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설교문과목: 소선지서와 설교=설교본문 : 하박국 2장 1절?4절제목: “말씀에 대한 성실로 살리라”1, 도입세간의 뉴스 중에 불법 및 사기죄로 기소되고 선고받은 사람들의 형량이 몇 년 정도인줄 아시나요? 일반 사기 범죄의 양형기준을 살펴보면, 1억원 미만은 최소 6개월 ? 2년 6개월, 300억원 이상은 최소 5년에서 최대 13년까지 가능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금액은 100배 이상 늘어났음에도 형량은 10배도 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민형법 상의 죄를 짓고도, 들키지 않는 죄들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즐비한 것이 이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 시대의 불의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1장 3절과 같이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또 1장 13절에서도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반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물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2. 서론우리가 읽은 본문 2장1-5절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인 1장 13절의 답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악이 횡행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미미해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신자와 비신자 구별할 것 없이 모두가 품을 수 있는 의문 중 하나입니다. 지금 이 시대 뿐만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가 살고 있던 B.C. 60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악인의 번영에 대한 질문은 동일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여러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포 되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하였고, 남유다 또한 신흥 강국인 바벨론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없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 민족, 그것도 이스라엘보다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통하여 심판을 성취하고 계십니다.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통하여 일하고 계심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악행들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섭리는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정의는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박국의 물음과 우리의 이러한 물음에 대해 하나님의 답변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얻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3. 본론(1) 1-3절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합1:13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의 질문은 한 두절로 끝나지 않습니다. 13-17절까지 계속하여 항변하며 질문합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워보이며 하나님을 궁지에 모는 것처럼 다급해보입니다. 선지자로서 이러한 질문이 바른 행태인지도 짚어볼 정도로 매서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다급한 질문에 빠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하박국 선지자는 본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파수하는 성루에서 기다리고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성루는 파수꾼이 전령의 소식을 기대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장 3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에 대한 중요성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기록하라고 2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개인예화]사람들은 누구나 기다림에 대해 인내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군대에 있는 군인들이 전역하는 날짜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날은 속히 오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시계가 고장났는지 시계를 계속 쳐다보며, 건전지도 일일이 체크해봅니다. 그러나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라는 우스갯 말처럼 군인의 전역하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 날이 안 올줄 알았습니다. 너무 까마득하고 망망해보였습니다. 아무리 손꼽아도 오지 않는 날 같아보였습니다. 그런데 전역한지 지금 10년이 다되어갑니다. 군에서의 2년은 그렇게 시간이 안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전역한 지 10년이 다되어 간다니 세삼 기다리는 것에 대한 시간은 언제나 길게만 느껴집니다.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취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회복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긴 기다림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회복하심과 구원하심은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반드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종말은 속히 이를 것입니다.4. 본론(2) 4절 누가 구원받는가? 겸손한 믿음의 사람2장 4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오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에무나”라는 명사인데, 에무나를 번역하자면 믿음이라는 뜻도 있지만, “성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통상적인 믿음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자면 창세기에서 아브람과 약속하실 때 등장하는 [아만]이라는 동사가 “믿음”을 가리키는데 그렇기에 하박국 2:4에 나오는 “에무나”를 믿음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뜻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성실”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입니다.또한 로버트 치즈홀름의 해석을 빌리자면, “교만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팔’을 “쇠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인 ‘알라프’로 읽을 것을 주장하면서 “그 속에서 그 영혼이 정직하지 않은 자”라는 명사절을 이 동사의 주어로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쇠하다”와 “산다”가 교차대구를 이루면서 “그 속에서 영혼이 정직하지 않은 자는 쇠할 것이며, 그의 성실 안에서 의로운 자는 살게 될 것이라”로 번역할 수 있게 됩니다.앞서 살펴본 개역개정의 “믿음”으로 번역된 부분을 “성실”로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두 단어는 표현상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에서 병치되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성실이 의인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의존적 상태로서 위선이 없는 신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구약에서 믿음을 표현하는 부차적 진술들은 대부분 행동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이삭을 기다렸고,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일하심을 믿고 또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성실은 단순히 거짓 없는 마음의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고 도덕적 행동도 포함합니다. 믿음의 표현 그 자체를 믿을 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될 때 그것을 “성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믿음보다 더욱 적극적인 자세는 바로 믿음을 유지하는 상태인 “성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무작정 믿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고 있으라는 것입니까? 바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결코 가만히 있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려고 움직이는 것이야 말고 믿음이요 성실한 의인의 자세입니다. 세상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지만, 의인은 말씀을 믿는 적극적 자세인 성실로써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삶이 말씀을 믿는 열심인 성실로 살아가시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선지서 요약과제: 구약의 그리스도 6-7장과목: 소선지서 해석과 설교: 미가, 나훔, 하박국6장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방법은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방법과 루터의 기독론적 방법 사이의 어디엔가에 해당된다. 이것을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이라 부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중심의 빛에서 메시지를 이해해야 한다.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신약의 문맥에서 찾아야 한다. 구속사적 해석이란 구약의 구절을 먼저 그 자체의 역사적, 문화적 문맥 안에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어떤 구절에 대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그 구약을 들었던 방식대로, 우리가 듣고 성경 전체의 구속사 전체 폭넓은 맥락 속에서 메시지를 이해하는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다.1) 본문을 그 자체의 역사적 문맥에서 이해하라설교자의 첫 번째 책임은 선택된 구절의 메시지를 그 자체의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본문 원래의 의미에서 나와야 하고 원래의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원래의 의미는 어떤 구절이 오늘에 주는 중요한 의미를 끌어 내기 위해 객관적인 통제점을 제공하는데 덧붙여, 그 의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감소도 막을 수 있으니, 이는 구약 원래의 메시지는 분명히 하나님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어떤 구절의 역사적인 원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문예적, 역사적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 의미라는 세 가닥을 가지고 동시에 시행하지만, 우리는 분석의 목적을 위해서 그 가닥들을 풀어 보고 각 가닥이 본문 해석을 위해 제기하는 구체적 질문들을 주목해 볼 것이다.1-1) 문예적 해석이 본문의 장르는 어떠한 것인가? 어떤 비유적 표현을 쓰고 있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이 구체적인 책의 문맥 속에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국한되어야 한다. 논쟁의 흐름과 구문론적 수사학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1-2) 역사적 해석첫째 저자가 원래의 청중을 위해 의도한 의미는 무엇이있는련성을 밝히는데 중요하다.- 하나님 중심적 해석학자들은 보통 “신학저거 해석”에 대해 언급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세계와 창조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그 구절이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은혜, 신실하심 등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폰 라드는 “구약 작품들의 주 관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성”이라고 진술한다. 존 로저스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야기의 주제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은혜롭고 후회함이 없이 우리를 포함시킬 것을 선택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에 기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받을 존재로 주어지고 생명을 수여 받아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의미를 아는 열쇠가 놓여 있다. 구약 문헌의 하나님 중심적 초점을 경시하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한다.1.2. 메시지를 정경의 문맥과 구속사의 문맥에서 이해하라본문 설교는 제목 설교와 대비하고자 만들어진 말이다. 강해 설교는 설교 본문의 의미를 그 문맥 안에서 노출하고 파헤치는 것이다. 원래의 의미를 결정하여, 정경 전체의 문맥적 의미와 오늘날 우리의 청중에게 이러한 의미를 적용시키는 것에 이르기까지이다.정경과 구속사의 맥락에서 한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때, 문예적-역사적-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구별할 수 있다. 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속사와 계시가 진전되고 있고 구약의 약속과 주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은 구속사적 해석이며,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이다.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은 곧 하나님 중심적 해석과 연결상에 있고, 라이트는 “우리는 사건이나 그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의 이야기의 결말 즉, 그리스도에 비추어 드러나는 부가적인 수준들의 의미를 정당하게 볼 수도 있다”. 구속사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적인 질문들과 대면하게 하기 위해서 그 중점에 두고, 알레고리적 해석을 뒤로한 채,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관점에서 써야한다. 구속사는 통일된 이야기이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한다. 이것을 점진적 구속사의 길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위치에서 종말론의 고동소리를 들어야할 뿐만 아니라, 초림과 재림 안에 성취도 인식해야 한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행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께로 이동하는 의식을 필요로 한다. 모든 개인적인 성경 내러티브는 적어도 세상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더 큰 내러티브의 한 부분인데, 그것은 궁극적인 내러티브의 한 부분이 된다.3. 약속-성취의 길히브리 정경의 구조에 따른 통일되고 유기적인 발전으로서 구약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인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최후의 시도는, 약속의 구조라는 빛에서 해석될 때와 그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일 때에는 구약의 의미의 중요성이 신학적인 깊이와 실제적인 능력에서 설교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지 않는 설교는 구약 계시에서 항상 심층적 차원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약속의 성취로써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을 점진적으로 분할분으로 채워나가신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을 해석할 때, 구약의 약속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취로 나아가고, 다시 구약 본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이다. 반게메렌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소망을 두고 근거로서의 예언적 메시지의 완전한 충격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기독교 주해는 구약의 메시지에서 신야긍로 옮아가고, 그리스도 왕국의 진전을 탐사하며,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 앞으로 성취될 것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결정하기 위해 예언적인 메시지로 다시 되돌아간다.선지서의 약속들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자신의 생애 동안 성취하기 시작한 희년의 요소들조차 한기록으로 끝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소망은 다윗의 위대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성취된다. 창세기의 톨레도트 구조의 맥락에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저자가 여자의 씨를 아담에서 노아까지와 노아의 아들 셈에서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후손들의 계보로 간주한다는 것이다.4. 모형론의 길세속적이거나 이신록적인 형태의 역사비평적 방식이 지닌 전제 조건들을 기초로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형론을 거부함에 있어서 거의 선택할 여지가 없는데, 폐쇄된 우주에 살고 있다는 그들의 전제가 그들에게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적 가르침이 없다면, 모형론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섭리가 부인되면 모형론도 부인되며, 역사 속에 자신의 구속 계획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기도가 없이는 모형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존 브라이트는 모형론이 구약 본문 주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본문에 나타나는 새로운 의미를 보다 늦게 발생한 사건들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모형론과 주해의 관계성이 단순히 정의의 문제라면 그것에 많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해석학적 이슈는 하나의 모형이 예언만큼 예보적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모형들은 예보적인 것이나 다른 것들은 아니다. 참된 모형은 항상 어떤 확실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구별되는 이 특징들에 대한 지식은 진정한 모형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수적임은 물론,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도 근본적인 것이다. 하나의 모형은 먼저 그것이 상징되는 것과 독립되어 모형이 될수 없다. 모형론의 집 통로는 상징주의 집의 맨 끝에 있다. 그것이 무엇을 예표하는지 정당하게 질문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모형과 대형을 함께 묶는 유대는 구속의 진전에서 결정적인 연속성의 유대이다. 단순히 그리스도께 모형론적인 계열을 그리지 말고, 그리스도 자체를 설교하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 사람들이 자신을 구세주 주님께 맡기고, 그 분 안에만 있는 구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께 순종교회 사이의 연속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폰 라트는 교회는 다시 약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러한 중추적 위치는 설교자들에게 유사성을 사용하여 구약의 메시지를 신약의 교회에 집중시키도록 해준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언약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믿음을 나누며, 동일한 소망 속에서 살고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는 구속사 영향을 받았다.6. 통시적 주제들의 길다음의 세 가지 길은 계시사와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구속사와 계시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도, 계시사가 구속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계시사는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역사 하나님의 적절한 선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구속적인 초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케리그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절하지만, 구속사와 계시사의 점진성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확립하기 위하여 그 주제들을 신약을 통해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통시적 주제들의 실례에서 영원하신 로고스인 그리스도와 연결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만, 잠언 8장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의 시적인 표현이다. 그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나무라고 말했을 때, 생명나무는 에덴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금지시킨 나무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새창조때에 실재적으로 수면에 다시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일치하게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효과적인 연결이 나타난다.7. 신약 관련 구절 사용의 길신약의 많은 구절들은 약속-성취, 모형론 혹은 통시적 주제들의 길들로 구성된다. 만약 설교자들이 이러한 방법들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신약의 관련 구절들은 무심결에 간과하는 것에 대한 좋은 교정책이다. 만일 설교자들이 이러한 길들 중에 어떤 것들을 발견했다면, 신약의 관련 구절들이 확인용은 물론, 설교 때 회중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디딤돌로서도 자주 사용될 수 있다. 게다가 신약의 관련 구절들과 인유는 때때로 신약의 그리스도와의 예기치 않은 연결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한 연결 고리로서 사용할 수 있 있다.
미가 설교문과목: 소선지서와 설교설교본문 : 미가 2장 1절?13절제목: “성문을 깨시는 하나님”1, 도입대한민국은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쟁 이후 이념의 혼돈 속에서 국가-사회적 토대를 마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군국주의 정권 속에서 을 모토로 대한민국은 고속성장을 하게 되며, 아이러니하게 교회도 같은 시기에 성장하게 됩니다.그리하여 21세기 들어 한국교회는 1,000만 성도라는 타이틀까지 얻을 정도로 많은 양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2019년 자화상은 어떻습니까? 진정 1,000만 신자가 성도로 불릴 만큼 영적-질적인 성장을 하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성적 부도덕은 매스컴에 빠지지 않고 달마다 등장합니다, 교회는 사유화 된 재산목록처럼 이리 저리 속하기도 하고, 대물려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고속 성장과 함께 한국교회는 속 빈 강정처럼 진리를 빼먹은 채 몸집만 커가고 있습니다.2. 서론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미가서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통치했던 시기의 선지자이며, 앗수르가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였습니다. 유다 요담 왕 말미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끝난 시기이며, 이 때 미가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 시기는 이스라엘의 부국강병한 번영이 끝나고 쇠퇴하는 시기였습니다. 마치 한국교회와 같이 양적 번영의 시기가 끝나고 쇠퇴가 시작되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스라엘 모습입니다.남북 이스라엘은 국가적 쇠퇴기 상황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 국가인 아람과 앗수르를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한 국가였던 남과 북은 서로가 의지하는 주변 국가를 통해 서로 적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전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 이였을까요? 왜 남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고 받게 되었을까요? 본문을 통하여 그 의미를 더욱 살펴보고자 합니다.3. 본론(1) 1-5절 이스라엘의 죄악 ‘강탈’미가 1장에서는 야곱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지목하면서 2장에서는 그 죄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은 풍요의 시간을 맞이하였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침상에서 악을 꾸미는데 2절과 같이 “밭들을 탐하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고 그의 산업(토지)을 강탈하도다”하며 땅을 빼앗는 일들을 꾸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죄악은 재산을 빼앗는 일, 고대 근동에서 재산과 기업을 의미하는 “땅”을 빼앗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레위기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토지는?다?내?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함과 같이 토지는 팔 수 있거나 빼앗아서는 안되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였습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누군가가 취할 수 있는 소유개념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의 이스라엘에서는 토지를 빼앗고 집을 빼앗음으로 사람과 기업을 빼앗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악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고, 모세오경 속 율법에서 복과 화를 말씀하실 때 ‘화’로써 설명하신 부분, 바로 토지를 빼앗는 일을 경고하였었습니다.3-4절과처럼 이 죄악으로 인하여 “재앙”을 계획하시고, “슬픈 노래”를 불러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여 빼앗는 족속들의 결말은 심판임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대한민국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강탈이 자행되고 있습니까? 사회의 자본주의 풍토가 물질지상주의를 지향하면서 많이 가진 자가 영광을 누리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사기와 배임, 횡령과 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하며 교회 또한 자본화하여 계산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돈으로 나누기도 하며 헌금을 횡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렇게 패역한 백성들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5절과 같이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 현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통치가 깃든 것을 말합니다. 이웃의 것을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이며, 현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는, 구원 받지 못하는 형국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사회와 삶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여호와의 기업,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4. 본론(2) 6-11절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이웃의 밭과 집을 탐하여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인자와 자비를 행하는 사랑의 삶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랑의 행위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택하신 백성의 온전한 삶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웃의 것을 빼앗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삶을 조정하고 회개의 재를 머리에 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향하여 “예언하지 말라”, “예언할 내용이 아니다” 라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처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기 좋은 내용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야 말로 사탕발린 거짓 메시지인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 중에서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인 정의와 공의를 세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해결한다’거나 ‘기도로 해결한다’는 추상적이지만 듣기 좋은 메시지만 귀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도 믿음으로 기도로 해결한다고 하는 신앙은 기복신앙이며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와도 같습니다.8-9절과 같이 이웃을 강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을 벗기며”, “부녀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어린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일”과 같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강탈로써, 이자를 취함으로 집과 토지 그리고 사람을 팔게 만드는, 폭리를 취하는 행위들이며, 안식년과 희년에 해방해야 할 종들과 토지에 대해서 “자유”를 빼앗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위배하는 악행 중의 악행입니다.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회에서는 물질만능주의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것에 급급합니다. 그들의 편향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음으로 사회는 기회와 재화에 대한 불균형이 여전히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하면 “돈”을 모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과정과 정당한 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돈”을 모으기에 급급한 세상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대우합니다. 직분을 추천할 때도 헌금의 정도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교회 내에서도 작동하는 원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통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라 판단받기를 즐겨합니다.이러한 모든 행위가 지속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맙니다. 10절과 같이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말합니다. 11절과 같이 오히려 백성들이 “포도주”와 “독주”와 같이 사람들이 즐겨하는 것을 말하도록 선지자들에게 종용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회개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보다, “포도주”와 “독주”와 같이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포하는 그 사람을 “선지자”라고 칭한다며 역설하고 있습니다. 진정 이 나라의 사회와 교회는 듣기에 좋아하는 것만 취하려는 “백성”과 “선지자”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과 완전설교문과목: 누가복음과 설교설교본문 : 누가복음 11장 5-13절제목: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1, 도입옛 말에 “마른 논에 물 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보기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요즘 그 마음을 실감하는데요, 딸이 맛있는 반찬을 먹을 때, 제가 먹을 그 반찬도 덜어서 주는데, 딸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 옛말이 체감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2. 서론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어떤 사람이 상대방에게 먹을 것은 주는 “먹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본문 11장은 누가복음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6장에서도 등장하는 “주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5절부터 8절, 9절부터 13절로 각각 한 단락씩 해당되는 비유와 시를 통해 기도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평소에 그냥 떡을 꾸으러 온 어떤 사람과 아비에게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에 관한 내용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이야기들이 기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오늘 말씀을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3. 본론(1) 5-8절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 5-13절은 비유와 시 형식을 가진 문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5-8절부터 살펴 보겠습니다.5절: 마을 공동체의 벗, 어떤 한 친구가 밤중에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말합니다.6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집 안에 있던 사람의 대답을 가정하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헬라어 용법에 예수님의 의문형 가정문장은 부정대답을 이끄는 의문용법입니다. 그럼 마땅히 집 안에 있던 사람의 물음에 대한 청중, 즉 제자들의 대답은 부정문인 “그럴 수 없습니다”로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 근동 지방의 풍습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ex) 케네스 베일리의 책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에서 말함과 같이, 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 관습입니다. 만약 그 집에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이나 물이 없다면 이것은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이며, 그 집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손님에게 실례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렇기에 밤중에 친구 집에서 손님을 위한 음식을 빌리는 것은 우리의 문화로 봤을 때는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동지방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의 질문인 “문이 닫히고 침실에 누워 있어서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에 대한 대답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가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답변이 됩니다.8절: 예수님께서 위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여기서 문법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 등장합니다. 앞 서 위의 문화적 배경과 같이 실례를 범할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구했던 떡 세 덩이를 줘야 함과 같이, “간청함”이라는 헬라어 단어 [아나이데이아]는 “뻔뻔함, 수치스러움” 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에 문화적 배경과 관련하여 “간청함”보다는 “수치스러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그러므로 “그 수치스러움(실례를 범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가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유치하거나, 무례하거나, 당혹스러워서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 간구는 밤중에도 마땅히 떡 세 덩이를 구하였던 친구의 간구처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는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갑자기 왔다가는 손님과 같은 우리의 일회성 기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기도에도 응답하시고자 최대한의 대접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땅히 기도하며 구하십시오!! 반드시 응답하시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4. 본론(2) 9-13절본문의 두 번째 문단 9-13절은 시의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단식 대구법 형식의 시로써,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 받을 것/찾아낼 것/열릴 것]의 구조를 지닙니다.“구하라”에 사용된 “아이떼오” 동사는 ‘기도하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찾으라”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라는 말로 통용되어 ‘하나님께 기도하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두드리라” 역시 탈무드에서는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표현함에서 보듯이 이 세 표현 모두 “기도하라”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고, 그 기도는 반드시, 받고, 찾고 열리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악한 자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요즘 세상이 부모자식 간의 정도 온전치 못한 세상이지만,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정상적인 이치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생선을 달라하는 자식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재밌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유대 갈릴리 호수에서는 생선을 잡을 때,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비늘 없는 어종인 물뱀이나 장어들이 잡히곤 합니다. 그리하여 생선과 유사하면서도 대비가 되고, 전갈도 그 몸통을 동그랗게 말면, 달걀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비유에 대해 청중들은 헷갈릴 수 있는 두 대상이지만 절대로 부정된 것을 주지 않으며, 마땅히 생선과 알을 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13절: 악한 자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느냐 말씀하십니다.11절과 같이 아버지 된 어떤 자가 자녀에게 마땅히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너희 중에 악한 아버지일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텐데, [하물며, 더더욱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식 같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독서과제: 간추린 본문이 이끄는 설교과목: 본문이 잘 들리는 설교1.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신학존 스토트의 책에서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비밀은 “기교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확신에 지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씀의 우월성은 구약 선지자가 지닌 필수적이며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선지자는 여호와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항상 주신 그 말씀을 선포한다. 계시의 성령 이전에 계시의 말씀이 와서 그를 여호와의 선지자로 만들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인 구약 성경에 효과적으로 호소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그 구약 성경에서 자신과 독자가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바로 설교 사역을 위해 이루어지는 주해다. 성경의 권위, 무오성 그리고 충분성은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2.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필수 요소설교에 관해 가르칠 때, 반은 주해 그리고 반은 전달에 관한 형태를 강조한다. 우리의 설교가 본문의 내용, 구조 그리고 무드를 반영하도록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정의의 요소다.-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 설교의 초점이며, 추진력이다. 그 본문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풀어 설명 해야한다. 심각한 문제는 그 본문이 말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 것이다.- 본문의 구조: 훌륭한 설교는 본문의 구조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본문에 빅 아이디어가 있다면, 우리의 설교에는 반드시 하나의 빅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보통 삼대지 구조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데, 본문이 꼭 그렇게 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것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저자가 본문의 내용과 구조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본문의 무드: 설교는 반드시 본문의 무드를 반영해야 한다. 여기서 무드란 저자가 의도한 본문의 감정으로서 이 감정은 장르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본문을 살펴볼 때, 그 본문이 내러티브인지 권고적인지 교훈적인지 아니면 절차적인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3.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준비 과정목회자의 설교 준비 과정은 기도, 본문 읽기, 원어번역, 관찰, 배경조사, 본문해석 등을 해야한다. 설교는 핵심 아이디어와 보조 아이디어 1,2로 보통 짜여진다. 모든 설교는 설명, 예화, 적용과 관련된다. 본문을 먼저 쓰고, 서론과 결론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목요일 전에 설교 원고를 마쳐라.4.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예화 사용예화는 찾아 쓰는 것보다, 분별하여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전체의 영역에서 예화를 찾아 써야 한다. 체험, 관찰, 독서를 강조한다. 자신의 예화 사용이 성경 강해를 섬기는지 아니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지 생각해야 한다. 예화는 설교의 주제를 부각시켜야 한다.5.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샘플 설교베드로의 설교를 예를 들었는데, 토양에 올바른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베드로가 복음을 제시했는데, 1) 그들의 잘못을 지적 2) 하나님의 계획 나눔 3) 부활을 선포 4)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집중하였다. 하나님의 요구를 생각해보라. 말씀의 즉각적 반응 초청은 중요한다. 또한 하나님의 장기적인 계획 안으로 청중들을 이끌어야 한다. 쉽게 설득될 수 있도록 청중과 함께한다.6.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결과훌륭한 설교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 중에 배우고 삶에 적용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도 반응의 일부로 타당하다. 마음 속에 불붙는 심령을 주신다. 설교를 통해 사람ㄷ르이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여야 한다.※ 비평적 분석- 저자의 중심생각설교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자로서 전달하는 일종의 창작-예술적 행위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대부분 본인의 설교가 본문이 이끄는 설교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책을 통해 본문이 이끄는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요소와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실제를 소개하고 있다.우리가 계시의 말씀으로 받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시에 무오하고 축자영감된 말씀이라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반드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출발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정체성이자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더욱 더 본인의 설교에 대해 신중하고 신중을 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설교에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함을 말하면서, 철저한 준비와 설교의 전달에 대한 내용에 좀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강점이 책의 강점은, 설교를 구성하는 요소를 간결하게나마 소개하지만 확실한 강조점을 말하고 있다. 먼저 설교자와 설교를 마주할 때,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의 정체에 대해서 보다 명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소개한다. 이것은 설교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 확립에 있어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뒤에, 설교의 필수 요소에 있어 내용과 구조, 무드를 설명하고, 준비과정에 대해서 나열한다. 상당히 실제적인 것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 설교문을 가지고 예를 들면서 설교에 녹아져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려주는 강점을 지녔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표본을 보는 듯하기도 했는데, 하나님의 거시적 계획 안으로 청중을 불러오는 것이 설교 안에 있는지 재고하게 되는 계기다 되었다.- 약점설교의 필수 요소 중, 무드(spirit)에 대한 부분은 다소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본문에 저자가 의도한 무드에 대한 점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설교자가 청중과 호흡하는 설교 시간에 본문 저자가 의도한 무드보다 청중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설교를 받아들이는 미묘한 경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무드를 설교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현장에서 운행하시는 성령의 감동은 사실 설교자를 먼저 감화하게 한다. 그리하여 청중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하여 흘러갈 때 느껴지는 그 무드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무드는 설교 현장을 배제하고서는 이론적으로 정립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