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군주적 면모- 로마 집권자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문대학 사학과목차134972 문수빈Ⅰ. 머리말Ⅱ. BC 1세기 이집트의 왕위계승분쟁Ⅲ. 클레오파트라의 집권기ⅰ) 카이사르와의 관계ⅱ) 안토니우스와의 관계Ⅵ.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역량Ⅴ. 맺음말Ⅰ. 머리말200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유혹’하면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그 많은 시간동안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군림하며, 지금까지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인물은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악녀’, 또는 ‘유혹’의 대명사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는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특히 클레오파트라를 소재로 한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은 그녀의 무기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라는 희곡에서는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고, 유혹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몰락을 그린다. 또한 1963년에 개봉한 영화 에서도 당시 가장 아름다운 미모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으면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을 구체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클레오파트라가 역사 속에서 맡은 역할은 두 남자를 파멸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을 설명하기 쉬운 것은 역시 아름다움이 결부된 성적매력이었다. 두 권력자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그녀의 능력을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승자의 역사라는 이론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역사 속에서 패배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적 결말이 현재까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를 기록한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그녀가 사망한 뒤 76년이 지난 뒤에서야 태어났고, 아피아누스는 100년, 디오(Cocceianus Dio Cassius)는 200년이 지난 뒤에야 글을 썼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는 좋은 역사가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녀의 평가가 왜곡되었다는 아니라, 거칠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던 마케도니아 인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달도 안 되어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가장 진취적인 장군이자 그의 공식적인 맛 감식가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친구였고 일설에 따르면 먼 친척이기도 했다. 이 왕조는 마케도니아적인 유산을 포기하지 않고, 적법성을 부여하는 과거를 돈으로 사들였다.이렇듯 국외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집착하였다면, 국내에서는 파라오들과의 연결을 중요시하였다. 때문에 이집트의 관습으로 알려진 형제자매 간의 혼인이 정당화되었다. 마케도니아 귀족의 경우, 결혼은 커녕 형제자매를 살해한 전례가 많았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가족끼리 결혼한 열다섯 번의 사례 중 적어도 열 번은 남매간의 결합이었다. 근친혼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이들과의 법적 문제를 거의 없애주고, 외국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찾아야하는 문제도 없애주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높고 배타적인 위상과 더불어 가문에 대한 숭배를 효과적으로 강화시켰기 때문에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하지만 근친혼에 의한 왕위 계승은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에게 계속 반복되는 위기를 안겨주었다. 근친혼은 부와 권력을 통합했지만 형제자매 간의 경쟁의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에서는 가족 한둘 제거하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BC 3세기 말 삼촌, 남동생, 어머니를 살해하여 악명을 높였다. 이와 같은 사례 등으로 이어진 약 2세기 동안의 광란한 세월이 지나고, 기원전 80년에 결국 적통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린다.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23년 전에 안전을 위해 보내졌던 시리아에서 호출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왕조의 직계 가족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집트인 사이에서 왕가의 혈통이 문제시 되자 예전부터 기회를 엿보던 로마가 이에 간섭했다. 여기에는 물론 그럴듯한 구실이 있었다. 선대 프톨기하지 않고, 막대한 빚을 져 가면서까지 원로원 의원직을 사서 자신의 딸과 대립하며 로마군의 출병을 요구했다. 베레니케의 목에 1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자,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는 부관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를 출동시켜 베레니케의 남편을 제거하였다. 그 후 아울레테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재입성하면서 베레니케를 처형하고 왕좌를 되찾는다.이로부터 4년 후, 드디어 클레오파트라가 부왕의 유언을 받아 열여덟 살에 왕위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의 공동통치를 맡은 것뿐이었다. 이때 동생은 열 살이었다. 이를 구실로 환관 포티누스(Pothinus) 일파는 이집트의 국정을 제멋대로 조정했을 뿐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인 아르시노에(Arsinoe)와 손을 잡고 클레오파트라를 아라비아 국경으로 추방시켰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부왕의 외교를 이어받아 폼페이우스를 지원하고, 군대를 조직한 다음 시리아 사막에 병영을 꾸리고 직접 이들을 지휘해나갔다.이 와중에 로마 내전으로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온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이집트 왕위계승분쟁에 끼어들게 되면서 소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일어난다. 여기서 카이사르가 뒷받침 해준 클레오파트라가 최종 승리하면서 이집트는 사실상 클레오파트라만의 것이 된다.Ⅲ. 클레오파트라의 집권기클레오파트라는 앞서 보았듯이, 험난한 여정을 통해 파라오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서 일을 감행하기 보다는 로마 권력자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 로마의 두 남자를 사랑했든지, 사랑하지 않았든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처세술이 충분히 정치적인 역량을 뽐내어 그녀를 구제해 주었던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ⅰ) 카이사르와의 관계클레오파트라가 군영을 꾸리고 기회를 보고 있을 그 때에, 파르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에서 기세가 기 20년 이상 걸릴 것을 단 며칠 만에 해냈다는 점이다. 그녀가 정말 성적인 매력으로 카이사르를 유혹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녀의 지적 수준을 볼 때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 받는 것을 소홀이 하지 않았고,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사법에 관해서는 특출했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품위를 지키며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수사학 뿐 아니라 수학, 과학, 철학, 천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특히 아홉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학 분야의 천재였다. 악기 연주와 노래에도 능했으며 어릴 적부터 엄격한 체육과 군사교육을 받았다.이러한 교육으로 볼 때, 그녀가 카이사르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분명하다. 클레오파트라는 말하는 법을 아는 타고난 연설자였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카이사르에게 큰 흥미를 샀을 것이다. 당시 학식이 풍부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푹 빠져 있었으며, 열정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의미로의 아름다움과 달리, 지성을 갖춘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여성이라면 어떤 종류의 대화라도 막힘이 없을 것이다.한 달 후, 동맹을 맺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에게 공동통치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섭정들은 맞서게 된다. 폼페이우스까지 죽이면서 카이사르의 지원을 기대했던 소년 왕과 그 측근들이 카이사르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정황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알렉산드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클레오파트라 7세는 복위되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사했으므로 공동 통치자로서 더 어린 열 세 살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두었다. 그녀가 받은 교육 수준을 고려해 볼 때, 카이사르의 선택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의단이었고, 때문에 공동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유령이 되고 말았다.ⅱ) 안토니우스와의 관계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만남은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3년 후에 이루어졌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사망한 후 누가 뭐래도 로마에서 최고의 존재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Gaius Julius caesar)보다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였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이기는 쪽의 편을 들고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 시급했다. 형식으로는 동방 원정에 나선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주둔군이 공화파에 가담한 사태를 설명하라며 여왕을 호출한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여왕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편지를 여러 번 묵살하였고, 그를 안달 나게 만들고서야 움직였다. 그녀는 당시 원래 교육받은 지성에, 경험까지 더해져 최고의 기지를 발휘하였던 것 같다. 이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두 사람이 낚시를 갔을 때 안토니우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허탕만 치자 몰래 어부를 잠수시켜 자신의 낚시 바늘에 물고기를 걸게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하고 상대를 칭찬했다. 다음 날도 낚시를 가게 됐는데 안토니우스가 의기양양하게 먼저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그런데 잡힌 것은 흑해에서만 잡히는 그것도 소금에 절여진 큰 물고기였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어부를 매수한 것이다.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낚싯대는 팔로스나 카노보스 왕에게 줘버리세요. 당신은 수도와 백성과 대륙을 낚으셔야죠.”앞서 말했듯이, 클레오파트라는 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재치 넘치는 말솜씨, 그리고 지성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향락과 여색으로 안토니우스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