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자들의 대변자-신경림,『사진관집 이층』에 대한 서평인간의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은데 금전적 요인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과거의 인류는 신분을 통해 삶이 결정되었고, 현재의 인류는 경제적 능력에 의해 삶이 나누어진다. 근대화 이후 우리는 부의 차이에 따라 계층 간의 극심한 차이를 겪어왔다. 경제적 강국으로 성장하는 국가와 대조적으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며 금전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삶은 경제발전의 그늘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였다. 빛으로 인하여 생긴 그림자에 가려져 고통스러운 민중들을 위하여 노래하고 그들의 삶을 대변한 시인이 바로 신경림이다.시인 신경림은 흔히 농민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낮달』(1956), 『갈대』(1956)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출발한 초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삶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썼다. 그는 시골 농촌에 내려가 10여 년쯤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60년대 말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첫 시집인 『농무』는 1973년이 되어 출간하였다. 유년시절 가난한 농촌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신경림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러나온 서정을 노래하였다. 그는 농민들의 생활 감정을 노래하여 민중에 가까이 다가갔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궁핍한 삶, 떠돌이 노동자들, 도시 변두리의 뿌리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처럼 민중의 삶을 소재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시로 형상화한 신경림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참여시인, 민중시인으로서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의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하였다.신경림은 난해한 시를 거부하였다. 난해한 시는 반역사적, 반민중적이므로 그는 민중들에게 쉽게 읽히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의 제목을 제외하고 외래어나 한자를 거부하고 한글을 전용하였다. 또한 시에는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이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민요가 내포한 민족의 한과 설움, 끈질긴 생명력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간결한 비연시를 비교적 선호하였고 화려한 묘사보다는 평탄한 진술로 시상을 전개하였다. 시의 전형적인 형태인 3·4조, 7·5조 음절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는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민중들과 더불어 살면서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슬픔과 한, 그들의 굴곡진 삶을 수수하고 친근한 언어로 노래해온 민중적 서정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단지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한정되지 않고, 현실의 압력을 맞서 견디며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삶을 추구하였다. 다음의 시들을 살펴보며 신경림 시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오히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더불어 산다세상은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번지가 없어 마을사람들이 멋대로 붙인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나는 지금도 이 지번에 산다 ??-신경림,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신경림의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라는 시는 자조적이고 자괴적인 어조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였다. 화려한 묘사보다는 잔잔한 진술의 기법을 사용하여 시상을 전개하였다. ‘무허가촌, 사글셋방, 오물, 달동네’와 같은 시어로 가난함을 표현하고 있다. 소박한 꿈을 꾸는 시의 화자와 ‘서대문구 홍은동’이라는 현실을 대조하며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부각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처지의 근본적인 원인인 현대사회의 모순된 제도를 비판한다. 가난이라는 표면적인 절망이 아니라 사회제도라는 근원적인 절망에서 출발하는 실존주의적 모습을 보여준다. 위 시와 더불어 하층민들의 삶의 편에 서서 노래하며 현대사회의 모순을 노래하고 있는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신경림,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1행에서 5행은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며 음지 편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패배한 장사’,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와 양지를 의미하는 ‘개선하는 씨름꾼’,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과 대조하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신경림 시의 주된 특징인 음지에 서서 현대사회의 모순된 제도를 비판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힘이 북돋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행에서 9행을 살펴보면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며 음지의 관점에서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드러내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행복하였다며 행복과 불행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는 시인의 인생관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연에서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라며 쓰러진 사람들이 결국 이길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1연과 2연의 문맥상 흐름을 고려하면 이것은 정말 희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러니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아이러니는 어떤 낱말이 문장에서 표현된 뜻과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 용법을 말하며 반어(反語)라고도 한다. 아이러니에는 낭만적 아이러니, 상황적, 구조적, 극적 아이러니, 모순적 상황에서 비롯된 아이러니 등이 있는데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는 예상했던 언술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상황적, 구조적, 극적 아이러니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쓰러진 것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황과 어조를 살펴보면 그 누구보다 음지에 사는 자들의 꿈이 실현되기를 희망하고 있다.이 시는 경험적 시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경험적 시간이란 주관적, 인간적 특성을 지니는 시간으로서 문학작품의 구체적인 시간이다. 경험적 시간은 우리에게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과거의 모든 인간과 사물, 정황을 직접 정서적으로 경험하도록 한다. 우리는「쓰러진 것들을 위하여」,「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의 시간 속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슬픔, 쓸쓸함, 고통, 절망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끼고 경험한다.다음으로 ‘개’라는 동물을 시의 소재로 삼아 신경림 시인의 주제의식을 잘 표현한 시를 살펴보자.쓰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카메라에 잡혔다.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신경림, 「누구일까」1연에서 쓰나미로 온 가족이 쓸려나갔다며 어지럽고 황폐한 배경을 설정하였다. 쓰나미는 근대화를 의미하며 근대화로 인하여 질서가 혼란스러워진 현대사회를 표현하였다. 시인은 근대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개는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온 반려동물로서 지능이 뛰어나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인간과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개는 현대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 동일시되어 개와 인간의 의사소통의 불가능은 인간과 현대사회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라며 하층민의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마지막 연의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에서 ‘그’는 하층민들의 삶과 대조되는 상류사회로서 모순된 제도를 의미한다. 제도의 모순에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의사소통의 단절이 발생한다.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에서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모순된 사회제도 아래 속에서 현대사회라는 세계의 부정에 의한 개인의 불능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 시로 상류사회는 하류사회의 말을 들으려는 의지가 없고 그로 인해 반복되는 좌절로 하류사회의 저항의지도 꺾이고 있는 부정적인 현실을 표현하였다.마찬가지로 ‘별’이라는 자연물을 시의 소재로 혼란스러운 현실세계를 표현한 시를 살펴보자.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고운당 유득공(古芸堂 柳得恭)-목차-1. 작가소개1-1. 생애1-2. 시대배경2. 유득공의 작품2-1. 송경잡절(松京雜絶)2-2. 서경잡절(西京雜絶)2-3.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2-4. 발해고(渤海考)3. 문학사적 의의1. 작가소개1-1. 생애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조선시대 후기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奎章閣 初代 檢書官) 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이고,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 등으로 다양하다. 1748년 음력 11월 5일 부친인 유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홍이석이 서자 출신이었던 까닭으로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유득공의 일생을 기록해 놓은 행장이 전하고 있지 않아서 생애가 자세하지 않지만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부친인 유춘이 사망했다고 한다. 서자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친마저 여의었으므로 유득공은 신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모친 홍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 유득공의 공부를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들의 학업을 이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유득공은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숙부, 유련(柳璉, 1741~1788)으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다. 20세를 전후로 하여 유득공은 숙부인 유련을 통해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의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교유에서 그치지 않고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하였다.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1772년, 그가 25세 때 기자(箕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가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5년에 이르는 검서관 생활 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것 또한 그의 중요한 이력 중의 하나이다. 그의 나이가 37세 때인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인「발해고(渤海考)」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서술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송산에 묻혔다.1-2. 시대적 배경유득공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은 영조, 정조의 시기이다. 200여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의해 조선의 경작지는 3분의 1로 줄어들고, 국가재정이 부족하여 공명첩을 팔아서 신분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붕당이 심화되면서 노론이라는 세력들이 정치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영조 즉위 당시 붕당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여 노론, 소론을 비롯하여 남인과 북인의 인물까지 다양하게 등용하였다. 그리고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군포(軍布)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 밖에 17세기 이후, 이앙법의 보급과 수리시설의 발달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또한 상업도 크게 발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당시에 탕평책을 통해 노론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뿌리가 엄청 깊던 노론은 계속 청나라의 사상과 갈등을 일으켰다.하지만 노론 출신 중에서도 홍대용, 박지원 등은 청나라를 여행하고 난 후 청인과 한개혁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정조가 계획들을 추진하는 도중에 1800년에 의문사를 당하고 다시 기존의 노론들이 정권을 잡아서 주자학을 내세워 천주교를 탄압하고 실학을 실천하려 했던 이들을 거의 모두 죽이거나 장시간동안 유배를 보내어 정조와 북학 실학파의 개혁은 실패하게 된다.2. 유득공의 작품2-1. 송경잡절(松京雜絶)門千戶萬摠成灰(문천호만총성회) 번화하던 옛 자취 다 없어지고剩水殘山春又來(잉수잔산춘우래) 산과 물만 남아 있고 봄은 또 왔네.吹笛橋邊踏靑去(취적교변답청거) 다리 위에선 피리 불며 답청놀이 한참 하는데,禮成江上打魚回(예성강상타어회) 예성강 맑은 물가에선 고기를 잡네.紫霞洞裡草菲菲(자하동리초비비) 자하동 깊숙한 골목 풀만이 푸르러 무성한데不見宮姬?馬歸(불견궁희병마귀) 말을 따라 달리던 궁녀 이제는 볼 수 없네.爲君辛王行樂地(위군신왕행락지) 지나간 고려 임금 언제나 놀던 놀이터에至今猶有燕雙飛(지금유유연쌍비) 이제는 제비들만 쌍쌍이 날며 오가누나.고려조 500년 도읍지인 송도, 오늘날의 개성을 돌아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읊조린 시이다. 그 옛날의 산천, 즉 자연은 변한 것이 없는데 인걸은 간 데 없고 성터만 남았을 뿐이다. 인생과 권세는 모두 결국에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며 시인은 탄식하고 있다.2-2. 서경잡절(西京雜絶)朝周白馬已千秋 (조주백마이천추) 백마로 주나라 찾은 지 천년이 지났는데楊僕樓船尙有洲 (양복루선상유주) 양복의 누선은 아직 섬에 있구나.浿水湯湯流日夜 (패수탕탕류일야) 대동강은 밤낮으로 넘실넘실 흐르고??草色使人愁 (한천초색사인수) 우거진 풀빛이 수심 겹게 하네.이 시는 1773년 봄에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면서 지은 칠언절구로 우(尤)운이다. 에는 15수 중 첫째 수로 실렸다. 서경의 역사를 돌아보고 지금의 풍경을 노래하였다.2-3.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유득공이 살았던 조선후기의 사회는 적서차별제도가 엄연했다. 더구나 그는 서출의 신분으로 이런 사회적 제약을 많이 받는 처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내용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고 있으며, 시의 뒷부분에는 시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사의 내용도 소개하고 있어서 시의 분량은 칠언절구 43수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38장 1책에 이른다.유득공은 「이십일도회고시」를 저술하면서 한국사 체계의 기초를 확립하고 역사 지리적 지식도 확보했다. 또한 그는 한국사 속에서 정신과 문화적인 요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다루었다. 같은 북학사상가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자신들의 저술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제도와 같은 것을 언급한 부분이 다소 있다. 하지만 유득공의 상당히 많은 그의 저작 가운데 이런 방면의 글이 거의 없고 그 대신에 문학, 음악, 미술, 역사, 지리 등의 관한 저술이 많은 편이다.「이십일도회고시」는 우리 역사의 지나간 모습, 즉 민족적 삶의 총체적 양상을 각국의 왕도를 통하여 제시함으로써 우리 것을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는 역사적 대응방식을 뚜렷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역사를 승리자 위주로 서수해 온 잘못을 시정하고 잊혀져 있는 곁가지까지 조사하여 평가하였다. 유득공의 참신한 역사의식이 강렬한 시의식으로 변용되면서 형상화한 것으로, 내 것과 나를 찾으려고 하는 주체적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二十一都懷古詩(이십일도회고시) -백제 4수 제2수落日扶蘇數點烽 (낙일부소수점봉) 해가 지면서 부소산에는 봉화가 자주 오르고天寒白馬怒濤洶 (천한백마노도흉) 추운 날에 백마강의 물결 사납구나.奈何不用成忠策 (내하불용성충책) 어찌 충신 성충의 계책을 쓰지 않고却恃江中護國龍 (각시강중호국용) 도리어 백마강 속의 호국의 용만을 믿었던고이 시는, 단군 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대 왕조의 고도를 돌아보고 지난 날을 회고한 작품으로 백제의 옛 도읍인 부여를 찾아가서 지은 시이다. 다른 회고시들과는 달리, 나라를 잃어버린 슬픔을 안타까워하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충신이었던 성충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어 역사적인 교훈을 찾게 하는 작품이다.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성을 제시하여 망국의 쓸쓸함을 더하게 하였다. 전구는 자신의 상황으로 현실적인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회고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결구는 백제의 임금은 부여의 왕성인 자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포근한 단잠에 빠지지 않았느냐고 하여, 자신이 추위에 떨고 있음과 대비시켜서 백제 임금의 행락적 태도를 지적했다.2-4. 발해고(渤海考)-발해의 인식과정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발해를 주변국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조선 전기에는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서술에 있어서도 발해의 역사를 통일신라의 역사 속에서 부수적으로 다룬다는 특징이 드러난다. 『동국통감』에서는 발해를 그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주변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의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중·후기의 발해의 인식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부터 시작된다. 『동국지리지』의 발해사 부분에서는 발해사를 신라가 아닌 고구려와 함께 서술되었으며, 영토를 중점으로 생각하여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신경준이 저술한 『강계고』에서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그 인구의 구성역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해에 대한 인식은 다시 두 가지의 형태로 변화하는데 첫 번째는 발해가 통일신라와 대등한 독립적인 국가로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발해를 남북국의 역사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동사』, 후자의 경우는 『발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동사』에서 이종휘(李種徽)는 발해를 부여, 가야와 함께 세가(世家)에 넣어 서술하여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서 독립국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인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유득공의 『발해고』이다. 발해의 멸망 이후에 그 역사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정리와 연구를 한 사람이 바로 유득공이다.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있었으니 곧 고구려요. 부여씨가 서남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