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한국사의 이해 -- 목차 -1. 임진왜란 역사관2. 동래부 동헌3. 복천고분군 야외전시장4. 복천 박물관5. 동래읍성 북문6. 동래향교1. 임진왜란역사관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현재까지 확인된 임진왜란 전쟁터 중에서 여러 종류의 가장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역사관이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의 생생한 모습은 물론, 목숨을 걸고 적에 맞선 선조들의 불굴의 항쟁 정신과 모습을 잘 보여주는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최초로 철도 역사 안에 만들어진 역사 전시관이다.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가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이다. 음력 4월 14일에 부산진성이 궤멸당하고 이튿날 동래읍성이 함락된 지 한 달이 안 되어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달포 안에 평안도와 함경도가 유린당하였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오랜 싸움에서 얻은 강력한 무력을 국외로 방출하고자 일으킨 전쟁으로 우리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의병, 의승군의 분기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조/명 연합국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왜군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내었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벌였던 국제전이자 조선 왕조 최대의 국란으로 중국은 명/청 교체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봉건제후의 세력이 몰락하고 도쿠가와막부가 성립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1626년의 경연에서 영의정 이원익은 “난 후의 인구가 평상시의 6분의 1이 못 된다.” 고 할 정도로 극심한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 또 왕의 피난으로 노비들이 그들이 문서를 보관한 형조와 장예원을 불질러 경복/창덕/창경의 세 궁궐을 모두 불타 없어지기도 하였다.1-1 내가 할말 & 자신의 느낌아침 10시 수안역에 위치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역사관엔 도시지하철에 위치한 역사관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잘 조성되어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와 무구, 활과 화살, 갑옷과 투구, 동래읍성의 해자도 있었다. 해자에는 많은 무기들도 많았지만 사람의 뼈도 많이 보였다. 당시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조선시대의 무기인 화차와 대장군전/장군전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수안역 개발당시의 유물들이 발견이 되었을 때를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한 곳이었다. 우린 무심코 지나칠 수 도 있었던 곳을 우연한 개발로 인해 발견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수안역에 발견된 유물 외에도 동래 어딘가에 발견하지 못한 유물이 묻혀있다고 설명을 들었다. 당장에 발굴 작업을 하진 못하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유물과 잔해들을 수거하여 편히 잠드실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2. 동래부 동헌 & 충신당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이라고도 하며,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로 이청, 무청, 향청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동래는 일본과 최접경지로서 한반도 제일의 관방이자 전략요충지로 중시된 만큼 일찍부터 읍성과 관아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시되어 태조 때부터 진을 두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에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것을 독진으로 독립시키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개축되다가 고종에 병인양요를 겪고, 부사 정현덕의 주도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읍성과 관아를 대대적으로 증·개축하였다. 그러나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1 내가 할말 & 자신의 느낌임진왜란 역사관 탐방이후 동래시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동래부 동헌에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확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부를 들어가니 위의 사진과 같이 사또가 한분 앉아 계셨다. 보자말자 대충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대충 감이 왔다. 내부는 현재 여기저기 새로 짓는 건물이 많았다. 마당에는 투호와 제기차기, 널뛰기 등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동래부 동헌에서 조금 돌아가면 충신당이 있었다. 충신당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충신들을 모셔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교수님께서 구석에 자리 잡은 한 비석을 보며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구석에 자리 잡은 비석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 때 열심히 싸운 노비의 비석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보며 당시 난을 피해 도망간 양반들을 대신해 싸운 사회적으로 계급이 낮은 신분에 대한 경의가 저절로 표하게 되었다. 또 한 평등사회인 지금 얼른 양지바른 자리로 비석을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3. 복천고분군 야외전시장복천동 고분군은 사적 제273호. 부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이 일대를 거점으로 해서 성장했던 세력집단 지배자들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이 수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시킨 결과 1991년까지 총78기에 달하는 유구가 조사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덧널무덤, 구덩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으로 구분된다. 이중 덧널무덤은 딸린덧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양분되는데,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 대개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으뜸덧널 딸린덧널은 일자형으로 배치된다. 구덩식돌방무덤 역시 딸린덧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에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의 배치상태는 앞의 덧널무덤과 동일하고 딸린덧널은 나무덧널로 이루어지는데 10·11호분과 21·22호분이 여기에 해당된다.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은 이 유적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대형분일 경우에는 막대한 양의 껴묻거리를 껴묻을 뿐만 아니라 으뜸덧널 혹은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에서 순장이 실시되었던 흔적도 엿보인다. 반면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숫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이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의 물질문화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토기의 경우 굽다리접시[高杯]류가 많이 발굴되며 이외에 단지, 목단지, 바리모양·통형·화로형의 그릇받침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금속제품으로는 금동관·금귀걸이·유리구슬·곱은옥 등의 장신구류·쇠도끼·쇠손칼·쇠끌·쇠삽날·쇠낫 등의 농공구류, 쇠살촉·화살통·쇠투겁창·대도·삼지창 등의 무기류, 판갑옷·비늘갑옷·투구 등의 갑주류, 말머리가리개·안장미개·발걸이·재갈·말띠드리개·청동제말방울·띠고리 등의 마구류를 들 수 있다.3-1 내가 할말 & 자신의 느낌동래부 동헌을 지나 복천고분군 야외전시장으로 향하였다. 동래시장 뒤편으로 올라가면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그것이 야외전시장이었다. 겉으로는 무척 아름다웠고 푸르렀다. 하지만 그곳은 무덤이 전시가 되있는 곳이었다. 무덤내부를 보니 많은 항아리와 그릇들이 보였다. 역사책에서만 봐왔던 옛날의 그릇과 항아리를 실제로 보니 신기하고 그 당시의 기술로 이렇게 만든 것을 보니 신기할 다름이었다.4. 복천박물관부산광역시립박물관의 산하 박물관으로, 삼국시대의 대표적 분묘로서 1969∼1994년에 발굴된 동래 복천동고분군 옆에 건립되었다. 1990년 12월 전시관 건립공사를 착공하여 1996년 10월 5일 전시관과 야외고분군 전시공간을 조성하여 개관하였다. 동래 복천동고분군은 가야고분(AD 1∼5C)으로 향토문화 변천 및 일본과의 관계 규명 등을 밝힐 수 있는 주요 유적으로서 삼한 시기의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4-1 내가 할말 & 자신의 느낌제1전시실은 고분과 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실이었다.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한국 고분문화 변천과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각 시대별 무덤의 형식과 부장품이 전시되어있었다. 1전시실에서 기억에 남는 전시품은 목걸이였다. 조개로 대충 만들어서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요즘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제2전시실은 복천동고분군의 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실이었다.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장르별로 전시하여, 복천동고분군의 성격을 볼 수 있었다. 2전시실에서는 금동관과 사진에 있는 말타는 사람동상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5. 동래읍성 북문동래읍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곳 동래읍성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시기는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 초기이다. 왜군은 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증산아래에 있던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이때 부산진성에서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과 대항했으나 성은 무너졌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동래읍성으로 진격해 “싸우려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끝내 항쟁을 계속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송상현은 성이 끝내 함락되자 관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순국했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읍성은 거의 관리되지 않다가, 영조 7년에 동문·서문·남문·북문·인생문과 암문, 그리고 곳곳에 장대와 망루를 세워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북문과 북문 주변에 복원된 성터뿐이다. 서문과 남문 그리고 부근의 성곽들은 일제 때 파괴되고, 남문에서 동문까지도 차츰 주택지로 변해 옛 모습을 잃게 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