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ructing Architecture and ReportSummary and A Report on Brutalism1-1. SummaryInterior structures, loadbearing structures, and infrastructures are factors relevant to the design which, depending on the utilization structure, influence each other to differing degrees, or activate various relationships.It is well known that the Romans already possessed highly developed supply structures such as underfloor heating and water pipes, these accomplishments remained virtually meaningless to everyday building work until the Industrial Revolution. From that time onwards they started to influence design more and more, owing to the mass production that became possible and also because of the drive to improve the poor hygienic conditions of 19th-century towns and cities. From then on, client and architect were therefore confronted with defining the degree or scope of services and the associated usage. If the level of comfort demanded is low, an old building such as those built before the 20th ce building materials, i.e. the glass. This situation continued until the oil crisis of the 1970s and growing environmental awareness in the 1980s led to investigations into how the use of technical systems could be reduced through materials technology. Although insulating glass coated with heat-absorbing film and noble gas in the cavity had been known since the 1950s, it has undergone a phenomenal development since then and glass is now no longer seen as a synonym for high energy losses.The growing use of central heating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meant that the necessary infrastructure, for heat distribution or heat output, was being added to or integrated into building components more and more. The way in which architects handled this new challenge varied from the pragmatic approach of routing the services in full view, to the opposite approach in which all pipes and radiators were concealed behind some form of screen or cladding. Yet another approach was employed by those 도시환경과 인간 상호간의 심리적, 사회적, 기능적, 상징적 관계를 포함시키는 인본주의적 측면에 그 기초를 둔다. 뿐만 아니라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게 나타난 생산 유통기능과 인구의 집중, 급속한 산업기술의 발전 등의 복합적인 상황은 풍부한 표현력과 개성을 가진 건축을 만들려고 하는 건축가들의 새로운 의지를 창출시켰다. 이러한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여러 유명 건축가들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전통적인 건축 속에 담겨있는 불변의 표현적 요소를 현실적으로 적용시키면서 형태와 공간에 대한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에 인간 형태를 위한 건축, 기능적인 건축물들이 대두하게 됐고, 이러한 것들은 형태주의(Formalism)과 브루탈리즘(Brutalism)으로 각각 발전하였다.전쟁의 종전 이후 파괴된 도시의 재건과 복구는 전 세계적 과제였으며, 브루탈리즘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건축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다. 브루탈리즘의 형성과 성장에는 전쟁으로 인한 유럽 국가들의 만성적인 주거 공간 부족 문제와 정부 주도로 추진된 여러 신도시 계획들이 주요한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제성과 내구성, 시공의 용이함과 신속함, 과감한 조형을 가능하게 하는 가소성 등 복합적인 이유로 선택됐던 콘크리트라는 재료는 그 마감처리를 통해 이후 브루탈리즘 미학의 중요한 표현 요소가 된다. 여기에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의 유토피아적 이념과 건축에 대한 윤리관이 더해지면서 단순한 미학적 표현을 넘어서까지 해석됐다. 이러한 양상은 관광서와 공공영역의 건축물에도 활발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경량의 투명함, 기계로 가공 된 매끄러움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 양식에 대한 미학적 반발이 동인으로 작용하여 건축의 사조와 담론에 대한 변증법적 진화의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ⅱ. 브루탈리즘 건축브루탈리즘의 건축은 50년과 60년대 경제 부흥과 함께 도시 중심적 산업환경과 대중 생산 사회를 직시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반영하여 직접적으로 이미지화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세기 초, 정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예를 들면, 관청건물, 학교, 기차역사 등-를 계획할 때 많은 경 우, 외국 건축가들에게 의뢰하였고, 그들은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일본에 남아 서구 건축을 일본에 소개했다. 당시 일본 건축가들은 아직 전통에 대한 개념이나 논쟁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였으며, 일본건축계의 최대 목표는 선진화된 서양의 양식(洋式)건축기술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벽돌과 돌을 사용 하는 영국이나 고딕 혹은 르네상스 양식이었다.19세기 말엽에 훈련된 근대 일본건축의 1세대들이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새롭게 건축을 배워오면서 서서히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구 문명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술을 적극적으로 습득해 나아갔다. 선진건축을 배워 온 이들은 일본 건축계의 주도적인 위치를 맡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일본 건축계에 서구건축의 동향이 신속하게 알려졌다. 하지만 무분별한 서양 건축의 유입과 무비판으로 인해 서양풍건축이 유행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이와 동시에 최초로 일본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도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메이지 초기의 화양(和洋)절충양식과는 달리 의식적으로 순수한 일본 건축 양식을 채용하거나 목조 건축으로부터 출발한 공공건축에서 신(新) 양식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일본풍의 절충주의 건축양식이 되었다.CIAM 8차 회의 (1951)에 마에가와와 단게가 참여하였고, 10차 회의 (1956)에는 요시자가와 가와이가 참여하였다. 또한 1958년 오델로 회의에 단게가 초청되어 제 3세계와 교류점을 마련하였다. 당시 CIAM을 통한 근대건축운동은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이 추구했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으로서의 국제주의양식은 이념화 되었다. 하지만 CIAM의 기존 건축가들이 보였던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인 모습은 오히려 Team X과 같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으며, 그 결과 신구세력의 대립적인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메타볼s carrying a slab, which spans 28 meters and 12 meters of cantilever, and this slab again is supporting a loadbearing walls upstairs, which is dividing the internal layout into system of ‘four bands’. (About ‘four bands’ we’ll see it later.)The system called ‘sheer walls’ was used in the interior layout.These highly strengthened concrete walls and the slabs are interconnected together, so it works as a loadbearing system. In most case, this kind of system is used in special cases like skyscraper’s cantilever. But the system was used in the whole inter layout. The part of slabs, walls are connected together to form a wall plate. And we can see these as a big I-section beam like the picture so they can spread the weight to the right and left walls. If wall plates meet in just any one point, through the floor, like this then they can sufficiently act as strong loadbearing walls. so the plate These wall plates serve as support or a suspension point for another plate. In this way, it buildss.
- 高麗의 漕運制度-1. 고려시대의 조운제도고려 건국세력은 장기간의 후삼국 통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내륙 수로와 서남해의 연근해 해 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또한 당시에 습득한 해양 지리나 항해기술은 향후 開京중심의 水陸교통망 편성에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해상 운송 기반을 활용하여 지방에서 수취한 租脫를 都邑으로 운반하는 조세운송체계를 마련하여 中央財政源으로 충당하는 재정구조를 운영하였다. 이렇게 고려 초기에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여 운영 되었던 灌運制度는 한국중세의 시대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시작시기에 관해선 이설(異說)이 많지만, 흔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조운제도는 고려 때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앞선 신라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조세 운송 방식으로 조운제가 확립되어 운영됐다. 漕運制는 “國事之中最重者也” 라고 표현될 정도로 봉건왕조에서 중요한 관제였고, 그런 만큼 고려시대의 경제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894년에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질 때 까지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관영물류(官營物類) 시스템이었다.이러한 조운제도는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997)에서부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대에 완성됐는데, 주요 운송수단은 수레가 아니라 선박이었다. 주로 서해를 이용하여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근처인 예성강으로, 그리고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부근의 한강으로 집결하여 왕경(王京)으로 운반되었다. 비단 조세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왕래, 사신, 경제 교류 역시 대부분 선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후 삼별초의 봉기, 몽골의 일본 원정, 왜구의 침입 등을 거치며 점차 무너져갔다. 조운제도의 붕괴는 곧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져 공민왕과 우왕 대에 이르러는 국고가 바닥나기도 하였다.1-1. 고려시대의 조운제도 운영 방식(1) 조세행정외관의 파견고려왕조는 건국 직후에 조세징수체계를 수립하여 국가재정구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태조대는 조운활동을 위한 시설은 물론 노동력과 선박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지점에서 60포제는 漕倉制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적 형태의 漕運體制라고 할 수 있다.(3) 조창제20여 년 이상 지속된 遼와의 전쟁이 마무리된 현종 대는 집권체제의 안정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 정비를 본격화하였다. 이 때 전형적인 조운형태인 漕倉制가 성립되었다. 界首官制를 근간으로 하는 主-屬縣體制의 군현체제는 각 군현의 조세 수납 및 운송단위였던 조창의 收稅區域을 설정하는 기준이 되어 조창제 운영의 기본 원리로 작용하였다. 앞선 60浦制 때 지나치게 많았던 포구에 분산되어 있던 수집과 운반의 기능을 인근에 위치한 주요 포구로 통폐합시키고 창고시설을 갖추게 해 12곳의 조창을 마련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어 수세구역이 설정됨에 따라 조운의 집약성이 강화됐다. 또한 이전에는 轉運使가 지방을 순회하는 방식이었다면, 漕倉制 운영 이후로는 判官을 漕倉에 배치시켜 조운 업무만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는 수경가가 포구마다 달리 책정되었다면, 漕倉制에서는 모든 조창에서 동일한 액수의 耗米를 징수하였다. 이러한 漕倉制는 전후의 60浦制나 군현별 조운체제 때에 비해 조운 운영기반의 확보나 통제력은 월등하였다. 조운선과 漕役집단이 결합된 조창의 확보와 관리는 전형적인 조운형태인 漕倉制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4) 군현별 조운체제13세기 중후반부터 漕倉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조창제의 운영이 어려워졌다. 또한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내부의 경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漕倉民의 이탈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외부의 경우, 元朝의 일본원정(1274, 1275년)으로 인해 인적, 물적 수탈을 겪었다. 특히 몇몇 지역에선 조창과 조운 기능이 큰 피해를 입었다. 기능의 약화와 소멸의 정도에 따라 인근 郡縣으로 통폐합되거나 자체적으로 남기도 하였다. 이처럼 漕役 집단을 확보하기 어려운 고을에서는 私船집단에 조운활동을 일임하고 그 대가를 雇立의 형태로 취하였을 것이다.한편 이 과정에서 私船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자 고려 말엽에는 조운비용의 高率化가 또다시 사회조운거점(漕倉과 收租處)과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수납체계의 정비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마침내 성종(成宗, 재위기간 1469년 ~ 1495년) 대에 이르러 漕倉과 官船을 토대로 하는 ‘고려식 조운제도’로 완성을 보았다.2. 긍정하거나 동의하는 요소.2-1. 육로 운송이 아닌 해로 운송의 이점.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의 주요 운송수단은 수레가 아니라 선박이었다. 지방에서 거둔 조세와 특산물들은 漕運을 통하여 수도까지 운송되었다. 이러한 조운제도는 기본적으로 육로 운송이 아닌 해로운송이다. 이러한 운송 체계에는 육로 운송이 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로 운송은 대개 牛馬를 이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농민과 牛馬가 생겨났다. 정부에서 조운을 금지시키고 육로를 통해 조운하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나 내렸던 것은 육로 운송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12조창제도가 시행된 이후에도 일부 포구는 조창의 역할을 그대로 맡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 한강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고을들의 조세는 육로보다 수로를 통해 운송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뿐 아니라 이 지역에 조창이 설립되지 않은 것은 특정 지역에 모아서 운송하는 것보다 한강 변의 몇몇 거점 포구에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조운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운송거리가 먼 전라도의 조세는 조운 외에 별다른 운송 방법이 없었다. 이후 왜구의 규모가 점점 커짐에 따라 우왕 대에 조운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던 것이다. 왜구의 침탈을 피하기 위해서는 육로 운송이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수백 년을 이어온 조운을 갑자기 육로 운송으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2-2. 조운제도가 갖는 의미.고려시대는 조세 운송 방식으로 漕運制度가 확립되어 운영된 시기다. 조운제도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도 표현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국가의 경제를 담당하는 큰 축이었다. 국가 재정 운영체계, 수취제제 하의 民의 부담 등 경제사의 여러 부분에 대한 폭넓은 이해뿐만 아니라 상업사, 교통사, 지역사 등 고려시대의 다세조대를 거치며 500석 이상을 적재할 수 있는 대형 조운선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궁극적으로 조선이 추구한 조운제도는 고려 성종~문종 대에 완성된 고려식 조운제도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조운제도의 정착과정은 곧 고려후기에 동요된 조운제도를 재건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조운제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조운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다가 다시 재개되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조운제도의 정비 과정과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고려 말~조선 초의 조운방식 변화에 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고려 말의 조운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의 부족과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복잡하고 다양한 조운 상황에 막혀 각 시기의 상황이 어떤 연결선 상에 있는지 또는 서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한 비교론적인 연구에는 이르지 못하였다.2-3. 조창제의 의의.60포제 중심으로 운영되던 고려의 조운제도는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한층 강화되면서 조창을 중심으로 하는 조운제도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60여개의 포제에서 사선을 동원하여 조세를 징수하던 방식은 지역의 거점 포구에 설치된 조창에서 관선을 통해 직접 운송하는m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국가가 지방의 포구와 해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려시대 조창의 분포는 主-屬縣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고려 특유의 지방 행정제도 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고려시대 지방 행정의 기본단위는 州?府?郡?縣?鎭 등으로 칭해진 이른바 ‘郡縣’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각 군현의 실제 중요도는 해당 군현명에 부여된 邑格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外官이 파견되는 主縣인지 그렇지 않은 屬縣인지가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려시대 전라도에 6곳의 조창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고려시대 조창의 운영이 주-속현 영역의 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전라도에는 모두 17곳의 주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지역 해가 있다.성종대는 향촌사회에 대한 국가 통제를 확대해나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교통시설인 驛의 파악이나 역로망 개설도 점차 확대되어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浦에 대해서도 파악하려고 했지만 중심으로 하는 대상은 서해안과 한강 유역인 ‘近地’를 중심으로 파악하여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浦의 분포를 확인하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60곳의 浦 중에서 ‘近地’에 해당하는 서해안 지역과 한강 유역에 80%의 浦가 위치하는 것이 비해서 같은 조건으로 남해안을 보면 10곳도 채 되지 않는다.포의 분배와 더불어 재정 운영체계의 성립 과정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성종 2년(983) 外官 파견, 公?田 지급, 鄕吏職制 개편 등 몇몇 조치를 통해 지방세력들의 조세수취권을 약화시킴으로써 보다 안정적으로 국가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성종대는 재정 관리의 중추기구인 戶部와 三司가 설치됐다. 삼사의 업무 등을 감안한다면 성종대에 중앙집권적인 재정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세곡의 漕運방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하지만 이와는 다른 의견도 있다. 성종의 이와 같은 재정기구 확립과 제도적 기반을 발판으로 하여 顯宗 연간에 조운제도가 성립됐다는 것이다. 생산물을 얻고 그 생산물들을 옮기려면 驛道가 필요하다. 각지의 조창으로 도달하는 경로로 이용됐던 22개의 驛道의 형성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轉運使가 현종 20년에 폐지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조세 운송방식의 종결이며,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새로운 稅貢 운송방식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운제도의 시작을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3-2. 私船의 이용.다른 의문점은, 官船만으로 충분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私船이 추가적으로 사용되진 않았는지, 다른 운송수단을 활용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선 정말 순수하게 官船만으로 운영됐다는 견해가 있고, 公船이외에 私船이 이용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 漕船의 적재량과 13漕倉에 기반하여 보면, 각 조창의 官船에 의해 운반된 1회 稅穀것이다.
4장 식량 생산의 기원역사상으로 보면 수렵 채집민은 농사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이곳 저곳을 전전함.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의문이 들은 작가는 이유를 탐구하기 시작함. 식량 생산은 이를 풀기 위한 주요 키워드가 됨. 식량생산은 간접적으로 총기, 병원균, 쇠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선행조건임. 식량생산의 주체는 농경민이나 목축민으로 각 대륙의 민족들이 농경민이나 목축민이 되었느냐 말았느냐, 또 되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였는가가 이후 각 민족의 대조적인 운명을 결정짓게됨. 지금부터 농경민이나 목축민 같은 정착민에 대해 알아보겠음. 기본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열량이 많다면 그 만큼 인구가 많아지게 되게 됨. 자연 생태계는 원래 여러 종이 함께 서식하게 되는데 그 중에 인간에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함. 그래서 인간은 일정한 넓이의 땅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동물종과 식물종들만 선택하여 키워야함. 그것들이 그 땅에서 전체 생물 자원의 90%를 차지하게 되면 단위면적당 얻을 수 있는 식품열량이 많아지게 됨. 그럼 그 땅의 인구는 증가하게 됨. 가축 소유의 인간사회는 동물을 가축화하여 고기와 젖을 만들어냄. 이는 주된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작용하여 열량을 높혀줌. 또한 동물의 분뇨를 농작물을 재배하는 비료의 주원료로 사용하여 농사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게됨. 가축화된 동물은 이 외에도 동물성 섬유를 생산하게 하고 말 등의 대형 포유류는 인간이나 물자를 운반하는데 육상 운송의 주요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정복전쟁에까지 기여함. 이는 그 지역 내에 인구가 조밀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함. 이렇게 인구가 조밀해짐에 따라 인간은 정착생활을 하며 추장사회, 왕국 등의 형태로 조직화된 농경사회를 형성함. 조직화된 사회는 정복전쟁을 치르는 데에도 이점으로 작용함. 이 중 가장 큰 예가 잉여 식량을 저장한다는 것임. 잉여 식량은 정복전쟁을 정당화시켜주는 사제를 비롯하여 전쟁에 필요한 숙련공, 필경사 등도 먹여살릴 수 있음. 위에서 이야기한 가축화된 동물과 잉여 식량 외에도 정복 전쟁에 가치 등에 의해 결정됨점진적으로 전파된 식량 생산 체계: 채집민들은 식량생산이 시작되면 그 체계 전체나 일부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거나 모두 거부하고 수렵민으로 남음.식량생산과 수렵채집은 상호경쟁의 대안방식: 거시적으로 보면 수렵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전환임, 그 이유는 야생 먹거리의 감소, 야생식물의 작물화에 따른 보상, 식량생산에 필요한 각종 기술의 발달, 인구밀도의 증가와 식량생산 발원의 상호관계(자가 촉매작용, 인구밀도가 보다 빨리 상승)현재까지 수렵 채집민으로 남아 있는 부족: 수렵 채집민은 농경민에 의해 쫓겨나던지 식량생산을 수용해야 했음, 다만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이 유난히 강력해서 농경민들이 이주하거나 각 지역에 적합한 식량 생산기술이 확산되기 어려운 지역은 20세기까지 수렵 채집민으로 존재함(캘리포니아의 아메리카 원주민, 남아공 희망봉 일대의 코이산족,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7장 야생 먹거리의 작물화식물의 작물화란 어떤 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인간 소비자에게 더 유용하도록 야생 식물을 유전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임. 초기 농경민은 이를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인간을 비롯한 동물종은 무의식중에 식물을 ‘작물화’함. 식물도 동물종과 같이 자손을 퍼뜨려야함. 이를 위해서 일부 식물의 씨앗은 바람에 날리거나 물에 뜨도록 만들어졌음. 또한 그렇지 못한 식물은 씨앗을 맛좋은 과육으로 감싸서 동물종이 자기 씨앗을 운반하도록 함. 즉, 동물종은 무의식 중에 식물을 작물화하고 있던 것임. 또한 초기 농경민은 식물의 과육을 먹고 씨를 뱉게됨. 그것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종자를 생산하게 되면서 초기 농경민은 이를 인지하게됨. 그래서 이들은 의도적으로 씨앗을 뿌리게 되는데 이것이 식물의 작물화의 구체적 시작이 됨. 식물의 작물화를 위해 선택조건에는 대표적으로 크기와 맛이 있음. 인간은 똑같은 식물이라도 더 큰 것을 선호했음. 또한 야생 식물은 인간을 유인하기 위해 맛있는 과육을 이용했지만 씨앗은 퍼트려야 되므로 쓴 맛을 내었음. 이 후 인간은 살리카에는 작물화되지 못함, 초생달 지역 바깥쪽은 안과 달리 아마와 외톨밀을 작물화하지 않음-----야생 동식물이 많아 정주형 식량생활이 수렵 채집생활에 대해 경쟁력을 가질 정도가 되어야 가능,비옥한 초생달 지대 식물군의 이점: 도시 문자 제국 문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 식량생산이 가장 앞섬, ①겨울에 온난다습하고 여름은 길고 덥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 ②야생 조상이 풍부하고 생산성이 높았음(많은 변화가 불필요함), ③자웅동주형 제꽃가루받이(자화수분) 식물이 많음서유라시아 지중해성 기후대의 남다른 이점: 유사한 지중해성 기후의 4곳에 비해 ①가장 넓은 지중해성 기후, ②계절별 연도별 기후변화가 가장 큼(식물의 풍부), ③고도 및 지형의 변동이 심함(다양성 수확의 차별화) ④가축화된 야생 포유류의 조상도 풍부(염소 양 돼지 소), ⑤수렵채집생활의 경쟁력 약화----B.C.6000년 경에는 이미 농작물과 가축에 의존고대인들의 민족생태학적 지식활용: 원주민의 민족생태학은 자연사백과사전, 1000종이 넘는 동식물의 특성 분포 쓰임새에 해박함, ex, 뉴기니의 원주민 탐사에서 버섯, 시리아 텔 아부 후레이 유적(B.C.10000~9000년)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157종 확인, B.C.9000~8000년 요르단강 유역에 존재하는 23종 가운데에 보리와 에머밀이 가장 최선,고지대 뉴기니인들의 토착적 식량 생산의 한계: 수렵 채집의 보상이 크지 않고 야생동물이 귀함, 뉴기니의 고저지대 사람들은 정주생활로 식량생산체계유지(B.C.7000년경에 기원), 사탕수수, 바나나, 참다 등등 재배----단 ①뉴기니에서는 1종도 작물화 안됨(토종뿌리작물), ②대형 포유류가 없음(단백질과 열량 부족), 뉴기니의 생물과 환경에 기인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지닌 생물상과 환경의 취약점: 호박 해바리기 등 4종이 B.C.2500~1500년에 작물화, B.C.500~200년 사이 마디풀 작은 보리 등 3종이 재배되자 농경식량생산체계로 전환, 문제는 작은 종자, 건초열, 냄새와 염증이 존재, 1~ 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발생 또, 대중성 질병은 인구가 충분히 많고 밀집되어 있어야 지속되기 쉬움.소규모 인구 집단은 질병에 취약하다외부로부터의 방문객 한 사람 때문에 작은 부족 전체 전멸할 수 있음. 그 세균에 대한 항체를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 소부족의 대다수 인구를 죽인 후에 유행병은 사라지기 때문에, 유행병을 존속시킬 수 없음. 그러나 전혀 발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전염병이 발병하기도 함. 동물의 몸이나 토양 속에 살 수 있어서 언제든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거나, 피해자가 죽기까지 매우 긴 시간이 걸려 피해자가 세균 저장소 역할을 하는 경우가 그 예임. 또,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면역성을 가질 수 없는 각종 질병에도 취약함. 회복되었다가 다시 감염될 수 있기 때문. 이처럼 소규모 집단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의 질병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가장 오래된 질병이라 할 수 있음세균들에게 행운을 안겨 준 농경과 도시의 발생농업은 수렵 채집 생활보다 높은 인구밀도 뒷받침, 비료사용으로 세균의 번식 증가. 도시의 발생은 세균들에게 더 큰 행운. 전보다 더욱 조밀한 인구가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 살게 되었기 때문. 또, 세계교역로의 발달도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하나의 거대한 세균 번식장 형성.새로운 질병들은 어디서 생겨났을까?대중성 질병은 이전에 존재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발생했을까? 세균에 대한 분자 연구에 따르면 대중적 전염병들은 대체로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동물들에 국한되어 발생. 소나 돼지 같은 사회적 동물 가축화시켰을 때 발생. 그 예로 홍역 바이러스와 우역(牛疫)바이러스가 매우 유사. 즉, 우역 바이러스가 소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긴 후 인간의 신체에 맞도록 특성 변화시켜 홍역 바이러스로 진화했음을 의미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의 질병으로 자리 잡은 침입자들그러나 이 침입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극소수만이 인간의 질병으로 자리잡음. 인간의 질병으로 진화하는 단계 네 가지로 설명 가능. 첫째, 애완동물이나 가축에는 화소의 크기에 따라 세 가지 기본적 방식으로 구분. 첫째, 기호 하나가 언어의 소리 하나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알파벳에 해당. 둘째, 기호 하나가 낱말 하나를 나타내는 것으로 어표라고 불림. 중국, 일본, 이집트 상형문자 등이 해당됨 셋째, 음절에 대하여 하나의 기호 사용.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방식만을 사용하는 문자 체계는 전무. 각 방식이 혼합되어 나타날 수 있음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독립적으로 고안된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대부분의 문자는 기존의 문자 체계를 빌리거나 고쳐 씀.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문자의 대표는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 초기의 수메르 문자는 비음성적인 어표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그러나 음성 표기법을 도입.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운 추상명사를 발음이 같은 기호를 이용해 사용. 이를 리버스 원리라고 부름. 여기서 단순히 추상 명사를 만드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이 원리를 문법적인 어미에 해당하는 음절이나 글자에 사용하기 시작. 수메르인의 문자에는 세 가지 유형의 기호들이 섞이게 되었음. 첫째,한 낱말이나 명사 전체를 뜻하는 어표. 둘째, 음절, 글자, 문법적 요소 등을 나타내는 음성 기호. 셋째, 한정부호. 이는 일부 음절들을 나타낼 수 있는 기호 없고 같은 기호가 다르게 발음될 수 있다는 한계 지님.인간의 보편적 창의성 입증하는 문자 체계멕시코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도 독립적으로 문자발생. 신세계 사회가 문자를 가진 구세계와 접촉했다는 증거 없음. 또, 문자의 기호들이 구세계의 것과는 전혀 달랐음. 마야 문자 또한 독립적으로 발생했고 추상적인 낱말을 위한 리버스 원리를 바탕으로 고안. 이처럼 중앙아메리카 문자와 고대 서유라시아 문자 사이의 유사점은 결국 인간 창의성의 보편성을 입증.청사진 복사와 아이디어 확산발명의 전달 과정은 두 가지로 나뉨. 그대로 복사하거나 변형시켜 사용하는 ‘청사진 복사’와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채택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새로 발명하는 ‘아이디어 확산’. 이 두가지가 문자 체계의 전파 과정에서 어떻게
1. 신생공화국의 발전(1) 연방헌법(聯邦憲法)의 제정독립전쟁 중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대륙회의의 권고에 따라 이미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한 바가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1776년 7월 4일에 대륙회의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13개의 ‘공화국’이 되었고, 1781년에는 연합 헌장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연합회의는 과세권을 갖지 못하는 등 중앙정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메사추세츠 ‘셰이스의 반란’은 미국의 기득권층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새로운 정부는 각 주에 통치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는데, 그들은 강력한 정부의 출현은 다시 폭정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통일된 국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제헌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대표들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시켰다. 각국 대표들은 대부분이 젊고 부유한 자산가였는데 특히 채권자 출신이 많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중 제헌 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버지니아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과 뉴욕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었다.1787년 미국연방헌법이 채택한 연방제도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그 구성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에드먼드 랜돌프(Edmund Randolph)가 제출한 버지니아안(the Virginia Plan)과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의 뉴저지안(the New Jersey Plan)은 각각 큰 주와 작은 주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견의 대립으로, 대표들은 타협의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새 헌법에 관한 ‘대타협’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1787년 7월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물론 제헌 회의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헌법의 제정 주가 헌법을 승인하였다. 새로운 정부 수립의 성패가 달렸다고 볼 수 있는 버지니아와 뉴욕의 승인이 이어서 이루어지면서, 결국 새 연방헌법은 각 주의 비준을 받는 데 성공하였다. 1789년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워싱턴은 4월 30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새로운 정부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국가 재정의 확립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재무장관 해밀턴은 헌법에 의해 ‘과세권’을 갖게 된 의회에 수입관세를 제정시켜 정부의 세출재원을 확보하였다. 이어 독립전쟁 중 연합회의와 주들이 짊어진 국내외의 채무 상환문제 해결에 착수하였고, 중앙은행인 미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설립을 1791년 의회에 제의하기도 하였다.2.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달과 영토 팽창(1)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시기존 애덤스(John Adams) 시기를 거치고 이른바 ‘1800년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18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파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824년의 선거전은 지역 간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 있다. 선거 결과 잭슨은 선거인단 표가 당선에 필요한 과반수에는 미달이었다. 수정 조항에 따라 하원에서 각 주가 1표씩을 행사하는 결선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헨리 클레이(Henry Clay)의 공작으로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퀸시 애덤스는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였고, 잭슨은 둘 사이의 정치적 흥정에 대해 의심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화파는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는 국민 공화파(National Republicans)와 잭슨을 지지하는 민주공화파(Democratic Republicans)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1828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양쪽 정파 사이의 견제가 북부, 남부 지역을 휩쓸었고, 잭슨은 퀸시 애덤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미국 역사에서 한 인물을 빌려 한 시대를 정의하는 경우는 오직 잭슨시대가 유일하금지하는 법을 발표하였다. 1835년 텍사스의 반멕시코 감정이 고조되어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1836년 3월 텍사스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1845년 12월 텍사스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28번 째 주가 됐다.미국이 텍사스를 주로 승인하자, 멕시코 정부는 미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며, 여전히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텍사스와 멕시코의 경계에 대한 다툼으로 인해 더 악화됐다. 멕시코는 리오그란데(Rio grande)강의 북쪽에 있는 누이세스(Nueces)강이라 한 반면, 텍사스 사람들은 그 경계가 리오그란데 강이라고 하였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K. 포크(James Knox Polk)는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이끄는 병력을 보내 텍사스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또한, 미국인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멕시코 영토인 캘리포니아(California)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지역에 점차 백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상점을 차린다던가, 싼 값으로 농지를 매입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정착지에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으며, 몇몇 일부는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이처럼 전쟁을 준비하던 포크 대통령은 외교 사절을 보내 그 지역을 구매하려 하였으나, 멕시코에서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누이세스에 있던 병력을 리오그란데 까지 이동시켰다. 그러자 국경 지역에서의 교전은 잦아졌고 그 피해도 점점 커졌다. 전쟁 비준을 둘러싸고 많은 의원들이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민주당과 휘그당의 야합으로 전쟁 결의안은 의회를 통과하였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비준하였다.1848년 2월 2일 멕시코시티 근교의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에서 조약이 체결되어 종전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지금의 캘리포니아 주와 뉴멕시코의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였고, 리오그란데 강은 텍사스와 멕시코의 경계선이 되었다. 대신 미국 정부는 새로 미국에 편입된 지역의 시민이 멕시코에 인하여 기존 노동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3. 남북전쟁과 재건시기(1)노예제와 북부 남부의 분열노예제도는 미국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논쟁의 초점은 연방에 새로운 주들을 받아들일 때, 그 주에서 과연 노예제를 인정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1817년에 연방 주 가입신청을 낸 미주리의 경우를 놓고 극에 달하였다. 이를 두고 헨리 클레이(Henry Clay)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는데, 미주리 주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되 그 주의 남부 경계선 이북의 다른 지역에서는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이라 한다. 이 협정은 미봉책에 불과했다.멕시코 전쟁이후 치러진 1848년의 대선에서 전쟁 영웅이었던 테일러가 승리하였지만, 새 영토들의 문제를 풀어 갈 정책이나 계획을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9년, 캘리포니아 당국이 자유주로서 연방에 가입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냈고, 남부 사람들은 이에 크게 반대하였다.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연방 가입을 두고 타협 법안들이 상원에 상정되었고, 결국에는 스티븐 더글라스(Stephen Douglas)상원의원에 의해 충분한 지지를 획득하여 타협이 성립됐다. 타협안에 있던 5개의 법안 중 ‘도망 노예들에 관한 법은 가장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법에는 노예 소유주들의 탈주한 노예들을 잡아들이는 일에 연방 정부가 지원해 준다는 규정이 들어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북부의 여러 도시에서 오랫동안 자유민으로 지낸 온 자유흑인들이 졸지에 체포되어 남부로 송환될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이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a Act)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있었고,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v. Sandford) 그리고 북부인 존 브라운(John Brown)의 남부 무기고 습격 등으로 인해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점차 심화됐다. 1860년 선거에서 링컨(Lincoln)이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인 영향을 받았다. 전쟁 기간 동안 북부의 남부에 대한 해안 봉쇄가 발효되자 남부는 거의 모든 물품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농장에서도 면화 및 수출 작물의 생산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 자체의 수요를 충족시킬만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징집됨으로써 식량 생산을 지속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물품과 인력의 부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전쟁 이후 국가 복구 및 재건의 문제가 남았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의 마을과 농지는 황폐화됐으며 많은 사회 간접자본들이 파괴됐다. 과거 전쟁 동안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발행했던 공채에 투자한 자본 역시 사라졌다. 백인들만이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노예로 일을 하던 해방 흑인들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의회에서도 연방을 이탈한 적이 있는 남부 주들을 어떻게 연방에 재가입 시킬지를 두고 혼선을 빚었다. 때문에 재건은 더욱 지연됐으며 더 어렵게 됐다. 또한 북부는 점자 자체의 정치 경제 문제들에 몰두하면서 재건에 대한 관심 자체도 약해지기 시작했다.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은 다양하다. 1858년 뉴욕 상원의원 윌리엄 슈워드(William H. Seward)는 당시 나라를 들끓게 하던 지역 갈등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설명을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한편에는 갈등이 ‘우연이었고, 불필요 했으며, 이해관계가 있거나 광적인 선동가들의 작품’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슈워드를 포함해서 그들의 반대편에는, ‘서로 반대되는 영구적인 세력 간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는 주장은 186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남북전쟁에 대한 논의의 주류를 이루었다. 갈등의 종류도 노예제, 지역 별 경제적 차이, 문화적 차이 등에 따라 다양했다. 예를 들어 찰스 비어드와 메리 비어드(Charles and Mary Beard)는 1927년에, 농장주의 이해와 산업가의 이해 사이의 ‘본질적인 적대감’에 대하여 주목했다. 각 집단은 .
대항해시대(The Age of Maritime Expansion)1. 배경(1) 인구요인15세기 초 유럽의 인구는 당시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창궐로 약 5분의 2 가량이 감소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의 적대적 성향을 유지하던 유럽에서의 무슬림 추방은 심각한 인구감소를 야기하였고,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인구감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인구감소는 노예무역과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맞물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대항해 시대 이전의 노예무역은 주로 백인을 대상으로 성행하였다. 또한 흑인노예무역도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금과 병행하여 이루어져 노예들이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으로 이송되고 있었으며, 중세 말에는 남유럽 지역에도 노예들이 공급되고 있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 근접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포르투갈인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원정 기간 동안 본격적인 대륙탐험에 앞서 그들의 경작을 위한 노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혹은 대서양의 제도들(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에서 팽창 일로에 있던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 이용하기 위해 흑인노예들을 구매하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이러한 노예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대륙에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동기로 작용하였다.(2)경제적 요인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에 대한 특별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 중 중국과 인도는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의 왕래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등으로 엄청난 부와 고도의 문명을 가진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동양에서 들어오는 값비싼 상품들은 유럽인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보석, 비단, 카펫, 향신료, 도자기 등은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조미료(향신료), 면, 견, 보석 등을 충분하게 확보하기 위해 상인들은 종래의 통상 방식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ⅰ. 향신료유럽인들이 향신료를 선호했던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관기능이다. 당시의 보관기술은 고기를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데 부족했다. 하지만 수가 늘어나고, 밑이 깊고 폭이 좁은 더욱 거대하고 튼튼한 배가 건조됨에 따라 대양 항해가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렌체의 천문학자였던 토스카넬리(Toscanelli: 1397~1482)는 지구 구형설에 입각한 해도를 작성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일의 베하임(Beheim: 1430~1506)은 지구의를 만들었다.(4) 지정학적 요인동방으로 가는 중세말까지의 루트는 장기여행에서 오는 위험이 따를 뿐 아니라 과중한 경비가 들고 중간지역에서 지불하는 세 부담이 컸다. 따라서 새로운 통상로가 개척될 필요가 있었다. 1400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유럽과 아시아 간 교통은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15세기 오스만인들의 성장과 강세는 계속되었고 이들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때문에 당시까지 대아시아 무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아라비아 반도를 통한 육로 수송로는 매우 위험하였고, 새로운 무역 경로가 개발되기는 하였으나 전에 비해 불안정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주변 국가의 성장으로 인한 지정학적 관계는 새로운 무역로 개척의 필요성을 점점 증가시켰다.(5) 종교적 요인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을 통해 알 수 있듯, 15~16세기 유럽인들에게 종교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15세기 중반을 전후한 이슬람의 진출, 근동 지방의 오스만 터키 민족의 세력 팽창은 그리스도 교회의 전도사업 또한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뿐만 아니라 12세기부터 퍼지고 있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의 전설은 그리스도교 전도열과 탐험열의 결합으로 신대륙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다. 이 전설은 몽고 혹은 아프리카 방면에 선교사 존이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인데, 당시 서방국가들은 이 전설을 믿고 이 왕국과 동맹하여 이슬람에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2. 항로개척과 아메리카정복(1) 항로개척1) 포르투갈포르투갈은 해외로 팽창하기에 안팎으로 여러 요소와 이점들이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 1385년에 아비스(Avis)왕조가 들어섰으며,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서남단인 월비스만(Gulf of Walvis)에 이르렀다. 그 후 계속해서 남쪽을 향해 항해하였지만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여 귀항하기로 결의하였다. 보급선과 합류하기 위해 월비스만으로 귀항하는 도중에 디아스 일행은 도중에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목격하게 된다.ⅲ.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이후 주앙 2세는 인디즈(Indise) 항로 탐사를 시작하지만 곧 사망하여 이 계획은 유보되었다. 이 계획은 주앙 2세의 뒤를 이은 마누엘 1세에 의해 재추진되었는데, 이 때 인디즈 탐사대장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였다. 다 가마는 적도의 무풍지대를 피하여 희망봉을 우회하고, 아프리카 동해안의 항구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급 받으면서 다음 해(1498) 인도의 캘리컷(Calicut)에 도달하였다. 현지의 힌두계 지배자는 별로 호의를 보이지 않았고 기득권을 가진 아랍상인들의 방해도 있었으나 신항로개척의 목표였던 후추와 계피 등 향료를 입수하여 다음 해 리스본으로 돌아왔다.2) 에스파냐ⅰ.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46?~1506)제노아의 선원출신인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기 위하여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것보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훨씬 가깝다는 생각을 하였다. 처음에 계획을 포르투갈에 제시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도 제의를 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결국 에스파냐의 이사벨라(Isabella)여왕에게 건의를 하여 마침내 1492년 첫 출항을 하였다. 약 두 달간의 항해 끝에 지금의 바하마제도(Bahamas)와 쿠바(Cuba)를 발견하였다. 이후 3차례 더 탐험을 진행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고, 에스파냐의 후원도 끊겼다. 오히려 식민지의 부적절한 통치로 체포되어 본국으로 귀환됐으며 모기 제독이(Admiral of Mosquitoes)라는 별명까지 얻는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이후 에스파냐가 업은 초기부터 상업, 탐험, 정복의 욕구가 혼재된 양상을 보였으며, 원주민 문명의 기반을 많이 파괴해 놓고, 다시 사회와 경제, 통치의 토대를 재창출해야 했다. 1520년 이전에 서인도제도 대부분의 큰 섬들이 개발되고 수많은 에스파냐인이 이주하였으며,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와 쿠바가 그 중심이 되었다. 중남미 토착문명에 관한 소식과 그들이 많은 귀금속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경우에 따라 그들이 찾던 황금의 나라인 엘 도라도(El Dorado)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히스파니올라에서 소량의 금맥이 발견되자 금을 찾으러 많은 사람들이 유입됐다. 그 중 코르테스(Hernando Cortez, 1485~1547)는 400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멕시코를 정복에 나섰으며 1521년에 아즈텍(Aztec)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마야문명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코르테스는 이곳을 식민지로 경영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그의 정복 사업을 지원해준 사업가들에게도 배당금을 나누어주었으나, 그의 무자비한 식민지 경영으로 인해 아즈텍 제국은 멸망 50년 만에 인구가 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코르테스의 성공담에 매료된 피사로(Francisco Pizzaro, 1471~1541)는 같은 방법으로 180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1533년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Cuzco)를 정복하였다. 그는 황제를 사로잡아 거금을 획득했고 신전을 약탈하여 고대문화의 미술품 등도 수집하였다.3. 영향(1) 문물의 교환1) 새로운 문물의 접촉과 영향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대륙 간에 전에 없던 물질적, 문화적, 생태적 교환이 일어났다. 양이나 말과 같은 유럽의 가축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으며, 옥수수나 감자 등의 구황 작물이 유럽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교역용 도끼나 총을 비롯한 무기들을 수용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고 캘리코와 같은 면직물은 유럽인들의 의생활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반면 유럽인들을 따라 전염병은 신대륙으로 건너가 착취하기 위해 이후 ‘흑인=노예’라는 새로운 개념, 즉 최악의 인종주의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근대 대서양 노예무역이 가지는 핵심적인 차이였다.3) 화폐의 이동식민 초기에 있어 귀금속 채굴의 양은 엄청났다. 초기의 정복자들은 토차민이 보유한 금?은을 마구잡이로 탈취하여 사복도 채우고 본국에도 보냈다. 그러나 점차로 금광과 은광을 답사하여 채굴하면서, 16세기 중엽에는 멕시코의 포토시(Potosi)와 같은 풍부한 광맥들이 발견되었고 유럽 왕실의 주도 하에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들어왔다. 신대륙에서 유입 된 귀금속의 상당량은 유럽 내에 잔존하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화폐량이 증가하여 이것이 곧 물가상승을 초래한 것이다. 이를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도 한다.(2) 유럽의 변화1) 경제적 변화가격혁명은 자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과 생산업자 등, 신흥 자본가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거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그것의 끊임없는 확대는 유럽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전례 없는 자극과 기회를 제공하며,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이러한 상업상의 큰 변혁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럽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리켜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 그 체제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는 시민계급(중산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2) 무역 중심의 이동과 패권다툼무역의 중심지가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이 새로 열린 세계시장의 점거를 목표로 치열한 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경쟁의 승자와 패자는 그 결과에 따라 번영하거나 쇠퇴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갔다. 지리상의 발견 후 번영을 누렸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또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나라들은 식민지 쟁탈전과 패권 다툼을 통해 주도권을 빼앗기거나 차지해나가며 식민지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3) 세계관의 변화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의 사고방식에 전환점을 주었다. 기존의 종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