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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의 세속화와 템플 스테이
    불교의 세속화와 템플 스테이자본주의화와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불교 역시 다양한 부분에서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다. 요즈음에는 종파들과 사찰마다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어 사찰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법회 영상을 시청할 수도 있다. 사찰 음식은 ‘웰빙 푸드’로, 108배는 건강과 집중력을 강화시켜 주는 운동으로 대중문화를 통해 소개된다. SNS 등을 통해 유명해진 승려들은 불교 철학에 대한 ‘상담’과 ‘강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템플 스테이는 이러한 불교의 세속화에 따라 나타난 문화 상품 중 하나다. 2017년 기준으로 홈페이지에 등록되어 있는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은 총 478개이며, 137개 이상의 사찰이 템플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한국에서 ‘템플 스테이’가 운영되기 시작한 계기는 1988년 올림픽과 2002년의 한일 월드컵이었다. 템플 스테이는 당시 한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에 대한 숙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불계가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불계는 템플 스테이를 통해 한국 불교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템플 스테이를 통해 포교의 첫 단계를 만들고자 했고, 정부는 한국만의 색다른 숙박시설을 발굴하여 외국인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템플 스테이를 통해 숙박 시설을 확보하고 불교 문화를 알리고자 했던 시도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올림픽과 월드컵 이후 템플 스테이는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에게 꾸준히 이용되는 문화 상품으로 발전하였으며, 유형도 다향화되었다.조계종에서는 템플 스테이를 ‘한국의 전통 사찰에 머물면서 사찰의 일상 생활과 한국 불교의 전통 문화, 수행 정신을 익히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템플스테이를 ‘한국의 전통 문화와 불교 문화가 결합된 숙박 시설’이라고 소개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는 한국 불교 템플 스테이 상품을 브랜드화하여 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아생여당의 브랜드 슬로건은 ‘나를 위한 행복 여행’이며 브랜드 철학은 ‘행복 가꾸기’로, 슬로건과 브랜드 철학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를 찾아보기 힘들다.실제로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시행한 에 따르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심신의 재충전, 문화 체험 등 문화휴양적 체험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들에서 알 수 있듯, 템플 스테이는 종교가 세속화되어 문화적인 상품으로 소비되는 사례에 속한다.대한불교조계종의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는 템플 스테이의 공식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공식 통합 정보 사이트의 배너에서도 관련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는 현재 템플 스테이를 운영 중인 사찰을 검색해서 그 사찰의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연락처, 위치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에서 인기 있는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기도 한다. 템플 스테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후기 역시 홈페이지를 통해 읽어 볼 수 있다. 템플 스테이 예약 페이지에서는 템플 스테이의 체험 비용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승려와 신도(또는 사찰의 방문자) 사이의 관계가 화폐화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템플 스테이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시한 템플 스테이의 평균 가격은 1박 2일 기준으로 체험형이 5~7만 원(숙식비, 프로그램 진행에 필요한 경비는 별도), 휴식형은 2~3만 원이다.현재 운영 중인 템플 스테이의 유형은 크게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과 그 외 맞춤형으로 나뉜다. 당일형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 프로그램, 사찰 안내, 다도 체험, 염주나 연등 같은 물건 만들기 등이 속하며, 당일형 프로그램의 가격대는 대부분 5만 원 내외로 체험형과 비슷하다. 체험형은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진행되며, 불교 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야생 녹차 만들기나 갯벌 체험 등 자연 환경을 이용한 체험 프로그램, 문화 유적 답사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휴식형은 예불과 참선, 공양 등에 참여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며, 가격대는 참여형과 당일형에 비해 저렴한 (1박 기준) 2~3만원대이다. 고시생들이나 수험생들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휴식형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템플 스테이가 관광 상품화 되면서 직장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 프로그램이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 및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특히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2016년 기준 24개로, 대부분 당일형이나 체험형으로 운영되고 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절에서는 영어, 중국어 등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승려들이 외국인들을 안내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사찰에 방문하여 여러 가지 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시공간의 압축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템플 스테이와 함께 발전하게 된 불교 문화 상품 중에는 단기 출가 프로그램도 있다. 단기 출가 프로그램에는 성인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참여하는데, 아이들의 단기 출가는 ‘동자승 체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단기 출가는 실제로 머리카락(무명초)를 자르고 참여하며 실제 승려의 일상을 그대로 체험한다는 점에서 템플 스테이와 구별된다. 단기 출가는 수계식(삭발식), 승려로서의 교육과 생활, 환계식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간은 다양하다. 단기 출가에 참여하는 성인들은 대부분 종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체험을 위해 참여한다. 단기 출가에 참여한 성인들 중 일부는 출가자가 되기도 한다. 단기 출가에 참여하는 아동들은 대부분 미취학 아동으로, 부모의 권유나 신청에 의해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과학| 2018.09.12| 3페이지| 1,000원| 조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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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과 일본의 대중 매체: 천황 금기를 중심으로
    천황과 일본의 대중 매체: 천황 금기를 중심으로2015124088 정치외교학과 류수현< 목차 >Ⅰ. 서론Ⅱ. 선행 연구 검토Ⅲ. 본론(1) 오에 겐자부로의 과 (2) 후쿠자와 시치로의 (3) 벤 힐즈의 (4) 그외의 사건들Ⅳ. 결론Ⅴ. 참고 문헌Ⅰ. 서론천황은 일본 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이고, 현대 일본 국민들의 통합의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천황가는 ‘대중천황제’, ‘열린 천황제’ 등의 이름하에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으며, 대중 매체들에서도 천황가의 건강, 혼사, 패션, 여가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천황가가 매체에 노출되는 일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매체와 예술 작품에서 천황에 대한 표현은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기쿠 터부(菊 Taboo; 천황 금기)는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과 풍자를 비롯한 각종 ‘부적절하고’ ‘불경한’ 언급에 대한 금기다. ‘기쿠’라는 단어는 천황가의 상징이 국화(菊花)인 데에서 유래했다. 기쿠 터부는 궁내청의 매체 통제와 각종 우익 단체들의 테러 및 협박을 통해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테러와 협박 등에 대한 공포는 일본의 언론인들과 예술가들에게는 내재화된 금기로 작동한다. 출판사와 언론사들은 천황에 대한 언급을 할 때 극도로 자기검열적인 태도를 보인다. 때문에 매체들은 천황을 다룰 때 ‘불경하지 않은 표현’, ‘적절한 표현’, ‘금기를 어기지 않는 표현’ 등을 사용하기 위해 자기 검열에 심혈을 기울인다.천황과 황실에 대한 보도의 통제는 궁내청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궁내청의 통제, 제재 기준은 헌법이나 황실전범 등에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늘 기준에 대한 논란들이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기쿠 터부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떤 표현이 ‘불경’하다고여겨지는가? 엄격한 검열 끝에 언론에 비추어지는 천황의 ‘적합한’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이러한 금기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본 보고서에서는 오에 겐자부로의 , 후쿠자와시치로의 , 벤 힐즈의 등극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가상의 천황의 이미지와, 천황을 일반인이 연기하여 표현하는 것에대한 금기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위 연구에서는 천황은 극영화에서는 ‘혈통이 좋은 가부키출신 배우’를 통한 절제된 연기를 통해 재현되며, 사적이거나 인간적인 표현은 제한된다고말했다. 또한 천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을 시도한 영화들은 여럿 있었지만, 직접적인 비판을 시도한 영화는 전무하다고 분석했다. 또한 위 연구에서는 천황을 일반인의 몸을 통해재현하는 것 자체가 불경하게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천황을 표현하는일이 ‘황공한’ 일이라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천황에 대한 금기에 대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조정민의 (2017)에서는 1960년대의 시마나카 사건(풍류몽담 사건)과 아사누마 사건 이후 일본 본토의 문학계에 자리 잡은 천황 금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전후 일본문학과 오키나와문학에 나타난 천황의 표상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윤여진의 (2006)에서는 오에겐자부로의 과 에 대해 분석하면서,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아사누마 사건과 당시 소설의 창작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가 판금된 이유와, 오에 겐자부로가 이 소설의 판금에 대해 언급했던 것들 역시 분석했다.이외에도, MBC 광복60주년 특별기획 다큐 5부작 중, 제5부 '제국의 유산'편에서는 일본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천황 금기의 예시로 2005년 NHK의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방영 조작 사건을 들어 설명했다. 이정은의 (2009)에서는 상징천황제의 정착과정에 있어 대중 매체, 그 중에서도 밋치 붐 당시의 여성주간지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있는데, 천황제가 대중매체를 통해 열린 황실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황에 대한 보도에 대해 통제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Ⅲ. 본론1. 오에 겐자부로의 과 오에 겐자부로의 과 는 1960년에 일어난 을 모티브로 쓰여진 소설이다. 은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당시 17세였던 대학 청강생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야마구치 오토야가 범행‘만일 내게 공범이있다면(굳이 내 공범이 있다고 말하자면) 천황의 유령일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는 우익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점, 우익 소년을 묘사할 때 성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 천황이 이러한 테러 행위들을 묵인함으로써 우익 테러의 공범이 되었다고 말하는 대사 등을 이유로 우익 단체의 공격을 받았다.1부인 은 1961년 에 처음으로 게재되었고, 한 달 뒤 2부에 해당하는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는 우익 단체들의 격렬한항의 때문에 판금되어 정식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문학계는 이 소설을 게재한 것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오에 겐자부로는 외설적인 표현 때문에 을 판금하는 것에 항의하고이 소설의 재판을 지지했던 문학인들이 과 의 판금에는 항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문하면서, 가 판금된 이유는 우익으로부터의 공격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가 판금된 이유는 이 소설이 천황제의 본질을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표현의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나 비판은 불경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이 소설들을 지지하는 것이 황실을 모욕하는 불경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1)는 금서가 된 지 57년 만인 2018년에야 정식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도쿄신문은 의 정식 출간을 알리는 기사에서 본 소설은 전후 일본의 언론의 자유 문제에 있어 시사하는 점이 많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다.2) 그러나 우익 단체들은 여전히의 정식 출간에 항의하고 있다.2. 후쿠자와 시치로의 은 1960년 11월에 에 게재된 후쿠자와 시치로의 소설이다. 의 주인공인 ‘나’는 꿈에서 도쿄 시내에 일어난 혁명을 보게 된다. 히로히토 황태자와미치코 황태자비는 도끼날에 의해 목이 베인 뒤 몸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쇼켄 황태후는 우스꽝스러운 사투리를 사용해가며 욕을 한다.은 천황가의 일원이 참수당하는 모습을 묘사한 점, 황태후가 방언을 사용하는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점 등이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았해하고 시마나카 호지의 아내에게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 중앙공론사는 ‘부적절한 작품’을 게재한 것에 대해 황실과 일반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작가인 후쿠자와 시치로 역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우익의 습격을 피해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또한 시마나카 사건 이후 중앙공론사는 황실에 대한 자체 검열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게되었다. 1962년 잡지 『사상의 과학』(思想の科?)의 1월호에는 천황제 특집이 실릴 예정이었으나, 중앙공론사에서 이를 공안조사청에 미리 보여주고 검토를 받은 결과 해당 호를 발간정지하고 일방적으로 폐기 처분하는 결정을 내려 집필진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3)후지타 쇼오조오는 저서 에서 풍류몽담과 시마나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황실과 일본의 국민들을 대변하여’ 테러리즘을 저지르는 근왕주의자들은 오히려천황제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테러리즘에 대해 직접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일본 천황가를 비판하기도 했다.4)3. 벤 힐즈의 은 도쿄 특파원 출신인 호주 저널리스트 벤 힐즈가마사코 황세자비에 대해 저술한 책으로, 벤 힐즈가 마사코의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취재하고분석한 결과가 담겨 있다. 책에서는 ‘일본 황실이 마사코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마사코 비는 중증의 우울증을 앓았다’, ‘천황가의 구성원들이 마사코의 고통에 일조하거나 방관했다’등의 내용과 천황가의 전통에 대한 비판 등을 담고 있었는데, 일본 언론과 정부에서는 벤힐즈의 사과를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벤 힐즈는 본 저작 때문에 메일로 살해 협박을받기도 했다.벤 힐즈의 저서가 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을 때 외무성은 책에 ‘왕실에 대한 무례하고 모욕적인 기술’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배경에 일본에 대한 멸시는 것은 아니냐며 항의했다. 프린세스 마사코를 출판했던 에 따르면, 아사히, 요미우리, 닛케이 등의 주요 신문에서는 ‘황실을 모욕하는 표현이 담겨 있으며, 외무성과 궁내청이 싫어할 것이다’는 이유를 들어 의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는 2013년 “황태자 전하,퇴위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황태자비를 두둔하는 황태자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5) 그러나 야마오리 데쓰오를 비롯하여 황태자와 황세자비가 천황가의 전통에 도3) 조정민, 「금기에 대한 반기, 전후 오키나와와 천황의 조우: 메도루마 순의 를 중심으로」, 일본비평 16호, 2017.2, p.187.4) 후지타 쇼오조오, 이홍락 역,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창비, 2013, p.135-161.5) 권숙인, 「전후 천황제와 젠더- 황태자비 마사코의 시련과 황실의 위기를 중심으로」, 일본비평 9호,2013.8. p.36.전하는 것을 비판했던 이들은 우익 집단의 공격을 받거나 테러를 당하지 않았다.또한, 때때로 천황가의 여자 구성원들에 대한 비판은 황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황제 존속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천황주의자들은 이러한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서는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를 비난하거나 천황가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천황에 대한 금기를 어기는 것이 되지만, 천황제라는 제도에 반(反)하는 천황가의 일원 개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천황 금기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천황 금기가 ‘천황이 아닌 천황가의 개인(특히 그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비판’까지금기시하는 것은 아니며, 천황 금기는 ‘천황의 위엄과 천황제라는 제도’의 부정적인 언급에대한 금기라는 것을 의미한다.4. 그외의 사건들1980년 일본의 월간지 은 천황의 계승 문제를 다루면서 천황제의 유지 체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가 우익 단체의 테러를 여러 차례 당했다. 당시 발행인이었던 오카도메 야스노리는 우익 단체의 테러에 의해 전치 40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6)1990년 나가사키 시장이었던 모토시마 히토시는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가 천황에 대한 불경을 이유로 우익단체의 공격을 받았다.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2005년 1월 29일 N아사히신
    사회과학| 2018.09.10| 7페이지| 1,000원| 조회(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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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과 라울 알폰신의 인물 비교 연구
    김영삼과 라울 알폰신에 대한 인물 비교 연구- 경제 정책과 외교, 과거 청산을 중심으로Ⅰ.서론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 세계정치에는 ‘민주화의 제 3의 물결’이 거세게 휘몰아치게 된다. 군부지배체제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분단독일의 통일, 동구권의 민주화 등의 변동은 그 변화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의 제 3의 물결이 확산되면서 민간정부의 출현, 다당적 경쟁체제의 도입, 언론자유의 허용,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평화적인 정부이양 등의 ‘세계민주주의 혁명’(global democratic revolution)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 역시 세계민주주의 혁명 대열에 동참하였다. 한국은 30년의 군부정치기간을 지나 1993년 김영삼의 당선으로 민간정부가 출현하였으며, 아르헨티나 역시 1930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였고 1983년 10월 라울 알폰신의 선거 승리로 민간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김영삼과 라울 알폰신은 각각 군정에서 민간정부로의 이양을 상징하며 두 국가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우리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모습을 보인 두 나라의, 군부정치기간을 지나 처음으로 민간정부를 구성하게 된 두 대통령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김영삼과 라울 알폰신은 정계에 진출하여 군부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였으며 민간정부로의 전환기의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과거청산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외 정책에서도 이전 정권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두 인물을 비교함에 있어, 각 인물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장과정을 분석하여 인물에 대해 통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두 인물의 유사한 행적을 기반으로 비교의 큰 틀을 삼고자한다. 과거 청산 과정, 경제정책, 외교, 당시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두 인물의 결정과 대처를 사실을 통해 비교한다. 그리고 인물, 공간, 시간을 또 다른 기준으로 하여 분야별로 비 1982년 32.3%에서 1990년 18.4%로, GNP 대비 1989년 2.6%에서 1993년 1.7%로 삭감되었다. 이 뿐 아니라 개혁조치로 인해 징집이 15% 줄어드는 등 결과적으로 군 병력은 육군 45%, 해군 30.1%, 공군 11.8%가 축소되었다. 그리고 군의 개혁조치로 국방부를 ‘군축부’(Ministry for Disarmament)라고 개정하였다.그러나 군부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군은 알폰신의 개혁조치를 국가 취약성을 완전하게 드러낸 ‘자멸적인 평화주의’(suicidal pacifism)이라고 비난하였다. 군은 1986년 12월 23일 기소종결법의 통과에 불만의 목소리를 냈고, 이후 세 번의 반란을 통해 표출되었다. 1987년 4월 ‘부활절 쿠데타’가 일어나는데, 인권재판 과정에서 실추된 군의 위신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알도 리코 중령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로 인해 군 수뇌부가 교체되고, ‘강제 명령에 따른 복종법’이 통과되었다. 1988년 1월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강경파 리코중령이 자신의 사법적 처리에 불만을 갖고 일으킨 반란이었다. 1988년 12월 세 번째 반란은 모하마다 알리 세이넬딘이 특수부대 카라핀타다의 참모 총장을 중립 인물로 임명하라는 요구로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세이넬딘은 1990년 12월 3일 반란 가담자의 복직과 군인의 생활수준 향상을 주장했다.(김영길,2004)..한편, 알폰신 대통령은 자신의 안위마저 위태로워지자 1986년과 1987년 푼토 피날(PuntoFinal)라는 이른바 국민화합법과 의무복무법을 발표, 사법처리를 중단하는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개혁의 조치는 한편으로는 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폰신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는 공약에 따라 과감하게 군정청산을 추진하려 했으나 군에 대한 민간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군정을 하루아침에 청산하는 작업은 어려움이 따랐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알폰신 대통령의 군정청산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3년 12월 29일에 김영삼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 및 기능 조절 방안’을 통해 133개 공기업 중 58개 공기업을 1998년까지 민영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공기업 민영화 방안은 비효율적인 공기업들을 민영화하여 공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으나,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대기업에게만 경제력이 집중될 수 있다’는 반발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김영삼 정부는 사기업에 대한 규제를 축소하였고, 각종 인/허가 업무 역시 간소화하였으며 경제에 관련된 제도들을 자율적인 시장 구조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였다.1995년에는 최초로 국민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넘기기도 했다. 1994년 말 한승주 외교장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96년 12월 12일에 가입서가 발효되어 한국은 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OECD는 선진국 진입의 관문 격으로 평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OECD 가입은 의의가 컸다. 그러나 OECD에 가입함으로 인해 시장 개방에 대한 부담 역시 커졌다.그리고 자유 경쟁을 강조하고 보호와 규제를 완화함에 따라 저소득층보호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은 계속 축소되었고,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들이 완화됨으로써(오염물질 배출업소 입지 규제 완화, 환경기술 감리제도 폐지, 환경관리인 고용 의무 완화 등) 인해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기도 했다. 국민들은 문민정부가 ‘개발 독재’를 앞세웠던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중소기업 정책을 활성화하고 소외 계층에게 공공이익을 재분배하며 노동법의 비민주적 조항을 개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김영삼 정부는 ‘경제 안정’을 내세우며 부정의한 경제제도를 개혁하지 않았다. 중소기업에 대한 보호 역시 이루어지지 않아 김영삼 정부대에는 사상 최고의 중소기업 부도율을 기록했고, 빈익빈 부익부 역시 심화되었다. 게다가 1996년에 12월 26일에 여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노동법 중 복수 노조 금지와 정리 해고제가 변칙 노력하지 않았고, 많은 산업가와 노조 세력은 알폰신 정부의 경제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1984년 9월 알폰신 정부는 IMF와 대기차관(Stand-By Facility) 협정을 맺고 IMF의 재정 적자 감축안을 받아들였지만 바로 다음해에 감축안의 조항을 어겨 추가 차관을 거부당하게 되었다. 1985년에도 재정 적자와 통화 발행, 인플레이션은 증가했고, 1985년 초의 인플레이션은 연율로 환산해 1000%에 달했다. 결국 알폰신 정부는 1985년 4월에 베르나르도 그린스푼을 해임하고 후안 수루이예(Juan Sourroille)를 새로운 경제장관으로 임명했다.한편 알폰신은 비페론주의 노조지도자 출신의 알도 무치(Aldo Mucci)를 노동장관에 임명하여 노조 내 비페론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페론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조재조직법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노조재조직법은 노조 내 선거에 대한 규제책을 도입하여 노조를 민주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84년 3월에 페론주의자들과 야당 의원들은 노조재조직법을 부결시켰고, 페론주의자들의 노조 지배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는 알폰신 정부와 급진당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알폰신 정부는 알도 무치를 해임하고 카세야(J. M. Casella)를 새로운 노동장관에 임명한 뒤 노조의 ‘협조’를 얻어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페론주의 노동자연합(CGT)는 정부가 노조의 자금력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에 반발했고, 총파업을 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결국 1985년 알폰신 정부는 노조와 사회적 협약을 맺으려는 전략을 포기하고 아우스트랄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1985년 6월에 후안 수루이예 경제장관은 아우스트랄 계획(Plan Austral)을 발표했다. 아우스트랄 계획의 주요 내용은 ‘아우스트랄’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도입한 뒤 재정과 통화를 긴축 운영하고 임금과 가격, 환율을 동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우스트랄 계획을 사전에 통지받지 못한 페론주의 노동자연합은 아우스트랄 계획이 실질 임금을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김정일 사후에 김영삼은 같은 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 있다’고 언급하는 등, 북한의 경착륙을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김영삼은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왔다. 1993년 3월 10일에 있었던 공군사관학교의 졸업식에 있었던 연설에서는 ‘북핵 문제의 해결 없이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논의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같은 해 6월에 있었던 내외경제신문의 특별기자회견에서도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대와는 악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시해왔다. 북한과 미국의 협상이 마무리되어가던 1994년 10월 7일에 뉴욕타임스와의 대담에서 ‘북한 정권과의 타협은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해줄 뿐“이라고 말하여 예정되어 있던 북미협상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미국과 외교 마찰을 빚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함으로써 일관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북한의 핵 문제와 영변 핵위기는 안보 위협을 증대시켜 안보에 드는 비용을 증가시켰으며,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서 한국 정부와의 의논 없이 직접 해결에 나섬에 따라 한국 정부의 권위와 위상에도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김영삼 정권 대에서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도 늘어났다. 냉전기에는 한일 양국이 미국과 우호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반공 연대를 형성하고 서로 결속하였기 때문에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갈등이 표면화되지 못하였지만, 냉전이 해체됨에 따라 그동안 억눌려왔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1993~1994)에는 일본에서도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과거에 대해 반성적인 내각(호소카와 내각, 하타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다.
    사회과학| 2017.05.22| 14페이지| 2,000원| 조회(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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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 분쟁 분석: 2차 인티파다 운동을 중심으로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 분쟁 분석 >- 2차 인티파다 운동을 중심으로‘인티파다(Intifada)’는 아랍어로 봉기, 반란, 각성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동시에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의 반-이스라엘 독립 투쟁을 칭하는 단어이다. 인티파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영토를 몰수당하고 이스라엘 점령지 밖으로 쫓겨난 아랍-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가지고 있던 아랍-이스라엘인들이며, 현재까지 인티파다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우선, 두 민족의 분쟁은 ‘민족과 폭력을 연결하는 네 가지 메커니즘’ 중 영토 회복 운동(Irredentism)과 분리 운동(Secession)이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이 소유했으나 현재는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과, 이스라엘의 존재를 용인하며 이스라엘로부터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모두 분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단체에는 하마스(HAMAS) 등이 있으며, 후자를 지지하는 단체에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등이 있다.두 민족에게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상징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모두 가진 땅이었다. 팔레스타인(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땅은 이슬람교, 유태교 모두에게 성스러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악사 사원이 있는 산은 유태교인들에게는 템플 마운트로 3000여년 전 ‘솔로몬 왕이 세운 성스러운 곳’이었고, 아랍 무슬림들에게는 하람 에스-샤리프, 즉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었기 때문에 두 종교 모두에게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유태인 민족주의자들(특히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약속받은 땅이었으며, 오래 전 유태인들이 세계로 흩어진 이후 처음으로 민족 국가를 수립할 수 있게 된 기회의 땅이었다. 또한 아랍-팔레스타인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은 맥마흔 선언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약속받은 독립된 영토였으며, 이타인 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땅이었고, 두 민족과 영토의 결합은 폭발적인 분쟁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또한 두 민족은 상이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은 아랍인들의 생활과 정치 영역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유태교는 유태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또한 두 나라 모두에서 종교 집단(정당)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종교적인 원인은 민족 분쟁의 주요 원인은 아니었지만, 주변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1차 인티파다 운동은 1987년에 시작해서 1993년에 종식되었다. 1차 인티파다 운동의 결과로 오슬로 평화 협정,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립과 요르단과의 평화 협정, 와이 리버 협정 등이 체결되었지만 두 민족 간의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2000년에 2차 인티파다 운동이 발발하면서 두 민족은 다시 한 번 폭력적인 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1차 인티파다 운동 종식 이후의 몇 년간의 평화가 깨지고 또다시 무력 분쟁이 시작된 원인은 무엇일까?2차 인티파다 운동 시작의 티핑 포인트가 되었던 사건은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였던 아리엘 샤론이 동이스라엘의 알 악사 사원 기습 방문한 사건이었다.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은 통곡의 벽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던 이스라엘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졌고,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기를 사용해서 이들을 진압했으며, 다음날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가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로 확산되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을 재점령했으며, 소요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무장 공격을 감행했고 이스라엘은 그에 대한 강도 높은 보복을 실행했으며, 이 이로 인해 2차 인티파다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두 민족의 갈등에 불을 붙였을 뿐, 이 사건 이전부터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은 고조되고 있었다.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은 아랍-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이스라엘인들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1996년 팔레스타인의 과격 단체인 하마, 1997년에 이들이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안에서 권력을 잡게 되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사실상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실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유태인 군인이 가자 지구에서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적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아랍-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유태인들에게 강제로 영토와 집, 직장을 빼앗기고 가자 지구와 웨스트뱅크 등에 있는 난민촌으로 쫓겨난 난민들이었다. 이들은 귀향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며, 애초에 오슬로 협정이 귀향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평화 협정의 조항들은 성실하게 이행되지 않아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내의 이스라엘 정착촌은 철거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국경 폐쇄 때문에 많은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에 비해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이득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아랍-팔레스타인들을 위한 독립 국가의 건국에 대한 방법을 결정하려고 했던 2차 캠프데이비드 협상은 동예루살렘의 지위 문제에 대한 양쪽의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어 결국 결렬되었다. 게다가 1990년대에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의 경제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안보상의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키자, 사회간접자본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게다가 부패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경제 발전을 제대로 이루어내지도 못했다. 1999년 이스라엘이 봉쇄를 완화하여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 간의 일부 통행을 허가했지만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고,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은 기초 생필품과 의약품을 구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에 빠지게 되었다. 경제 하강으로 인한 만성적인 실업 역시 큰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아랍-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여전히 사회적, 제도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1차 인티파다 종식 후인 1994년에도 아랍-이스라 교육 기회는 여전히 불평등했고, 개종하지 않은 아랍-이스라엘인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유태인 사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주류 사회로의 편입도 불가능했다.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이스라엘 내의 빈곤층을 형성하게 되었다.즉, 두 민족간의 분쟁은 영토 분쟁, 안보 위협, 일방적으로 한쪽에 유리했으며 미봉책에 가까웠던 평화 협정에 대한 불만, 이스라엘 내 소수자로서 아랍-이스라엘인들이 받던 제도적 차별, 종교 차이로 인한 차별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이 중첩되어서 촉발된 것이었다.본격적으로 전개된 2차 인티파다 운동은 1차 인티파다 운동과는 크게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2차 인티파다 운동에서 자살 폭탄 테러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군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도 감행했다. 테러를 감행한 이들은 테러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다른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의 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며, 테러 이후 이스라엘 여론이 ‘2차 캠프데이비드 협정보다 더 많은 양보를 하더라도 빨리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것’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했다.실제로 자살 폭탄 테러는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은 로켓포와 무장 헬기 등을 사용하여 더 강한 보복 공격을 실행하게 되었으며, 아랍-이스라엘인들과 아랍-팔레스타인인들이 받는 차별과 경계 역시 테러 이후로 더 심화되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비해 군비, 무기 등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테러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마스의 지도자인 마하무드 알자하르는 이것이 ‘테러로서 공포의 균형을 맞추는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테러가 더 많은 보복 공격으로 이어지고, 보복 공격이 다른 테러로 이어지면서 두 국가 사이의 무력 분쟁은 치열해져갔다. 이 과정에서 대량 학살 역시 늘어났다.2차 인들의 적극적인 중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 협정을 주재하는 것은 대부분 미국(특히 클린턴 행정부)의 몫이었는데, 2차 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친이스라엘 성향이었으며, 임기 초반에 부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당사자 해결 원칙’에 입각하여 방관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이스라엘 정부의 강경한 진압에 대한 비판’보다는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국제 사면 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과 국제 인권 감시 기구는 웨스트뱅크의 제닌 지역에서 난민촌을 공격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전쟁 범죄 혐의로 비난했고, UN 역시 이스라엘 방위군이 과잉 방어와 과도한 보복성 공격을 실행하고 있다고 확인했지만, 이들의 의견에는 분쟁을 멈출 수 있는 강제력과 군사력이 없었다.이스라엘 내 우파 정당(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고, 팔레스타인에서도 과격 독립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하마스가 정권을 잡은 것 역시 인티파다가 심화되고 길어진 원인 중 하나였다. 특히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하타와 하마스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갈등의 양상이 더욱 복잡해졌다. 하타는 2차 인티파타 초반에 국민들에게 되도록이면 평화로운 투쟁을 할 것을 부탁했으나 부패한 하타 정권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고, 극단적인 자살 폭탄 테러는 계속해서 일어났다.2차 인티파다는 종식된 시점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2차 인티파다 운동이 완전히 끝을 맺지 못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또다시 가자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4년을 인티파다가 끝난 해로 보는 이들도 있고, 가자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한 2009년에을 인티파다가 끝난 해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대중동 태도 변화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적극적인 중재 시도가
    사회과학| 2017.05.22| 5페이지| 1,000원| 조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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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정보 기관: 역시와 구성, 활동 사례
    < 요약 >프랑스의 정보기관은 국내정보를 담당하는 내무부 산하의 국내일반안전국(DGSI)과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국방부 소속의 대외안보총국(DGSE). 군사정보부(DRM), 국방보안부(DPSD)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1. 프랑스의 국내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시작은 내무성 사법조사 관리총국이다. 내무성 사법조사 관리총국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위신이 실추된 군 정보기관을 경찰이 보완하기 위해 1899년 신설되었다 내무성 사법조사 관리총국은 1933년 국토감시관리총국으로 개편되었으나 WW2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이 해체되었다. 세계 2차대전 이후에는 국토감시청(DST)이 신설되어 국내정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국토감시청(DST)은 2008년 내무부 일반정보국(RG)와 통합되어 국내중앙정보국(DCRI)으로 개편되었다. 국내중앙정보국(DCRI)는 2014년 또다시 개편을 거쳐 국내일반안전국(DGSI)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게 되었다. .국내일반안전국(DGSI)은 내무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주요 목적은 대스파이, 대테러,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경제 주권 수호 등이다.2. 프랑스 국외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시작은 중앙정보활동국(BCRA)이다. 중앙정보활동국은1942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영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망명정부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했다. 중앙정보활동국은 제2국(DB)의 소속으로 있던 첩보국 SR과 병합하여 총특무국(DGSS)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44년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하에서 벗어나고 드골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면서 총특무국(DGSS)은 연구조사총국(DGER)으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하게 되었지만, 1946년 드골이 임시정부의 수반직에서 물러나며 해체되고 해외 정보 및 방첩국(SDECE)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해외 정보 및 방첩국(SDECE) 이후 국외정보 담당 정보기관의 국내 첩보활동은 법령으로 금지되어 해외 정보 부문만 전담하게 되었다.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이 집권한 이후, 해외정보 및 방법국(SDECE)은폐 시도 역시 실패하면서 DGSE는 크게 비난을 받게 되었으며, 당시 DGSE 국장과 국방장관이 사임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정보 자산 >- 프랑스는 여러 가지의 첩보 위성을 발사하여 IMINT, SIGINT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DGSE등의 기관에서는 HUMINT를 수집하고 있다. 현재 가동 중인 위성은 플레이아데스(Pleiades), 엘리사(Elisa) 등이다.-< 본문 >프랑스의 정보기구는 국내정보를 담당하는 내무부 산하의 국내일반안전국(DGSI)과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국방부 소속의 대외안보총국(DGSE). 군사정보부(DRM), 국방보안부(DPSD)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1. 프랑스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역사(1) 내무성 사법조사 통감부 (내무성 소속의 사법조사 관리총국, Controle General des services de Recherche Judiciaire, 1899-1934)내무성 사법조사 통감부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위신이 실추된 군 정보기관을 경찰이 보완하기 위해 1899년 5월 신설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방첩 활동까지 관장하기도 했다.(2) 국토감시통감부 (국토감시관리총국, Controle General de Surveillance du Territoire, 1934-1942)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무성 사법조사 통감부는 국토감시통감부로 개편되었다. 국토감시통감부는 국경 경비와 통신 감청을 분장하였으며, 1942년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된 이후 독일군에 의해 해체되었다.(3) 국토감시청 DST (1944~2008)국토감시청의 공식 임무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외부 세력의 교사, 기도, 지원에 의해 자행되는 공작활동이 프랑스의 영토 내에서 전개되는 것을 조사, 예방, 진압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1982년 12월 22일자 법령 제82-1100호) 국토감시청은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국내 정보수집 및 부정색출 단속, 외국의 프랑스 첩보 활동의 탐지 적발, 테러 범죄나 마약 범죄6년 3월 19일자 국가경찰총국장 훈령에서는 “국내의 테러리즘에 관한 정보의 수집 및 종합을 담당한다”고 규정했다.정보활동중점대상은 50년대에는 프랑스 공산당, 60년대에는 알제리아 민족해방전선(FLN)과 비밀무장조직(OAS), 70년대에는 극좌세력, 80년대에는 테러리즘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목표가 모호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내무부 일반정보국은 2008년 DST와 통합되어 DCRI로 개편되었다.(5) 국내중앙정보국 DCRI (2008~2014)국내중앙정보국은 경찰청 내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찰청 정보국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내중앙정보국 내에는 대테러국, 대스파이국, 폭력 및 파괴행위 전담국, 경제보호국, 기술국, 국제문제국, 행정국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중앙정보국의 주요 임무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국가 이익 침해를 야기할 수 있는 모든 활동들에 대한 대응”이다. 국내중앙정보국의 업무에는 ‘극단적 성격, 동기 등에 의해 국가 안전의 침해를 야기할 수 있는 개인, 단체 및 조직에 대한 감시’와 ‘사회 현상 분석 업무’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내중앙정보국은 2010년 사르코지 대통령에 대한 악성 루머를 공식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 문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어 2014년 프랑스 정보기관의 개편에 큰 영향을 주었다.(6) 국내일반안전국 DGSI (2014.5.2~)국내일반안전국의 주요 목적은 대스파이, 대테러,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경제 주권 수호 등이다. 전신이었던 DCRI는 경찰청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DGSI는 내무부 소속되어 있다.2. 프랑스 국외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역사(1) 중앙정보활동국 BCRA (Bureau Central de Rensegnements et d’Ation)1942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영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망명정부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특수정보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 중앙정보활동국 (BCRA)를 설립했다. 중앙정보활동국은 후에 군첩보 연구조사총국(DGER)이 국내 첩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던 것과는 달리, 해외 정보 및 방첩국의 국내 첩보활동은 법령으로 금지되어 해외 정보 부문만 전담하게 되었다.SDECE의 대표적인 공작 사례는 붉은 손 (Red Hand, La Main Louge) 공작 (1954~1961)으로, 알제리 민족주의자,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무기거래상, 친 알제리 지식인 등에 대한 암살과 폭파 공작에 성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고, 많은 선박이 폭파된 사건이다.1965년 모로코 반체제운동가 메디 벤 바르카(Mehdi Ben Barka) 납치 및 살해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진 이후 국방부로 이관되었다사회당 집권 이후 DGSE로 명칭을 바꿔서 활동하게 되었다.(5) 해외 안보 총국 DGSE (La Direction Generale de la Securite Exterieure)해외 안보 총국 DGSE의 정확한 조직과 정원은 국방 비밀로 규정되어 있으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전략기획국, 정보운영국, 정보활동국, 관리국, 기술장비지원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DGSE는 국방부의 관활하에 있으며, 국가가 필요로 하는 해외에서의 정보수집과 더불어 국가안전보장 및 국방에 위협을 가하는 간첩을 비롯하여 반국가사범과 테러범에 대한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다.1982년 4월 3일 법령은 DGSE의 활동 목적을 “정부에 유익한 임무를 수행하고 관계 기관과 긴밀한 협조를 위하여 프랑스 안보에 유리한 정보를 추구하고 또 이용하며, 국토 전역에 걸쳐 프랑스의 이익에 반대되는 간첩활동을 탐지하고 분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프랑스 국내 정보 및 수사권은 DGSI에 있으나, 외국 공관, 국제공항, 외국인 숙박 호텔 항만 등에서는 DGSE의 활동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DGSE는 1989년 이후 활동을 위한 자원 배분을 냉전 종식이라는 환경 변화에 맞추어 재조정하게 되었다.3. 그 외 정보기관(1) 군사정보부 DRM (La Direction du Renseignement Mi서 드레퓌스에게 역시 유죄를 선고하였다. 작가 에밀 졸라는 대통령에게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는 한편, 군의 야만적인 행동을 비난하면서 '프랑스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항의하였다. 항의 여론이 들끓게 되자,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그는 석방되고, 190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죄가 확정되었다.드레퓌스 사건에서의 정보 실패 원인은 프랑스군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국수주의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결과로 군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급격하게 하락하였으며, 프랑스는 정보기관을 분리하게 되었다.(2) 1980년 르 까나르 앙쉐네 (Le Canard Enchaine) 도청 사건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잡지 ‘르 까나르 앙쉐네’의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 사건이다. (잡지사가 건물하게 되면서 도청기 발견되었다.) 도청 사건은 전국민적인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내무부 총리 사임에 큰 영향을 끼쳤다.(3) 1985년 레인보우 워리어 호 침몰 사건뉴질랜드에 정박 중이던 그린피스 소유의 선박 레인보우 워리어 호를 DGSE가 폭파시킨 사건이다. 사진 기사 한 명이 익사하였다. 이 사건이 DGSE에 의해 저질러진 일인 것이 알려지고 은폐 시도 역시 실패하면서 DGSE 국장과 국방장관이 사임하게 되었고, DGSE의 PNIO 역시 재조정되었다.(4) 2015년 11월 파리 테러2. 정보 성공 사례(1) 1983년 T국(KGB의 과학기술 정보수집 부서) 요원을 포섭하여 KGB의 스파이 계획을 입수, 40명의 외교관과 5명의 무역대표부 직언, 2명의 타스통신 기자를 간첩 행위 혐의로 추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암호명 Farewell(2) 1987년 5명의 프랑스인을 포함, 우주 산업 관련 첩보 행위를 하던 간첩단을 색출하여 3명의 소련 외교관을 추방하였다. (이들은 프랑스의 우주 로켓 Ariane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이었다.)(3)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원을 살해한 팔레스타인 테러단 검은 9월단 (Black Se8
    사회과학| 2017.05.22| 7페이지| 1,500원|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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