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들을 통해 바라본 에 대한 분석1. 판토마임영화의 도입, 종수와 해미가 만나고 해미는 종수와의 술자리에서 요즘 배우는 것이 있다며 별안간 판토마임을 보여준다.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을 보여주며 해미는 판토마임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 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이라며. 나는 이것이 이 영화 자체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며 이후에 등장하는 많은 메타포들을 이해하는 것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ⅰ. 고양이 보일이해미가 키우는 고양이 보일이. 종수는 해미의 집에 갈 때 마다 보일이를 본적이 한 번도 없다. 보일이의 배변활동의 흔적을 보고 보일이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접게 되지만 보일이가 실재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해미가 실종이 되고 종수는 벤의 집에서는 주인이 없어서 키우게 되었다는 고양이를 보게 된다. 종수의 시선을 따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종수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보일이가 떠오른다. 보일이라고 부르는 음성에 고양이는 반응하지만 이 또한 그 고양이가 보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종수와 이 사건을 통해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게 된다. 종수는 보일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보일이의 부재에 대해 잊은 것이다.ⅱ. 우물해미는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경험에 대해 말한다. 몇 시간을 깊은 우물 속에서 동그란 하늘만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고 있을 때 자신을 구해준 것은 종수라고 말한다. 해미의 실종 후 종수는 우물이 있었는지를 묻고 다닌다. 해미의 가장 가까운 가족, 마을의 이장은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15년 만에 만난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를 통해 종수는 우물이 없다는 더 신빙성 있는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그 우물이 있고 자신이 그런 해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ⅲ. 전화종수가 파주의 집에 내려가고, 아무 응답이 없는 전화가 몇 번씩 걸려온다. 극의 말미 부분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는 종수의 어머니가 말을 하고 그로 인해 앞서 걸려온 모든 전화들이 종수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 모든 전화들이 종수의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전화 또한 이 영화가 내재하고 있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동시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2.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아프리카에 가기 전 해미는 종수에게 리틀 헝거과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리틀 헝거는 배가 굶주린자. 그레이트 헝거는 리틀 헝거를 넘어 삶에 의미에 굶주린 자. 이는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해미는 종수와 벤 앞에서 나체로 하늘 높이 손을 뻗어 새의 형상을 따라하며 춤을 춘다. 그녀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하는 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현실에서 해미는 눈앞의 배고픔이 중요한 리틀 헝거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벤은 그레이트 헝거이다. 벤의 금전적인 여유와 옭아맴이 없어 보이는 자유. 그것이 삶에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 반대로 종수는 해미와 비슷한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고 소설을 쓰지만 제대로 된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생각하며 유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리틀 헝거에 가깝다. 하지만 종수는 변화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리틀 헝거인 해미. 그레이트 헝거로 보이는 벤. 그 사이의 종수에게 집중해보자. 종수의 아버지는 자존심이 쎈 리틀 헝거이다.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농사짓는 이웃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징역살이까지 하게 된다. 그런 그의 금고 안에는 단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것은 종수의 아버지, 리틀 헝거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종수는 벤을 만난 이후로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며 아버지의 단도로 벤을 살인한다. 그리고 종수를 옭아매는 것처럼 보이는 옷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마치 앞서 보여준 나체 해미의 이미지와 겹치게 알몸으로 보임으로써 소멸(살해를 당하거나 도망쳤는지 알 수 없지만)한 혜미나 투옥된 아버지와 다른 리틀 헝거의 행보를 보여준다. 그는 이제 단지 배가 굶주린 리틀 헝거라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ⅰ.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청춘들의 분노종수와 혜미는 둘 다 가족과의 왕래가 거의 없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다. 벤은 종수의 차에서 어머니와 통화를 다정하게 하는 모습, 차종이나 집을 통해 알 수 있는 경제력, 종수의 미행을 통해 보이는 가족모임을 통해 그들과 정반대의 모습을 강조한다. 특히나 종수는 벤을 통해 패배감을 느끼고 혜미를 향한 마음도 에둘러 숨긴다. 하지만 결국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청춘의 모습을 대변하는듯한 종수가 자신의 아버지의 칼을 꺼내 벤을 찌르는 모습은 통쾌하면서 냉소적인 분노의 표출로 느껴진다.3. 비닐하우스 (헛간)벤이 혜미와 종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음식을 만들 때, 음식을 자신을 위한 제물이라고 칭하며 메타포에 대해 말한다. 혜미는 메타포의 개념 자체를 모르고 소설가인 종수에게 물어보지만 종수는 대답을 회피한다. 종수는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설가이지만 삶을 직유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개월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하는 벤. 그 말에 직접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며 확인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그 무렵 종수는 혜미와의 연락이 두절된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못 본 것이라는 벤의 말. 종수는 그 비닐하우스가 혜미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작조차 못하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은유, 즉 메타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웠는지, 그 비닐하우스가 혜미여서 해미가 살해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종수는 벤이 칭하던 비닐하우스가 혜미라고 결론을 짓고 벤을 살해해 불에 태운다. 벤이 무엇이던 간에 두달에 한번 태우는 행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