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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마가복음 14장 32-42절 주해와 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마가복음 14장 32-42절 주해와 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마가복음 14장 32-42절 주해와 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마가복음 14:32-42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1. 주해1) 본문의 배경적 상황마가복음의 저자는 베드로의 제자 마가 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따른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베드로에 대한 묘사가 마태나 누가보다 더 부정적이고, '거라사'와 같은 지명은 팔레스타인의 지리에 대한 저자의 지식이 부정확함을 보여준다(그래서 마태는 '가다라'로 고쳤다). 필자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지역, 아마도 시리아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보며, 예루살렘이 멸망한 기원후 70년 전후에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의 이야기(narrative)로 기록한 최초의 책이다. 마가복음보다 앞서는 Q가 거의 대부분 예수님 무지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둘째, 종교지도자들이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나 아리마대 요셉 등을 제외한 나머지 종교지도자들과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 갈등은 마가복음 14장 이전에는 주로 논쟁의 형식으로 나타나다가 14장부터는 직접적인 형태(체포, 심문, 재판 등)로 나타난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체포되기 직전 있었던 사건이다.셋째, 제자와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minor characters)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 차례 등장할 뿐이지만 참된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고 예수님이 칭찬하실만큼 믿음의 사람이었다. 반면에 제자들은 많은 경우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 이들과 대조되고 있다(참조. 막 4:40).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한편, 사탄 및 귀신들도 등장하는데 특히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신다.2) 본문의 주석과 해석① 32-34절14장부터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살해를 모의할 때 배신한 가룟 유다가 가세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면서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주신다. 식사를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향하신다. 가는 도중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신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감람산 ‘겟세마네’는 감람산 서쪽 능선에 있는 ‘기름을 짜는 곳’(oil press)이다. 감람산에서 자라는 감람나무 열매를 가지고 감람유를 만드는 곳이 겟세마네였다. 요한복음 18:1은 겟세마네를 ‘동산’(κ?πο?)이라고 부른다.예수님은 겟세마네의 어느 지점에 제자들을 있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만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실 때(5:37), 또 변있게 하셨을까? 이와 관련하여 ICC 마태복음 주석을 쓴 데이비스(Davies)와 앨리슨(Allison)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과의 유사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종 두 명, 모두 세 명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는데, 예수께서도 비록 같은 산은 아니지만 감람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고, 특히 세 명의 제자들을 별도로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이 여덟 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도착한 후 데리고 온 두 명의 종에게 한 말과 유사하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여기서 기다리라"는 칠십인역에서 "∼할 동안 여기서 앉아 있으라"(Καθ?σατε ?δε ?ω?)로 되어 있다. 이 표현은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32절)는 말씀과 어휘적으로 일치한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시험에 대해 말씀하셨다. 물론 양쪽에서 사용된 시험의 의미는 다르기는 하다. 이런 두 본문의 유사성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 그리고 이삭의 희생과 예수의 희생이 비교되고 있다. 자기 아들을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신실한 아브라함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예견한다.② 35-36절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아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분이셨다. 새벽 일찍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도 있었고(1:35), 밤늦게 산에서 기도하시기도 하셨다(6:46). 예수님은 기도가 아니고서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가르치셨으며(9:29), 강도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을 보시고 성전이란 본래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역설하셨다(11:17). 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용서하며 기도할 것을 주문하셨다(11:24-25). 외식으로 기도하는 서기관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할 것이라고 평상시에 서서 기도하지만 간절한 간구를 드릴 때는 무릎을 꿇거나 엎드린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아바'는 아람어인데 '아빠'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른 것은 당대 유대 문헌에서는 찾기 힘든 사례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먼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간청이었다. 구약에서 '잔'은 구원과 기쁨을 의미할 때가 있지만(시 16:5, 23:5 등)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상징할 때가 많다(시 75:8 ; 사 51:22 ; 렘 25:15 ; 겔 23:31-34 등).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이 잔'(14:36) 역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잔으로서 곧 있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죽을 지경까지 괴로워하신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예수님은 아버지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잔을 마시는 길을 예정하셨지만, 그 잔을 거둬들일 수도 있는 주권이 있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다.③ 37-38절앞서 13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를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13:33-37). 그러나 예수님이 발견하신 제자들의 모습은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이 특히 베드로에게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신 것은 그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14:29)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깨어 있는 것은 단지 잠들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기도로 사탄의 유혹과 시련에 맞선다는 말이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을 직역하면 '시험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시험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을 잃지 말고 예수를 따르라는 의미다. '마음'(πνε?μα)은 원하지만 '육신'(σ?ρξ)이 약하다는 말씀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보여세 차례 기도하셨다. 베드로가 세 차례 부인할 것에 맞춰서 예수님도 세 번 기도하셨다는 주장이 있으나 부자연스럽다. 모두 같은 내용으로(39절) 세 차례 기도하셨다는 것은 중언부언이 아니라 그만큼 기도의 내용이 심각하고 간절하단 뜻이다. 바울도 병 낫기를 세 차례나 간구했다(고후 12:8-9)."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는 말씀은 해석하기 쉽지 않다. 앞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제부터는 자고 쉬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실망과 분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뜻이다. "지금도 자고 있느냐? 아예 쉬고 있구나, 됐다." 이 해석은 과도하게 자의적이다. 제자들에게 자고 쉬라는 뜻은 예수님이 이제 세 차례에 걸쳐 기도를 마치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도로 도울 시간은 끝이 났다는 의미다.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이 가까이 왔음을 아셨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은 앞서 세 차례에 걸쳐 하신 수난 예언(8:31, 9:31, 10:33-34)에도 나온다. 자신이 당할 죽음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회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일어나 가자"고 적극적으로 고난 속으로 뛰어드신다.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계신 것이다.2. 설교본문은 기도의 본질에 대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1)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 기도하십시오보통 사람은 죽을 만큼 힘들 때 자포자기하거나 때론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평상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가룟 유다가 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겟세마네에 온 것도 거기서 전에도 기도0).
    인문/어학| 2024.12.24| 6페이지| 1,500원| 조회(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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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감사로 사명을 감당하라(마태복음 25장14-30 주해와 설교)
    감사로 사명을 감당하라(마태복음 25장14-30 주해와 설교)
    감사로 사명을 감당하라- 마태복음 25:14-30 주해와 설교 -마태복음 25:14-30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며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로 격려할 뿐만 아니라 경고의 이중적 효과를 하나님 나라 비유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공동체 안과 밖의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당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발 딛고 사는 나라는 제국의 이권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마태 공동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기에 로마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하지만 각자를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신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명을 책임 있게 감당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태는 오늘의 달란트 비유를 공동체에게 들려주기를 원했을 것이다.마태는 달란트 비유를 하나님 나라 비유와 연동시킴으로써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그 책임을 다할 때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고난 가운데 있는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살고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위기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달란트, 즉 책무를 깨어 잘 감당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분명 로마 치하와 바리새인의 득세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힘들지만(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변명 참조) 마태는 그래도 각자에게 맡겨진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 본문의 주석과 해석하나님 나라 비유는 ‘주인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라고 시작된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마지막 절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독자의 주의를 끈다. 30절 역시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내용이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속한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하에 움직여지는 나리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이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다고 명확하게 말씀때일 것이다. 인자가 올 때와 신랑이 올 때 그리고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듯 주인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 종들은 분명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이 꽤 흐른 그 어느 때에 주인이 와서 결산을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은 종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얼마나 잘 활용하여 주인의 뜻에 합당한 제자의 삶 곧 열매를 맺었는지에 대해 점검했던 것이다.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결산할 때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신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최선을 다해 그 일을 감당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더 남긴 것은 바로 공동체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인의 마음에 합한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분명 마태 공동체는 단순한 고백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 이 공동체는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 즉 열매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참조. 마 7:17-20). 마태는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공동체에 각인시킨다(7:20).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어렵고 힘들지만 주인이 맡겨 주신 사명을 책임 있게 감당하는 것이 주인의 뜻이기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제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른 두 사람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제자로서의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않았다. 맡은 바 달란트를 그저 땅속에 파묻어 두었다고 주인에게 고한다. 26절을 보면 주인은 이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한다. 그리고 그는 갖고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한다(참조. 25:28-30).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내 뜻과 내 생각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주인의 의지와 주권이 중요하다. 나를 불러 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감사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우리는 쉽게 비교를 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감사의 조건들보다도 부족하고 못마땅한 것들을 발견해 왔습니다. 비교의식은 결코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인도하게 됩니다.오늘 본문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여 말씀을 드리자면,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기게 됩니다. 어떤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를 합니다. 그 결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각각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게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아서 배로 남긴 종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을 하고 그 돈을 빼앗고 집 밖으로 내어 쫓게 됩니다.우선 이 비유가 기록된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저자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자신의 복음서에서 임박한 종말에 관심을 가지며 예수의 종말적인 교훈과 예언(마 24, 25장)을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며 많은 비유(마13장)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 공동체의 상황은 임박한 종말의 위기 속에서 깨어 있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로마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 마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책임 있고 충성되게 감당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임박한 종말의 시기에 제자 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자세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김과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종 된 제자들이 주인의 지시대로 맡겨진 일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만드실 나라이지만 충성된 제자(일꾼)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제자들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받은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둘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오랜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인이 다시 돌아온 시간을 뜻하는 것인데, 돈을 주고 떠났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만큼 주님의 재림도 더디게 느껴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주님의 재림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주인에게 종들이 와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각각 두 배씩을 남겼습니다. 이에 주인은 칭찬해 줍니다. 21절과 23절을 보면,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다음으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와서는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4절). 여기서 "굳은"이라는 표현은 '무자비한, 잔인한, 엄한, 거친'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를 주인에게 붙인다는 것은 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라는 말은 자신이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거나 돈을 꾸어주고 큰돈을 이자로 받는 수전노를 의미합니다. 그는 종들을 착취해서 이득을 챙기는 데만 급급한 무자비하고 포악한 탐욕자로 주인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하다가 손해를 본다면 분명히 몇 배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으니 땅속에 묻어 두었다
    인문/어학| 2024.12.07| 6페이지| 1,500원| 조회(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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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마태복음 13장 31-33절 주해와 설교
    마태복음 13장 31-33절 주해와 설교
    마태복음 13:31-33 주해와 설교- 자라고 또 자란다 -마태복음 13:31-3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1. 주해본문은 겨자씨 비유(13:31-32)와 누룩(13:33)의 비유, 두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두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개 비유에 속한다. 이 비유는 밀과 가라지 비유의 내용(13:24-30)과 해설(13:36-43) 사이에 위치하며, 이 비유들 다음에는 예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13:34), 이는 예언의 말씀(시 78:2)을 이루는 것이라는 서술이 나온다(13:35).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모두 누가복음에 같은 순서로 나오지만(눅 13:18-21), 마가복음에서는 겨자씨 비유만 나온다(막 4:30-32).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는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는 대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누가복음보다는 마가복음에 가깝다. 겨자씨 비유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비유된 백향목(겔 17:22-24)과 느부갓네살의 통치의 회복(단 4:21-22)에 대한 말씀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 누룩의 비유는 성경에서 병행을 찾기 어렵다.1) 겨자씨 비유(13:31-32) : 천국은 겨자씨에 비유된다겨자씨는 지름이 1mm 정도이지만 관목은 2-3m 크기로 자라며 나무가 아니라 채소에 속한다. 잎사귀는 샐러드로 사용되고, 씨앗은 의료용 향료와 새의 사료로 사용된다. 앞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 비유처럼,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겨자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파종과 추수가 대비되기보다는 겨자씨의 독특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마태는 마가처럼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 크게 자란다는 것을 대조하며 강조한다. 다 자랐을 때에는 공중의 새들이 가지에 깃들 수 있다. 새들이 겨자 관목에서 씨를 쪼아 먹었기 때문에 이러한 묘사는 비현실적인 과장은 아니다.겨자씨 비유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나타내는 백향목과 비교될 수 있다(겔 17:22-24). 하지만 예수는 레바논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라는 채소를 사용하여 비유를 들고, 가장 큰 나무가 아니라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를 말한다. 따라서 이 비유의 초점은 풍성한 마지막이 아니라 작은 시작에 있다. 예수의 정황에서 이 비유를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군대나 로마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땅에 있는 제자들과 은밀한 축사와 치유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드러나지 않은 시작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이룬다. 이 비유는 당시에 일반적인 승리주의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바로잡는다.반면 이 비유를 듣는 후대의 공동체는 마지막을 강조할 수 있다. 겨자씨 비유는 밀과 가라지 비유 다음에 나온다. 가라지 비유에선 가라지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주요하게 다뤄지지만, 겨자씨 비유를 듣는 청중은 가라지가 아니라 좋은 씨의 결실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청중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제자들에 대한 증오와 위협을 알고 있지만,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 새들이 날아와 깃드는 것은 선교를 통해 종말에 이방인이 모여드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가라지 비유의 해설에서 나타나듯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 선취되진 않는다. 밭은 세상이고, 인자의 나라는 세상에 현존한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거나 재촉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의 행위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2) 누룩의 비유(13:33) : 천국은 누룩에 비유된다누룩의 비유는 요리에서 유래한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누룩을 이용하여 빵을 만들었다. ‘갖다 넣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감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반죽하다’는 말 대신 ‘감추다’는 말이 나온 것이 독특하다. ‘가루 서 말’도 이례적이다. 서 말은 40리터 정도이며 빵 50킬로그램, 150명 이상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이 비유는 가정의 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하진 않는다.누룩의 비유에선 겨자씨 비유처럼 처음과 나중의 크기가 대비되진 않는다. 빵 50킬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룩도 2킬로그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룩은 가루에 감춰져 있지만, 누룩이 있다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도 누룩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이 숨겨져 있지만, 틀림없이 세상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누룩의 비유에선 부풀어 오르는 과정, 곧 성장이 중심적인 내용이 된다.13장에서 감춰져 있다는 표현은 비유(13:35)와 밭에 묻힌 보화(13:44)에도 적용된다. 누룩이 감춰진 것은 비유 안에 진리가 감춰지고, 밭에 보물이 감춰진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제자들의 과제는 말씀과 행위로 감춰진 진리를 드러내고(10:26-27),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2. 설교일곱 개나 되는 비유들을 모아놓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주인공 비유는 단연코 밀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그런데 밀과 가라지 비유 선포와 그 비유 해설문 사이에 단 세 절로 구성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슬쩍 끼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자칫하면 밀과 가라지 비유의 의미에 묻혀버리기 쉽습니다. 일곱 비유의 공통점은 하늘나라 비유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무엇과 같다”는 말로 시작하니까요. 하늘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데, 사진을 찍어 보여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서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때 쓰는 설명방식이 ‘비유’입니다.비유의 대가는 단연코 예수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묵상할수록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성격도 묵상하면 할수록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멋이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원래는 작은 것인데 커진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도 누룩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인의 누룩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매우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매우 작은 것이지만,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이 누룩이라는 점은 똑같습니다.원래 누룩이라는 것은 술 만들 때 쓰는 것인데, 발효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누룩이 물과 함께 밀가루에 들어가면 발효해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술이고, 빵을 부풀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이스트를 사용하는데, 밀가루 500그램에 이스트 7그램 정도면 훌륭한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 적은 것이라도 전체를 부풀게 할 만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누룩 같은 하늘나라”이고 “겨자씨 같은 하늘나라”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그러므로 일곱 개의 비유들 사이에서 겨자씨와 누룩을 하늘나라에 비유한 것은, 하늘나라는 작은 것이 커져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와, 잘 보지 않으면 하늘나라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마구 몰려가는 세상적인 가치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언젠가 겨자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작더군요. 그런데 만일 비슷하게 생긴 작은 씨앗들을 죄다 모아놓고 그중에서 겨자씨를 골라보라고 하면, 저는 못 고를 것 같습니다. 겨자씨를 자주 심어 본 사람만 알 수 있겠지요. 시골 장터에서 파는 채소 씨앗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호박씨나 고추씨 같은 것은 쉽게 구별하지만, 무씨, 배추씨, 상추씨 같은 것은 어쩌다 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구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산속을 다니면서 어떤 것이 먹을 수 있는 나물인지, 약초인지를 발견하는 ‘눈’(眼)이 없기 때문입니다.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묵상하면서 겨자씨와 누룩 그 자체의 역할만 생각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잘 압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이고 옳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겨자씨는 작은데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게 되고, 누룩은 적은데 온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해서 맛있는 빵을 만들게 한다는 것을 잘 알지요.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 어떻다는 말입니까?우선, 그 씨앗이 살아 있는 씨앗인지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룩도 변질되면 절대 부풀게 하지 못합니다. 겨자씨나 씨앗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또 교회라고도 하고, 내적인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만약에 인간의 욕심으로 채색된 하나님 나라라면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작은 것이 커진다는 의미를 찾다가, 그 작은 것이 만일 바리새파의 누룩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이 비유가 밀과 가라지 비유 사이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씨앗도 누룩도 제대로 된 씨앗과 누룩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묵상하는 현대인은 자기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하나님 나라인지 그 성격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문/어학| 2024.11.25| 5페이지| 1,5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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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서론과 개요 정리
    마태복음 서론 & 개요 정리Ⅰ. 마태복음 서론1. 저자마태. 성경 어디에도 마태가 저자라고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저자라는 사실이 강력하게 입증되고 있습니다.(1) 초기 교부들은 한결같이 이 복음서가 마태에 의해 쓰여졌다고 믿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초기 교회사가인 파피아스(Papias : A.D. 100)의 글을 인용합니다.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히브리어로 정리하였습니다”(The Gospel of Matthew, Vol. 1. “The Daily Study Bible.” Philadelphia, PA : The Westminster Press, 1956, p. 21.). 리옹(Lyons)의 주교 이레니우스(Irenaeus : A.D. 175)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면, 마태는 히브리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언어로 복음서를 기록하여 남겼습니다.”(Irenaeus, Against Heresies, 3.1.1)(2) 마태는 복음서를 쓸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리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가 상당한 업무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음을 뜻합니다. 마태복음을 연구해 보면 저자는 숫자나 계산(마 18:24 ; 28:12), 통계(마 1:17)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세부적으로 기록한 사실에서 저자는 분명히 업무 취급상 속기에 능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극히 일부만 소개될 뿐입니다.① 그는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막 2:14)②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눅 5:27-28)③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 그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예수께 소개했습니다. (눅 5:29)2. 기록연대확실하지 않으나, 주후 50∼70년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수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습니다.(1) 주후 70년에 을 주제별로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교회에 유용한 책이 되었습니다. 즉 믿음을 지키기 위한 변증서로서, 새 신자를 위한 지침서로서, 공중예배 때 읽히는 예배서로서 사용되었습니다.(2) 마태복음은 교훈적인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이 배우거나 따르기에 비교적 쉽도록 정리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분명하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① 산상설교 (마 5∼7장)② 메시야를 전하는 자와 그들의 사명 (마 9∼10장)③ 메시야의 비유 (마 13장)④ 메시야의 제자들과 그들의 행위 (마 18장)⑤ 메시야의 다시 오심과 세상 끝날에 대한 예언 :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 (마 24∼25장)(3)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 또는 왕국의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분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시리라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자입니다.① 예수님의 계보는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났음을 밝혀줍니다. (1:1-17)② 예수님은 거듭해서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일컬어집니다. (2:2 ; 9:27 ; 15:22 ; 20:30 ; 21:9,15 ; 22:42)③ 예수님은 율법의 권위를 능가하는 왕권으로 선포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5:21, 27, 34, 38, 43)④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입성함으로써 그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1:1-11)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자신에 대한 왕의 칭호를 당당하게 인정하셨습니다. (27:11)⑥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가 쓰여 있었습니다. (27:11)⑦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의 절대권력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8)⑧ “왕국”(Kingdom)이란 말이 50번,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란 말이 32번 나옵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천국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4) 마태복음은 종말론적 복수님의 제자 :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유형, 4:18-22(막 1:16-20 ; 비교. 눅 5:1-11 ; 요 1:35-51)③ 예수님의 엄청난 명성 : 성공적인 사역, 4:23-254. 제자들에게 주신 메시야의 교훈 : 위대한 산상설교, 5:1∼7:29(눅 6:20-49)① 참 제자(1부) : 복 있는 자와 그가 받을 보상, 5:1-12(눅 6:20-23)② 참 제자(2부) : 세상의 소금 ― 하나님을 섬김, 5:13(막 9:50 ; 비교. 눅 14:34-35 ; 골 4:6)③ 참 제자(3부) : 세상의 빛 ― 하나님을 비침, 5:14-16(막 4:21-23 ; 눅 8:16-18 ; 11:33)④ 율법과 예수님 : 율법을 깨뜨리심, 5:17-20⑤ 살인의 참 의미, 5:21-26⑥ 간음의 참 의미, 5:27-30(비교. 마 19:3-11 ; 막 10:2-12 ; 비교. 눅 16:18 ; 고전 7:1-16)⑦ 이혼의 참 의미, 5:31-32⑧ 맹세의 참 의미, 5:33-37⑨ 상해를 다루는 율법의 참 의미, 5:38-42(눅 6:29-30)⑩ 인간관계의 참 의미, 5:43-48(눅 6:27-36)⑪ 구제의 바른 동기, 6:1-4⑫ 기도의 바른 동기(1부), 6:5-6⑬ 기도의 세 가지 중요한 원칙(2부), 6:7-8⑭ 기도의 모범(3부), 6:9-13(눅 11:2-4)⑮ 기도의 기본 원리(4부) : 용서, 6:14-15(막 11:25-26)? 금식의 바른 동기, 6:16-18? 부와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 6:19-24? 염려에 대한 권고, 6:25-34? 판단과 비판에 대한 경고, 7:1-6(눅 6:37-42)? 기도의 열쇠 : 끈기있는 기도, 7:7-11? 윤리의 정점 : 황금률과 삶의 선택의 두 길, 7:12-14(눅 6:31 ; 13:23-24)?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 7:15-20? 거짓 믿음에 대한 경고 :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 7:21-23(눅 13:26-27)?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7:24-27(눅 6:47-49)? 예수3-19 ; 행 1:13)③ 제자들에게 맡기신 메시야의 사명, 10:5-15(막 6:7-13 ; 눅 9:1-6)④ 핍박에 대한 메시야의 경고, 10:16-23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야의 격려, 10:24-33⑥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치러야 할 대가, 10:34-427.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입증하는 메시야, 11:1-30①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주시는 확증, 11:1-6(눅 7:18-23)② 잘 잊고 변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꺠우침, 11:7-15(눅 7:24-28)③ 어린 아이 같은 자에게 주시는 메시지, 11:16-27(눅 7:31-35 ; 10:12-15, 21-22)④ 이 세대에게 주시는 위대한 초청, 11:28-308. 반대자들에 대한 메시야의 변론, 12:1-50① 변론 1 : 성전보다 더 큰 메시야, 12:1-8(막 2:23-28 ; 눅 6:1-5)② 변론 2 : 종교 규례보다 더 큰 자, 12:9-13(막 3:1-6 ; 눅 6:6-11)③ 변론 3 : 하나님의 택한 종이신 메시야, 12:14-21(막 3:7-12)④ 변론 4 : 하나님 나라와 집이신 메시야, 12:22-30(막 3:22-30 ; 눅 11:14-23)⑤ 변론 5 :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람의 말, 12:31-37(막 3:28-30 ; 눅 11:14-16)⑥ 변론 6 : 악한 세대 또는 배교자에 대한 메시야의 답변, 12:38-45(눅 11:24-26, 29-32)⑦ 변론 7: 친족들의 의혹에 대한 메시야의 답변, 12:46-50(막 3:31-35 ; 눅 8:19-21)9. 천국에 대한 메시야의 비유들, 13:1-52①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13:1-9(비교. 마 13:18-23 ; 막 4:1-9 ; 눅 8:4-15)②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 받는 자와 빼앗기는 자, 13:10-17(막 4:10-12 ; 눅 8:9-10 ; 10:23-24)③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 13:18-23(막 4:13-20)④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악의 존재24-30)⑧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메시야의 불쌍히 여기심 : 어떻게 사역할 것인 가, 15:29-39(막 8:1-9)⑨ 종교인들의 누룩에 대한 메시야의 경계 : 영적 무지와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16:1-12(막 8:10-21)11. 메시야의 극적인 계시 : 그분의 메시야 되심, 그분의 교회와 십자 가, 16:13∼17:27① 메시야의 극적인 자기계시와 그분의 교회 :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 16:13-20(막 8:27-30 ; 눅 9:18-21 ; 비교. 요 6:68-69)② 메시야의 죽음과 장래의 영광에 대한 예언 (첫번째) : 전적인 헌신, 16:21-28(막 8:31∼9:1 ; 눅 9:22-27)③ 변형되신 모습 :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능력 받으심, 17:1-13(막 9:2-13 ; 눅 9:28-36)④ 능력 없는 제자들 : 믿음과 능력에 관한 큰 가르침, 17:14-21(막 9:14-29 ; 눅 9:37-42)⑤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 (두번째) :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손 에 넘기워짐, 17:22-23(막 9:30-32 ; 눅 9:43-45)⑥ 선한 시민의 의무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 메시야, 17:24-27(비교. 막 12:13-17)12. 메시야의 제자들과 그들이 실천해야 할 행동, 18:1-35① 위대함의 조건, 18:1-4(막 9:33-37 ; 눅 9:46-48)②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한 경고, 18:5-10(막 9:42-48)③ 잃은 양의 비유 : 목양의 위대한 모범, 18:11-14(눅 15:1-7)④ 죄 범하는 형제를 교정하는 단계들, 18:15-20(눅 17:3-4)⑤ 무자비한 종의 비유 : 용서의 영, 18:21-3513.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의 메시야의 가르침, 19:1∼20:34① 결혼의 신성함, 19:1-12(비교. 마 5:31-32 ; 막 10:1-12 ; 눅 16:18 ; 고전 7:10-16)② 어린 아이를 영접하심, 19:13-15(막 10:13-16 ; 눅 18:15-173-46
    인문/어학| 2024.07.25| 11페이지| 1,500원| 조회(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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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3편 강해와 설교
    시편 13편 강해와 설교Ⅰ. 강해 : 시편 제13편 ?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고통 당하는 자의 처절한 외침과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찬양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시는 ① 극심한 고통에 대한 탄식 (1, 2절), ② 구원에 대한 간구 (3, 4절), ③ 여호와께 대한 확신과 찬양 (5, 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본시에는 다윗의 마음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먼저 다윗은 극도의 위기 상황을 맞으면서 주어진 현실에 대해 탄식한다. 그 다음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 구원을 요청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응답을 확신하며 찬양한다. 이처럼 탄식에서 간구로, 간구에서 찬양으로의 진행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믿는 다윗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윗은 신앙을 통하여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마음의 전환을 성취한다. 이러한 전환 과정은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다윗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기록되어졌음은 사실이다. 다윗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 절망의 심연(深淵)으로 떨어졌다가 하나님께 대한 호소와 간구를 통하여 확신과 찬양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한편 본시의 장르에 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인 비탄시’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간구시’(prayer song)로 알려져 있다.이제 고통을 당하는 다윗의 간구와 내적 응답이 드러나고 있는 본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탄식이 드러나고 있다(1, 2절). 본 대목에서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원적 질문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극심한 고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우리는 1절을 참조하여 볼 때 아마도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다윗은 당면한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매우 괴로워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윗의 영혼은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찼으며, 마음의 근심을 극복할 능력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원수들의 조롱을 두려워하였다(2절).이와 같은 다윗의 번민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고통은 시작되고 심화(深化)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상태 자체가 곧 저주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복(福)이다. 이러한 원리는 시편 전체의 대강령이자 성경 전체의 대주제인 것이다.둘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호소와 간구가 드러나고 있다(3, 4절). 본 대목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다윗의 절박한 기도가 나타난다. 앞에서 다윗은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멀리하시는 이유를 곰곰이 숙고해 보았다(2절). 그러나 자신에게 임한 답답한 상황과 원수들의 핍박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회의와 근심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다윗의 이성적인 노력은 아무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육신적 사고를 부추길 뿐이었다. 만일 그가 인간적 고민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본시의 결말을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머물지 않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문제를 내어 놓았다. 그는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고 자신의 염려를 털어놓았으며 자기의 형편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간구한 것은 방향 전환의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고, 다윗을 믿음의 본보기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다윗은 모든 의심과 회의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믿고 하나님만을 붙잡았다.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역경을 극복하고 찬송을 회복하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다윗은 믿음을 통하여 위태로운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의 승리의 근거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며, 이것을 통하여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셋째,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회복과 찬양이 나타난다(5, 6절).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통하여 확신을 소유하게 된 다윗은 본 대목에 이르러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다윗은 현재 자신의 처지가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예감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 이처럼 고통 중에 부르는 다윗의 찬송은 일반적인 찬송보다 더욱 고귀하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체험했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찬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찬송은 모든 싸움을 다 마친 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회상하며 부르는 찬송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찬송은 모든 고통과 싸우는 중에 부르는 믿음의 찬송이었다. 다윗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뢰하였고(5절),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우리는 이상에서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참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확신하는 것이며(히 11:1), ② 지상에서의 성도의 찬송은 참된 영적인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지속적일 수 있다.Ⅱ. 설교 :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시 13:3-4 / 눅 11:9)만약 자식이 부모와 아무런 상의 없이 모든 일을 자기 멋대로 처리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일을 막으시면서 기도하도록 유도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또한 기꺼이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성도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하시는지에 대해 알아야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를 생활화할 수 있기에 이 점에 대해 상고하고자 합니다.1. 성도가 사망의 잠을 자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성도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 성도는 매우 좌절하게 되며 심지어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거나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비극이 성도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시 91:15 ; 사 58:9 ; 슥 13:9). 성도가 극한 상황에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다면 그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며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가운데서 신음하며 기도하는 성도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단, 여기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육신적 소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요 15:7).
    인문/어학| 2024.07.09| 4페이지| 1,500원| 조회(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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