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박근혜 퇴진 시위 참여 경험에 관한 인터뷰1. 보고서의 목적, 인터뷰 대상과 그 선정이유본 보고서는 시민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한 경험과 간접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시민으로서의 개인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지 비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이 보고서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시민사회운동은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이뤄졌던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이하 ‘촛불시위’)다. 나는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다만 간접적인 경험만 있다. 그래서 이 운동에 관한 직접 참여 경험을 듣기 위해서 나는 나와 동갑이면서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A를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다.인터뷰 대상으로 A를 고른 이유로는 몇 가지를 들 수가 있다. 먼저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주변에 시민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있더라도 시민운동이 자기 내면에 미친 영향에 관해 터놓고 얘기하기에 인터뷰하는 나와 친밀도가 너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내면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친밀감이 필요한데, 친구가 아닌 내 주변 사람은 이게 너무 부족했다. 반면 A는 나와 10년 이상 친하게 지냈으므로 더 스스럼없이 인터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두 번째 이유는, A가 나와 정확히 동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A가 가진 생각을 내 생각과 비교함으로써 정치적인 시민사회운동 참여 경험이 개인의 삶에 끼친 영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집단경험으로 인해 다른 가치관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만약 나와 다른 세대의 사람을 인터뷰한다면, 그 사람이 가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촛불시위에 참여한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말하기가 비교적 어렵다고 판단했다. ‘시민운동 직접 참여 경험’을 일종의 변수처럼 보고 ‘가치관’을 그에 따른 결과처럼 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A는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저녁에 광화문에서 열렸던 가까웠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③ 촛불시위를 해석하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한상익, 2019). 하나는 촛불시위를 일종의 ‘혁명’으로 보려는 시각이다. 이 해석은 촛불시위가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이뤄졌다는 시각에서 나온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촛불시위가 ‘정치적 항의’라고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촛불시위가 체제 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과연 직접 참여한 사람은 어떻게 촛불시위를 바라볼지 물어보려 한다.④ 수업에서 다룬 적 있는 김윤철(2018)의 글에서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직접 참여자는 어떻게 답변하는지 인터뷰하려 한다. 즉, “민주화 이후 30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을 당할 정도로 위법을 저지르는 대통령(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헬조선’으로 불릴 정도로 사회경제적 삶의 고통이 극심했던 현실에 놓여 있었음에도 별다른 정치사회적 항의가 표출되지 않다가 대통령(세력)의 부당함이 드러나자 그것을 쟁점으로 삼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주도의 대규모 집합행동이 일어난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대통령을 퇴출한 후 집회를 완전 해산하고 별다른 후속 실천 없이 개별 유권자로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후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다.⑤ 촛불시위에 참여한 이후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에 변화가 생겼는지 질문하려 한다. 특히 정치와 관련된 분야에 있어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 알아보겠다.3. 인터뷰 내용Q1. 먼저 당시의 촛불시위 경험을 말해주면 좋겠다.A: 수능 직전부터 본격적으로 박근혜 퇴진 요구에 불이 지펴졌고, 촛불시위가 본격화되었다고 기억한다. 매주 뉴스에 광화문 광장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만든 촛불의 물결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입시가 끝나면 가볼 생각이었다. 11월 26일은 마지막 대입 논술시험이 끝난 날이었는데, 친구와 저녁에 광화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논술시험을 본 대학에서 출발하여 광화문에 있었던 나도 앉았어야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중간에 소등행사를 한 것이다. 무대 조명이랑 사람들의 촛불 모두 껐다. 그리고 마지막에 행진할 때 도로변에 의경버스들이 있었는데 겉에 꽃무늬 스티커들이 잔뜩 붙어있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시위자와 경찰 사이에 별다른 충돌 없이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는 건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는데 꽃 스티커는 좀 신기했다. 원래 시위라고 하면 전경들이랑 시위자들이 마구 난투를 벌이는 걸 먼저 상상하게 되지 않던가?Q3. 촛불시위 이전에 참여했던 시민사회운동이 있었는가? 그게 아니라면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이 있었는가?A: 한 번도 없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해서 참여한 것 정도 말고는 기억나지를 않는다. 딱히 그런 쪽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고, 사실 지금도 크게 관심 없다.Q4. 촛불시위에 참여하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문화적인가 정치적인가? 풀어서 말하자면, 참여하면 재밌을 것 같다던가 남들이 참여하니까 함께 참여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는가? 아니면 정치가 너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나섰는가?A: 둘 중 어느 하나만 있지 않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전자인 것 같다. 사실 난 도덕적 의무감보다는 뉴스에서 봤던 걸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비록 좀 힘들긴 했지만 정말 대단한 광경을 봤던 것 같다. 굉장히 신기했다.Q5. 자기가 생각했을 때 2016년의 촛불시위는 혁명이었나 아니면 정치적 항의였나?A: 혁명이라고 하면 프랑스 혁명이나 4·19 혁명처럼 정말 지도자랑 정치 체제가 통째로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사회 모습이 엄청나게 바뀌었든가. 그런데 과연 촛불시위가 그런 사례에 속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Q5-1. 좀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 당장 박근혜의 파면은 국회에서 통과되고 헌법재판소에서 결정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제도적인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서 된 것이지 시민들이 직접 법을 만들거나 한 것대방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비교적 덜 알려진 후보였던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당장 나는 당시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대선에서 처음 들어보았다. 지금이야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지만. (Q6-1. 지금도 박근혜 같은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 박근혜가 탄핵당할 정도로 위법한 대통령이 될지는 본격적으로 게이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거의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왜 박근혜 같이 위법한 사람이 대통령까지 되었나’) 질문을 던지는 건 너무 결과론적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같은 후보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Q7. ‘헬조선’이라는 소리가 만날 나올 정도로 살기 힘들 때는 별다른 시위 같은 게 없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폭발적인 집단행동이 발생했다. 이것은 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나?A: 사실 살기 힘든 건 대통령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고, 대통령의 실정 때문이라도 대통령을 뽑은 건 국민이니까 대통령을 잘못 뽑은 국민의 탓도 있는 것이다. 정치를 못 하는 것 가지고 대통령을 탄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는 명백하게 법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내용이 너무 어이없지 않나. 대통령이 그냥 일반인에게 나랏일에 관해 이것저것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고 생각한다.Q8. 대통령을 퇴출한 후 집회를 완전 해산하고 별다른 후속 실천 없이 개별 유권자로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후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A: 그거야 당연히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해산하고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Q8-1. 그럼 박근혜 파면이 촛불시위의 목적이었던 것인가? 혹시 그 외에 시위대에서 외친 구호나 요구사항 같은 건 없었나?) 시위에서는 박근혜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무대에서 발언하시는 분이 ‘사회 부조리를 뿌리째 뽑읍시다’와 같은 말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는다.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구호도 가끔 외쳤던 것 에 일심단결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서, 잘못된 사안에 대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지난번에 광화문이랑 서초동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여론이 두 갈래로 갈렸다면 시민들의 전체적인 참여도 훨씬 덜해지고, 박근혜는 자기 임기를 다 채웠을 것 같다. (Q10-2. 일부 사람들은 박근혜 사태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이며,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박근혜 사태는 청와대 내부에서 일어난 비리인데, 이게 직접민주주의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견제를 강화한다는 등의 주장은 말이 되지만 정치적 결정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하는 것은 한계가 많다고 생각한다.Q11. 마지막으로, 2016년 촛불시위가 우리나라 사회에 갖는 의의는 뭐라고 생각하나?A: 아무리 선거로 뽑혔어도 그것이 곧 뭐든지 다 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님을 확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하는 일을 감시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Q11-1.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촛불시위가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 이런 커다란 사건이 있으면 좀 더 많은 시민이 나처럼 정치에 관심을 늘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촛불시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예전보다 정치 뉴스를 더 관심 있게 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치를 더 알수록 그만큼 우리 정치의 민주주의도 진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4. A에게 촛불시위 경험이 미친 영향에 관한 개인적인 해석 및 평가어떤 측면에서 봤을 때, 촛불시위가 A의 삶에 미친 영향은 굉장히 사소해 보인다. A는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한 후에도 특별히 시민운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정치적 가치관에도 큰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다. 촛불시위 이후에 참여한 시민사회운동도 따로 없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A의 시민운동 참여 경험이 그의 삶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에 같다.
시민사회운동에 관한 나의 견해 및 내가 바라는 시민사회운동-세 번째 개인보고서-Ⅰ. 수업 이후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내 생각의 변화사실 이 수업을 듣기 전에는 시민사회운동에 관해 피켓과 현수막 외에 뭐라 할 만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지는 않았었다. 기껏해야 뉴스 등에서 어떠어떠한 단체가 규탄에 나섰다느니, 어디 단체 대표와 인터뷰를 했다는 식의 내용으로만 접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약간의 회의감 내지는 불신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몇 가지만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ⅰ. 도덕심 부족: 시민단체는 불투명하게 운영되어 공금이 일부 활동가에 의해 사적으로 유용되고, 활동가 개인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도덕이니 명분이니 하는 것은 도구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특히 윤미향 사건 이후 불신이 더 커진 것 같다.ⅱ. 전문성 부족: 환경·기후·정치·경제 등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의견을 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커졌는데, 시민단체들이 주장했던 탄소중립과 탈핵이 동시에 달성할 수 있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ⅲ. 비판 기능 부족: 사실 나는 시민사회단체가 정파성을 띠는 것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론도 다 자기들만의 성향이 있잖은가?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강해서 자신들의 성향에 일치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권력 감시 및 견제라는 시민사회단체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수업을 듣기 전에 나는 대략 위와 같이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런 생각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졌다. 내가 잘 몰라서 오해했던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내 또래 중에서 정치에 관심이 많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에서 나오는 내용이 낯설었다. 그래서 수업 내용 중 흥미로운 것도 많았고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았다. 특히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점차 변화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지위와 역할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수업 외에도 발표 준비도 시민사회단체에 관해 알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사실 우리가 시민사회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계기는 없다. 그래서 시민사회단체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언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뉴스와 신문에는 문제가 있는 사례만이 나온다는 것을 나는 간과했던 것이 아닐까? 시민사회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들어가면 단체들이 위에 나오는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로 조사했던 서울환경운동연합은 거의 후원금에만 의존해 단체를 운영하고 예산 사용 내역도 투명하게 공개함을 조사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고,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구성한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발표를 들으면서, 시민사회단체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의 감시 및 비판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시민사회단체를 무조건 불신하기보다는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에 이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시민사회운동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하나 더 덧붙이자면 학교나 대학 등에서 한국정치를 가르칠 때 시민사회와 정부의 상호작용이 너무 간과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정치사’를 공부할 때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그 비중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나마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1998년의 정권교체 정도이다. 하지만 정치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어떤 요구가 발생했고,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지까지 통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서술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함께 정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임에도 정치외교학과 커리큘럼을 보면 이를 너무 적게 다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사회학과나 행정학과에 개설된 강의 중 일부를 정치외교학과 전공으로도 인정될 수 있게 하는 편이 미래의 공공인재를 키우는 데에 더 좋다고 생각한다.Ⅱ. 내가 바라는 “사회변화”와 그에 있어서 시민사회운동이 갖는 의미·역할나는 우리 사회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에 관해 추상적이고 거대담론적인 어떠한 이상을 상정하지는 않으며 단지 우리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크고 일반적인 원칙-민주주의, 자유주의, 입헌주의 등-정도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변화는 분야에 따라, 그리고 주어진 사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띤다고 생각한다. 정치외교학과 수업이니만큼 여기에서는 정치적인 측면만 말하도록 하겠다.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는 민주주의를 최대한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일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고 그것을 제도로 구현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뭔가 말로 하면 쉽지만, 미국 등 민주정치를 행한 지 오래된 나라에서도 민주주의 위기 담론이 종종 나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간신히 달성 가능한 목표일 것이며 당연히 한국 사회도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그런데 민주주의의 문제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책 몇 권을 쓸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한 공공선 실현에 관해서만 보려 한다.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는 대의제 아래에서 이뤄져야 하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나라 대부분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단체는 대의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데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시민사회단체는 정치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즉, 제도권 정치에 부족했던 대의 기능을 일부 분담한 셈이다. 단순 규모만 봤을 때 시민사회운동의 최전성기라고 평가되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이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에서 다뤘던 바와 마찬가지로 나는 시민사회단체가 이 시기의 지위를 다시 갖기란 어려우며, 더 나아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단체의 위 지위는 민주주의가 아직 공고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떠맡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대의민주주의는 단지 대표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의민주주의는 두 방향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표성의 결여이며, 다른 하나는 심의과정의 결여다. 심의민주주의로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대표들이 여론을 바탕으로 공공선을 도출할 수 있도록 ‘공공 이성’을 갖춰야 하며 시민들이 공공선에 대해 합의하고 이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공론장’이 갖춰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환경은 ‘공공 이성’과 ‘공론장’을 마비시키고 있다. 다양한 요인-인터넷 알고리즘이든 경제적 양극화든-에 의해 시민들의 정치 성향이 점점 양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관용 없이는 유지될 수가 없다. 그리고 관용은 상대방과 내가 모두 동의하는 믿음이나 가치가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므로 여론이 극단화될수록 관용은 어려워진다. 우리나라는 미국 등 다른 나라와 달리 아직 유권자의 정치이념 양극화가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으나 극단주의 여론의 과대대표, 가짜뉴스의 확산 증가 등 양극화가 나타날 위험은 매우 크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극단화를 정치인의 극단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데, 시민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과 책임이 있는 정치인 자신들이 결국 변화의 대상인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론장이 망가진 상태에서 정치인의 공공 이성은 작동하기 몹시 어렵다.나는 정치 양극화가 공론장을 망가뜨리고, 망가진 공론장이 다시 정치의 공공 이성을 망가뜨리는 악순환 속에서 시민사회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단체는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시민사회단체는 시민에 의해 선출되지는 않으므로 시민들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직업 정치인들과 구별된다. 또한 시민사회단체는 사회문제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전문가의 지위를 갖고 있으나 시민의 일상적 문제들에 우선하여 접근해 공공성을 잃지 않을 수 있고 시민을 동원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단체나 언론 등 다른 전문가 기관과 구별된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지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정치인들의 공공 이성이나 시민들의 공론장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는 데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Ⅲ. 내가 새롭게 기획하고 싶은 시민사회운동위에서는 정치 극단화, 공공성 등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정치적 의미를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 나한테 ‘네가 지금 하고 싶은 시민사회운동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만 내지는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운동을 기획하고 싶다.시민사회운동의 정치적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에 관련한 문제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이전보다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나도 집에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그런데 포메라니안 강아지는 유전병으로 기관허탈증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강아지는 나이도 어리면서 가만있다가도 갑자기 콜록대는데, 우리 집이 어쩌다가 떠맡아 키우게 된 강아지임에도 그럴 때마다 안쓰럽고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문제는 품종견들 상당수가 이러한 유전병의 위협을 받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골든레트리버 태반은 암으로 생을 마감하며 소형견 중 일부는 입 안에 공간이 부족해 혀를 축 내밀고 다닌다. 품종견은 품종견만의 형질을 유지하게 하려고 유전적으로 가까운 개체끼리, 즉 친척뻘 개체끼리 결합해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로 잡종견, 또는 비(非)품종견은 품종견이 겪는 여러 건강 문제들을 겪을 확률이 낮다. 따라서 만약 내가 시민사회운동을 하나 기획한다면 ‘품종견 반대’ 운동을 하고 싶다. 동물권 운동에 힘쓰는 시민사회단체-카라, 케어, 동물자유연대-의 활동 내용을 보면 이 분야에는 상대적으로 이 운동의 목적은 사람들이 강아지를 분양받거나 입양할 때 품종견을 고집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논제: 1517년 정몽주 문묘 배향의 배경을 폭정과 반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하고, 예송과 환국, 그리고 탕평 정치 시대에 문묘 배향을 둘러싼 지식 권력과 왕권의 경쟁을 설명하라.1. 서론: 문묘 배향의 정치적 의미사대부의 도통(道統)은 임금의 치통(治統), 즉 정치적 계보와 구별되는 지식의 계보이며 문묘는 도통의 계보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문묘 종사는 선비로서 최고의 영예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도통의 계승자임을 국가적으로 공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문묘 종사는 학문적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조선에서 이상적인 정치란 신하(지식인)와의 협동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임금이라도 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치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임금 처지에서 도통론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임금 자신이 아니라 사대부에게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들은 자신들의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대체로 문묘 배향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임했고, 신하와 유생들은 이에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때로 임금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그래서 문묘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를 둔 갈등이 표출되는 공간이 되었다.2. 정몽주가 문묘에 배향된 배경과 그 의미(1) 조선 초기의 정몽주정몽주는 단 하루도 조선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렇기에 태조 대에 그는 조선의 역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조선에서 문묘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조선 지식인 계보의 조종으로서 지위를 갖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역설은 정몽주 문묘 종사가 논의되었던 시대적 맥락과 연관 지어 파악해야 한다. 우선, 정치 질서가 안정되면서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쪽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 안정기에는 새 질서를 만드는 ‘창업의 정치’ 대신 만들어진 질서를 수호하는 ‘수성의 정치’를 우선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이후 수성시대의 시점에서 정몽주는 충성, 정도전은 반역자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몽주가 조선 도통의 시조로 설정되는 과정은 그리 일관적이지 않았다. 사실, 맨 처음 문묘 종사가 논의되었던 계보는 정몽주를 시조로 하는 계보가 아닌 권근-이제현-이색으로 이어지는 계보였다. 하지만 이 계보는 문묘에 오르는 데에 실패했다. 권근은 불교에 아주 호의적이었으며, 이색은 아예 불교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숭유억불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이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조선 지식인의 시조가 된 데에는 그가 일종의 대안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기도 한 셈이다.(2) 사림 세력의 정치 진출과 두 차례의 사화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대가로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훈구파 대신들은 유교적 종법질서상으로 왕위계승 서열 3위에 불과했던 자산군이 13살에 왕이 될 수 있게 할 정도로-자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였다-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 이는 성종이 성년이 되고 나서도 계속되어 그가 자신의 정치를 하기 힘들게 했다. 성종은 훈구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림 중심의 대간을 성장시켰다. 대간들은 언론활동을 통해 훈구파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했으나, 동시에 왕권을 견제하기도 했다. 한편 성종의 아들 연산군의 눈에는 대간들이 그저 능상을 일삼는 무리처럼 보였다. 수륙재 사건, 사찰 소금 공급 사건 등으로 대간들과 충돌하던 그는 두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신하들을 대거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경연을 금하고, 성균관을 폐쇄하고, 신하들의 언론활동을 금하는 등 군신공치의 원칙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는 왜곡된 왕토사상에 빠져 궁궐 주변의 민가를 허물고, 온갖 사치를 일삼는 등 유교적 정치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는 신하들이 주도하는 반정으로 몰락하고 만다. 연산군의 뒤는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이 이었다.(3) 신진 사림파의 정치사상과 정몽주새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반정 세력을 주도한 공신들이 중심이 된 강력한 훈구파 세력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이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를 하기 위해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선택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도덕 근본주의라는 용어로 나타낼 수 있다. 조광조는 자기 앞에 놓인 정치 현실을 그러한 원칙이 무너진 도덕 실종의 상태라고 보았다. 이는 조선 초기에 수양의 찬탈, 연산군의 폭정 등 유교적 윤리와 종법질서가 무너지는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도(道)를 통해 유교적 원칙에 입각한 도덕적인 정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신하로서 도리라고 생각했고 이에 맞춰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공훈 삭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왕권에 부딪혔다. 중종이 조광조를 사사한 것이다. 비록 조광조는 죽었지만, 그는 정몽주를 조선 지식인 계보의 시조로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정몽주는 중종 12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신진 사림파가 이뤄낸 성취였다.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지식인 집단이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했다는 의의가 있다. 정몽주는 사림파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충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합의에서 도출되었다. 즉 정치 권력에 초점을 맞춘 계보가 아닌, 윤리적 의미로서의 절개를 지킨 충신 정몽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 도통의 새로운 이정표를 창출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정몽주에서 출발하는 계보가 갖는 정치적 역할은 이후 사화에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동방오현’의 문묘종사를 통해 더 확고히 굳어지게 되었다.3. 지식 권력과 왕권의 경쟁 양상(1) 조선 지식인의 분열조선 후기 왕권과 지식권력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조 대부터 발생한 사림의 분열을 알아야 한다. 지식인 계층의 분열로 인해 역설적으로 지식인의 지형이 협소해지고 지식인의 본래 역할, 즉 정치 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이 약화했기 때문이다. 원래 사림은 훈구파와 대조되는 내부적 동질감, 통일성을 갖고 있었지만, 선조 시기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동서분당이 시작되었다. 이조 전랑은 막강한 인사권을 갖고 있어서 권력 재생산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후 사림은 이조 전랑의 자리를 두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구성되었던 동인, 그리고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구성된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동인은 선조 대 조정의 주류가 되었다. 20년 정도 집권하던 동인은 서인과의 정쟁 과정에서 유배 간 정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 갈등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강경파는 조식의 문인으로 구성된 북인으로, 온건파는 이황의 문인으로 구성된 남인으로 갈라졌다. 북인으로 구성된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인조는 서인과 남인을 주로 등용했다. 하지만 서인과 남인은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두고 갈등을 벌었는데, 이는 아들 효종과 손자 현종 때까지 이어졌다.(2) 예송논쟁예송논쟁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현종 때 두 차례 벌인 정치적 논쟁이다. 첫 번째는 기해예송, 두 번째는 갑인예송이라고 한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었을 때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할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윤휴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은 효종이 왕위계승자라서 사실상 적장자이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당나라 대의 사례를 끌어들여 효종은 서자이며,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송시열의 발언은 아주 위험했다. 이는 곧 효종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주장은 ‘무이통 불이참’, 즉 상례에 임금과 사대부의 차이가 없음을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현종은 기년복을 입기로 하여 승부는 서인이 이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송논쟁은 갑인년에 한 차례 더 발생했다. 현종은 선왕을 이렇게 박대하는 서인의 결정에 반발했고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일의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결국 일의 마무리는 14살의 숙종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