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효창공원목 차1. 서론2. 효창공원의 역사3. 효창공원 속 문화재?원효대사 동상?임정요인 묘역?삼의사 묘역?의열사 & 이봉창의사 동상?백범 김구선생 묘역?백범 기념관4. 효창공원의 현 상태와 차후 활용 방안 및 보존?효창공원 내부 문제점?탑골공원과의 비교?해결방안5. 참고문헌서론대부분의 사람들은 효창공원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그저 흔한 동네 공원으로 알거나 효창운동장이 있는 곳 혹은 기사식당 맛집이 많은 곳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나 역시 효창공원 바로 앞에 살면서도 그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장기와 바둑을 두시거나 인근 중, 고등학교와 숙명여대 대학생으로 인해 젊은 사람들이 운동하는 곳으로 밖에 알지 못했다. 이마저도 밤이 되면 그다지 밝지 않은 조명으로 인해 으슥한 느낌이 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는 곳이다.그만큼 이곳은 서울 시내의 다른 여러 유명한 공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유명한 어느 공원과 상징성을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조선시대부터 역사를 이어와 일제시대 때 일본군에 의해 역사적인 아픔을 가진 이 공원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범 김구 선생,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은 알고 있지만 그분들이 어디에 안치되어 계신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 안치되어 계신 곳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에도 조차 언급되지 않은 이 효창공원을 한번 탐방해 보기로 했다.효창공원의 역사효창원은 조선조 제22대 왕 정조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의 묘소 즉 효창원 자리인데, 그 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 및 숙의박씨의 소생 영온옹주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이었다.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본군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서삼능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그러나 특히 김구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던 이승만 영도하의 당시 집권세력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선열묘소를 교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하였는데, 그 일단으로 제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가 결성되고, 언론사를 비롯한 각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묘소 이전은 보류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되었다.광복이후 조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의 주도하에 조국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모시게 되어, 1946년 7월 효창원의 중심지인 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함과 아울러, 안중근의사의 허묘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주석 이동녕 선생과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후 서거하신 조성환 선생을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의 한을 품고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이 같은 경로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을 10개년 계획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1977년 7월에는 건설부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다. 1989년 11월 의열사 및 창열문이 건립되고 묘역 확장과 정비가 마무리되었으며, 1989년 6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효창공원 속 문화재원효대사 동상본래 효창공원과 원효대사의 관계는 없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애국선열들의 조69년 효창공원 내에 동상을 설립하게 되었다. 효창공원이 용산구 원효로에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쉽게 기억이 날 수 있도록 원효대사 동상을 효창공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이 원효대사 동상은 공원 내에서도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편인데 공공적인 기본적 기능에 못 미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임정요인 묘역임정요인 묘는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이동녕과 임시정부 국무장관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9월 중국에서 숨진 차이석,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귀국 후 숨진 조성환 선생 등 애국지사 3분을 안치한 곳이다. 묘역은 1991년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삼의사 묘역삼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백정기 선생 애국지사 3분의 유해가 안치된 묘역이다. 3분의 유해는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선생에 의해 1946년 6월에 모셔지게 되었다. 3분의 애국지사들은 본래 문효세자가 안치되었던 효창공원 중앙에 안치되었고, 1946년 7월 6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4개의 묘 뒤에는 태극기를 비석으로 만들어 세워 놓았고 4개의 묘 가운데 맨 왼쪽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묘역으로 나중에 유해를 찾게되면 모시기 위해 마련해 둔 곳으로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비어있는 상태이다.의열사 & 이봉창의사 동상?백범 김구선생 묘역 (※공사로 인해 외부 이미지 사용)의열사는 이동녕, 김구, 차이석, 조성환,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백정기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7위를 안치한 사당이다. 애국지사 7위를 기리기 위하여 1978년 3월 10일 조직된 순국선열추모위원회 주관으로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 7위 선열합동 추모제가 열린다. 1988년 11월 한국정부는 묘역 주변의 정비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결과 1990년 의열사와 창렬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의열사는 1989년 6월 8일 사적 제 330호로 지정되었고, 1991년 7월 7일 선열 7위가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다. 사적보호를 위해 현재는 공사가 진행 중 이어서 겉모습을 가려놓았다.의열사에서 내려와 작은 쪽문으로 공원을 벗어나게 되면 이봉창의사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상높이 3.5m, 좌대높이 3m인 이 동상은1932년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져 세계를 놀라게 한 이봉창 의사를 기려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효창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봉창 의사를 위해 매년10월 10일은 이봉창 의사 순국 83주기로 이봉창 의사의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에서 추모식이 거행된다고 한다.백범 김구 선생 묘역 & 백범 기념관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 안에 건립한 기념관으로 2002년 지어졌다. 기념관 1층에 들어서면 먼저 중앙 홀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놓인 백범 좌상을 만난다. 내부 사진은 촬영 금지이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흔히 좌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임시정부시절부터 서거까지에 이르는 백범의 중후반기 삶은 자세히 알려진 반면, 초중반의 과정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1층에서 2층을 거치며 백범과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친 숱한 선열들의 면면과 활동내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확대해 전시한, 구한말에서 한국전쟁 직전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흑백사진들은 대부분 우리 근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장면들이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내용과 기록문서·편지, 임시의정원 회의록과 임시정부 시정방침, 각종 증명서와 수료증 등도 볼거리다. 이봉창 의사가 백범에게 보낸 편지, 윤봉길 의사의 이력서 등도 있다.수업 때 갔었던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의 혈흔이 묻은 옷, 서거 당시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더 상세한 김구 선생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규모가 생각보다 매우 큰 편인데 그만큼 김구 선생과 다른 독립투사들의 모습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립에 도움을 주었던 해외 인사까지 다루어 놓아 상세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백시 효창공원으로 들어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역이 나온다. 매년 추모식과 정부고위직 들이 참배를 한다.효창공원의 현 상태와 차후 활용 방안 및 보존 효창공원 내부 문제점앞서 탐방을 해보았듯이 효창공원 내에는 공원이라고만 하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문화재 혹은 그 인물의 묘소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관리가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각 위인들의 묘역은 그나마 관리가 되어있는 편이었지만 전반적으로 구조물에 녹이 슬어있거나 벤치가 부러져 있는 등 관리가 미흡해 보였다. 그리고 관리소가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들만큼 규모도 작고 2~3명의 인원이 관리하는 것 같았다. 안내도도 관리소 앞 작은 책장에 외로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백범 김구 기념관의 경우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이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휑한 느낌이 들었다. 기획전시의 경우에도 기획전시를 열만한 큰 공간이 있음에도 개관 후 13년간 단 2번 밖에 열리지 않았을 정도이다.또한 날씨가 좋은 봄, 여름밤이 되면 조명이 거의 없는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정자에서 인근 고등학생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곤 한다. 위인들을 모셔놓은 묘에서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탑골공원과의 비교효창공원을 탐방하면서 가장 먼저 드는 의구심이 한 가지 있었다. 다른 서울 내의 공원과 사적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역사적 가치가 전혀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할까 라는 의구심이었다. 효창공원과 비슷한 공원으로는 탑골공원을 예로 들 수 있다. 두 군데 모두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쉼터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효창공원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반면에 탑골공원은 종로라는 도심 속에 위치해 수많은 시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곳에서 산책을 즐기고 갖가지 문화재와 3.1운동과 같은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모습을 보고 있다. 도심 속에 위치하느냐의 차이가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