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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지형 및 기상을 배우는 목적
    지형 및 기상을 배우는 목적
    지형 및 기상을 배우는 목적은 지형과 기상을 보는 군사적 안목을 함양하여 창의적으로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전장환경은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환경으로 인적 차원과 물리적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미군의 작전요무령은 인적 차원을 육체적ㆍ심리적ㆍ윤리적 측면으로, 물리적 차원을 지리, 지형, 기상 및 기반구조로 구분하였다.특히 육군의 작전은 공통적으로 계획수립 단계에서 METT-TC, 즉 임무(Mission), 적(Enemy), 지형과 기상(Terrain and weather), 가용부대(Troops available), 가용시간(Time available) 및 민간요소(Civilian considerations)를 고려하여 신속히 상황을 판단하고 교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승리할 수 있어야한다. 지휘관은 지형을 보는 안목을 갖추어 지형의 가능성과 한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적 수준에서는 지형보다 지리적 지역의 특성이 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작전적 수준에서의 지형은 피ㆍ아 대규모 기동부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요 도로 체계 및 이동회랑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전술적 수준에서는 지휘관의 관심이 근접지형에 집중된다. 이때 주로 고려되는 요소는 지형평가 5개 요소(OCOKA), 즉 관측과 사계, 은폐 및 엄폐, 장애물, 중요 지형지물, 접근로 및 기동화랑이다.기상은 지휘관이 통제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지형과 다른 특징이 있다. 지형이 불변하는 요소라면 기상은 가변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기상의 변화를 예측가능하거나 불가능하더라도 그 기회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요소로 활용될 수도 있다. 지형과 기상에 대한 정보가 정교하게 수집ㆍ분석되면 지휘관에게 교전의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장정보분석이라는 절차를 통해 전장환경과 그 환경에서 피ㆍ아가 선택할 방책들이 예측될 수 있다.
    인문/어학| 2017.04.24| 3페이지| 1,000원| 조회(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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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택동의 혁명사상
    모택동의 혁명사상1.서론모택동은 1917년 개혁성향의 꿈을 꾸던 동료학생들과 신민학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의 대부분이 제1사범학교 학생들이었고, 신민학회 출신은 훗날 후난성 혁명 지식인의 모태가 된다. 1918년 ‘신민학회’를 창립하고, 이해 사범학교를 졸업 후, 양창지와 함께 베이징으로 와서 양창지의 추천으로 모택동은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게 되고 이때 접했던 수많은 책의 학습으로 모택동 사상의 기초를 다졌다. 모택동 사상은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순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막스-레닌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론을 중국혁명의 실천과정에 적용하면서 생성된 ‘실천적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모택동 사상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사상이며, 중국혁명과 중국의 정치현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모택동 사상의 발전과정을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소개하겠다.2.본론2.1.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 사상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던 1949년 7월, 모택동은 신중국의 통치형태는 ‘인민민주전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시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계급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전정이 사행된다. ‘인민민주전정’하에서의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착실하게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따라서 중공정권은 1950년대 초에는 “토지개혁, 항미원조운동, 반혁명분자의 숙청, 국민경제의 부흥 등과 같은 대규모 투쟁을 수행하여 계획적은 경제건설은 추진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중공정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기틀을 마련하였던 1953년에 중공정권은 스탈린 경제발전 모델에 입각하여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동시에 농업, 수공업, 상업 등 경제구조의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급적인 산업화와 집단화정책에 대하여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모택동은 그와 같은 ‘보수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집단화한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개조는 “개체경제의 속박으로부터 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1955년과 1956년에 중공정권은 농촌사회에서 합작화운동을 강화하였으며,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개조를 완결하였다. 그러나 현대공업, 특히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하여 급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들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산당의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모택동은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1956년에는 “논십대관계”를, 그리고 1957년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서 경제적인 불균형과 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화제방, 백가쟁명 및 민주적 인사와 공산당 간의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의 방침을 제시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무자비한 계급투쟁이나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하여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이유는 흐루시초프의 자유화정책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사회주의에 대하여 기본적인 반대가 없으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농업과 수공업의 집단화와 상공업의 국유로 “사회주의경제의 우위가 확립되었고, 노동자계급이 수억의 농민과 동맹관계를 가지고 전국적인 지배권력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는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으며, 인민 내부의 모순은 기본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독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단결-비판-단결의 원칙에 의한 민주적인 방법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와 같은 낙관론은 인민 내부의 모순의 심각성이 노정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이 가열되자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은 결국 반우파운동으로 대치되고, 비판적인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2.2.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모택동의 지도력과 모택동사상의 권위에 대하여 불신과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마침내 지도층의 내의 노선투쟁으로 발전하여 문화혁명을 야기하게 되었다. 1959년 9월에 노산에서 개최된 당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시 국방상이던 팽덕회가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좌익모험주의`와 `소시민계급적 열광`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팽덕회를 숙청하고 대약진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959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사이에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지 모택동의 정치우선주의, 계속혁명사상, 대중운동방식의 경제발전정책, 그리고 평등주의적인 경향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제1선에서 물러나고 유소기, 등소평, 진운 등과 같은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이 `인민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사상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비등하였다. 이들은 `경제법칙`과 객관적인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유토피아적 경향을 비판하였고, 경제활동에 대한 정치와 사상공작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홍`에 대한 `전`의 역할을 강조하고, 경제적 효율과 수익성에 입각하여 대약진운동 당시에 추진되었던 정책을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실용주의 노선은 대약진운동의 정책적인 과오를 시정하고 경제위기를 수습한다는 한계를 넘어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경제발전에 대한 모택동 사상을 비판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960년 초에 북경시당부의 오함, 등척 등은 모택동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고, 중공당 고급당학교의 교장이던 양헌진은 모택동의 모순론과 유물변증법을 정면을 부정하는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즉, 양헌진은 모순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모택동의 `일분위이론`에 대하여 모순의 통일과 계급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합이이일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당내외에서 `수정주의적 경향`과 `자본주의적 성향`이 풍미하게 되자 모택동과 임표와 같은 급진파들은 다시금 계급투쟁과 정치우선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모택동 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임표는 1963년 2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정치공작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군사.혁명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급진파이 모택동 사상 학습운동은 마침내 1966년에는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청산하고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본주의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는 문화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은 대중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중국사회에 존재한다는 모든 `봉건적`, `수정주의적`사상에 대하여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라고 촉구하였다.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개조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사회과학| 2016.03.08| 4페이지| 1,000원| 조회(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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