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음식문화가 앗아간 건강한 문화들코로나 시기 ‘확찐자’라는 말이 유행했다. 방역수칙으로 사람들이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시작하자 배달음식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살이 찌기 시작했다. 살이 찌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코로나로 인해 생긴 변화이므로 사람들은 ‘확찐자’를 농담조로 많이 사용했다. 친구들끼리 만났을 때도 누군가 살이 쪘다고 말하면, “너도 확찐자 됐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코로나가 끝나면 비대면으로 줄어들었던 활동이 복구되어 사라질 하나의 사회 현상처럼 여겨졌다.하지만 코로나가 만들어 냈다고 생각되는 ‘확찐자’는, 사실 코로나보다 배달 음식문화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배달 음식문화가 코로나 때문에 발전한 거니까, 결국 코로나가 문제이지 않나?’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조리된 식품이 아닌 재료를 배달시켜, 집에서 요리를 하고 건강을 챙길 수도 있다. 또 살이 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비대면 운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아무런 경각심 없이 ‘확찐자’가 되어간다. 왜 배달 음식문화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확찐자’로 이끄는 것일까?이유는 배달음식 문화가 갖는 ‘편리함’에 있다. 배달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찾아, 결제를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음식을 시키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어떻게 만들지 등에 관한 고민을 크게 할 필요가 없어진다. 배달이 도착하면 편리하게 얻는 ‘맛’과 ‘포만감’을 즐길 준비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배달을 시킬수록 이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이전에 음식을 먹기 위해 했던 ‘생각’이나 ‘행동’을 점차 생략하게 된다. 이 단순한 생략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음식을 먹는 과정을 간략하게 바꿔 놓았고, 그 결과로 코로나시기에 ‘확찐자’가 나타났다.이렇게만 보면 배달 음식문화가 단순히 살을 찌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확찐자’라는 결과가집에서 된장찌개를 만든다고 하거나 직접 나가서 사 먹는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거치는 단계들이 배달 음식문화로 사라지는 과정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행해오던 일들이 사라졌을 때는 어디선가 다른 문제가 쌓여가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편하게만 느껴왔던 배달 음식문화가 우리 생활에 어떤 부분을 바꿔 놓고 있고, 이 변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세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부분은 ‘건강’이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배달을 해주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 스스로 음식을 해야 할 때 발생하는 장을 보러가고, 요리를 하고, 다 먹고 설거지를 하는 일상적인 움직임이 배달을 시킬 경우 사라지게 된다. 식당에 가서 사 먹는 경우 잠깐 이동하는 걸음조차 배달 기사가 대신 해 준다. 소비자가 하는 움직임은 집 앞으로 음식을 받으러 가는 일과 배달 음식을 뜯는 일만 남게 된다. 외적으로 보기에는 매우 편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건강적인 측면에서는 스스로의 몸을 망치고 있는 습관이다. 인천힘찬종합병원 소화기내과 손효문 센터장은 이런 상황을 두고 “활동량이 줄고 고염분·고칼로리 음식을 자주 섭취하면 기초대사량은 감소하고 지방이 과잉 축적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경우 심혈관질환, 제2형 당뇨병, 고지혈증 등으로 진행가능한 대사증후군 질환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라고 경고했다. 적은 움직임으로 얻는 편리함이 우리 몸의 질병을 유발하고 있는 셈이었다.음식을 고를 때 재료를 비교하지 못하는 점도 건강을 해치는 요소다. 우리가 직접 요리를 할 경우 마트나 시장에 가서 재료를 고르는 행위를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어떤 재료가 더 좋은 재료이고, 해당 재료가 어떤 영양소를 갖고 있는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먹는 행위가 자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하지만 배달을 시킬 경우 우리는 이 절차를 거칠 수 없다. 조리되자 입장에서는,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고민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배달을 시킬수록 소비자는 재료에 관한 정보에서 배제당해 스스로의 영양을 챙길 겨를이 없어진다.마지막으로 배달을 시킬 때 소비자가 음식의 영양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점도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음식을 시킬 경우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음식 이름과 재료, 사진, 가격, 배달기사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이다. 어플리케이션에서 음식의 칼로리나 영양 정보는 원산지를 제외하고는 알 수 없고 이마저도 제일 하단부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런 실태에 관해 성균관의대 강북삼성병원 영양팀 김은미 수석은 “소비자가 주문 선택 시 식사의 영양적 균형을 찾아갈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개인이 스스로 식사패턴 및 필요 영양 등을 고려해 소비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영양정보가 없을 경우 소비자는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 채 사진과 맛을 기준으로만 음식을 선택한다. 이런 음식들은 당과 나트륨 등의 함량이 높아 반복적으로 섭취하면 질병을 유발한다.배달 음식문화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변화를 일으킨다. 음식은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하나로서 생활에 있어서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다. 이런 음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누군가에게는 큰 정신적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하루 세 번 마주쳐야 하는 식사에 있어서 자신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영양소나 음식을 스스로 얻지 못하고 항상 타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점은 자신감을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배달 음식문화는 소비자에게 음식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누적시킨다. 그리고 이런 스트레스가 누적될 경우, 사회 속에 있는 한 개인이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인간관계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배달문화로 늘어나는 혼밥 문화도 사회적인 관계를 단출하게 만든다. 과거부터 음식을 먹고 만드는 일은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공동의 일이었다. 자신이 수고스럽게 만든 하지만 현대에 배달문화가 생기고 사회활동이 증가하면서 스스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밥을 먹는다는 기본적인 행위조차 혼자 해결하게 되며 인간관계의 기회는 축소되었다. 인간관계의 축소는 대인관계 기술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높고, 약화된 대인관계 기술은 개인으로 하여금 점차 소속감이나 사회적인 욕구 충족을 저하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생기고 개인의 삶의 만족도도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배달 음식문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상권 또한 변했다. 기존의 상권은 소비자의 방문을 기준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배달 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상권이 소비자들의 방문을 기준으로 형성될 필요가 없어지며 골목상권들이 상대적으로 비활성화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 배달 어플리케이션이 없을 경우 원하는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는 해당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에 보이는 다른 음식점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다음 소비지가 같은 상권에서 결정되었다. 하지만 배달 어플리케이션의 경우 가장 먼저 뜨는 정보는 광고비를 낸 업체이고, 그 아래로 리뷰, 별점 등을 기준으로 정렬된다. 결국 누군가 임의로 정해놓은 기준을 봐야 하는 소비자는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 어려워졌고, 새로 오픈한 가게의 경우는 광고를 내지 않고서는 인지도를 얻기 어려워졌다.마지막으로 배달 문화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쓰레기 처리에 있다. 간편함을 기준으로 하는 배달 문화이기 때문에 쓰레기도 간편하게 처리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설거지를 안 해도 되는 일회 용기나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고, 일회용 수저와 젓가락을 포함해서 배달해 준다. 집에서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경우는 세척이 가능한 다회용 용기를 통해 먹기 때문에 불필요한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지만, 배달 음식은 한번 시킬 때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생하는 구조다. 평균적으로 배달음식 한 번에 8개의 쓰레기가 발생하고 하루에 천만 개가 넘는 배달 쓰레기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꼴이다.재활용 되지 않는 쓰레기들도 문제다. 통계적으로 55%의 용기가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편리함을 위해 배달해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배달 온 비닐봉투에 먹은 것을 그대로 담아 버리는 경우도 있고, 재활용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음식물이 담겨 있는 용기나, 스티커가 붙어 있는 용기는 재활용되기 어렵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분리수거를 장려하고자 해도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에 발전해 버린 산업이기 때문에 따라잡기 힘든 실정이다. 결국 우리가 배달을 시켜먹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재활용 쓰레기 문제가 쌓여가고 있다.긍정적으로만 느껴졌던 배달 음식문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건강적인 측면에서, 사회적인 측면에서, 쓰레기 처리 문제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편리함’이라는 개인적인 이득을 얻는 대신에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던 셈이다. 이런 점을 소비자 스스로가 경각심을 갖고 대처하지 않고 배달 문화를 이용한다면, 같은 문제가 계속해서 쌓여갈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가 배달 음식문화가 변화시키는 자신의 일상적인 측면을 스스로 인지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사회적으로는 배달 음식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재 배달 어플리케이션 업체들을 중심으로 ‘일회용 수저 안 받기’를 기본값으로 바꾸는 일을 하거나, 국회에서는 배달 업체의 일회용품 무상제공을 금지하는 등의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또 배달 음식의 문제점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기사나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도 배달 음식문화가 가져온 문제점에 관한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다. 배달 음식문화의 문제점이 수면위로 드러난 게 최근인 만큼 아직은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배달 음식문화 관련 조기 교육이나 식품 정보 표기 등 개선되어야 할 점이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문제점을 빠르게 인식하고 개선하려고 한다면 배달 음식문화도 올바른 식문화로 점차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걸리겠지만 배달 음식문화의 편리함과 기존의.
신채호 - 꿈하늘1.질문: 기독교적 세계관이 생각나게끔 소설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이유: 저자가 외래에서 들어온 사상에 부정적인 입장임에도, 소설의 구조가 마치 소설 천로역정과 같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생각: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퍼져있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저자는 우리나라의 역사도 외래의 사상만큼이나 위대하게 보인다는 점을 기독교적 세계관과 비교해서 강조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또 저자가 소설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저자는 이런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우리나라의 문화를 뒤로하고 받아들이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2. 인상적인 대목: “도사의 하늘까지 들어와 님의 하늘을 가리워 이천만 사람의 눈이 한쪽으로 뒤집혀서 보고하는 일이 모두 딴전이 되어 국전과 국보가 턱턱 무너지기 시작할새 역사의 제1장에 우리 임 단군을 빼고” (단채신채호전집 1975 27p)인상과 감상: 개화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주적인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민족적 바탕과 방향성이 필요했다. 이 대목은 이 두 가지를 정해주는 대목이라고 느껴졌다. 저자는 외세의 영웅들과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의 ‘단군’이라는 역사적 뿌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 같다.이광수 - 무정1.질문: 형식이 평양에 가서 영채를 찾는데 집중하기보다 계향과 있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일까?이유: 바로 전날에 확실하지 않던 영채의 마음을 알게 되고 눈물까지 흘리며 찾아 왔는데, 계향을 만난 것으로 인해 하루 만에 감정이 바뀌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형식이라는 인물이 유교적 관념을 무겁게 생각한다는 점이 책 곳곳에 명시가 되어 있고, 평양에 가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순적으로 보인다.생각: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감정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무정하게 보일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형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가 소설적 장치로 사용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형식’이라는 인물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보면, ‘형식’이 유교적 관념에 얽매인 동안 외로움을 크게 느껴 새로 생긴 감정에 저항하지 못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2. 인상적인 대목: 참 생활이 열릴까요? 다시 살 수가 있을까요? (동아출판사 무정 273p)인상과 감상: 구시대적 사고방식으로 대표되는 그동안 지켜왔던 영채의 정조관념이 무상하게 보이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형식’과 ‘영채’, ‘선형’, ‘병국’이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가 급변하며 새로운 사상간 갈등이 연속되는 상황에서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을 ‘무정’하다고 표현한다. 그런 대목들 중에 이 대목이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이다. 당장 죽어야만 영채의 상황을 단순한 사상하나로 삶으로 돌려놓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서 구시대적 관념이 매우 무상하게 느껴졌다.김사량 - 빛 속으로1.질문: 한베에는 일본인이었을까?이유: 작품 중반 이후 부분에 한베에와 미나미가 감옥에서 나눈 대화에서, 한베에는 자신의 고향이 남쪽이라고 했다. 또 한베에의 조선인에 대한 증오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베에가 순수 일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 한베에가 혼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약 한베에가 순수 일본인이었다면 소설에서 나오는 조선인에 대한 폭력적인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한베에가 같은 조선인인 미나미에게 반응하며 감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점이나, 조선인 부인을 데려간 점은 조선인에 대한 동질감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작가는 이 점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에 미나미가 하루오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두 개의 자아가 합치되지 못해 한베에와 같이 폭력적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하는 대목을 넣었다고 생각한다.2. 인상적인 대목: “남선생님이시지요?”(빛 속으로(121p), 온이퍼브)인상과 감상: 반은 조선인의 피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던 하루오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벗어던지는 대목이었다. 이 대목 부분에서 주인공인 미나미 역시 자신이 밀어내야 했던 조선인이라는 자아를 하루오를 통해 회복하며 안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동질감을 가진 두 인물이 상처내거나 밀어내던 스스로의 모습을 보듬어주는 느낌이었다.강경애 - 인간문제1.질문: 317p에(인간문제, 창비) 검열로 삭제당한 160자는 무슨 내용이었을까?이유: 이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내용이나 선정적인 내용,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곳은 검열되지 않았는데, 특별한 말이 없을 거라고 예상되는 대목에서 검열 당한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생각: 이 부분은 첫째의 생각이 담긴 부분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이 담기지 않았을까?’였다. 하지만 책에 이전 내용에도 욕지거리라고 생각되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에 합리적이지 않다. 다음에 드는 생각은 ‘독자들로 하여금 체제에 반항하게 만드는 생각을 담고 있지 않았을까?’이다. 당시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점과, 이 대목이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갈등이 일어난 상황임을, 그리고 첫째가 피지배층을 대변하는 인물임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추측으로 보인다.2. 인상적인 대목: “이놈, 너도 지내봐라! 누가 잘못하고 싶어 잘못하는 줄 아느냐? 나도 배고파서 헐수할수없으니 그랬다! 너두 지내봐라! 어디 이놈!” 첫째는 이 말에 귀가 번쩍 틔며 이상하게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인간문제, 창비, 143p)인상과 감상: 첫째가 인간 문제에 대해 논하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 오버랩이 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여러 계급 관계를 부각시키며,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이 문제의 원인을 사회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둔 점이 인상적이었다. 위의 문장처럼 먹고 살려고 무언가 시작하여, 마지막에 고된 노동 끝에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또 이런 주제 의식이 각 인물의 사상 변화 속에도 녹아있다.김명순 - 탄실이와 주영이1.질문: 왜 작가는 탄실이가 정조를 잃은 일을 탄실의 시점이 아닌 외부인들의 시점에서만 보이도록 소설을 썼을까?이유: 주인공 탄실이가 겪은 일을 탄실의 심리 상태가 아닌, 외부 사람들의 구설수와 상황으로만 보여주는 형식이 처음에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힘들었다.생각: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미완결 작품이어서, 이후에 나올 탄실이의 심리상태가 빠졌을 수도 있을 수 있다. 다른 이유는 작가가 당시 신여성이 정조를 잃고 겪게 되는 사회적 불합리한 상황을 외부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 소설은 탄실이 엿듣는 부분에서 탄실의 인생 회상으로 시작된다. 이후 왜 탄실이가 정조를 잃게 되었는지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게 함으로서, 당시 신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구시대적 여성관과의 갈등, 외로움, 그에 따른 선택들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킨다. 이 과정을 앞에 여성들을 평가하는 남성들의 대목과 대비시키면서, 정조를 잃은 여성이 폄하되는 사회적인 불합리함을 고발하려고 한 것 같다.2. 인상적인 대목: 산봉우리를 아래서 쳐다볼 때만 높게 봅니다. 그 높은 데 올라갈 것 같으면 다시 더 높은 곳이 있는 듯이 상상해집니다. 그러나 어찌하다가 잘못 미끄러져서 산봉우리 아래 떨어질 것 같으면 다시 자기가 올라갔던 산봉우리가 높았던 듯이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사람은 낮은 데 있어야 높은 데를 더 그리는 것 아닙니까? 올라갈수록 높은 것이 한정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이상을 표준하고 신성하다 고상하다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을 만들면 확실히 저는 신성합니다.(근대여성작가선 79-80p)인상과 감상: 처음 읽을 때는 이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봤을 때 신성함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탄실이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사회적으로 떨어진 자신의 신분을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자신이 당한 상처로 인해, 신성하기 위해서는 낮아질 수밖에 없는 처지와 그로 인한 슬픔이 잘 드러난다.이태준 - 패강냉1.질문: 작품이 쓰인 시대인 일제강점기 당시에 카메라가 흔하게 사용되는 물건이었을까?이유: 작품 속에 주인공 ‘현’이 사진을 찍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카메라가 대중들에게 보급되었던 건지 궁금해졌다.생각: 해당 대목이 쓰인 곳에서 ‘현’이 ‘문학청년’이라고 언급된 점을 보면 부모님의 지원이 있지 않는 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하기 때문에, 카메라가 대중들에게 보급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찾아보니 카메라는 1883년 조선에 처음 들어왔고, 1907년 우리나라 최초 사진관인 '천연당'이 생겼다고 한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배층을 위주(고종이 사진 찍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로 사용되었고 점차 보급되었다고 한다. 작품이 발표된 때가 1938년인 점을 고려하면, 작품은 당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소설에 투영한 것 같다.(관련기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65232&CMPT_CD=TAG_PC)2. 인상적인 대목: “이상견빙지…… 이상견빙지…….”(작품전문: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2487, 200번째 줄)인상과 감상: 일제 강점기 당시 잃어가는 우리 문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인공 ‘현’의 마음이 집약된 대목이었다. 하지만 작품에서 이런 현의 태도가 개인적인 아쉬움과 김에 대한 반감에 의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 있어 모순적이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현은 앞에서 카메라나 재즈와 같은 신문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고, 단순히 우리 문화가 보존되기만을 바라는 입장이었던 점도 주인공 ‘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본 이인직의 혈의 누1) 텍스트로 읽은 혈의 누이인직의 ‘혈의 누’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배경지식이 없이 읽었을 때는, 개화기 시대의 국위선양을 위한 소설로 읽히게 된다. 왜 그런지 텍스트를 통해 분석해 보자.먼저 일반적인 역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에서 제시되는 단어를 통해 해당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5p(문학과 지성사, 이인직 소설전 혈의누)에서 나오는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라는 대목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다른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이후 27p의 ‘일청전쟁’이라는 단어를 통해 해당 전쟁이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뤄진 청일 전쟁임을 알 수 있다.작품 초반부에 청일전쟁으로 시대적 상황이 형성되고, 전쟁으로 ‘옥련’의 가족들이 흩어지며 작품이 전개된다. 옥련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고, 일본에서 다시 버림받고 기차에서 ‘구완서’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버림받아 더 나은 처지로 향해가는 ‘옥련’에 몰입하게 되어, 작품 초중반의 내용은 옥련이 가족의 불행한 서사로 인식이 된다. 그리고 이후 미국으로 향해 개화되는 내용이 나오며, 작품 후반의 내용은 전쟁이 가져온 구시대적 사상의 변화로 인식이 된다.위와 같이 인식이 되는 이유는 작품 후반부에, 봉건적인 조선의 시대상에 반하는 개화사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69p의 김관일은 옥련의 혼사 문제를 논하지 못하고 있고, 70p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중략)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와 같이 국위선양과 남녀평등 사상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옥련 가족의 가련한 인생과 구완서의 지적이고 애국적인 면모, 작품의 우연한 전개와 계속되는 장소의 큰 변화들이 합쳐져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현대 시점의 독자로 하여금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작품의 구체적인 콘텍스트보다 인물의 서사와 감정에 빠져 몰입하게 된다.이런 상황에서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어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고, ‘상편종’이라는 문구로 이후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정리하면 당시 일제강점기 정서를 경험하지 못한 현재의 독자가 혈의 누를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주제가 ‘전쟁으로 벌어진 옥련이 가족의 불행과 개화’로 인식된다.2) 콘텍스트로 읽은 혈의 누하지만 이인직이라는 인물의 인생과 당시 시대상을 참고했을 때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친일 소설로 분류 된다. 신승희의 ‘이인직의 [혈의 누] 연구’를 보면 이 작품의 저자 이인직은 ‘혈의 누’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조선을 폄하하는 기사를 싣는가 하면, 러일전쟁의 일본군 통역관으로 종군했다. 이 작품이 발표되기 전에 이미 이인직이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작품을 읽게 되면, 다른 맥락으로 작품이 해석된다.먼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옥련 가족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국적이다. 맥락을 모르고 읽을 때는 주인공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옥련의 가족들은 ‘일본인’에게만 도움을 받는다. 옥련의 어머니는 일본인 헌병에게, 옥련은 일본의 간호원에게, 군의관에게, 군의관의 부인에게 도움을 받는다. 청일전쟁인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시대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일적 성향이 존재하던 소설가가 일본인이 조선인을 도와주는 형태의 관계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인직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도와주는 형태를 통해, 조선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개화사상이라는 발전된 사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만약 이인직이 친청 성향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작품의 전개는 청나라 중심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다음으로는 (1)에서 이야기 했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중략)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라는 대목이다. 맥락을 모르고 이 문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구완서라는 인물이 뜻을 가지고 일본과 만주를 합해 조선을 강국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제강점기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구완서라는 인물이 학식이 높고 지적인 인물로 등장한 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을 강국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당장 국권이 위태한 나라를 포부 하나만으로 뒤집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그렇기에 이 대목은 현재인의 시점이 아닌, 일제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읽어보려고 해야 한다. 일제의 억압을 받던 조선인들은 이미 국권이 넘어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위의 문장을 ‘조선을 중심으로 일본과 만주를 합한다.’가 아닌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를 합한다.’로 해석이 되어야 올바르다. 이인직은 이런 해석을 의도하고 이 뒤의 ‘문명한 강국’이라는 긍정적인 꿈을 심어주면서 일본에게 합병당하는 것이 조선에게 긍정적인 효과라는 점을 조선인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그리움과 삶에 관한 시(‘흰 바람벽이 있어’와 ‘별 헤는 밤’ 비교)1) 들어가며가끔 그리움이 인간의 본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운 공간에 놓였을 때, 익숙한 것들에서 떨어졌을 때, 어디선가 실패를 했을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내가 선택한 이 두 시는 이런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잘 드러나는 시이다. 제목에 있는 것처럼 ‘흰 바람벽이 있어’는 ‘흰 바람벽’을 통해서, ‘별 헤는 밤’은 ‘별’을 통해서 화자가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화자들이 시에서 어떤 이유와 과정으로 서로 다른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는지 시를 통해 알아보고. 이 그리움이 이들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탐구해 보고자 한다.2) '흰 바람벽이 있어‘ 텍스트 분석먼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분석해 보자. 시에 초반부에서 화자는 그리워할 대상을 떠올리기 위해 분위기를 형성한다. ‘좁다란 방’에 ‘흰 바람벽’을 보고 앉아 ‘쓸쓸함’을 느낀다. 여기에 전등에서 나오는 ‘지치운 불빛’으로 감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낡은 무명셔츠’로 애잔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고독한 상황에서 화자는 외로움을 느끼며 그리운 대상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한다.처음에는 ‘가난한 늙은 어머니’의 모습을, 이후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시인은 이 과정을 ‘또 어인 일인가’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며 그리워하는 대상을 연상하는 과정이 우연적인 점을 표현한다. 이후 화자는 바람벽에 비친 자신의 ‘쓸쓸한 얼굴’을 바라본다. 이 대목은 시의 상황으로 볼 때, 흰 바람벽을 보며 연상을 하던 중에 자신의 쓸쓸한 그림자를 마주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글자들을 마주보게 된다. 처음 지나가는 글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중략)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라는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는 글자들이다. 이후에는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중략)’라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글귀들이다. 이 글귀가 지나가고 화자는 자연의 이미지들과 숭고한 삶을 산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시를 마친다.시의 텍스트만 놓고 정리해 보면,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던 화자가 그리운 대상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을 시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외로움 속에서 화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고, 그 그리움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재로 오기 위해 어떤 글귀들을 자신도 모르게 마주했다. 그 글귀들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화자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는 글귀였고, 나쁘게 해석하면 스스로의 상황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글귀였다.3) ‘별 헤는 밤’ 텍스트 분석다음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분석해 보자. 시의 초반부에서 화자는 ①과 마찬가지로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기 위해 분위기를 형성한다. 사색을 하기 좋은 높다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 ‘가을 속의 별들’을 헤기 시작한다. 이 때 별을 다 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자신의 그리움의 크기와 시간적인 한계를 설명한다.시의 중반부에서는 별 하나에 그리운 대상들과 자신의 감정을 연상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이들이 현재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이 과정을 ‘어머님’이라고 시작하며, 마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듯한 느낌을 준다.시의 후반부에서는 ‘무엇인지 그리워 (중략) 내 이름자를 써보고’라는 구절을 통해 그리움의 이유가 ‘이름’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화자는 이름을 쓰고 덮는 구절 뒤에, 벌레가 우는 이유를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화자는 이런 부끄러운 이름에도 ‘겨울’이라는 혹독한 상황이 지나 ‘봄’이라는 따뜻한 시기가 오면 자신이 이름이 묻힌 언덕에도 풀이 무성할 거라는 구절을 쓰며 희망적으로 시를 마무리한다.정리하면 ‘이름’에 관계된 일에 의해 화자는 가을 하늘의 별을 보며 감상에 빠져, 그리워 하는 대상들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통해 생각해보면 이 이름에 관계된 일은 이 시의 저자 윤동주가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4) 시 비교먼저 두 시의 대표적인 두 가지 공통점을 살펴보자. 먼저, 두 시는 공통적으로 ‘그리움’을 느끼고 정리하는 구조가 유사하다. 두 시 모두 어떤 대상(흰 바람벽, 별)을 통해 그리움을 느끼고 -> 그리운 대상을 말하다 ->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시를 마무리 한다. 두 시가 이런 공통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감정의 결핍(쓸쓸함)을 느끼고 어떤 대상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 속에서 결국 자신은 현실(‘흰 바람벽이 있어’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별 헤는 밤’은 자신의 이름을 쓰며)에 있음을 자각하며 감정을 정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두 번째 공통점은 두 시인이 그리움을 전개하는 과정에 나열하는 대상들이다. 두 시는 전혀 다른 사람이 쓴 시임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그리워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매우 유사하다. ‘어머니’가 대부분의 사람의 공통적인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도, 두 시에서는 모두 ‘프란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이 언급되고, 자연에 있는 동물 이름들이 언급된다. 시 속에서 두 시인 모두 ‘숭고한 삶’을 지향하는 점을 알 수 있고, 순수한 자연의 대상을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므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윤동주가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윤동주가 백석의 심상을 따라 자신의 시를 써 내려 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이런 공통점 속에서도 두 시는 세부적인 차이점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리움을 매개하는 대상이다. 백석의 시에서 ‘흰 바람벽’은 좁은 방안에 갇혀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반대로 윤동주의 시에서 ‘별’은 널따란 우주의 광활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시의 결말이 백석의 경우 개인적인 성찰로 느껴지는 반면, 윤동주의 경우 넓은 가을 하늘의 이미지와 결말이 합쳐져 아직 모르는 미래를 향한 끝없는 희망으로 느껴진다.다음으로는 그리움의 이유이다. 백석의 시의 경우 그리움의 이유가 우연적으로 나타난다. 시에서 ‘또 어인 일인가’라거나 ‘어느 사이엔가’라는 시구를 통해 화자가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된 상황에 특정한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윤동주의 시의 경우 ‘부끄러운 이름’이라는 시구를 통해, 그리움의 이유가 ‘창씨개명’이라는 사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윤동주는 ‘창씨개명’으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의 순수한 조선 이름에 담겨 있던 무언가를, 가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두 시의 결말이 다른 흐름으로 흘러가게 된다. 백석의 시의 경우는 그리움을 이겨낼 방법으로 우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숭고한 정신을 끌어오는 반면에, 윤동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언덕에 썼다 지우며 자신의 순수한 이름에 담긴 정신이 지켜질 수 있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하나 된 중국을 위한 영화일까?영화는 중국이 진나라로 통일되기 전, ‘무명’이라는 자객이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나라의 복수’라는 대의를 위해 무명은 친구 장천의 목숨을 버리고 비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진시황의 10보 이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천하라는 대의를 위해 진시황 암살을 포기했다는 파검의 말에 설득당한 무명은 끝내 진시황을 죽이지 못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 무명은 ’조나라의 복수‘를 소의로 돌려놓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된다.무협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액션장면들과 화려한 영상미 때문인지 영화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영화는 중국의 공산주의를 옹호한다고 생각했다. 파검의 ‘한 사람의 고통은 온 천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영화의 스토리가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다른 사사로운 감정들은 버려질 수 있다는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감상문을 쓰다 보니 영화는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이라는 진나라의 짧은 역사를 비추어 보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가’라는 대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오히려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한 인간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정’이라는 체제 안에서 덕치와 법치가 실현되기가 왜 어려운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보였다. 먼저 덕치에 대해 살펴보면, 영화 속에서 진시황과 무명은 파검이 서예로 쓴 ‘劍’을 보면서 ‘최고의 경지는 검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임을 모두 깨닫는다. 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공자의 ‘인’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내용이나, 맹자가 지향한 왕도정치와 같은 의미다. 하지만 온갖 계략과 음모를 이겨내고 온 외로운 왕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뜻대로 천하를 다스릴 생각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소수 민족의 언어 사용을 제한하고 편의를 위해 모두 같은 언어를 쓰기를 바란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이가 나를 암살하려는 자였다니”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천하를 이루려 하는 자신의 뜻이 파검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 백성의 삶이 존중되는 것이 천하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파검과 세상이 통일되어 규칙에 맞게 돌아가는 것이 천하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진시황이 바라는 세상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무명은 진시황을 죽이지 않으면서 “죽은 자들은 전하께서 최고의 경지를 잊지 않길 바랄 겁니다.”라고 말한다. 무명은 천하를 이루어도 파검과 자신이 원하는, 왕이 마음으로 다스리는 세상은 오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있지만 전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가는 무명을 진시황은 죽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법도를 요구하는 신하들의 간청으로 인해, 갈등하다가 무명을 죽이게 된다. 왕 한 사람이 천하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불분명한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보다는, 정해진 법도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편리하기에 덕치는 실현되기 어려웠다.하지만 이렇게 편리한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 또한 온전하지 못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나라의 역사가 15년 밖에 이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법치의 문제점은 “이렇게 검을 찌르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겠죠. 하지만 전하는 살아남으실 겁니다.”라고 말한 무명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대사는 앞으로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일 거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진시황이 무명의 칼에 죽은 경우를 생각해 보면 곳곳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 또 전쟁이 벌어지고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무명이 이 말을 한 의도는 단순히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위해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일 거라는 의미가 아닌, 진시황의 법치를 문제 삼은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진시황은 법치를 통해 나라의 통일성을 이루길 원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소수민족이나 개개인의 의견은 법 안에서 묵살되어야만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시황은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로지 황제 하나만의 생각을 위해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을 말살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실제로 진시황이 사상통제를 위해 ‘분서갱유’라는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유생을 생매장 시키고 서적들을 불태운 것을 생각해보면 무명의 대사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 와 닿게 된다. 여기에 무명의 “이렇게 검을 찌르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겠죠. 하지만 전하는 살아남으실 겁니다.”대사 뒤에 “죽은 자들은 전하께서 최고의 경지를 잊지 않길 바랄 겁니다.”가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법치는 편리하지만 각 백성들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희생시키기 때문에 법치 국가 또한 실현되기 힘들었다. 영화 마지막에서 암살이 실패하고 비설이 파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한 것처럼,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끝나 온전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이런 맥락으로 이해해보면 처음에 생각한 것과 달리 영화는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전쟁이 없는 하나의 국가를 위해 자신들의 신념과 삶을 포기하는 내용을 통해서,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른다는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이런 체제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희생에도 불구하고 진 왕조는 15년 밖에 유지되지 못했고,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삶이 상처를 남긴 채로 영화가 끝을 맺는다. 이런 결말은 사회를 위해 억압된 개인의 삶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영화의 제목이 ‘영웅’이고 주인공의 제목이 ‘무명’인 점, 그리고 영화 처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랑, 우정,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도 한다.’라는 문구를 생각해 보면 영화는 사회 체제에 상관없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가를 이루기 위해 ‘어떤 신념’으로 죽어간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의 ‘영웅’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