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과 그 의의201503120 정진목서론: 68혁명이란?1………………....낭테르의 학생들2………………………………………….……노동계의 참여3………………………………………………..진정 국면으로4…………..............68혁명: 사상의 각축장결론: 68년 5월, 엇갈리는 평가서론: 68혁명이란?68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시작된 저항시위가 노동계와, 좌파 지식인 등의 동참으로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며 약 한달 넘게 지속된 사건을 말한다. 학생들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을 점거하고 당시의 정치 체제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했으며 «금지를 금지하라» 라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 모든 형태의 억압을 거부했다. 노동계의 참여로 파리 노동자의 약 3분의 2가 파업에 돌입해 프랑스가 마비되었으며, 수많은 지식인이 동참해 학문적 열기를 더했다. 68혁명의 주도 세력은 프랑스 공산당 등 기존의 좌파세력을 철저히 외면하는 등 새로운 정치 지형을 낳았다. 68혁명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나라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일대 사건이었으며, 그 불길이 잦아든 후에도 유럽인들의 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1. 낭테르의 학생들68혁명은 파리 근교의 낭테르 대학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불타올랐던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는 프랑스에도 번져, 관련 시위에 연루된 학생들이 체포되자 낭테르 대학의 학생운동가들은 학교 행정실을 점거하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낭테르 대학은 휴교하게 되고, 이 사건의 주동자 중 하나인 다니엘 콩 방디(Daniel Cohn-Bendit, 1945~)는 68혁명의 주요 학생지도자가 된다. 학생들은 파리 소르본 대학으로 장소를 옮겨 집회를 계속하는데, 5월 3일, 일련의 소동 끝에 경찰에 의해 농성하던 학생들이 연행되자, 이를 본 다른 학생들이 반발하며 격한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에 교원노조인 SNE-Sup도 학생들을 지지하며 파업을 호소하면서 68혁명은 보다 조직적인 단체가 참여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5월 6일에는 전날 수감된 콩-방디 등의 사면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파리의 모든 대학이 폐쇄되었다. 7일에는 3만여명의 학생들이 개선문을 행진하며 무명 용사의 묘 앞에서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했다. 10일에는 오후에 약 1만 2천명이 시위에 참여한데 이어, 밤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라탱 지구를 점거하고 바리케이트를 쌓는 등 격렬한 소요사태로 약 400명이 연행되고 200명이 넘는 경찰 측 부상자가 나왔다.2. 노동계의 참여5월 11일, 노조가 학생 지지 성명을 내고 13일에 파업을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13일에는 노조 측에선 100만, 경찰 추산으로는 약 20만 명 가량의 노동자가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당페르까지의 가두행진에 가담했다. CGT(노동총동맹)은 노동자와 학생들간의 지나친 연계를 걱정했으나, 역시 행진에 참석했다. 다음날, 쉬드-아비아시옹 공장의 노동자들은 공장장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공장을 점거하고 공장장의 신변을 구속하였다. CGT의 조르주 세기 등은 이 같은 행위를 비난하였으나, 공장 점거의 열기는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공공 부문을 포함해 파업자가 7백만명에서 1천만명으로 늘어나는 등, 프랑스 전역이 마비되는 대파업 사태가 일어난다. 사태가 확산되자 노동조합들은 파업 중앙 위원회를 낭트 시청에 세웠고, 식료품과 연료의 배급을 담당한다. 노동조합들은 임금 인상, 60세 퇴직 등의 보다 온건한 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학생 시위의 격렬한 구호들과는 대조적이다.3. 진정 국면으로5월 13일 재개방된 소르본 대학을 차지한 후, 이틀 후 약 2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파리의 오데옹 극장을 점거하였다. 일부 극단적 정치세력조차 반대 의사를 표한 무모한 계획이었다. 18일 파업과 극장 점거 소식을 듣고 샤를 드골 대통령이 일정보다 빨리 루마니아에서 귀국하였고, 22일에는 진행된 프랑스 하원에서 진행된 정부 불신임 결의가 11표 차로 부결되었다. 드골 대통령은 혼란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민투표를 제안하였으나 시위 세력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유력 좌파 정치인이었던 피에르 망데스는 ‘국민투표, 그것은 토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는 말로 반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미 계속된 혼란과 파업으로 인한 불편으로 민심은 시위 세력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5월 29일 드골 대통령은 예고 없이 프랑스를 떠나 잠시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떠나 측근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대통령의 실종은 프랑스인들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이는 불안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이 사건을 드골 정부의 여론전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30일에 프랑스로 돌아온 드골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시위 세력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선포하고, 하원의 해산을 명령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드골을 지지하는 대규모 거리행진이 열렸다. 68혁명의 열기는 점점 잦아들어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6월 10일에는 총파업이 종결되고, 쉬드-아비아시옹을 점거했던 노동자들 역시 13일에 경영진의 협상 조건을 받아들여 노동 재개에 찬성한다. 이로써 68년 5월의 격렬했던 상황은 일단락된다.4. 68혁명: 사상의 각축장68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은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쩌둥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다양하였으며, 많은 학생들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론과 흡사한 ‘상황주의자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은 예술과 문학의 힘을 빌려 노동의 인간소외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시장경제체제를 부인했고 직접민주주의와 노동자 자주관리 등의 체제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상이한 계열의 좌파 정치 집단들은 비록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68혁명이라는 상황적 특수성에 서로 공존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68혁명은 기존의 구좌파에 맞선 신좌파에 의한 운동이며, 이는 경제 문제에 집착한 구좌파와는 달리, 생태주의, 여성주의, 성소수자 운동 등을 포함한 소수자와의 연대에도 관심을 가졌음을 의미한다.68혁명과 관련된 주요 사상가로는 5월 20일 당시 소르본 대학에서 강연까지 한 장 폴 사르트르, 제2의 성의 저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성적 억압에 대한 이론가인 빌헬름 라이히,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소비에 적합한 인간이 감소한다”고 주장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68혁명은 미국에도 영향을 끼쳐 주디스 버틀러 등의 페미니즘 사상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사상적인 측면 외에, 68혁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최저임금 35%향상, 임금 10%인상, 주 40시간 노동과 4주 유급 휴가 등은 ‘그르넬 협정’으로부터 이끌어낸 실질적인 성과이다.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68혁명의 영향은 상당했는데, 극단주의적 신좌파는 주로 반체제 운동에 머문 반면 녹색당은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서 좌파 연립정부 구성에 참여하였다.결론: 68년 5월, 엇갈리는 평가68혁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68혁명을 프랑스 사회의 결속력을 약화시킨 ‘석공의 정’과 같은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소수 집단이 국가를 볼모로 일으킨 반민주적인 소란이라는 극단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68혁명으로 인해 형성된 사회 분위기로 인해 노동 욕구가 감소했고, 대학 평준화로 교육의 질이 감소했으며, 각종 도덕적 타락을 야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68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혹자는 68혁명이 프랑스 전후의 딱딱한 체제를 해체했으며, 사회 각층에 있어서의 사상적 해방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68혁명의 물결은 프랑스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 68혁명에 자극 받아 독일에서 일어난 시위의 일환으로 전후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이 일어나 향후 독일의 역사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68혁명은 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에도 상당한 자극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반전운동은 전후의 미국 중심의 체제에 대한 의문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경제 호황기에 일어난 반물질주의, 반 자본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상업주의적 문화 속에서 확산되던 무분별한 물질 만능주의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