해서 생긴 비극적 몰락을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작품의 주된 시기는 1864년부터 1930년대의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진행이 된다. 작품 내적인 특징으로는 가족사 소설이면서 한편으로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들 속에서 빠른 전게 더 유리해진다. 그러나 조준구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마을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최참판 댁으로 쳐들어오지만, 조준구는 찾지 못한다. 서희와 길상은 재물을 챙겨 간도(間島)로 떠난다.간도에 정착한 서희는 가문 되찾는 것을 목표로, 길상과 공 노인의 도움을 얻어 노력한 끝에 거부(巨富)가 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친일 관계도 하였다. 길상과 혼인한 서희는 두 아들을 얻는다. 길상은 옥이네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내 서희의 가문에 대한 집착과 신분 때문에 고독을 느낀다. 이 때, 환(구천)이 나타난다. 환은 별당 아씨가 죽은 후, 윤봉. 윤도집. 지삼만. 판술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활동 방법에 관한 견해차 때문에 간도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간도에서 환은 길상과 이동진, 권필응 등을 만난다. 한편, 서희의 결혼으로 충격을 받은 상현은 서울로 돌아와 일본 유학을 떠나지만 정신적 패배감 때문에 안주하지 못한다. 서희와 헤어진 봉순은 기생이 된다. 이름도 기화로 바꾸고 미모와 소리 잘하는 기생으로 이름이 난다. 봉순 또한 간도로 건너가 서희와 길상 등 고향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외로움으로 인해 마음의 지주(支柱)를 갖지 못한다. 용정에 정착한 용이는 월선과 함께 국밥집을 한다. 그러나 돈에 욕심이 많은 임이네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장사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홍이는 퉁술포에 있는 청인의 소작농이 되어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벌목군으로 일한다. 용이가 떠난 후, 월선은 홍이와 함께 살다가 암에 걸려 생을 마친다. 한편, 조준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는 송관수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한 후, 조준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조준구 집에 하인으로 들어온다. 서희는 광산 사업에 실패한 조준구에게서 빼앗긴 토지와 재산 문서를 되찾은 후, 월선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독립 운동을 위해 떠난 길상과 환(구천)과 헤어져 귀향길에 오른다. 윤도집이 운봉과 함께 죽은 뒤, 동학의 세력은 급격히 무너진다. 지삼 갑오개혁 직후인 1879년을 시작으로 하여 구한말과 일제 강점 하에서 이름 없는 민초의 정서까지 담아내면서 가족사 소설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역사 소설이 되었다.4. 통영 속 박경리만의 아픔역사주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박경리 작가의 경우에도 다수의 주변 요소들의 작가의 창작활동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 중에서 가장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그녀의 고향이었던 통영이다.제가 통영에서 탄생했다는 게 매우 중요한 겁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 민족주의라든지 자주적이라든지 이런데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어린 영혼에 심어준 게 바로 통영이거든요.박경리 작가의 대표작인 토지 나 김약국의 딸들 , 파시 같은 그녀의 소설에선 통영이 주된 배경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작품에 따라서 통영이란 배경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품 내에서 배경으로서 빈번한 통영의 언급은 박경리, 본인이 자신의 일생 중 태어나고 살아간 주변 환경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연상할 수 있겠지만 정작 한편으로 박경리는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간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와 같이 박경리의 일생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올 수 있음에도 50년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문학계에서도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아무리 그래도 그사이 한 번도 못 왔느냐고 물으시면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기질 탓도 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방안에만 있는 '구멍 지기'라고 어머니한테 야단맞곤 했지요. 결혼 때는 이웃에서 이 집에 처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줍음이 많아서 지금도 낯선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요. 잘나고 도도해서가 아니라 제가 워낙 그래요."이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경리는 본인의 성격상 남들 앞에 나서는 것, 다른 곳에 가는 것을 주저하는 소심함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미스테리에 대해서 해명했다. 개인의 성격이나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자 하는 제 2차 세계대전, 6·25부에는 살림집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서 '기봉이네"와 딴살림을 살았다.출중한 외모를 가진 어머니와 통영에서 차부를 운영하면서 어머니에 비해 두 살 어린 아버지 사이에서 박경리는 태어났다. 박경리의 아버지는 진주로 물건을 실고 다니는 통영에서 하나뿐인 화물차 차부(車夫)이자 지금의 서문시장 일대인 새터에서 차부(車部)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1930~40년대 잘 닦이지 않은 길 위에서 물건을 실고 나르는 직업의 특성상 지역을 오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랐다. 자신이 운영하는 차부에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추후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의 품에서 살아가게 된다.이러한 어릴 적 상처에 대해서 그녀는 어머니를 버리고 떠한 아버지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표출했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그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은 그녀에게 있어서 최초의 결핍의 대상이었고 결핍은 근친상간적 모티프로 발휘가 되었던 것이다. 즉 고향 통영이 박경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의미는 결핍으로 인한 비윤리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2) 여성의 몸으로 힘겹게 살아가야하는 세계한편으로 1950년대 박경리가 작품을 쓰기 시작 이후 박경리의 초기 소설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혼자가 된 여인들, 전쟁 미망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성의 부재로 인해서 부득이하게 자신이 모든 것을 맡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작게는 가정의 살림에서부터 크게는 가문의 중심을 맡는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지금의 이 생활을 영위해 갈 능력이, 생존의 자유가 없다. 끝없는 궁핍에서 오는 공포 속에 나는 쫓겨 다니며 있는 것이다. 민혜는 그런 말을 뇌며 눈을 감았다. 눈가장자리가 뜨겁게 젖어온다. 만일 내가 죽어버린다면 영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거리에 나갈 것이다. 내가 없어짐으로써 고아가 될 수 밖에 없는 영주다. 민혜는 자살자가 자기의 자식을 먼저 죽여버리는 일을 생각한다. 민혜의 가슴은 저절로 뛰었다. 죽음을 생
일본어 ‘は’와 한국어 ‘는’의 생략 현상 대조일본어 조사 ‘は’의 생략 현상과 한국어 조사 ‘는’의 생략 현상을 대조하여 일본어 ‘は’의 생략 현상과 한국어 ‘는’의 생략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어를 기준으로 하여 생략이 불가능한 현상과 생략이 가능한 현상을 ‘は’, ‘는’과 결합하는 NP에 관한 조건, 표현 양식에 관한 조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1. 생략이 불가능한 경우1.1. NP에 관한 조건1.1.1. ‘は’와 ‘는’과 결합한 NP가 친숙하지 않은 경우친숙하지 않은 경우란 총칭명사구나 3인칭의 경우를 말한다. 조사와 결합하는 NP가 청자에게 친숙하지 않은 경우 ‘は’와 ‘는’의 생략은 어렵지만 한국어의 ‘는‘은 휴지가 있을 때 생략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어의 (1)라처럼 경우에 때라 생략이 될 수도 있다.가. 韓?人 *(は) よく ?く。한국인 은 열심히 일한다. はたらく(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나. 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다. 한국인, 열심히 일한다.라. 바나나 맛있다.1.1.2. ‘は’와 ‘는’이 대조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は‘와 ‘는’이 대조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 は와 ‘는’은 생략이 불가능하지만 한국어에서 첫 번째 ‘는’은 휴지가 있을 경우 생략이 가능하다.가. 私 *(は) ?生 だが、 彼女 *(は) ?社員 だ。나 는 학생 이지만 그녀 는 회사원 이다. かいしゃいん(나는 학생이지만 그녀는 회사원이다.)나. 나*(는) 학생이지만 그녀*(는) 회사원이다.다. 나, 학생이지만 그녀*(는) 회사원이다.1.1.3. ‘は’와 ‘는’이 초점일 경우초점이라는 것은 화자가 의도하는 정보 전달을 행할 때 청자에게 가장 전달하고 싶은 정보를 말한다. 이 때 は는 생략이 불가능하지만 ‘는’의 경우 휴지를 둘 때 생략이 가능하다. 이 때 휴지는 길어야 한다.가. 私 は 昨日 *(は) ?校 に 行かなかった。나 는 어제きの는 학교 에 가지 않았다.いく(나는 어제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나. 나는 어제*(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다. 나는 어제, 학교에 가지 않았다.1.1.4. 대응 부분이 생략되었을 경우'は'와 ‘는’의 대응 부분이 생략되었을 경우 'は'와 ‘는’은 동일하게 생략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철수에 대해 가족들에게 ‘철수는 어디에 있어?’ 등의 질문을 할 때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대응 부분은 생략할 수 있다.가. チョルス*(は)?철수 는(철수는)나. 철수*(는)?1.1.5. 대응 부분을 강조할 경우대응 부분을 강조할 경우에는 'は'와 ‘는’은 모두 생략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응 부분이 뭔가와 대조되어 있는 경우에 한국어는 생략이 가능하다.가. それ *(は) うそだ!그것 은 거짓말이다!(그것은 거짓말이다.)나. 그것*(은) 거짓말이다!다. A: 실례하지만 김씨입니까B: 아니요, 저(는) 박입니다.1.2. 표현 양식에 대한 조건1.2.1. 확정을 나타내는 경우확정을 나타내는 경우 즉, ‘だ(~이다)’, 그리고 형용사, 동사로 끝나는 경우에 'は'은 생략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어의 경우에는 문말 표현과 상관없이 ‘는’의 생략이 가능하다.가. 私 *(は) 韓?外?語大? の ?生 だ。나 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의 학생 이다. かんこくがいこくごだいがく(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학생이다.)나.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이다.다. 私 *(は) 若い。나 는 젊다. わかい(나는 젊다.)라. 나(는) 젊다.2. 생략이 가능한 경우2.1. NP에 관한 조건2.1.1. 'は'와 ‘는’과 결합하는 NP가 청자에게 친숙한 경우NP가 청자에게 친숙한 경우란, 1인칭과 2인칭의 경우를 말한다. 이 때 'は'와 ‘는’은 생략이 가능하다.가: 私 (は) 一人っ子 です。저 는 외동아들 이에요. ひとりっこ(저는 외동아들이에요.)나: 저(는) 외동아들이에요.2.1.2. 3인칭의 경우 예외3인칭의 경우 'は'와 ‘는’의 생략이 어렵지만, 그 의미 자체가 친숙하거나 격식이 없는 3인칭이라면 생략이 가능하다. 또 명사구가 한정의 의미를 가지거나 고유명사일 경우에는 생략이 가능하다.먼저 친숙하거나 격식이 없는 3인칭의 경우는 ‘아버지’와 ‘아빠’의 차이가 있다. 이 때는 'は'와 ‘는’ 모두 생략이 가능하다.가. 父 *(は) 今夜 ?くなる そうだ。아버지 는 오늘밤こんや 늦을 것 같다고 했다. おそい(아버지는 오늘밤 늦을 것 같다고 했다.)나. 父さん (は) 今夜 ?くなる そうだ。아빠 는 오늘밤 늦을 것 같다고 했다.(아빠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하셨다.)라. 아버지*(는) 오늘밤 늦을 것 같다고 했다.마. 아빠(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했다.명사구가 한정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에 'は'은 생략이 가능하다. ‘는’은 명사구가 한정의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생략이 가능하다.가. バナナ *(は) おいしい。바나나 는 맛있다.(바나나는 맛있다.)나. 台? の バナナ (は) おいしい。대만たいわん 의 바나나 는 맛있다(대만 바나나는 맛있다.)다. 바나나(는) 맛있다.라. 대만 바나나(는)맛있다.3인칭이 고유명사인 경우에 'は'와 ‘는’은 생략이 쉬워진다. 다만, 완벽하게 가능한 것은 아니며 쉬워질 뿐이다.가. スマ?トフォン*(は) 扱い やすい らしい。스마트폰(혼) 은 다루기あつかい 쉽다고 한다. 라시이(같다)(스마트폰은 다루기 쉽다고 한다.)나. iPhone (は) 扱い やすい らしい。iPhone 은 다루기 쉽다고 한다.(iPhone은 다루기 쉽다고 한다.)다. 스마트폰*(은) 다루기 쉽다고 한다.라. iPhone (은) 다루기 쉽다고 한다.2.2 표현양식에 대한 조건2.2.1. 비확정성을 나타내는 경우 (모달리티 형식)일본어에서 모달리티란 화자의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형식을 의미한다. 화자의 판단, 추측, 가정 등에서 화자의 확신도의 정도를 나타내며 개연성과 정보의 근거도 포함된다. 이 확신도나 확정도의 정도에 따라 'は'는 생략이 어려워지기도, 쉬워지기도 한다.가. ご?親 *(は) 君 の ?? を 心配している。부모님ごりょうしん 은 너くん 의 미래しょうらい 를 걱정しんぱい하고 있다.(부모님은 너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나. ご?親 ?(は) 君 の ?? を 心配しているだろう。부모님 은 너 의 미래 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부모님은 너의 미래를 걱정하고 잇을 것이다.)다. ご?親 (は) 君 の ?? を 心配しているようだ。부모님 은 너 의 미래 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부모님은 너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라. 부모님*(은) 너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마. 부모님*(은) 너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가)의 경우에는 화자의 생각에 추측이나 가정이 없고 완전한 확정의 의미이다. 따라서 'は'를 생략할 수 없다. 그러나 (나)와 (다)는 상대적으로 확정성이 낮기 때문에 'は'의 생략이 가능하다. 한국어의 ‘는’은 화자가 판단하는 확정도에 관련이 없이 생략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건국신화목차ㄱ. 한국의 건국신화1. 단군신화2. 주몽신화3. 석탈해신화4. 수로왕신화ㄴ. 감상ㄱ. 한국의 건국신화1. 단군신화우리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建國神話), 국조전설(國祖傳說). 원시시대부터 민간에서 구비(口碑)로 전해 내려왔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말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의 제1권 고조선 조(條)에 실려 있다. 『위서』(魏書)에는 단군 임금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으니 중국 요(堯)와 같은 시대(B. C. 2333)라고 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할 때,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보아 홍익인간(弘益人間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할만하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천부인(天府印) 3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여러 신들과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참을성 많은 곰만이 100일을 견뎌내 사람이 되었고(熊女),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이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뒤에 아사달에 천도하여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이러한 내용의 단군 신화는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도 나타난다. 단군 신화의 사상은 상고(上古)의 민간 신앙에서 나오는 것으로 선왕당(仙王堂)ㆍ천왕당(天王堂)ㆍ산신당(山神堂) 등 천신숭배ㆍ산신숭배의 사상과 합치되어 있다. 단군 숭배 사상은 고려 충렬왕 무렵에 원(元)에 대한 자립 의식으로부터 싹터, 조선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동명왕(東明王)과 더불어 추앙하였으며, 구한말 자주 독립사상이 고조될 때 발생한 대종교(大倧敎)ㆍ단군교(檀君敎)의 성립 배경이 되었다. 유교, 불교, 선교(仙敎:道敎)의 유입 이후 단군 신화의 사상을 3교의 모태로 보기도 하며,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환검(檀君)을 3신(三神)이라 하는 삼신사상이 싹트기도 하였다.2. 주몽신화주몽의 설화는 3가지 설이 있다. ① 광개토왕 비문(碑文)과 《위서(魏書)》 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巡狩)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奄利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루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②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③ 《삼국사기》의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柳花)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①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왕(金蛙王)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3. 석탈해신화《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삼국유사》 권1의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紀)〉 등에 실려 있는 신라 제4대 왕이자 석씨(昔氏) 왕조의 시조인 탈해왕의 탄생신화를 말한다. 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알에서 태어난 비정상적 출생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숱한 시련을 극복한 뒤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르는 영웅신화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게 하였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에 보물과 함께 알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궤는 파도를 타고 가다 먼저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그곳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혁거세 재위 39년에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닿았다. 해변에서 한 노파가 궤를 건져 열어 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고, 노파가 기른 아이는 장성하여 키가 9척에 풍모와 지식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은 궤가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담긴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으며, 나중에 양산의 호공(瓠公) 집을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훗날의 월성(月城)이다. 남해왕이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은 뒤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임종할 때 나이 많고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되었다며, 자신도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삼국유사》의 '탈해왕'조에는 출생지가 용성국(龍城國)이며, 함달파(含達婆)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낳았다고 한다. 용성국은 다파나국과 마찬가지로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정명국(正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알로 태어난 탈해는 칠보(七寶)·노비와 함께 커다란 궤에 넣어져 배에 실려 바다를 떠다니다가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에게 발견되었다. 탈해는 키가 9척 7촌, 머리둘레가 3척 2촌에 달하는 거구로 묘사되어 있고, 사후에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소천구에 장사지낸 자신의 뼈를 들어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였으며 이후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판소리에서는 작품하나를 '한마당'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정조, 순조때는 그 종류가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 12가지를 골라 '판소리 12마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소리꾼들에 의해 완성되어 온 것이다.현재 전창되고 있는 판소리는 5마당(춘향가ㆍ수궁가ㆍ심청가ㆍ홍보가ㆍ적벽가)이다.● 심청가심청 이야기는 어린 심청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뱃사람들에게 인제수로 팔려 바닷물에 빠지나,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와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심청 이야기가 어느 때에 판소리로 짜였는지는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영조ㆍ정조 무렵이 아닐까 추정된다. 효에 대한 이야기는 심청 이야기, 에 나오는 지은 처녀의 이야기, 인도의 전 동자 설화, 일본의 사요히메 이야기도 있음으로 보아 아시아에서 두루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예술성이 높기로는 다음으로 평가되며, 슬픈 대목이 많아서 계면조로 된 슬픈 소리가 많다. 또한 아니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소리에 능하지 않고는 를 이끌어 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의 줄거리와 가락의 짜임새로 봐서 첫째ㆍ심청이 태어나는 대목부터 심청 어머니 출상하는 대목까지, 둘째ㆍ심봉사가 젖을 동냥하러 다니는 대목부터 몽은사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겠다고 하는 대목까지, 셋째ㆍ심청이 후원에서 기도하는 대목부터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까지, 넷째ㆍ심청이 용궁으로 들어가는 대목부터 황후가 되었으나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어서 탄식하는 대목까지, 다섯째ㆍ심 봉사가 맹인 잔치에 참예하려고 황성으로 가는 대목부터 눈을 뜨는 대목까지의 다섯 부분으로 가를 수 있다.● 춘향가는 남원 퇴기 월매의 딸인 성춘향이 남원 부사의 아들인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으나 이별한 뒤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여 옥에 갇히자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구해 준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으로, 문학성으로나 음악성으로나 연극적인 짜임새로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서 가장 예술성이 높은 마당으로 꼽힌다.춘향의 이야기가 어느 때부터 판소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 갈이 없으나, 는 적어도 숙종 무렵에는 판소리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판소리 의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는, 한문으로 된 이야기책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한글로 적힌 이야기책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중국의 옛날 희곡인 원곡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남원의 양 진사가 광대에게 행하 돈 대신으로 지어 준 것이라느니, 남원의 신임 사또가 못생긴 어떤 처녀의 원혼을 달래려고 마련한 살풀이굿에서 비롯되었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요즈음에는 여러 사랑 이야기들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로, 박문수 암행어사 이야기와 같은 여러 암행어사 이야기가 이몽룡 암행어사 이야기로 되어 그 전해지는 이야기를 가색이 소리로 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나 소리의 음악적인 짜임으로 따져 첫째ㆍ몽룡이 광한루에서 춘향과 만나는 대목, 둘째ㆍ몽룡이 천자풀이를 하는 대목에서 두 사람이 사랑가를 부르는 대목까지, 셋째ㆍ이별하는 대목, 넷째ㆍ신연맞이 대목에서 춘향이 옥중가를 부르는 대목까지, 다섯째ㆍ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전라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와서 춘향 어머니와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을 만나는 대목까지, 여섯째ㆍ변사또의 생일잔치가 벌어지는 데에서 뒤풀이까지로 나눌 수 있다.● 수궁가판소리 는, 병이 든 용왕이 토끼 간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더러 토끼를 꾀어 용궁에 데려오게 하나, 토끼는 꾀를 내어 용왕을 속이고 세상으로 살아나간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으로 '토끼타령', '별주부타령', '토별가' 따위로 불리기도 한다. 의 사설이 소설로 바뀐 것은 '토생전', '토끼전', '별주부전', '토공사', '토별산수록' 따위로 불린다.의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옛 불교 경전에 나오는 '원숭이와 악어'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중국의 옛 불교 경전에도 나오며 우리나라 에도 보이는 '자라와 잔나비' 이야기를 거쳐서, 조선 왕조 때에 와서는‘자라와 토끼’ 이야기로 바뀌어 판소리로 짜인 것이라고 한다.● 흥부가는 가난하지만 착한 아우 흥부가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 주었더니, 그 제비가 물어 온 박씨를 심었다가 얻은 박을 타서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되고, 부자이나 심술궂은 형 놀부는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서 고쳐 주고 얻은 박씨를 심었다가, 박 속에서 나온 상전, 놀이패, 장수 따위에게 혼이 난다는 줄거리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으로 '박타령'이라고도 한다.짐승이 사람에게 은혜와 원수를 갚는 이야기는 몽고의 '박 타는 처녀' 이야기, 일본의 '혀를 자른 새' 이야기, 중국의 '은혜를 갚은 누런 새' 이야기 따위에서도 보이듯 아시아에 널리 퍼져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예부터 전해오는 이런 이야기를 조선 왕조 어느 때쯤에 가객들이 판소리로 짠 것 같다.에는 서민다운 재담이 가득 담겨있고, 또 놀부가 탄 박통 속에서 나온 놀이패들이 벌이는 재담도 들어 있어서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서 가장 민속성이 강한 마당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를 재담소리라고 하여 한편으로 제쳐 놓던 가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종파(1) 장로교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 · 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 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 · 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2) 침례교청교도 혁명 전에 네덜란드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살았는데, 지도자 존 스미스는 옆에 살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는 영아 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성서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교인 전원에게 모두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12년경 영국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영국 가지로 퍼지고 1639년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하면서 미국 각처로, 특히 남부로 많이 퍼졌다.(3) 감리교1729년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존 웨슬리 신부가 창시한 이 교파는, 각 신도가 엄격하게 규칙을 통해 자기 통제할 것(Methodist)을 규정한다. 미국에 파견할 선교사에 대한 안수를 거부당한 존 웨슬리 신부의 독자적인 안수에 의해 성공회에서 분리되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영국의 선교사 코크에 의해 1784년 설립되었으며 미국 남북전쟁으로 북·남 감리교회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동감리회가 세워졌다. 한국에는 1884년 미국 북감리교회의 일본 주재 선교사 맥레이가 북감리교회의 지부를 설립한 이후, 1933년에 남·북 감리회가 미국보다 앞서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였고, 해방 이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로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4) 퀘이커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등장한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친우회(형제들의 단체, 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며,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느님(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 운동으로 시작하였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19세에 집을 나와 4년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퀘이커는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現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받았다.(5) 루터교16세기 로마 가톨릭에서 가장 먼저 분리된 루터교는,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3원리는 루터교를 떠받고 있는 기둥이다. 루터교에서는 평신도들이 단상에 올라와 설교도 하고 성찬(성체를 나누는 잔치)을 성직자(목사)와 함께 베풀기도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분리된 루터교는 비슷한 시기에 분리된 장로교와 신학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으며, 장로교와 더불어 다섯 Sola 정신을 공유한다.(6) 기독교대한성결교회성결교는 19세기말 미국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로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결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4가지를 4중 복음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중 성결을 가장 강조한다. 성결교 신학의 배경에는 우선 개신교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그 당시 시대적으로 19세기에 있었던 성결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알마니안주의를 들을수 있다.(7)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1830년대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윌리엄 밀러 주도하에 일어난 예수 재림의 대망을 강조하는 운동이 그 효시가 된다. 당시 200여 교회의 목사와 5만여 명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후 그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 중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넷째 계명, 즉 제7일 안식일의 준수를 회복하고 실천하는 무리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