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학과 :학번 :이름 :한국근현대사의 이해 - 영광의 날들, 마르티네즈의 전사마르티네즈 상사의 어렸을 때 모습은 영화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마르티네즈는 유년기 때부터 자신이 어머니가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즉, 그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임에도 자신을 아랍인이라 생각했고 아랍민족으로서 가지는 자긍심 또한 뛰어났다. 그가 점차 성장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이는 프랑스 자국의 문화와 문명을 알제리에 뿌리내릴만한 규범의 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하는 것으로서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육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프랑스인들은 알제리 인들의 문화와 종교, 언어 등을 파괴하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동화정책을 시행하였고 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이 자연스럽게 프랑스 문화와 언어에 동화되길 요구했다. 그들은 알제리인들이 동화정책으로 인해 프랑스적 가치관을 가지길 바랬다.하지만 그는 이러한 프랑스의 정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랍인이고 심지어 친구들조차도 아랍인인데 왜 아랍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께 그 이유에 대해 물어봐도 선생님은 에둘러 말할 뿐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알 수 없자 답답함을 느꼈고 이에 대해 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는 그런 마르티네즈를 자랑스럽게 한 편으로는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마르티네즈에게 현 알제리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줬다. 알제리는 지금 프랑스의 식민지이며 동화정책으로 인해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 등 프랑스에 관한 학문들을 배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프랑스가 우리를 아랍인이 아닌 프랑스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며 현 상황과 프랑스 교육 시행 이유를 말해줬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분개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에 아랍인으로서 성공해서 현재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종족을 무시한 그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며 결심한다. 점차 시간이 흘러 그가 중학생이 되자 프랑스의 동화정책은 점차 더 심화되었다. 아랍어 문화와 아랍어 교육의 비중은 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던 것에 반해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화 교육 시간의 비중은 더욱 더 늘어났다. 그는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었고 선생님과 학교에게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몇 몇 친구들을 모아 아랍어 교육 동아리를 학교 내에 몰래 만들어 저학년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랍어 교육 등을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아리 회원을 대상으로 하여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동아리 회원 모집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모든 학생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태어난 알제리 출신 아이들이었고 이들에게 식민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대다수의 아이와 청년들은 이러한 동화정책의 시행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르티네즈처럼 성공해서 독립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행보를 계속 이어나갔고 결국 그의 간절한 염원 때문인지 동아리는 많은 학생들에게 알려줬고 이로 인해 점차 동아리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이 늘어났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이 학교 측에 알려지게 되고 마르티네즈를 비롯한 동아리 회원들은 이에 대해 벌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티네즈와 동아리 회원들의 부모 귀까지 흘러들어가 마르티네즈는 그의 회원 부모들에게까지 갖은 비난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동아리 회원 모두가 탈퇴하게 되고 결국 동아리는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신념 하나로 키워온 동아리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좌절하고 만다. 비록 학교 내 작은 동아리였지만 그에게 있어 이는 전부였다. 그리고 점차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같이 뜻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알제리 사회 내에서 점차 프랑스의 힘과 입김은 세져 갔다.마르티네즈 또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점차 자신의 신념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신념이 되어주시던 어머니가 쓰러지시게 되고 돈이 없던 그는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투에 필요한 군인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게 된다. 마르티네즈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 군대에 지원하게 된다. 그는 군대에 들어가서도 프랑스 언어를 비롯해 전투신호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지원한 다른 아랍 토착민 병사와도 친해지게 되지만 그들 그 누구 하나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다수 병사들은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하고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우러 온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던 마르티네즈였지만 그는 점차 이 생활에 적응해나갔고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점차 약해져갔다.그리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군대 내에서 아랍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받게 된다. 마르티네즈는 그렇다쳐도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 해방을 자국의 해방으로 생각해 열심히 프랑스어 교육을 받고 훈련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식단 배급에 있어서도 프랑스 군인과 차별을 받았다. 프랑스 군인은 언제나 영양가 좋고 맛있는 음식만 배급받았던 것에 비해 아랍 토착민 병사에게는 그 흔한 과일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언제나 썩기 일부 직전인 음식을 배급받기 일쑤였다. 이러한 차별 대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월급 면에서나 진급 면에서나 프랑스 군인에 비해 훨씬 못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의 월급은 프랑스 군인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며 진급도 그들에 비해 두 배나 느렸다. 또한 그들은 6개월 내내 한 부대에서 훈련만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흔한 휴가 한 번 받지 못했다. 마르티네즈는 처음엔 이러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상사에 대해 항의하는 등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프랑스 군대는 겉으로는 프랑스 군인과 너희는 같은 군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동료들은 이러한 차별대우에 그 누구보다도 실망감이 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마르티네즈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공해서 알제리의 독립에 일조하고 싶었던 그에게 아랍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그의 성공 발판에 장애물이 되었다. 그는 며칠 내 고민 또 고민하다 이러한 차별대우를 더 이상 받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군대 부대 이동을 신청하고 다른 부대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부대에서만큼은 자신이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자 노력했다. 아랍인 이라는 사실에 민족적 자긍심이 컸던 그에게 이 선택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택에 최대한 노력을 다했다. 때로는 프랑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간과 쓸개까지 내보이며 성공하고자 안간힘을 다했으며 힘든 훈련도 절대 빠지지 않고 무엇이든지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진급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진급은 한 프랑스 군인이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던 마르티네즈는 자신의 상사에게 이에 대한 이유를 밝혀 달라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등본으로 인해 그가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리 노력하고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해도 아랍인 이상 출세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까지 숨기면서 이루려 했던 것이 허망하게 돌아가고 그는 자신과 같은 행보를 다른 아랍인이 겪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는 1943년 모로코에서 사, 야시르, 압델카르드, 수니를 만나게 되고 자신과 비슷한 행보를 걷는 압델카르드를 보며 자신의 옛 시절을 떠올린다.
원시미술 ( 기원전 2 만 5 천년경 시작 추정 ) 수소들의 전당 기원전 1 만 3 천년경 . 주술적 의미의 동굴벽화 개 찾으려다 프랑스 지방의 동굴에서 1940 년대에 알려짐 . 사실적 묘사 , 벽면에 소 말 그림 . 제사장이 주술제 등을 통해 초인적 능력 발휘 . 울퉁불퉁한 벽면을 통해 동물의 근육 표현 , 산화마그네슘으로 그림 표현 . 제사장이 자신의 초인적 능력 발휘 원함 이집트 미술 ( 기원전 5 천년경부터 , 영혼불멸사상 ( 이집트문명을 이끈 중심사상 ,) 새 사냥 기원전 1450 년경 - 파피루스의 종이위에 그려짐 , 현세는 내세를 위한 준비기간이기에 사실적 묘사 하지 않음 , 이상적 형태를 찾아 그림 . Ex. 파라오의 모습은 인체의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옆얼굴은 강해보이고 , 신비 , 평면적 , 하지만 눈과 가슴은 앞을 향함 , 가슴은 넓게 커다란 발로 대지를 지탱하는 모습을 보임 ( 왕위 위엄성 ), 바탕에 새가 원근감 , 입체감 없이 그려짐 ) 네바문 무덤 출토 ,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그리스미술 ( 기원전 1100-30 년경 , 인간중심 세계관 , 현실적 , 사실적 , 합리적 , 개인적 , 생동감묘사 ) 기하학적 양식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의 디필론의 암포라 , 기원전 750 년경 테라코타 높이 108cm. -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 행렬을 그린 것으로 맨 윗단에 그려진 것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 . - 그 밑단에 그려진 것 : 장례식 행렬 , 시신누워 있는 모습 , 마차행렬 끄는 모습 , 오열하는 모습 ( 머리위에 손을 올려놓음 ), 그 밑단은 전투사가 마차타는 모습인데 표현이 조악함 . 원래 암포라는 주로 술 , 올리브 유 등을 담아 놓은 것 , 손잡이 有 , 위는 둥글고 다리부분은 가늘어 기능성이 그리 좋지 않음 - 그리스문명은 서구문명의 근간으로 그리스에 회화가 있었다면 이는 아마 벽화였을 것 - 그리스문명 (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해 인간중심세계관 , 논리적 , 인체근육마저 세세하게 묘사 ) ↔ 이집트문명 ( 영원불멸사상 , 더 자잘하게 표현 , 세번째는 붓으로 칠한 것 같은 느낌 , 복음서를 손에 들고 있음 , 첫번째에 비해 인간과 비슷하게 그려짐 . 세 개 모두 예수님 성상을 표현 . 2) 로마네스크 미술 (1000-1200 년 )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 ,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 중세미술 3) 고딕미술 (12 세기 중엽 - 14 세기 ) 치마부에 천사에 둘러싸인 마리아 ,1270 년 경 - 노란 것은 전부 금으로 채색한것으로 마리아와 천사얼굴이 다 똑같음 , 원체감 전부 무시 , 평면적 , 완벽한 좌우대칭의 모습 보임 . 원근감을 거부했기에 공간이 이상 , 마리아가 높은 건좌위에 크게 앉아 있음 .중세미술 3) 고딕미술 지옷토 통곡 1305-1306 년 -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모습 , 성모마리아가 그녀의 아들을 마지막으로 포옹하며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 서서히 평면에서 벗어나는 그림으로 원근법이 나타나며 천사들도 각도있게 내려옴 . 종교적 변화 ,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됨 . 천사들마저 인간의 슬픈감정이 반영됨 . 미술양식이 사실적 , 현실적 , 인성이 드러나기 시작함 . 르네상스 ( 중세 1000 년의 종교적 억압에서 탈피하려는 인간 정신으로 새로운 자연과 인간의 발견 , 고전으로의 복귀 , 현실에 대한 기쁨 , 자신에 찬 생명의 힘 , 능동성에 대한 사랑 , 과학 탐구등이 근본 개념 , 유화물감의 발견 , 명암 효과에 의 한 모델링 , 과학적 원근법 , 해부학적 지식을 이용한 인체묘사로 현실감과 생동감 표현 . 15 세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 얀 반 아이크 (1390-1441) 아놀피니의 결혼식 초상화 1434 년 - 템펠라로 그린 것으로 공간감이 아주 좋음 , 공기 원근법 ( 공기를 통해 창문 밖으로의 모습을 보여줌 ). 중경 (= 벽 ) 에 있는 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춰짐 . 그림 그려주는 화가의 모습도 반영 . 거울 위에는 화가 이름이 쓰여있는데 이는 자신이 이결혼식을 증명하는 입회인임을 나타냄신자 유다는 거지를 모델로 , 하지만 실제 안젤로가 거지 – 인간의 양면성 나타냄15-16 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1500 년 이후 - 유화자화상 , 얇고 조그만 입술 , - 해부학 , 7 등신의 비트비루스의 말 믿음 . - 밑에 글이 거꾸로 뒤집어 있는데 그는 항상 글을 거꾸로 뒤집어 씀 . 생명이 어떻게 출생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과학자로 만듬 . 15-16 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켈란젤로 ( Buonarroti , 1475-1564 년 , 이탈리아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1508-1512 년 바티칸 , 로마 - 천장화는 반밖에 안보임 , 천장은 반원통형 모형 , 천장 가운데 부분에 창세기 얘기 ( 아담창조 ), 양 옆에 거인 표현 ,(5m, 334 명 그림 ), 물감을 개는 조수만 쓰고 그림을 인체비례에 맞춰 3 년동안 그린 그림 . -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보다 23 살 어리지만 , 40 년을 더 삼 (89 세까지 ), 평생 독신 , 종교적인 사람 , 과학자 X, 예술가 , 건축가 ,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 그린 그림 . 감성적이고 종교적인 인간상을 최우선으로 여김 . 신의 정신이 깃든 인간상 표현 . 미켈란젤로는 원래 건축가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5-1541 년 , 시스티나 제단화 , 바티칸 - 이제는 풍경화 X, 수직으로 지옥과 천장을 구분 , 세부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마리아 有 , 가운데 예수를 기준으로 오른쪽 하단에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을 당했던 순교자 바르토로메오가 들고 있는 인물 가족은 기괴하게 표현된 미켈란젤로 자신 , 프레스코화 테크닉의 진수 보여줌 , 사람들의 각도가 다 다른데도 균형적 ( 예술과 과학의 조화 보여줌 ), 40 대 전부동안 그림 , 당시 종교의 분열상과 전쟁을 보면서 신의 심판이 멀지 않았다는 그의 종교적 신념 보여줌 . 미켈란젤로 피에타 1500 년 , 성 베드로 대성당 , 바티칸 . - 피에타 (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 ) 피라미드 구조는 다빈치에 배운것 드러나 인간의 심리와 내면 , 영혼의 교감이 느껴짐 .(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던 시기 X), 19c 낭만주의 20c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초월해 사용 , 빛을 이용한 명암법 사용 (19 세기 인상주의를 앞선 것 , 그 당시 채색할 때 색에 의한 명암법 사용 , 빛이 들어오면서 어두워지면서 얼굴에서 깊숙히 올라오는 것이 느껴짐 ) 17 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렘브란트 야간순찰대 1640 년대 - 야간 민병대가 단체 초상화를 주문하면서 그려진 그림 , 그 당시 길드의 세력이 강함 , 그 당시 단체 초상화가 多 , 그 당시 초상화 틀은 현재와 같음 ,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세계에 빠져 사람들의 시선 , 행동을 다 각각 그림 . 사람들마다 각자 소실점이 있음에도 완벽한 균형감각을 보임 , 빛에 의한 명암법 , 하지만 주문한 사람이 반발 , 이후 일이 끊김 . 이후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음 . - 렘브란트는 그 당시 과학에 심취 , 나날이 역동화되는 시공간을 보여줌 ,17 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렘브란트 골든 헬멧을 쓴 남자 1650 년 - 군인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 잘 그려져 있음 , 인간의 내면 , 심리세계는 19c 낭만주 의 부터 표현되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 심리가 잘 표현됨 . 17 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렘브란트 다윗왕의 편지를 받은 밧세바 1650 년 - 다윗왕이 산책을 하다 목욕하는 부인 세바를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장군의 부인 , 아내여서 그 장군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전장에 보임 . 그 후 남편이 죽고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편지를 보고 미래에 대한 불안 , 남편을 잃은 슬픔이 표현됨 , 강한 대비로 불안함을 보여줌 . 하인이 발을 씻겨주는 모습 , 풍만한 여체 ,17 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렘브란트 이젤 앞의 자화상 1660 년 좌 ) 자화상 그린 이유 ?1) 모델료가 없어서 ( 초라해 보이는 행색과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담겨있음 ) 렘브란트 자화상 1660 년대 17 세기 스페인 바로크 , 벨라스케스 필립 4 세 , 16폴레옹이 좋아하는 작가 , 나폴레옹을 신적인 존재로 그림 , 아버지가 장식미술가 , 어머니가 음악가였는데 결벽증이 있어 완벽한 미를 추구 , 그림이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치중한 느낌 19 세기 신고전주의 , 앵그르 오달리스크 , 1810 년대 , 루브르 - 신비한것을 강조하기위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X, 인체 비례가 왜곡됨 , 오달리스크 ( 터키의 궁녀 뜻함 ), 궁녀에 대한 신비감 , 관능적인 것이 있음 , 머리가 페르시아의 문양스카프적인 것을 두르고 얼굴은 그리스적인 느낌이 듬 . - 세부적인 것이 강조 , 아랫부분의 천 , 보물등이 향략스럽고 세밀하게 묘사됨 . - 어깨는 좁고 , 허리는 좁고 엉덩이는 크게 묘사되 불편한 느낌을 줌 . 특히 다리부분이 가장 이상 .19 세기 신고전주의 앵그르 드 브로그리 왕자비의 초상 1850 년대 - 라파엘로적인 느낌 , 19 세기 신고전주의 앵그르 터키탕 1860 년대19 세기 낭만주의 ( 자아의 해방 , 주관적 감정 중시 , 개성 존중 ) 제리코와트 (1791-1824 년 , 프랑스 ) 메뒤사호의 뗏목 1810 년대 , 루브르 - 낭만주의는 너무 현실적인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항 , 그 당시 과학이 문제를 해결해줘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과학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됨 . 이러한 현실주의와 과학에 대한 염증 . 비현실주의로 들어가 신비한 세계 , 우주 , 낮이 아닌 밤으로의 내면세계로의 집중이 나타남 , 밝은 면이 아닌 어두운 면을 찾아감 . 자아에 대한 해방중시 - 제리코와트와 들라크르와는 낭만주의를 완벽하게 보여주지 않음 . 제리코와트는 부유한 가정출신 , 33 세에 요절 , 영국으로 전시가다 죽음 - 화사한 파스톤계를 쓰지 않고 어두운 색채 사용 , 삶의 본질의 어두운 면을 보여줌 . 그 당시 사건을 주제로 다룸 .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정찰하다 30 명넘는 장교와 사람이 탑승했었는데 거의 죽음 . 몇 명은 뗏목을 구해 살아난 생존자들이 구조선이 오자 살려달라고 인간의 처절한 }
REPORT학과 :학번 :이름 :나약하면서도 위대한 황제, 진시황동서 문화의 이해 화요일 15:00~17:45심혁주 교수님진시황은 중국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진시황은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를 제패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으며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는 등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자마자 괴상망측하게도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 당시에 중국 백성은 70만 명이 동원되었고 결국 이는 37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뿐 아니라 병마용갱도 건설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시행하는 것도 모자란 마당에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 만드는 일에 왜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백성을 동원할 정도로 이에 열중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다. 무릇 목숨을 가진 존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더욱 그러하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불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비롯된다. 진시황의 경우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진시황의 경우 전국 각지에 있는 백성들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구해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백성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만큼 그는 불사의 생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그는 왜 이렇게 ‘죽음’에 대해 그토록 고민하고 두려워한 것일까?나 같은 경우 진시황의 성장시절을 살펴보고 무덤 건설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었다. 진시황의 경우는 탄생부터 위태로웠다 할 수 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자신이 아끼던 무희를 보냈는데 이미 무희는 여불위의 자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식이 진시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시황은 가정사에 있어 참 불행한 사람이었다. 여불위는 후에 음란한 무희에게 노애라는 정력가를 붙여줬고 노애는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진시황은 반란의 배후에 대해 조사하다 여불위가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불위를 귀양 보낸다. 결국 여불위는 귀양 갔다 음독자살한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 맞다면 여불위는 결국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진시황이 아무리 폭군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불행한 사람은 삶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불행한 시절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또한 진시황은 만리장성 축조와 분서갱유 사건만 보더라도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생전에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놓은 그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반 사람보다 더 컸을지 모른다. 그래서 말년에 그는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할까 무서워 수많은 궁전, 그 중의 일부인 아방궁을 짓고 그 곳을 지하로 돌아다니며 이를 비밀로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자신이 죽은 후에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무덤을 도굴할까봐 무덤을 건축한 사람을 죽여 자신이 묻힌 곳을 비밀리에 부쳤다. 또한 자신의 모둠이 도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동 발사 장치라든지 함정 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진시황은 생전에 자신이 죽고 난 훗날의 걱정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렇듯 진시황은 죽음을 삶의 마지막, 끝으로 본 것은 아니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시신이 훼손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만 봐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이를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순장시켰다. 또한 죽은 후에도 자신이 이전에 누렸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수많은 금은보화와 보물을 자신의 무덤에 안장시켰다. 진흙으로 빚어 실제 크기로 만든 수천의 병사와 말들을 대열에 맞춰 배치시키기까지 했다. 이는 죽은 자신을 사후에도 보호하고 명령을 받들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사실들만 보더라도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 진시황릉을 죽음 이후에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 여겼던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멸하지 않는, 불멸로 가는 삶의 시작이라 간주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과 달리 정말 광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집착했고 결국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곁에 둔 채 떠났다. 이러한 것을 보면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죽음에 더 연연하는 것 같다.진시황이 왜 그렇게 무덤가 괭을 건설 했을까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보니 그에 대한 몇 가지 성격, 특징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는 권력욕이 넘쳐나며, 겉으로는 백성들에게 폭정을 저질렀지만, 안으로는 죽음이라는 태생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해보였다. 아방궁과 같은 화려한 궁전, 수많은 궁녀들조차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진 못했던 것 같다.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붙잡고 사는 사람의 인생이 어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도 아주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게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 무서움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서 자신의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는 이르게 되는 곳이 죽음이다. 그렇기에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금 현재의 내 삶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도 죽기 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백성을 통치했다면 역사에서 좀 더 위대한 황제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이를 오히려 감추기 위해 그런 폭정을 저지른 것이라 생각하니 같은 인간으로서 안타깝기도 했다.진시황은 자신의 무덤, 진시황릉에 600마리 이상의 말, 청동마차, 황실에서 기르던 진귀한 동물을 묻었다고 한다. 또한 돌조각을 청동 고리로 이어 만든 것부터 시작해 갑옷, 전차 등 무덤 안에는 진귀한 것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는 그 시대, 진나라에 비하면 참 놀라운 과학기술과 예술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진나라에 일한 기술들을 발명할 능력이 있었을까?또한 무덤 전방 4km에 사람의 모습을 한 병사를 친위부대로 만든 병마의 표정과 크기가 하나하나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나이 또한 각기 달라 보이며 병마용이 취하고 있는 자세 또한 제각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병마들이 취하고 있는 모습에 혹시 서양인이 한 명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서서히 궁금증을 갖고 조사해보니, 진시황 병마용갱 근처에서 출토된 유골 50구의 DNA 중 1구에서 유라시아 서부인종의 특징이 발견됐다고 한다. 아마도 그 사람은 진시황릉과 갱을 건설하는 과정에 참여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진시황릉이 위치한 시안, 지금은 장안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유라시아 서부인들과 왕래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뿐만 아니라 진시황은 생전에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다. 이는 그가 그만큼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진나라의 수도, 장안은 후에 동, 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교통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역사에 따르면 실크로드가 열린 것은 전한 때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진시황릉에 안장 돼있던 진귀한 물건들, 각기 다른 병마들의 모습, 도로 건설, 유라시아 서부인종의 DNA로 볼 때 비단길이 열리기 이전에 이미 동서양간의 교류가 있었을 거란 생각에 확신이 든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릉이 훗날 실크로드의 출발점에 위치해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교역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깨달은 그이기에 훗날 장안이라는 도시가 교역의 출발점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늠했을지도 모른다.
REPORT학과 :학번 :이름 :Q. 박정희 시대 대외 개방 정책의 하나인 베트남 파병에 대해 서술하고 한반도에 끼친 영향을 논하라.한반도 외교정책김용민 교수님현재 우리나라는 베트남 파병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베트남 파병은 한·일 국교정상화와 더불어 박정희 정부의 대외개방정책 중 하나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군을 해외에 파병한 것으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한반도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파병은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한국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기에 앞으로 베트남 파병의 배경과 전반적인 흐름, 그리고 한반도에 끼친 영향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베트남은 1954년에 제네바 협정의 조인으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보통 선거로 단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북베트남의 주장을 무시한 미국은 반공주의를 내세운 남베트남을 적극 지원했다. 북베트남이 이에 반발하여 남베트남을 무력 침공하면서 월남전은 시작되었다. 그 당시 공식적인 개입을 자제하던 미국은 중공에 이은 베트남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자유우방 25개국에 월남전 지원을 호소하였고, 이로써 한국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파병되었다.사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이승만 정부 때부터 해외파병을 추진했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 때도 계속 이어졌으나 미국 측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하자 한국은 1964년 9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 등 140명을 파병했다. 그 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게 되면서 한국에게 건설 지원 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두 번째 파병 또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비둘기 부대로 명명된 2천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파병했다. 이상과 같은 두 차례의 비전투 부대 파병은 인도적 차원의 파병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경비 이외에 별도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그러나 베트남전은 점차 더 격화되었고 미국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파병요청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비전투 부대의 파병 때와 달리 미국에 국익차원의 지원을 요구했다. 그 당시 한국은 1) 파병 상한선은 5만 명 이내에 2)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3) 북한의 침공 시 미국이 즉각 출범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4)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 진출을 보장한다. 등을 미국에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의해 수용되었고, 한국은 그 후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를 파병했다. 뿐만 아니라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그 당시 파병된 한국군은 미국의 1/10 수준 정도였다. 또한 한국군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 등과 같이 자국의 부담으로 월남전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원을 미국이 부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파병된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전략을 수행하기 보다는 미군이 위임해주는 범위 안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 당시 미국이 정규전 방식의 작전을 수행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주민 속에 섞여 있는 베트콩을 분리시킨 후 주민으로부터 그들을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주민과 적이 뒤섞여 있는 게릴라전에서 주민들의 신뢰와 자발적 협조를 얻어내는 것은 그 당시 가장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한국군은 무력에 의한 군사작전보다 민사심리전에 더 집중을 하였다.그 당시 한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 명에 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약 5000여명이 전사했으며 1만 5000여명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그 후 1973년에 베트남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군은 병력 철수를 완료했다.한국이 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했을 때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6.25전쟁 당시 얻은 우방의 도움에 보답하겠다는 것과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해 자유국가를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이면적인 이유는 베트남 파병을 통한 국익추구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시행된 베트남 파병은 한국에게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남북한 관계에 긍정적, 부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실제로 베트남 파병을 시행하기 전 한국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북한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한국은 국민 1인당 GNP를 기준으로 볼 때 북한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었으며 많은 국민들은 생활고에 처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가 아닌 5·16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렇듯 그 당시 한국은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이며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있으며 군사적으로도 병력규모 세계 6위의 군사대국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국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원인에는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러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것은 박 정권 때의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라 말할 수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로 인해 5억 불의 보상을 얻어내었고 이는 한국 경제성장의 초석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결과물은 베트남 파병으로 약 50억 달러를 얻어낸 것에 비하면 극히 작은 수준이다. 그렇기에 베트남 파병이 무엇보다도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그 당시 미국의 지속적인 무상원조로 국내 산업의 생산기반은 극도로 취약했으며 실업률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전후 폐허화된 일본이 오늘날 같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한국전쟁이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들에게는 경제성장이 정치권의 생존과 국가안보의 확립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그들이 경제적 동기를 배제한 채 베트남 파병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실제로 베트남전쟁으로 막대한 소비시장이 등장하였고, 수출할 통로가 없던 한국 경제는 베트남으로의 수출로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베트남 참전으로 발생한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추진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 뿐만 아니라 공공 및 상업차관을 미국과의 베트남 협상을 통해 도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사회간접 자본의 확충과 전략적 기간산업시설의 확충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공공차관은 주로 발전소 건설과 철도 및 고속도로 건설에 그리고 상업차관은 정유, 화학, 시멘트, 철강 등의 전략적 기간산업시설의 확충에 투입되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자로 인해 국가와 자본(재벌)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고, 이 과정 속에서 현대, 한진, 대우 등의 독점적 대기업들이 새로이 떠올랐다. 또한 기업의 베트남 진출경험은 후에 중동진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을 볼 때 베트남 파병이 가져다 준 직, 간접적 효과는 컸으며 이로 인해 국가 위상이 상승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큰 효과는 만성적 외화부족을 해결해 정통성으로 문제를 겪던 박정권의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이러한 경제적 효과 외에도 베트남 파병은 한·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의료부대와 건설지원단의 파병이 결정된 때만 보더라도 한·미 안보 동맹 체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미국 주도형 동맹 체제였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점차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이 요구한 것을 대폭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베트남 파병은 한·미 관계가 상호협상의 관계로 바뀌게 된 계기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 사례로 베트남 추가 파병을 조건으로 경제발전과 안보 등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는 한국에 14개 조항에 걸친 보장과 약속을 브라운 각서로 한국 정부에 공식 통보한 것을 말할 수 있다. 해외에 파병되는 우방국 군인의 수당을 미국 정부가 대신 지급한다는 내용은 물론 파병을 조건으로 약속한 내용을 문서로 수교한 이러한 외교행위는 미국 정부로서도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또한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안보와 국방, 북한과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군의 주둔을 보장 받을 수 있게 돼서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군이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습득한 연합작전 수행 능력은 한국의 군사적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오늘날까지 세계 도처에서 PKO, 또는 다국적군으로 기량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전쟁의 연합작전 경험으로부터 연유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32만 여명의 전투경험은 귀중했다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방위산업도 베트남 파병으로 가능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M16소총을 실전에서 활용함에 따라 박대통령과 군부지도자들은 미국 정부에 M16소총공장 건설 지원을 적극적으로 제기했고, 이로 인해 국내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수립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발전은 세계로 하여금 한국이 더 이상 낙후된 군사적 기술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토대가 되었다.
REPORT학과 :학번 :이름 :-그대들이 생각하는 이성과 결혼관은?동서 문화의 이해 - 심혁주 교수님요즘 점점 나이가 듦에 따라 결혼이라는 말이 예전과 달리 느껴진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행복, 기쁨과 같은 단어가 먼저 생각난 반면에 요즘엔 결혼이라는 단어 바로 옆에 책임, 부담이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특히 결혼의 여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는 네 가지 유형의 결혼에 관한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남상미와 이태란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면 결혼은 꼭 해야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또는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요즘엔 나와 같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결혼관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십대 중반쯤에 결혼해서 약 2년 정도 지나서 아이를 가져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다. 하지만 요즘엔 많이 다르다. 주위만 보더라도 아니 TV만 보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즐기다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아이를 낳으려 하기보다는 부부끼리의 생활을 더 즐기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아직 내가 결혼을 할지 안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행복 또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결혼을 신중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동반자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찾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상형을 많이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토록 바래온 이상형과 만날 확률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남성은 여성의 외모를 가장 중요시하고, 여성의 경우 남성의 경제력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고 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의 경제력과 외모가 뒷받침된다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같은 경우 내가 바라는 이성은 키 크고, 얼굴이 잘 생기고, 옷태가 좋은 이런 외향적인 것보다는 나와 내적으로 비슷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같은 취미, 관심사를 가지고 있거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형으로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들을 많이 언급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라면 자신의 2세를 위해 혹은 또 다른 이유로든 키 크고 , 잘생기거나 예쁜 외모를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 만나면 처음엔 호기심이 발동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다름이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고, 어느 순간 이러한 것에 싫증을 낼 수도 있다. 이는 이들 간에 서로 공통점이나 유사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하거나 공통된 화제나 취미가 있어야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이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것인데, 서로 간에 불편함이 존재한다면 이는 영원히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경우 이상적인 동반자의 조건으로서 가장 고려하는 것이 나와 내적으로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는가이다.결혼을 함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 예물, 거주지 등 결혼자금이다. 나의 경우 결혼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나와 나의 동반자, 우리 둘이서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 고구려 시대 때만 보더라도 예물은 오직 돼지고기와 술뿐이었다고 한다. 남자 집에서 여자 집에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 재물은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재물을 여자 측에서 받는다면 이는 딸을 판 것이라 생각해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하지만 요즘 보면 결혼하기 직전인 많은 커플들이 결혼자금을 흔히 자신의 부모님에게 의존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곤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파혼 사유 중 가장 큰 이유가 결혼비용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50%가 넘는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의 결혼 비용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결혼 때문에 피해 또는 걱정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다. 만약에 내가 나의 부모님이나 상대방의 부모님에게 결혼자금을 의존한다면 설상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부모님의 의견이나 생각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혼한 이후부터 부모님들을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작 전부터 서로 돈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같이 목소리 높이고 싶지도 않으며 제 3자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부모님들의 경제적인 지원 없이 결혼을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하게 하고 싶다.내가 생각하기에 한 가정의 엄마나 아내라고 해서 헌신적으로 가정과 육아에만 몰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여성은 어느 정도 자신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그렇게 집에서 헌신적이고 내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옛 세대 분들도 더러 계시지만, 이렇게 생활한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허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친구 분들만 보더라도 이러한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내 일을 계속 하고 싶다. 내가 혹시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또는 아이를 출산하게 되더라도 내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있어서 전문성을 계속 키우고 싶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그것을 끝이라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한다. 앞서 말했듯이 결혼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의 삶을 남편에게 맡기면 되겠지 하고 50~60년대식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많다. 나는 이러한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힘든 일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동반자에게 일정부분 의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게 완벽히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혹시 결혼을 하더라도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지고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나는 결혼을 한다하더라도 결혼하기 전과 같은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가정과 육아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닌 나의 생활을 어느 정도 즐기면서 독립된 인격체로써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내 의견만 무조건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결혼 전 혹은 결혼 후에 배우자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하고 결정해야 하며, 혹시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 간에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