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사례연구 트라팔가 해전 - the Battle of Trafalgar - 201401633 이창기 201501421 양윤석 201402097 최주원CONTENTS ➀ 전쟁 개요 ➁ 전쟁 배경 ➂ 전쟁 진행 ➃ 사후 효과전쟁 개요나폴레옹 전쟁 중 1805 년 10 월 21 일 트라팔가 곶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 - 에스파냐 연합함대의 결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인한 영국의 식민지로의 해로 봉쇄나폴레옹군의 목적 → 육군이 상륙할 시간을 벌자 . 영국 해군의 목적 → 해로를 확보하여 인도로 해로 확보전쟁 배경나폴레옹의 기만전술 영국 상륙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영국의 전력이 서지중해 방어에 집중 - 프랑스의 손쉬운 이집트 원정 성공프랑스군 나일 해전의 패배 → 영국해군에게 기회가 됨러시아 -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압박 ↳ 프랑스의 전력 분산 및 영국침공 사실상 포기전쟁 진행영국군 전열함 27 척 프리깃 6 척 연합군 전열함 33 척 프리깃 8 척넬슨터치 당시 전열함 전술을 획기적으로 깨뜨림 특히 지휘체계 확립이 되지 않은 연합군 함대에 치명적이었음숙련도의 차이 영국해군이 1 발 /1.5 분의 장전속도 프랑스 해군은 1 발 /3 분의 장전속도격침 1 척 , 노획 및 파괴 21 척 전사 3,200 명 , 포로 7,000 명 전사 400 명 , 부상 1,200 명 함선 손실 없음 결과넬슨의 전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 “Thanks God. I have done my duty.” 넬슨의 전사프랑스의 영국침략 포기 및 대륙봉쇄령 발단 러시아 침공의 발단이 되어 나폴레옹의 몰락 발단 PAX BRITANIA 의 시작 사후 효과Q A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포클랜드 전쟁 FALKLANDS WAR 헬리콥터조종학과 201501421 양윤석 항공운항학과 201401633 이창기 항공레저산업학과 201402097 최주원 2조목 차 - 개요 - 배경 - 섬의 역사 - 전쟁의 경과 - 전쟁 결과 - 질의 응답스페인어 : La Guerra de las Malvinas, Conflicto del Atlántico Sur 영어 : Falklands War, Falklands Conflict, Falkalds Crisis, South Atlantic War 개 요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이에 영국이 군사 대응으로 맞서면서 발발한 전쟁.? 이곳에 이미지를 삽입해 보세요 배 경 갑작스런 전쟁이라 영미권 언론은 포클랜드 침공 배경에 많은 소설을 썼다. 빈부격차 심화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의 수 영국군 정규항모 퇴역 외채 증가 여론환기 영국의 경제난섬의 역사 포클랜드 제도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첫 상륙자 : 영국인 탐험가 존 스트롱( John Strong) 탐험자금 지원자의 이름을 따 포클랜드 해협으로 명명. 1765년 영국 해군 제독 존 바이런( John Byron) 에 의해 포클랜드 섬으로 명명섬의 역사 첫 정착은 프랑스인이 시작. 이후 프랑스에서 식민지로써 관리를 하다 스페인에 섬을 매각. 이와는 별개로, 프랑스가 정착한 이듬해인 1765년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의 서쪽섬 위에 요새를 짓고 정착촌을 형성한다. 당시 영국은 동쪽 섬에 프랑스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1년 전에 그 섬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는 독자적으로 섬이 영국 영토임을 선언한다. 이후 프랑스로부터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사들인 스페인은 서쪽 섬에 살기 시작한 영국인들을 내보내려고 노력하는데 때마침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1774년 이 섬은 영국령이다. 라는 현판 하나를 세워두고는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한다.섬의 역사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며 스페인령이던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한다.1829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포클랜드 섬을 독립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며 루이 베르네를 섬의 책임자로 임명. - 이후 루이 베르네의 해적질 시작 → 미국 어선 나포를 빌미로 미 군함이 섬에 포격 후 무주지 선언 → 미국과 아르헨의 외교 단절 및 미국의 영국 지지 표명섬의 역사 이후 아르헨티나 군 내분으로 섬은 영국의 실효지배 아래 있게 된다. 1965년 UN 의 식민시대 종결 선언,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영유권 협상이 시작. 그러나 영국은 130여년간 섬을 실효지배하였고 정착민들 또한 영국인의 후손이었기에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상륙 침공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고철상들이 배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국기를 계양한 해군함정을 통해 상륙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항의와 함께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상륙 침공 렉스 헌트 경이 영국군의 무장해제를 지시하고 있다.영국의 반격 The Empire Strikes Back. : 포클랜드 사태.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 -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철의 여인이라 불릴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가렛 대처 총리는 대외정책 역시 매우 강경하여 외교관계 단절과 동시에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함영국의 반격 제레미 무어 장군(왼쪽)과 샌디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전쟁 당시 영국군의 양대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했다.전 개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영국으로서도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함대와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세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블랙 벅 작전 Operation Black Buck * 목적 : 활주로 폭격을 통한 제공권 장악 * 과정 : 벌컨(이 항공기의 별칭이 블랙벅이다) 폭격 - 시해리어 폭격 - 함포사격 * 결과 : 규모에 비해 경미했지만 활주로 손상으로 아르헨티나는 본토 출격밖에 불가 능한 상황에 처함.(본토출격 → 전투공역 진입해도 작전가능시간 5분에 불과) 블랙 벅 작전을 기념하는 우표Operation Black Buck 블랙 벅 작전 The crew of the Vulcan after Operation Black Buck블랙 벅 작전 Operation Black Buck 영국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손상된 포클랜드 비행장의 공중사진 https://www.youtube.com/watch?v=mR0LwiKZnnU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5월 2일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컨커러(Conqueror) 함이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침몰시켰다.'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5월 2일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컨커러(Conqueror) 함이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침몰시켰다.'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배경 : 아르헨 해군 가용전력이 대부분 투입된 상황에서 제도 북쪽에는 항모전대가, 남쪽에서는 헤네랄 벨그라노 순양함대가 섬을 봉쇄하고 반격을 준비중이었다. 결과 : 그러나 잠수함의 순양함 격침 이후 영국이 제해권을 쥐게 되고 이렇다 할 방해 없이 섬을 공략하게 되었다. 아무리 강력한 함정이라도 호위함대의 잠수함 방어체계의 미비는 자살행위 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 포클랜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음.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ARA General Belgrano 침몰한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https://www.youtube.com/watch?v=dNpYwsc4yek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5월 4일 보복에 나선 아르헨티나군 해군 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 함을 격침시켰다.' HMS Sheffield;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공격기는 2대씩 짝을 짓고는 셰필드 함을 공격하기 위해 공역으로 진입해왔는데 공교롭게도 셰필드 함의 대공 레이더가 두 전투기를 한대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버그가 발생, 두 대가 모두 레이더에 감지되는 순간 이러한 상황을 예정하지 못했던 셰필드의 전투 통제 시스템은 오류로 먹통이 되어버렸고,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는 셰필드로부터 어떠한 대공 공격도 받지 않는 '거의 훈련 상황' 속에서 엑조세를 셰필드에 명중시켰다. 아르헨티나 해군 항공대의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영국 해군의 조사 결과 : 당시 영국 해군도 사용하는 엑조세를 셰필드의 컴퓨터가 아군 장비로 인식, 적성 장비로 인정하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Zu8bvxJs4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피격당한 셰필드 함영국의 상륙전 5월 21일 영국군이 동(東)포클랜드 산 카를로스(섬 서북쪽 위치, 반면 포트 스탠리는 동쪽이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 투입병력 : SAS 2대대와 3대대, 코만도 여단과 육군 제5여단(구르카 대대 포함) * 목표 : 섬 동쪽의 포클랜드 최대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항구도시 포트 스탠리. * 결과 :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던 아르헨티나 육군 1개 중대의 항복 영국 해군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우스 조지아 섬 주둔 아르헨티나 육군 지휘관 알프레도 아스티즈(Alfredo Astiz) 대위영국의 상륙전 5월 28일,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 육군 잔존부대를 제거하여 안전을 확보코자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결과 : 국군 피해는 전사 17명, 부상 31명.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250명, 부상자 121명, 투항병력 1,400명… 구르카병들이 실전에 참여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하고 지칠대로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들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구르카 항목 참조)에 항복했다고 한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게 된다.(좌측 사진 참조)영국의 승리 * 과정 : 영국군의 포트 스탠리 포위 → UN 의 대 아르헨 포클랜드 철수 제안 → 아르헨의 타 중남미 국가 지원 요청 → 거부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영공을 개방해준 칠레 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11일 포트 스탠리의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Longdon) 산에서 아르헨티나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던 아르헨티나군 중대병력은 의외로 분투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롱돈 방어선이 뚫린 뒤 14일 포트 스탠리의 아르헨티나군은 백기를 들면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영국의 승리 * 사상자 - 영국( A ) : 258명/28% - 아르헨티나( B) : 649명/72% ※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3명. 모두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으로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했다.보급의 부족 전쟁 당시 겨울임에도 방한장비 보급 부족 활주로 확장 공사 물품 및 전차, 야포탄 등의 보급 부족 무리한 인해전술 아르헨티나측이 머리수만 믿고 중화기도 없이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 다. 병사의 훈련도 차이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으로 전문성 이 의심되는 병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총알 떨어진 카빈총 든 예비군 10명이 중무장한 네이비씰 1명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나 패인 분석 + 더군다나 현대적인 해군의 부재로 전부 공중수송을 했으니 중장비 수송은 거의 불가능Any Questions ? THANK YOU FOR YOUR ATTENTION https://www.youtube.com/watch?v=bmlzDKev4ec{nameOfApplication=Show}
에티켓 : 지키다 / 안지키다 같이 지켜야 할 것, 사회적 규범매너 : 있다 / 없다 좀 더 개인적인 부분● IMAGE -어원 : 라틴어의 IMAGO-사전적의미 : 사물의 감각적 영상, 심상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받는 느낌이나 인상-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자신이 타인에게 공개되도록 허락된 모습-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브랜드● UCLA 알버트 메라비안 교수 연구결과- 55% 시각적요소 / 38%청각적요소 / 7% 말의 내용● 뒤셴미소 : 눈과 입이 동시에 웃는 모습
2016-2학기 『전쟁사』 REPORT전쟁사 연구 Report제출일자 : 2016. 11. 8(화)학 과 : 항공레저산업학과학 년 : 3학년학 번 : 201402097성 명 : 최 주 원담당교수 : 이 상 화▣ 로마는 3차례의 포에니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면서 결국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명실상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게 된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유와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공화정이 로마제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데 로마의 사회변화과정과 몰락과정에 대하여 기술하라. ??서 론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막강한 육군으로 장악하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며 적들을 격퇴하면서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고 카르타고는 당시 북아프리카 연안 및 이베리아 반도 일부를 거느리는 거대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해협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주변의 해상을 장악하며 대부분의 지중해 교역로 및 경제권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렇게 로마는 육군이, 카르타고는 해상강국이었는데 시칠리아를 사이로 두 나라가 나뉘어있었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의 메시나를 치려하자 로마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것을 계기로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전쟁이 시작됐다.2-1?본 론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이탈리아를 점령하며 육군이 강했기 때문에 해전이 강했던 카르타고는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격파했고 카르타고는 대규모의 병력을 시칠리아에 파견하며 전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섬으로 해전이 약했던 로마는 첫 번째 해전에서 졌다. 패한 뒤 로마는 까마귀배를 만들며 다시 카르타고와 전투를 벌였고 승리했다. 그 이후에도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육전이 밀리자 용병을 고용하고 코끼리부대를 앞세워 로마와 전면전을 했고 로마군은 코끼리에 공포를 느꼈지만. 참호와 경보병의 투창을 이용해 코끼리부대를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다친 코끼리가 오히려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며 카르타고는 대패하며 대규모 해전에서도 패배하며 결국 시칠리아점령을 포기하고 강화를 맺으며 로마는 배상금과 여러 섬을 얻으며 더욱 막강해졌다.제 2차 포에니전쟁은 한니발이 용병을 이용해 대군을 이탈리아반도 전면에 투입하며 다시 로마와 전쟁을 시도하며 벌어졌다.로마는 용병의 반란을 이용해 카르타고로부터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획득했고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은 용병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치하러 떠나고 그의 아들 한니발장군이 로마의 동맹시인 사군툼을 공격하며 전쟁이 재개된다.한니발은 용병과 코끼리부대의 대군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군을 공격하며승리를 거두었다. 로마는 카르타고 대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술을 이용해 적을 급습하고 빠지며 한니발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한니발은 로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로마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됐다.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지만 아프리카와 지중해사이의 지리적 요점으로 해상교역이 활발하여 금방 국력을 회복했으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가 계속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확실하게 굴복시켜야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이에 로마는 누미디아와 거래를 하며 카르타고를 침입하게 해서 영토분쟁이 나도록 만들었다. 이에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제재를 요청했지만 로마는 누미디아의 일방적 방문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카르타고는 경제적 손실을 2년간 받았으며 카르타고는 용병을 조직해 군대를 모았고 누미디아가 또 침입하자 역으로 누미디아로 밀고들어갔다. 로마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조약위반이라며 조사단을 파견했고 카르타고는 국력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전면전을 벌인다. 카르타고군은 시민들까지 전쟁에 참여하며 돌 맨손 등으로 맞섰고 3년간 로마군과 싸웠지만 결국 완전히 함락되며 땅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어버렸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후에 여러 식민지를 이용해 라티푼디움 (대농장)을 운영했고 그로인해 로마의 자영농민은 헐값에 들어오는 농작물로 순식간에 빈민이 되며 몰락한다. 로마의 중장보병은 농민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마의 군사력은 약해졌다. 그라쿠스형제는 이에 농민을 되살리고 공화정을 회복하기 위해 농지법을 만들고 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개혁의 노력을 했지만 로마 원로원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게 된다. 로마의 독재자 시저가 공화정을 부활시키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에게 암살당하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구성하게된다. 이 중 최종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원로원에 반납했지만 원로원은 그에게 다시 그 권한을 그대로 주며 '아우구스투스'칭호를 부여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제1의 시민으로 로마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게 되고 로마의 제정사회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