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를 따라서우덕착교수님순천대학교 20162111이진아제1장 실크로드란 무엇인가?1절. 문화의 3대특성과 동서문화의 교류∇ 문화의 3대 특성문화교류의 당위성은 문화가 갖고 있는 다음의 3대특성 즉 보편성, 개별성, 전파성이 있다. 이러한 3대 특성을 가진 문화는 여러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문화복합(Culture Complex)이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는 다른 여러 가지 문화와 결합하고 통합되어 문화통합체(Culture Integration)로서 기능하고 있다.? 문화의 보편성(공통성)이란?- 같은 환경이나 여건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화가 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문화교류로 인한 현상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보편성은 문화 간의 교류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문화와 타문화가 형태나 내용이 대단히 흡사한 경우에도 양자의 사이에 어떠한 교류가 있었던가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의 개별성(고유성)이란?- 문화가 자기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타문화와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원이 같더라도 시간, 공간을 달리하면 완전히 똑같은 문화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의 완전한 융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문화의 수용현상이 나타난다.? 문화의 전파성이란?- 문화가 창조되면 물리적 거리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화가 주변으로 전파, 확산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의 전파는 이 문화에 대한 피전파문화의 수용성 여하에 따라 그 속도와 규모가 규제된다.∇ 동서문화의 교류- 아시아, 아프리카 및 유럽의 광활한 지역에서 발생한 여러 문화가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의존적으로 발전, 풍부 화 되어 가는 문화과정을 말한다. 이 범세계적인 문화교류는 단순한 방향적 개념에서의 동방과 서방간의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교류가 아니라 지구 남북 방을 며, 서남쪽의 아케메네스조 유적이 있고, 이어 북상하여 이스파한에 도착한다. 이스파한에선 세계적인 모스크들로 장식된 도시를 볼 수 있다. 다시 서방으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고 남하하면 고도수사에 달한다. 아직도 발굴중인 수사유적지를 볼 수 있다. 서남으로 나아가 바그다드의 남쪽에는 사산조페르시아의 유적이 존재하고, 북방에도 여러 유적들이 존재한다. 또 다시 시리아 사막을 서진하면 중국비단이 출토되는 팔미라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대상들은 여러 항구를 통해 로마로 향해왔다. 지중해 동안 지방은 중요한 교통노선으로 이용되어왔다. 다마스커스, 팔미라 같은 지방이 동서와 남북을 이어왔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몇 갈래의 중요한 간선들이 있고, 수많은 오아시스와 폐허들이 점재하고 있다. ⇒ 2강의는 실크로드의 실태라는 주제의 강의였다. 이번 강의를 듣기 전, ppt를 살펴보니 낯선 지명들과 지리상 생소한 지역이 많아 다소 어려워 보여 시작 전부터 겁을 먹었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유적에 관한 이야기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을 기점으로 북, 남쪽으로 나누어 문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흥미롭고 많은 이야기다 담겨 있어 흥미로웠다. 1절의 주제는 오아시스로 이었다. 실크로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강의를 첫 부분에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며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넣어 부담감을 덜고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2절과 3절에서는 유적과 문명을 중심으로 배웠는데 오아시스 길의 영향으로 이렇게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다는 것에 ‘오아시스로‘, 그 자체적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3장. 서역개통1절. 장건의 서역대장정1) 장건의 제1차 서역사행-기원전 209년 흉노는(모돈선우)가 등극한 후 국력이 급속히 강화 →한의 안전을 각방에서 위협하고 한과 서역제국간의 내왕도 방해-한무제의 등극 → 대흉노강경책을 채택 → 장건을 기원전 138년 대월씨에 사신으로 파견-대월씨 정권 교첼로 흉노에 대한 공 수양제가 당시 중국 서쪽의 실크로드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토욕혼의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수의 서역경영이 시작 → 서역경영을 위해 서역4군(선선, 차말, 서해, 하원)과 이오군을 설치∇ 당나라양제의 성급한 정책과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인해 멸망하고 만 것에 비해 당나라는 수나라의 서역경영을 계승하여 완성시켰다. 이후 동돌궐, 서돌궐, 토욕혼 세력을 물리치고 하서회랑지대를 장악하였다. 또한 고창국을 멸망시켜 서주(西州)를 설치하고 동시에 천산산맥 북쪽에 있는 짐사의 오아시스를 점령하여 정주(庭州)를 설치하여 서역경영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쿠차, 우전, 소륵, 언기를 정복후 쿠차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그 외에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서역경영에 착수하였다. 이후 티벳군에 의해 안서도호부가 공격 받는 등 어려움이 있기도 했으나 다시 수복하여 당의 반세기에 걸친 실크로드 지배는 시작 되었다.∇ 소그드인이란계 주민으로 소그드어를 사용하고 그들은 상업활동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널리 중국과 몽고고원 그리고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교역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상의 각지에서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여 각지로 이주하여 활약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2절. 소그드인과 서역문화의 중국전파∇ 소그드인의 중국과 교역소그드상인들은 융단, 유리기구, 악기, 약품, 향료 등 온갖 서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낙타의 등에 싣고 타클라마칸 대사막을 지나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왔다. 귀족들은 저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오는 서방의 진귀한 물품에 매료되었다. 소그디아나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소그드인과 사산조페르시아의 페르시아인들은 중국에 이란풍의 많은 문화를 전파했다.∇ 의식주와 회화- 호모(胡帽), 호복(胡服), 호극(신발), 호식(胡食) 유행- 쿠차, 투르판, 돈황 등에 남아있는 불교벽화를 보아도 인도와 이란계 회화가 중국회화에 커다란 영향∇ 가무음곡남북조시대 이래 중국에 다수의 소그드음악가가 내왕하였다. 당대에 외국음악은 십부악(十部樂)이라 하여 그 중에 칠악(七樂)은 서역칠조(들을 통합해서 강성의 기회를 갖게 되면서 북중국을 점령해서 요라는 최초의 정복왕조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정복왕조의 등장정복왕조라는 개념은 최초로 위트포겔(Wittfogel)이 주장했는데 북방민족이 중국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 통치하는 왕조를 세운 경우, 그 왕조에서는 북방민족과 중국민족의 사회, 문화적 관계 및 사회, 문화양식의 이원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중국적 사회문화가 일원적으로 존재하는 전형적 중국왕조인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명(明)과 구별하여 요(遼), 금(金), 원(元), 청(淸)으로 대표되는 정복왕조라는 개념이 정립되었다.∇ 서하서하는 1032년티벳계인 탕쿠트족이 오아시스로상의 요충지였던 감숙협곡(甘肅峽谷)을 중심으로 제부족을 통합하면서 성립시켰던 중국의 변방왕조였다. 특히, 사료에 따르면 당시 서하의 수도였던 카라호토(Kara Khoto:黑水城)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전한다. 허나 몽고군의 공격으로 유린되어 한 때 융성했던 문화의 꽃을 피웠던 서하의 문화유적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20세기에 들어 소련의 고고학자 코즈로프(Kozlov)를 단장으로 하는 러시아 탐험대는 카라호토의 유적을 발굴, 조사해서 3000점의 고문서, 300점 이상의 불화를 수집하는데 성공해서 오늘날 서하학(西夏學) 연구의 기초를 이루게 하였다. 2절. 10~12세기의 실크로드 I오대시대에 하서지역에 돈황의 사주귀의군, 감주의 감주위구르, 양주의 양주티벳의 3개세력이 병립하여 각각 번영하였다. 탕구트족이 점차 강세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마침에 영주를 빼앗고 서하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화북에는 송 , 요, 서하 3국이 정립하게 되며 서하는 요와 함께 송을 위협했기 때문에 항상 송이 고심하게 만들었다. 서하는 경유지인 영주와 하서지역을 세력권에 넣고 있어서 11~12세기의 동서 교역을 거의 독점해버렸다.이 당시 하서지방에서 오르도스를 횡단하여 산서성 북부에서 내몽고를 거쳐 만주로 빠져나가는 루트가 실크로드의 동단 몽골제국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도 제국 내의 각 국가들은제국 전체의 통일보다는 분할을 택하여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고 복위 전쟁이 종료된 후 반세기 이내에각국들은 최종적인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 정복 시대에 피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몽골제국 내 민족의 지위를 나누고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며 경제 부흥 정책을 추진하는 등 그의 결단력과 리더십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최초의 정복 왕조 건설을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고 각 정치인들이 쿠빌라이의모습을 참고하는데 분명 이러한 리더십을 본받고자 해서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뛰어난 황제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했던 몽골 제국이 승계분쟁의 격화로 분열되고 계속되었던북위 전쟁으로 몽골 제국의 붕괴가 안타까우면서도 새로운 발전의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10장. 몽골제국과 동서문화교류1절. 몽골제국기의 실크로드 I징키츠칸의 죽음 이후 몽골제국의 지배영역은 직접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 되었다. 네 가닥의 중요한 동서교통로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있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거듭 언급한 천산북로, 천산남로, 그리고 서역남도 세길 이외에 스텝로가 추가된 것으로서 이 루트는 흉노, 유연, 돌궐 등 각 유목민이 서방과의 교섭에서 이용한 노선이 부활된 것이다.스텝로와 천산북로가 사라이, 오트라르, 우르겐치를 중계기지로 해서 직접 키에프, 크라카우 또는 안티오키아, 베니스,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되고 있었던 것은 13세기 실크로드의 가장 큰 특징이다. 몽골은 역전제(驛傳制)를 시행하여 더욱이 동서교통은 유례없는 번영을 자랑하게 되었다.2절. 몽골제국기의 실크로드 II∇서방 방문기- 야율초재 : 칭기스한의 서정에 동행. ‘서유록’ 집필(중앙아시아의 역사지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 장춘진인 : 1221년 서정도중에 있던 칭기스한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뒤를 쫓아 대체로 야율초재와 같은 루트를 타고 사마르칸드에 도착하고 다시 남하하여 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