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변호사, 후세다츠지목 차Ⅰ. 서론………………………………………………………………1Ⅱ. 후세 다츠지의 사상……………………………………………11. 후세 다츠지의 사상의 형성………………………………………1Ⅲ.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 41. 광복 전의 후세 다츠지……………………………………………42. 광복 후의 후세 다츠지…………………………………………… 8Ⅴ. 결론…………………………………………………………………………10Ⅵ. 연보……………………………………………………………………12Ⅶ. 참고문헌………………………………………………………………131Ⅰ. 서론‘만약 일제강점기에 살게 된다면 독립운동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친일파로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들 중 ‘독립운동가지!’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사를 공부하는 나조차도 망설여지는 질문이다.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내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 독립을 위해 힘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독립운동가도 존재했고, 친일파도 존재했다.최근 상영한 ‘암살’이라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상영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리더로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 암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 중에는 독립군을 돕는 역할로 일본인 ‘기무라’가 등장하는데 이는 앞으로 살펴볼 인물인 ‘후세 다츠지’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후세 다츠지는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도맡아 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했던 일본인 변호사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은 특이한 일이다. 당시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나라이지만 선뜻 독립을 위해 나서지 못하고, 나라를 배신했던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가 아닌 나라를 위해 선뜻 나섰던 후세 다츠지의 일생과 업적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청일전쟁에서 돌아온 마을 사람에게 “조선군을 마구 공격했지. 그들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어”라는 말을 듣고 조선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메이지 법률학교에 다닐 때도 일본인보다 유학생과 떠드는 시간이 많았는데, 거기에는 조선 학생과 타이완 학생도 있었다. 후세 다츠지가 이들에게 느낀 친근감은 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향을 떠나 도쿄로 상경할 무렵 청년이 된 후세 다츠지는 기독교적 박애주의에 대한 위상을 품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쟁과 폭력을 부정하는 톨스토이의 전쟁 반대론과 휴머니즘에 심취했다. 후세 다츠지는 톨스토이가 대지주였던 것을 부끄러워했듯 자신이 일본인인 것을 부끄러워했다.“약하고 옳은 자를 위해 저를 굳세게 해주십시오.”1899년 메이지 법률학교에 진학한 후세 다츠지는 프랑스혁명과 천부인권사상등 서부 근대 사상을 습득하며 자기 철학과 실력을 쌓아나갔다. 1902년, 그의 나이 23세에 어렵다고 소문난 판검사 등용시험을 단번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검사대리에 임명되었지만 6개월 만에 검사직에 회의를 느끼고 사임했다. 후세 다츠지는 범죄가 개인의 흉포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최대한 회피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검사대리로서 일하고 있을 때 연속해서 불기소판단을 내린다. 그로 인해 상부와 갈등을 겪고, 당대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검사직을 탐욕스럽고 잔인한 직업으로 비난하며 사임의 이유를 밝힌 후세 다츠지는 변호사의 길을 선택하였다. 도쿄에 법률사무소를 차린 후세는 실무에 유능하고 현실에 입각한 변론으로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연평균 250건이 넘는 사건을 취급했다. 후세 다츠지는 소위 사형수 사건을 적극적으로 수임했다. 게다가 대부분 무보수로 사건을 맡았다. 그 중 몇 건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런 변호활동으로 그의 지명도는 점점 올라갔다. 1920년 후세는 부와 출세의 길을 자기 스스로 끊고 자기 혁명을 단행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변호사로서의 입신39년부터 무려 3차례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두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후세 다츠지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신뢰는 높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인쇄물에 ‘우리의 변호사 후세’라는 활자가 자주 발견된다. 1949년 일본에서 열린 ‘변호사 후세 다츠지 탄생 70주년 기념 인권옹호대회’에 참석한 3,000여명 중 800여명 가량이 조선인이었다.일본농민당 당원이었던 후세 변호사는 해방 후 좌파 변호사라는 이념적 굴레와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둘러싸여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 11월, 후세 탄생 12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면서 ‘국제평화주의자, 조선해방의 은인’이라는 그의 존재가 알려졌고 정부는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Ⅲ.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1. 광복 전과 후세 다츠지(1)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백관수 변호제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백관수, 최팔용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10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다.실행위원등 27명의 유학생들이 구속되고, 1차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은 유죄를 인정한상태에서 관대한 조치를 호소했다.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 중 하나이 다쿠소는 “피고를 동정하지만, ‘국헌문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국법에 따라 재판이 행해져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우자와 소메이 또한 “조선이 합병된 것은 일본의 몸체에 행랑채를 붙인 것과 도심을 바라보며 ‘지금이야말로 민중을 위해 내 생활을 전부 바칠 때다’라는 사명감에 휩싸였다.간토 대지진 직후 도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 후세 다츠지는 더욱 비통한 감정에 휩싸였다. 9월 1일 밤 무렵부터 조선인이 습격했다는 유언비어가 재해지역 주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뜬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며칠 동안 자경단이 도로 각지에서 떼를 지어 통행인을 검문하고, 발음을 듣고 조선인이라고 판단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쓰보이 시게지는 당시 상황을 ‘구경꾼에 둘러싸인 채 갈고리가 등에 박혀 자기 피로 뒤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내…….’라는 긴 시로 전했다. 후세 다츠지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감시활동에 나서는 한편, 위기에 처한 조선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피난시켰다.‘풍채 좋은 남자가 어깨에 칼을 멘 채 말을 타고 치안 유지를 했다’거나 ‘계엄사령부라고 씌어 있는 완장을 찬 사람이, 헌병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었다’고 우익 헌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가 한 말을 들은 사람들이 참사를 조장했다. 후세 다츠지는 조선인 학살 현장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의 피해망상을 막지 못한 것이 괴로웠다. 또 자기 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러 오다가 붙잡힌 조선인도 있을 것 같았다.후세 다츠지는 평생 동안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이 사건을 한탄했다.“자신들이 항상 조선인을 학대했으니 지진으로 혼란한 틈에 보복당하지 않을까 두려웠겠지. 그런 심리로 계엄사령부와 경찰 관계자가 먼저 ‘조선인 내습’이라는 망상을 하고는 유언비어 그대로 호외로 보도해 일반 시민까지 민중의 양심을 잃은 게지.”당시 조선인들의 피해상황은 실로 처참했다. 그러나 내무성 정보국이 발표한 희생자 수는 단지 231명. 후세는 이 엉터리 숫자를 논리적으로 추궁하며 직접 학살현장을 조사해 조선인 희생자 수를 6천여 명으로 발표했다. 조선인 학살과 잔혹성에 분개한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잔혹한 변호사를 찾아갔고 후세는 농민들의 정열에 감격해 기꺼이 나섰다. 공삼면은 영산강변에 있는 세 개의 면을 일컫는다. 당시 동양척식회사가 헌병들과 경찰의 힘을 빌려 토지를 헐값에 매입해 동양척식회사 소유로 이전시키자 농민들과 잦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나주시 완곡면 공삼리 이회춘의 노모가 일본헌병의 몽둥이에 맞아 즉사하는 유혈사건이 발생했다. 식민지 조선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설립 직후부터 수운이 편리한 나주 일대 토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후세는 경문왕국의 방해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현장답사를 시작하고 본격적인 토지조사에 나섰다. 조선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하는 변호하겠다는 자기실천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후세의 활동에 대해서 총독부는 문제가 더 이상 커지기 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농민간의 화해를 시킴으로서 이러한 중재로 토지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후세가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토지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 총독부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농민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는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했다.(6) 조선공산당 사건 변론1927년 9월, 후세 다츠지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을 위해 조선에 갔다. 처음에는 1주일 동안 조선에 머무르며 변론까지 마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피고가 인권 유린에 대해 무척 진지하게 항의하고, 한 사람마다 필사적으로 고문을 폭로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후세 다츠지는 전에 의열단 단원에게서 본 ‘민족의 높은 뜻’을 여기서도 발견해 무척 감격하여 자기 변론은 다음으로 양보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세 다츠지는 그해 12월, 다시 남대문에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변론을 들어보자.“조선 민중이 모두 이 재판을 주목합니다. 피고들의 향후 활동에 민족의 운명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재판소는 민중이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밝혀진 사실에 미중이 벌을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