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자무역전자무역은 거래처 발굴ㆍ상담ㆍ계약ㆍ원자재 조달ㆍ운송ㆍ통관ㆍ대금결제 등 제반 무역 업무를 인터넷 등 최신 IT기술을 활용하여 처리하는 새로운 무역거래 형태이며, 시공간의 제약 없이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2015년 현재 세계의 인터넷 사용자 수는 30억명을 육박 하고 있는 상태이고, 이에 따라 인터넷을 통한 가상시장에서의 경제활동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무역은 인터넷 전자상거래에 의해 주도될 전망 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무역이 기존 거래 패턴을 급속히 대처하면서 무역 의존도가 특히 높은 한국무역의 최대 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한국은 산업자원부가 중심이 되어 전자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 및 민간부문이 선진 정보통신기술을 바탕으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무역자동화 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달성하였습니다. 2001년 9월에는 한국무역협회가 주축이 되어 ‘민간전자무역추진위원회’를 발족, 통합전자무역플랫폼(e-Trade Platform) 구축을 통한 무역업무의 단절 없는 One-stop 처리를 위해서는 물류업체, 금융기관, 수출입 유관기관등과 정부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인식하에 전자무역 추진을 위하여, 1)인터넷 기반 전자무역 인프라 구축 및 서비스 강화, 2) 기업 e-Biz화 및 전자무역 연계 3) 공공부문 프로세스 개선 및 인터넷 서비스 체계 구축 4) 전자무역 마케팅 역량 확충 및 확산기반 구축 5) 글로벌 전자무역 네트워크 구축 6) 전자무역 실현을 위한 법, 제도 개선이라는 6개의 핵심과제를 선정하여 범국가 차원의 추진을 모색하였습니다.2005년에는 전자무역촉진법 제정과 함께 세계 최초로 전자신용장(e-L/C) 유통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했으며, APEC으로부터 전자무역환경 최우수국으로 선정 되었습니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IT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잘 갖춰진 한국, 홍콩, 싱가포르 3개국이 최상위 레벨인 '레벨5'에 분류됐고, 이는 레벨4, 레벨3 등으로 분류된 미국과 일본 보다 높은 수준입니다.2008년, 세계 최초의 웹 기반 전자무역 통합서비스인 ´uTradeHub´를 상용화 함으로써 중소기업도 추가 투자 없이 인터넷을 통해 물류, 결제 등 대부분의 무역업무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uTradeHub’는 무역업무를 단일창구(Single Window)를 통해 처리할 수 있는 신개념의 국가전자무역허브로서, 무역업체들은 인터넷을 통해 uTradeHub에 접속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신속하고 편리하게 모든 무역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전자무역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희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전자무역시스템인 uTradeHub의 개통으로 인해 우리 국내기업의 경쟁력은 물론 앞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전자무역을 선도해 나가는 기반이 마련된 셈입니다.2015년도 5월 18일, 산업부 장관은 정부가 중소기업 수출을 전폭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전자상거래를 통하여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마케팅, 컨설팅, 금융, 번역등을 지원하는 등 수출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또한 산업통상지원부에서는 현재 초보 단계인 중남미 대상 전자상거래 수출 규모를 5년 내에 연 30억 달러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최근 열린 제 8차 한·루마니아 산업협력위원회에서는 무역·투자, 산업, 에너지 등 3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그 중 무역·투자 분야와 관하여 양국은 전자무역 구축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전자무역시스템이 루마니아로 수출되면 양국 간 무역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보입니다.이렇듯, 현재 한국의 전자무역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통신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역자동화 시스템 또한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무역자동화 추진법, 대외무역법등의 법적 기반도 갖추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2010년, 지식경제부와 한국무역협회는 종이 없는 전자무역의 이용을 보다 확산하기 위해 전자무역 선도기업 20개사를 지정했습니다. 지정된 업체에는 삼성전자, 삼성물산,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글로비스, LG전자, 범한판토스, 에스케이네트웍스, 웅진케미칼, E1, 롯데상사 등 11개 대기업과 경인양행, 지수어패럴, 동양잉크, 남양노비텍, 씨제이에코, 기도산업, 롯데상사 등 6개 중소·견기업, 한진해운, 유코카캐리어스, 신성해운 등 3개 선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업들 중, ‘삼성전자’ 기업의 전자무역 활용의 성공적 사례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삼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TOP5 브랜드 기업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현재 전자, 중공업·건설, 화학, 금융, 서비스 산업을 통해 90개 국가, 600여개 세계 속 거점에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삼성의 계열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삼성전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새로운 첨단 기술과, 혁신적인 최고의 제품 그리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 대한 영감을 불어 넣고, 고객·사회·임직원의 새로운 가치창조를 통해 인류사회의 번영을 가져오는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2014년 기준 매출액 20조7289억원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각종 물품 구매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부서가 바로 구매전략팀입니다. 구매전략팀의 역할은 원부자재의 통합구매와 구매 공급망 최적화, 글로벌 정보구매 강화등을 통하여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달성해내는 것입니다. 관리해야 할 조직과 구매물량이 갈수록 증가하며 구매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봉착하게 된 구매전략팀은 전사통합 시스템을 구출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물론, 구매업무가 단순히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 단 것을 감안하여 이 시스템은 반드시 글로벌 통합 시스템이어야 했습니다.마침 기업 간 전자상거래 구축에 대한 필요성이 해외 선진 기업들을 중심으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국내 정보기술 기반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 삼성전자는 국내외 부품 공급업체와의 모든 구매 관련 업무를 웹 환경하에 실시간 활용할 수 있는 글로넷시스템(Glonets)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무역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T/F팀은 99년부터 해외 수입업체와 EDI 방식의 전자구매를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3100개가 넘는 국내외 구매업체를 온라인으로 연결시켜 구매업무의 효율성 제고와 원가절감을 이루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일단 무신용장 거래로 전환되며 행정처리 프로세스가 10단계에서 4단계로 대폭 단축되어 물품발주-수입신용장개설-선적-통관 등의 제반 구매업무에 투입되는 시간이 9일에서 2일로 줄어들어 신속한 구매가 가능해졌으며 발주에서 최종적으로 물건이 입고되는 시점까지의 리드타임은 12주에서 4주까지 단축되었습니다. 구매서류는 33종에서 1종으로 줄었고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서류작업은 전산화 되면서 오류가능성 또한 크게 줄었습니다. 발주 프로세스가 월 단위에서 주 단위로 변경되며 구매계획을 신속히 수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인적자원의 효율성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삼성전자측은 실질적 비용절감액이 연간 2850억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자무역거래에 대한 수많은 노력의 결과 삼성전자는 전자무역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 머리말아테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B.C. 469~B.C. 399)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는 소피스트에 반대하여 객관적 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기존의 사회 통념을 재검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반감과 오해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을 부인하고 청년들을 부패시켰다’는 구실로 소송당해 사형 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됩니다.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이미 다양한 종교적 견해가 존재했으며, 일부 소피스트들의 극단적인 윤리사상까지도 허용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자유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의 죽음은 사회정치적 분위기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기원전 5세기 초엽,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492-479 B.C.)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달리는 중장보병’인 도시 중하층과 수병 대중 등 민중이 강화되면서 페리클레스시대에 민주주의의 전성기가 펼쳐집니다.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생애의 전반을, 펠로폰네소스전쟁시대에 생애의 후반을 살았고, 소크라테스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은 정치적인 재판을 받게 된 원인은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형성시켜 온 것은 바로, 그가 여러 사람들과 행한 비판적 대화들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소피스트로 오해 받을 정도로 비판적 대화를 즐겼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만도 많이 사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를 자연철학자 혹은 지식을 가르쳐 돈을 벌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전통적 가치를 경시하게끔 만드는 소피스트로 묘사하는 풍자도 고대 그리스의 최대 희극 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을 통해 아테네에 퍼져 있었습니다.이처럼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불만은 그의 재판이 있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그의 철학행위는 당시 사회와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 중의 일과 패전 후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따라서 당시 사회와 갈등을 겪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당시 아테네 민중들과의 사상적 차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이후 아테네의 사회정치적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배경을 그의 생애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2.소크라테스의 생애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남쪽에 있는 알로페케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Sophroniskos)는 석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를 이끌었던 정치가 아리스티데스(Aristeides)의 아들과 절친한 사이었던 것으로 보아 낮은 신분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파였던 그의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재혼했기에, 그는 종종 카이레데모스(Chaired?mos)의 아들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석공 기술을 제외하고는 소프로니스코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일찌감치 아테네 유력가문의 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인 소프로니스코스가 생전에 쌓아둔 친분 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소크라테스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37세에 포티다이아 전투에 참전했고, 45세 때에는 델리온 에서 있었던 보이오티아 군대와의 교전 시에 모습을 보였으며, 47세의 나이에도 암피폴피스에서 벌어진 전쟁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는 알키비아데스의 생명을 구해 훈장까지 받았고, 두 번째 전쟁에서는 모두 꽁무니를 빼고 후퇴할 때 용감하고 침착하게 행동해 그의 대담함이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맹목적으로 공동체에 헌신하거나 무조고도 기이한 종교 의식을 유포한 죄, 젊은이들을 정신적, 윤리적으로 오염시킨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심원투표에서 약 280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고,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고야 말았습니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 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습니다. 그 동안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며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인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대화편 에서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3. 소크라테스와 당시 아테네인들 사이의 사상의 차이점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기본적인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동료 아테네인들과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너무 근본적인 차이가 났기 때문에 조국인 아테네와 대립되기 시작했습니다.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점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관련 없는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테네인들이 누리고 있던 자치정부의 기초에 도전하는 것들 이라는 것입니다.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불일치는 인간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소크라테스는 인간 공동체를 왕이 통치해야하는 집단, 즉 목자가 보살펴야 하는 양떼와 같은 집단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아테네인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이가 아니었습니다.아테네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치란 일반적으로 두 집단 사이의 계급투쟁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도시를 시민들이 통치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습니다. 단지 시민권이 얼마나 폭넓게 주어져야 하느냐는 점에서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게 정치란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지 반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반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소크라테스는 과두정 지지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상은 소수에 의한 통치도 아니고, 다수에 의한 통치도 아닌, ‘아는 자’가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견해는 동시대인들에게는 가장 절대적인 형태의 왕정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왕정을 옹호하는 것 자체가 폴리스에 전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아테네인 모두 왕권이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자신의 삶의 통치권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소크라테스와 아테네와의 기본적인 두 번째 차이점은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덕을 정의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면서 내린 유일한 정의는, 덕은 지식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두 번째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이 문제들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덕이 지식이라면 덕은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덕이 가르쳐질 수 있었다면 구토지 귀족들인 소수에게만 한정될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 즉 신흥 중간 계층인 상인들과 장인들, 심지어는 평민들도 배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수가 덕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도시를 통치하는데 한몫을 차지할 자격이 있었고 그 몫은 부정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식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누가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덕은 지식이었지만 참된 지식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진리조차도 기껏해야 아주 소수만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덕은 지식이고 지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인 다수는 스스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덕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형이상학적 미로를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기본적인 명제, 즉 인간 공동체는 양떼와 같은 무리이고, 그러므로 스스로 통치하도록 맡겨 놓을 수 없다는 명제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대비되는 아테네인들의 견해, 즉 당시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모든 시민들이 공동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정치적 덕”이 그리스 폴리스의 기본적인 윤리적 전제였으며, 시민권이 상대적인 소수에게 한정되어 있든지, 자유인으로 태어난 모든 성인 남자에게로 확대되어 있든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약간의 기본적인 덕과 기본적인 지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바로 폴리스의 핵심을 공격한 것입니다.이 같은 그리스인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평민에게 존엄성을 부여해 준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평민을 격하시켰습니다. 이것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이었습니다.세 번째 차이점은 정치적인문제에 대한 차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적으로는 한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그 후 민회와 법원 등 공식적인 제도에의 참여를 거부하면서, 이러한 공식적 제도 기관에의 참여보다는 사적인 대화가 공공가치와 정의 등을 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 아테네인들은 일반적으로 시민은 폴리스의 생활과 일에 폭넓게 참여함으로써 교육받고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폴리스는 법, 축제, 문화, 종교적인 의식, 전통, 지도적인 시민들의 본보기, 극장 등을 통해, 문제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민회와 법정에서의 논쟁에 참여시킴으로써 시민들을 끊임없이 교육시키는 학교였습니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권리이며 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