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o Alvar Henrik Aalto (1898-1976)교육적 문제로 위베스퀠레로 이사하였다.위베스퀠레는 당시 스웨덴계 상류계급이 들어오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핀란드어 문화가 활발히 육성되고 있었다. 또한 교육도시로서의 성격도 강했다.1898년 2월 3일 핀란드 중서부 쿠오르타네에서 출생1916~1921년 헬싱키 공과대학 건축과1923~1927년 유바스큘라에서 설계 사무소 설립1924년 아이노 마르시오와 결혼. 설계사무소에서 협업
조각이란 무엇인가 - 1. 표지석과 부적과거 16세기경에는 예술의 상대적 가치를 ‘숭고성’으로 논하였다. 숭고성을 논한 고전주의 조각가들은 구체적인 실체 즉, 인체의 한 특성을 다루었다. 이를 헤겔은 ‘독자적인 재료를 가지고 성령을 형상화하는 놀라운 작업’이라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런 예술관에서 탈피하여 ‘모든 예술은 고유한 개성을 가진 것’으로서 각기 다른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은 불확실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체에 대한 감각과 정신을 예술적인 형태에서 인식했고 그 결과 ‘상징’을 창조해냈다.초기단계의 건축과 조각은 단일한 것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길로 발전되어 왔다. 건축의 기원은 인간의 주거지 또는 주거 장치로서의 원형이었고 조각은 부적과 표지석, 각기 별개의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헤겔이 인용한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표지석은 ‘남근 숭배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인도는 생식기능에 대한 숭배를 성기형태(높고 좁은 원기둥 모양)로 상징하였는데 후에 이것은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도의 사원, 탑은 주거형태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그 기원은 성기형태의 표지석에 있다. 즉, 인도의 사원은 건물군에 속할 수 있으나 착상이나 제작의 기원은 조각에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대중선동으로 그릇된 민족주의에 오도되었으며 합리성이라는 미명아래 파시즘과 세계대전의 시기를 겪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유대인 지식인으로서 유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동시대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서로 다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벤야민을 중심으로 아도르노와 비교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우라벤야민의 사상은 신학적 요소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요소가 함께 한다. 1924년 벤야민은 라체스와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의 생산방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복제기술은 전통 예술작품이 가진 유일무이한 진품성을 무가치하게 만들었고 사진, 영화, 음반과 같은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예술에서 원본과 복제품을 구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17세기 이후 인류의 역사는 낙관을 믿음으로 진보를 향해 진행되어 왔다. 계몽주의 사상과 제국주의는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 공산주의의 붕괴, 수많은 전쟁 등을 야기하였다. 계몽주의를 토대로 과학과 결합한 산업사회의 모더니즘 문화 속 1960년대에는‘오늘날 과연 모더니스트들이 갈망한 유토피아에 도달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이러한 근대를 반성하는 사유에서 시작하였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 주목하며 극단적인 형태를 논의해 온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미디어 이론가였다.그의 급진적인 성향은 그를 도발적이면서도 독특한 이론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사회학과 철학의 테두리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전통 사회이론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철학, 문화, 사회 등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의 스타일은 다양해졌다. 그가 제시했던 화두는 늘 논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