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과 서양 예절의 공통점과 차이점‘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처럼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손익을 따지는 이성적인 사람과 사람이 같이 어울려 살아가다보니 지켜야 할 선이 생겨났는데, 그 선은 공동체의 역사·문화·전통·생활방식 등이 오랜 시간 쌓여 자연스럽게 생긴 법이 아닌 사회규범이다. 예절은 어겨도 범법행위가 아니지만 예절이 있느냐 마느냐가 사람 됨됨이의 기준이 되고 그것은 요즘 사회에서 매우 중요시 여기는 ‘인성(人性)’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사법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준법정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동양과 서양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생활 해왔기 때문에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가장 먼저 많이 떠오른다. 우선 차이점부터 살펴보자. 동양은 예로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아 예(禮)를 중요시 생각했다. 특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또한 그러하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도덕사상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그 중 주제에 대입해볼 수 있는 항목은 오륜의 ‘장유유서(長幼有序)’이다. 직역만 하여도 어떠한 예절을 추구하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 즉, 지위를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나누는 경우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상대방이 또래이더라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대해야 할 태도를 배우고 가르쳐왔다. 심지어 옛날에는 같은 해에 태어났더라도 몇 달 더 일찍 태어난 사람에게 존칭을 쓰게끔 하기도 했다.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는 그 국가의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동양(여기서는 한·중·일로 제한함)에선 언니·오빠·형·누나와 같이 나이에 따른 호칭이 있으나 서양에선 brother(남자형제), sister(여자형제)뿐이다. 더 나아가 서양의 언어에서는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sir’, ‘ma'am’정도의 정중한 표현이 있을 뿐 서술어마다 높임말이 있는 동양과는 다르다. 동양사회에서 부모님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동양의 수직적 구조와 서양의 수평적 구조의 근원이 다른 역사적·문화적 이유도 있겠지만 존칭과 반말이 극명하게 나뉘어있는 언어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이에 의한 상하관계에서 말하는 데 있어선 상식 밖의 무례한 언행 외엔 서양에선 특별히 주의할 것이 없어 보인다. 동양에선 높임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연장자나 초면인 사람에게 말하는 데 있어 더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를 일상생활의 예를 통해 보면서 동양(한국)의 모습이 점점 서양의 예절과 비슷해져 감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청와대의 뉴미디어비서관실과 카카오회사에선 직급대신 닉네임(루피, 또치, 쭈니 등)을 부르며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이, 직급간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요즘 뜨거운 감자인 대중교통에서의 자리양보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몸이 불편하여 자리를 양보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5~60대 중년층이 서있는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 자란 나는 자리를 양보해야하나 괜스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이 변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어떤 60대 중년의 남성이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대학교육 시켜놨더니 자리양보하나 할 줄 모른다. 어른들한테 자리를 양보해야지!”하며 앉아있는 대학생들에게 호통을 친 일을 겪었다. 이처럼 한국에선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자리 양보 받는 것을 예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나는 이 사건의 결과로 서양과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남성의 호통 결과,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주는 젊은이는 약 10명 중 단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따가운 눈총으로 그 남성을 쳐다보았다. 대중교통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말하는 것에서 가장 먼저 눈살이 찌푸려졌고, 그 중년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이 어리긴 했지만 청자들은 성인이었고 초면이었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반말로 얘기한 것에서 두 번째 불쾌함을 느꼈다. 또, 신체의 불편함이 없었음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자리양보를 요구하여 불쾌함을 느꼈다. 이 사건을 토대로 보면, 2~30대의 서양문화를 자주 접한 젊은이들은 서양처럼 점점 개인주의화 되고 있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모두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을까?개인주의를 보여주는 예를 한 가지 더 보자.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노인이 휘청거리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옆 사람을 덥석 잡고선 그 후에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한국은 정(情)이 많다.’라는 말이 있듯 폐를 끼치더라도 ‘이정도야 뭐, 이해하겠지.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면 인색하지.’하며 그냥 넘길 때가 많다. 물론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이 많긴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처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도 예상치 못하게 신체접촉을 당한 상황에서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해 민감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점점 선진화되며 경쟁이 치열해지고 단체보단 개인을 우선시하는 서양사회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을 위의 예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만 보더라도 개인영역 침범을 매우 싫어하며 점점 선진국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공동체라는 끈끈한 끈이 점점 풀려가고 있는 것이다.2. 글로벌 매너 (Global manner)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적 당위성‘지구촌 시대’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영남대학교의 표어도 ‘글로컬(global+local)인재’로, 지역화된 세계로 나아가는 인재상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단어가 생긴 근원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하루도 안되는 시간에 지구 반대편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지구=촌(村) 즉,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 놓았다. 21세기에서 지구의 물리적 거리는 전혀 장애요인이 아니다보니 바다를 건너 각자 빼어난 능력을 가진 기술, 상품 등을 거래·매매하기 시작했으며 상업·정치활동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 우리의 문화를 판매하여 널리 퍼뜨리기도 하고 있다. 이제 지구에서 외국과 거래를 하지 않는 국가는 경제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어 국가 간의 교류는 필수불가결 한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문화 환경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문화적인 실수를 저질러 오해를 범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사회를 위해 의도적이지 않게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글로벌 매너라는 어느 정도의 지침과 교육이 필요하다.글로벌매너란 무엇일까? 우리는 자칫 서양매너=글로벌매너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서양의 사고방식은 훌륭하다. 하지만 이것은 상식적인 에티켓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서양매너=글로벌매너가 아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다른 글로벌매너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문화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처럼 외국인을 만날 땐 그 국가의 문화를 사전에 공부해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국밥문화가 발달되어 한식집의 어느 식탁을 가든 국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국을 천하게 여긴다. 이런 사전지식이 없이 한국에서 프랑스인과 한국인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한국인은 한국의 식문화를 소개하고 싶어 국이 있는 식탁을 소개했을 것이고 프랑스인은 당황했을 것이다. 한국인은 프랑스인에게 사전에 미리 한국의 전통적인 밥상에 필수적인 국을 먹으러 가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하고, 이 질문을 들은 프랑스인은 국을 먹는 한국문화를 천하게 생각하지 않아야하며, 프랑스에 없는 한국 식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제안에 응하고 거부감이 있다면 자신의 문화를 설명하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면 더욱 활기찬 식사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밖에도 식기를 들고 밥을 먹는 것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문화차이 등 국가마다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많은 글로벌 시대에 서로에 대한 매너를 공부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을 잘 따르는 진정한 글로벌인이라고 생각한다.
1.사후세계를 중시한 이집트 문화1-1. 이집트 신과 신화■이미지탐구-이집트의 신들-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 기원전 3200년 경 나일 강 하류에서 발생하여 기원전 332년까지 약 3천 년 동안 존재?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침? 나일강: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 농업을 위해 강의 범람을 예측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이유로 천문학과 역학, 측량술과 수학 등의 학문이 발전-고대 이집트 문명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찬란한 역사의 막을 내림태양의 신Ra습기의여신Tefnut공기의 신Shu하늘의 여신Nut땅의 신Geb지하계의 신죽음부활신OsirisOsiris의 배후자IsisOsiris의 동생SethSeth의 배후자Nephthys1.이집트의 신들-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신들과 함께 시작된다. 고대 이집트에는 아홉 신이 있는데, 태양의 신 라,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 공기의 신 슈, 하늘의 여신 누트, 땅의 신 겝, 지하계의 신 오시리스, 오시리스의 배우자 이시스, 오시리스의 동생 세트, 세트의 배우자 네프티스-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에 의해 모든 자연이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자연의 요소 속에도 신성이 있다고 믿었다. 공기나 습기, 땅과 같은 요소도 ‘공기와 공간의 신 슈’, ‘습기의 여신 테프네트’처럼 신들로 숭배되었다.-신은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는 암사자의 얼굴을, 아누비스는 자칼의 모습을 하고 있다.-그리스 신: 태양, 달, 바다 같은 자연을 대표하는 신과 함께 사랑의 신, 전쟁의 신, 지혜의 신과 같은 추상적인 신들도 있는 반면, 이집트 신: 대부분 자연을 상징-또한 그리스의 신들은 탄생되는 과정에서 동물의 상을 띠기는 해도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만, 이집트의 신들은 처음부터 동물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그리스 신이집트 신자연을 석회암 바위 언덕에 조각된 이 스핑크스는 전체 길이 73.5미터, 높이 20m에 이르는 거대한 미술품-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상상의 동물로 왕권을 상징하고 선한 자를 보호하는 신의 역할을 함- 스핑크스가 만들어진 이유①왕권강화: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왕의 강력한 통치력과 세력을 보여줌으로써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 예로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을 사자로 여겼기 때문에 스핑크스라는 존재 자체가 왕을 상징하는 의미가 강함. 또한 스핑크스가 머리에 쓰고 있는 코브라 장식도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만이 쓰던 장식이고, 스핑크스의 얼굴이 카프레 왕을 닮았다는 것으로도, 왕권강화를 위해 스핑크스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②수호신역할: 스핑크스는 동쪽을 향하고 있고, 스핑크스의 뒤쪽, 즉 피라미드가 있는 쪽은 해가 지는 서쪽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무덤 즉, 사후 세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스핑크스는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고 날개 돋친 스핑크스 상은 일반적으로 건물 입구나 건조물의 일부로 사용된 점으로 보아 신전이나 묘지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여짐③종교적 목적: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건축 당시에는 스핑크스에 신성한 색이라 여겨지는 붉은 색으로 몸 전체를 칠함. 또한 ‘쉐세프 앙크(영원한 생명)’, ‘호르 엠 아케트(지평선에 있는 호루스)’, ‘하르마키스(지평선의 태양신)’이라는 이름→스핑크스는 무엇인가를 수호하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기자의 스핑크스는 그 옆에 스핑크스 신전을 따로 두고 있는데, 이 역시 스핑크스가 독립된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증거. 일반적으로 노변 스핑크스나 우리나라의 해태처럼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조형물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쌍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기자의 스핑크스는 단독으로 서 있음. 이 역시 스핑크스 자체가 종교적 목적이 강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스핑크스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라는 것이 정설. 그것은 이집트에서 국민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시작- 한 때 세계의 패권을 주름잡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와 1871년 보불 전쟁의 패배로 국력이 쇠퇴하고 국민 사기가 침체된 상황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프랑스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열풍을 몰고 왔는데, 교육학자인 쿠베르탱은 프랑스 몰락의 이유를 청년들의 신체 허약이라 생각하여 신체 단련과 경쟁을 통한 청소년 교육을 강조- 때마침 국제주의 사상이 대두되면서 프랑스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올림픽에 대한 구상은 프랑스 국민만이 아닌 세계 청년들로 확대, 쿠베르탱은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청년의 우정과 화합을 도모하자는 결론을 내게 됨. 그리하여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조직하여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는데, IOC는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고 대회가 올림픽 정신에 의해 잘 치러지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하게 됨- 쿠베르탱의 강령=올림픽 정신“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2-2. 아크로폴리스와 신전1.아크로폴리스●고대 폴리스(고대 도시국가)- 종교적, 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따라 규제되며,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 폴리스는 고전기에는 본토에만 200개가 넘었고 소아시아와 에게해, 지중해 일대에 건설된 식민폴리스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그 크기는 소규모- 폴리스의 중심 도시는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했고, 다른 폴리스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 도시 안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세워진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었음- 아고라: 시장인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공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으며, 사교의 장- 아크로폴리스는 언덕으로 신전과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음. 그 중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2007년 유럽 건축물 문화유산 목록에서 중요 기념물로 공식 지정되었는데, 이곳은 아테네에서 해발 속도로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음. 일부 켈트족(수장: 베르킨게토릭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대항했지만 대부분은 선진적인 로마 문명에 적극적으로 동화(기원전 50년 경)-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치?보복적이기보다는 우호적인 정치?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 부여?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킴?자신에게 충성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의 자격을 줌으로써 반발을 최소화[-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를 축적하고, 로마의 골치거리였던 켈트족을 복속시킴으로써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검증 받았고, 7년 간의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됨.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됨.-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로 남김]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이 아이를 낳다가 죽음→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임↓폼페이우스는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음↓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 오고, 협상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함)-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폼페이우스는 당황했고, 그들은 로마를 비운 채 국외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지만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로마 귀족들의 오판이었음-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한번 맞서지 못한하던 폼페이인은 이집트의 신들을 발견하였고, 캄파니아 지방에 새로운 숭배의식을 소개. 이 새로운 숭배의식은 하층민과 노예, 해방노예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점차 귀족들 사이에 파고들어 마침내 제2의 공식종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베네테신전)- 어떤 폼페이 사람들은 악령을 쫓기 위해 요술단지나 악마적 요소에 의지하기도 했고, 이러한 특별한 성향은 디오니소스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 70년대 기독교가 폼페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이유??모든 신적인 속성을 부여 받은 황제에 대한 숭배가 다른 종교의식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후다른 신에게 쏟는 열광은 점차 줄어들었고, 황제 유일 숭배가 곳곳에 뿌리내리게 됨- 폼페이는 찬란한 유적과 뛰어난 건축물, 고도로 발달된 문명과 함께 일상의 친숙함이 배어있는 삶을 증거하는 도시?폼페이의 비너스→사랑이라는 비유를 통해 은밀하고 에로틱하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는데, 폼페이 곳곳의 주택과, 상점, 공공건물의 벽면에는 비너스가 은밀하고 에로틱한 방식으로 묘사→호색한의 모험담과 신화의 인물들이 외설스럽게 표현비너스→매력적인 시를 통해 사랑을 노래한 시구들과, 낙서, 벽화는 당시 폼페이가 쾌락에 빠져 있던 도시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줌●학습정리-고대 로마 건국신화(실비아♥마르스=로물루스, 레무스)? 트로이가 함락되면서 그곳을 탈출한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 땅에 정착한 것이 로마의 원조→그 후 수백 년 후 아이네아스의 후손 실비아가 전쟁의 신 마르스의 두 아들 쌍둥이를 낳음→이 쌍둥이들이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임→다툼 끝에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기원전 736년 로마를 세움-고대 로마의 역사? 기원전 8세기경 티베르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로마는 기원전 7세기경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기원전 6세기 말, 에트루리아를 몰아내고 귀족이 다스리는 공화정을 세움으로써 마침내 고대 국가의 틀을 마련-로마 공화정? 고대 로마 시대에서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한 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
8주. 찬란한 예술의 시대 르네상스8-1. 르네상스3대화가1.연대기표-중세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다음에 르네상스 전성기 시작. 하지만, 이미 고딕 시대(13세기~14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특성이 잠시 나타남. 기억해야할 화가=조토(죠토 1266~1337)-100년 뒤 15세기, 르네상스 전성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7, 라파엘로 등장(마사초 1401~1428,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 1482, 다빈치의 모나리자 1506, 미켈란젤로, 라파엘로)2.초기 르네상스 미술-일반적으로 말하는 르네상스 시대는 15세기~16세기. 하지만 미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적 특징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나타남. 이 때부터 그림에 ‘새로운 리얼리즘’이 드러나기 시작-(화가)치마부에: (1280); 새로운 리얼리즘의 시작?치마부에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인정?1966년 홍수로 손상된 뒤 복구되었지만 70%가량이 파손된 상태?1280년대에 그린 십자가상은 참혹한 수난을 당한 예수의 모습이 감정적으로 표현?예수를 실제 고통받는 사람처럼 그렸다는 것이 획기적 사실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이전의 십자가 예수는 눈을 뜬 채 살아있는 불멸의 이미지로 그려진 데 반해, 치마부에는 옆으로 기운 머리에 감긴 눈, 축 늘어진 모습의 사실적 형상의 예수를 통해 슬픈 감정을 유발하고 있음슬픔에 잠긴 천사들의 모습-(화가)조토: ; 인간의 감정을 표현?조토의 유명한 작품은 베네치아에서 약 60km 떨어진 파도바에 위치한 아레나 채플의 벽화 그림?부유한 시민의 가족 예배당을 장식한 프레스코화?기독교 구원의 역사 중 가장 극적인 주제를 선택, 38개의 도판으로 묘사?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며 통곡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그림?마리아는 죽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있고, 다른 여인들은 예수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음.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요한 역시 두 팔을 뒤로 젖히고 몸을 예수를 향해 굽히면서 울부짖고 있음.?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머리 위로 두 손을 들고 우는 마틴 루터가 서 있었다"라고 표지석이 있음-유럽 곳곳에는 종교개혁을 위한 선구자들의 동상들이 있음●스위스 제네바의 기념물-1559년 제네바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왼쪽부터 파렐Farel, 칼뱅Calvin, 베제Beze, 크녹스Knox2.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루터는 독일 작센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남-광부업을 하는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라 루터의 진로문제도 아버지의 뜻대로 정함-루터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기 원했고, 루터는 법학 학교에 서 법학 공부를 함-당시 16세기 중세 사회는 흑사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살고 있었음-루터가 길을 가다가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짐.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성모의 어머니인 ‘성 안나’를 부르며 소리지름.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정-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한 아버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됨-루터는 수도원에서 금욕적으로 생활하고, 매일 종탑 방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함. 루터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그러나 루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이 미워짐↓수도원 원장은 진정한 참회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줌↓이때부터 루터는 복음에 눈 뜨기 시작[-1512년 어느 날 루터는 수도원의 탑에서 회심을 체험하는 “탑의 경험”을 함⇒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고, 구원은 선행을 한다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아즈? 프랑수아즈는 25세 연상의 희극 시인 폴 스카롱과 결혼, 그의 살롱을 주도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 또는 귀부인들과 밀접한 교류를 맺음? 1660년 스카롱이 죽은 뒤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자 루이 14세의 서자였던 몽테스팡 부인의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교사가 됨? 프랑수아즈는 점차 궁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674년 루이 14세는 그녀에게 맹트농 후작 부인의 지위를 내림-맹트농 후작 부인에 대한 루이 14세의 총애가 날로 더해가는 것과는 달리 몽테스팡 부인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궁정을 떠남? 맹트농 후작 부인은 왕비 마리 테레즈가 죽은 후 루이 14세와 결혼, 이 결혼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음? 루이 14세가 죽고 난 뒤에는 맹트농 역시 궁에서 물러났고, 이후 가난한 귀족의 딸들을 교육하는 학교 설립]4)루이 14세의 문화적 업적-루이 14세의 사생활이 다소 문란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의 공적인 치적을 깎아 내리지는 않았음-루이 14세는 문화애호가로서 문화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발레에 대한 업적이 큼? 14세는 발레에 큰 애정을 가지고 7세부터 무용을 배움? 루이 14세는 역사상 최초의 직업무용수로 평가 받음? 1653년 15세의 나이에 밤의 발레(Ballet de lanuit)에서 '아폴로'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의 호칭을 얻음? 루이14세는 1661년 왕립무용아카데미라는 발레학교의 효시인 무용예술원을 설립? 예술에 대한 루이 14세의 관심과 노력 덕분에 화려한 궁정 문화가 꽃을 피웠고 전 유럽의 왕가에 확산-루이 14세는 프랑스 아카데미 설립: 프랑스어 문법 정립-프랑스 고유의 법체계를 정비: 고전주의 시대의 황금기를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희곡으로 유명한 몰리에르(Moliere), 라신(Racine) 등의 작가와 파스칼(Pascal), 데카르트 (Decartes)등 위대한 철학자들이 다수 배출-베르사유 궁전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듦? 베르사이유는 루이 13세가 1624년 사냥을 즐기기 위해 지은 소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가계로,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자 교회음악가 집안이었음-'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바흐에게도 계승-바흐의 큰할아버지와 두 아들은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임-이런 이유로 바흐 가족들의 중심지였던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임-수난곡, 미사곡 등의 종교 음악과 칸타타, 협주곡 등의 관현악곡을 작곡했는데, 특유의 근대 음악을 발전시킴-바흐는 그의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혀졌다가 19세기 초 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전 유럽에 바흐 광풍을 몰고 옴3)비발디(1678~1741)-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베네치아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교육을, 레그렌찌에게 작곡을 배움-20세 무렵 성직에 들어갔으나 머리털이 붉었기 때문에 ‘빨강 머리의 신부’라고 놀림을 받음-1703년부터 40년까지의 오랜 기간에 걸쳐 베네치아 자선 병원 부속의 여자 음악 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처음에는 바이올린 교사로 있다가 이후에는 합창장까지 겸함? 비발디는 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칸타타, 오라토리오, 협주곡, 미사 등의 많은 곡을 작곡-주요작품: 450곡의 협주곡 . 빠름, 느림, 빠름의 3악장의 구성을 취하여 독주와 합주가 교대로 나타나는 형식들인데, 특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음으로 표현한 곡이 유명●바흐와 헨델-바로크 시대는 바흐와 헨델이 등장함으로써 절정을 이룸-두 사람은 다른 17세기 초기의 대가들과는 달리 새로운 형식이나 양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요소를 각각 독자적인 방법으로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완성시킴바흐(바하)헨델국내외 활동국외에 나간 일이 없음일생을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보냄(영국에 귀화함)결혼2번 결혼에 20명의 자녀를 둠미혼성장 배경독일의 전통적 음악가의 집안에서 성장음악가 조상이 전혀 없음성격겸손, 경건, 완고함세속적로 선반이 낮아짐, 예술성있는 작품들과 소품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의 로코코풍의 화려함에도 심취했지만,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문인들과도 친교가 있었음-그는 상수시 궁전에 프랑스 문인들을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연주회를 개최●상수시궁전의 대리석 방(Marble Hall): 프리드리히 대왕이 볼테르, 카사노바 등 유명인사들과 함께 대리석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가장자리에 금장식을 두른 둥근 천장과 기둥 윗부분이 화려하게 장식된 로코코풍의 방-상수시 궁전의 대표적인 응접실2)님펜부르크 성의 아밀리엔부르크 파빌리온 (로코코)-로코코양식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지만 독일에서 절정기를 맞음-독일 뮌헨 근처 님펜부르크 성에 있던 아밀리엔부르크 파빌리온은 그 중에서도 가장 밝고 화려한 장식의 건물-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을 위해 그의 궁정에 있던 어릿광대가 지은 것●아밀리엔부르크의 거울의방 (로코코)-둥근 형태의 방 중앙에는 거울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효과를 줄 뿐 아니라 시간이나 날씨에 따라 미묘한 빛의 변화를 제공-장식적인 요소와 도금된 회반죽, 거울이 있는 이런 로코코 양식의 방은 단순한 실내에 생기를 불어넣음-아밀리엔 부르크 파빌리온의 거울의 방은 세속적인 로코코 양식의 가장 완벽한 예3)오토보이렌 대성당(독일 남부지방)돔외부내부-전체적으로는 단순하고 안정감을 주는 구조로 건축되었으나 성당의 내부는 상대적으로 무척 장식적임-3개의 돔을 수려한 기둥들이 받치고 있고, 대리석 기둥의 색과 기둥 윗부분의 조각이 실내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듦. 돔은 프레스코화로 멋지게 장식4)벨베데레 궁(오스트리아 비엔나)-유려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환상적인 장식효과-건물 전체는 복잡한 형태? 장식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가늘어지는 기둥? 창문 위 울퉁불퉁한 소용돌이 장식? 지붕 위에 줄지어 있는 조상과 전승 기념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물 내부⇒로코코의 세속적 특징을 잘 나타냄-실용성 측면에서는 의구심을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