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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대(唐代) 도성체제(都城體制)와 호족사회(胡族社會)
    당대(唐代) 도성체제(都城體制)와 호족사회(胡族社會)- 장안성과 낙양성을 중심으로 -머리말1. 도성 내부의 구조1) 방장제(防牆制)의 확립2) 궁궐배치와 시장배치의 변화2. 양도체제(兩都體制)의 성립1) 장안성과 낙양성의 기능분화2) 장안성의 공고화맺음말머리말수도(首都)는 한 국가의 중심지로서 국가의 총체를 반영한다. 때문에 수도를 보게 되면 그 국가의 사상이나 문화, 정치, 사회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당대(唐代)의 사회상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그 도성(都城)인 장안성(長安城)과 낙양성(洛陽城)을 보는 것은 유용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중국은 유목민인 호족(胡族)과 정주민인 한족(漢族) 사이의 대립과 융화가 시작되는 시기로 이때의 중국 사회를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시대상을 고려해 본고에서는 유목사회가 당대 도성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국가 내의 유목문화와 국가 바깥의 유목사회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 내의 유목문화는 도성 내부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기존에 한족들의 도성 구조와는 달리 당대의 도성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먼저 파악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국가 바깥의 유목사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대의 동아시아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유목사회 역시 강력했던 시대였다. 돌궐(突厥)이 통합되었고 그 뒤를 이어 토번(吐蕃)과 위구르(回?)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결합하여 당대에 양도체제가 지속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국의 역사에서 유목민들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도성 내부의 구조1) 방장제(防牆制)의 확립방장제(防牆制)는 각각의 방(防)을 담장(牆)으로 막아놓은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는 유목국가가 건설했던 성(城)의 기능에 의거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달리, 유목사회에선 흉노(匈奴)때 부터 도시가 축조되었다. 유목국가에는 농처 역할을 하였다. 다만, 흉노의 지배층인 유목민들은 이동생활을 하기에 성에 거주하지 않았고, 이는 선우(單于)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성들은 5호16국 시대에 하나로 통합되게 된다. 5호16국시기 대하(大夏, 혹은 赫連夏) 통만성(統萬城)을 보면 경기(京畿)를 구성하는 여러 소성(小城)들이 하나의 도성(都城)으로 묶이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 성이 도성으로 집중화 현상이 계속되면서 북위(北魏) 때 방제(防制)가 확립되었다.이러한 유목문화의 영향으로 당대의 장안성과 낙양성은 방장제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방장제는 사민을 목적으로 도성민(都城民)을 통제하고 각 방의 기능을 원활이 수행하도록 고안된 체제였다. 당대의 장안성과 낙양성은 모두 각각 수문제(隋文帝)와 수양제(隋煬帝)에 의해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수(隋)의 두 황제는 두 도성을 영건(營建)한 이후 사민(徙民)으로 인구를 채웠고, 방장제를 통해 이들을 통제하였다. 기본적으로 사민은 인근의 백성을 대상으로 시행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당대에 장안성에서는 이방인들이 사민된 경우도 있었고, 수양제는 낙양성에 대규모 상인인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사민하기도 하였다. 사민된 이들은 종족(種族)이나 직업(職業) 등에 따라 각 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렇듯 출신별로 분리는 하는 이유는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분쟁을 막고 이들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된 이들은 지배집단과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수당 이전에 5호-북조 시기에는 완전한 유목민이 지배집단이기에 언제나 도성민들의 반란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인은 고대 중국의 도성구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취하게 만들어 주었다.2) 궁궐배치와 시장배치의 변화진한대(秦漢代)의 도성구조는 중앙궁궐(中央宮闕)과 전조후시(前朝後市)이다. 그러나 당대 장안성과 낙양성은 궁궐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시장은 궁궐 앞에 위치하여 있었다. 먼저 궁궐의 위치에 대해 보자면 장안성에서 궁 이에 대비하여 유사시 도성을 탈출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의 도성은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안전한 탈출을 위해 도성 바깥에 넓은 금원(禁苑)을 설치해 금군(禁軍)을 주둔시키고, 유사시에 금원으로 탈출하여 후사를 도모할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때문에 금원은 도성 내 군사기지이자 피난처로서 사용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고, 금원과 궁궐을 연결해주는 현무문(玄武門)의 장악은 반란의 성패에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금원은 군사중심지이자 궁궐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유사시 금원을 이용하기 위해 궁궐은 도성의 중앙이 아닌 금원 가까이로 치우쳐져 있는 성원체제(城苑體制)가 형성되었다.이에 따라 시장의 위치도 달라졌다. 고대의 도성에서 시장은 궁궐의 뒤에 위치했다. 그 이유는 상업은 미천한 것이라는 유교적 관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세의 도성에서 궁궐은 도성의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그 뒤에는 금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탓에 시장은 궁궐 뒤편에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유목민은 본래 상업을 중시했다. 유목생산체제로는 얻을 수 있는 재화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에 다른 물자들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이를 위해 유목민이 주로 상업을 통해 물자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이어지면서 당대 도성에서는 시장이 궁궐 앞에 위치하였고, 시장은 2곳 이상 설치될 정도로 도성 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시장이 사람들이 주로 주거하는 곳으로 옮겨오면서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장안성의 동시(東市)에는 220개의 행(行)이 존재하였고, 장안성 서시(西市)에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들어온 식재료나 가죽 제품, 귀금속이나 보석 등이 판매되었다는 점에서 그 활기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도성구조의 변화는 호족(胡族)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 유입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호족의 문화는 내적인 구조 외에도 외적인 구조인 양도체제(兩都體制)를 형성하였다.2 때 양도체제는 지극히 유목적 요소가 반영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당대에는 장안성과 낙양성이 양도를 구성했다. 물론 장안성이 수도이고 낙양성이 부도(部都)이기에 위상은 장안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안성과 낙양성은 서로 주요 기능이 달랐다. 장안성은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다. 장안성이 위치한 관중(關中)은 관롱집단(關?集團)의 근거지였다. 또한 당대까지 왕조의 수도와 경기(京畿)의 경영방식은 거중어경(居重馭輕)이었다. 이 방식은 수도를 중점으로 방위하여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수도를 방어하여 기회를 노리는 방법인데,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관중이었다. 이러한 요소 외에도 장안이 유목지대와 정주지대의 접점에 위치한 도시라는 것이 또 다른 요인이다. 이 점은 장안이 내중국과 외중국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국내 통치와 국제관계의 정치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당대 장안의 경제기반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식량 공급은 물론이고 살림벌채, 토양 침식, 물 부족, 수로의 토사 퇴적 등의 문제로 관중이 점점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장안은 외부에서 식량을 수송해야 했다. 이 때 활용된 것이 바로 낙양성이었다. 낙양은 화북(華北)의 곡창지대와 대운하를 가진 인적 흐름, 물 흐름을 장악하는 요충지였다. 특히 대운하로 인해 들어오는 강남(江南)과 연결되어 있어 정치적 중심지인 관중과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 사이를 연결해주는 경제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낙양성은 장안성과 다른 구조를 가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안성은 궁궐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낙양성은 궁궐이 서북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러한 구조의 차이는 금원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금원은 중세 도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점을 고려해볼 때 대운하를 통해 올라온 물자가 금원으로 들어와야 했다. 낙양성의 서쪽은 도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낙수(洛水)와 황궁으로 들어가는 곡수(穀水)와 연결되는 지점이자 도랑(渠)을 통해 황하(黃河)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구낙양으로 순행(巡幸)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황제가 식량을 위해 지속적으로 낙양을 순행할 정도라면, 낙양을 경사(京師)로 삼는 것이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낙양은 계속 부도로 남아있었고 당이 멸망할 때까지 장안이 제 1의 수도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 때 측천무후가 천도를 감행한 목적은 2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북위 이후 동서분열로 인해 산동(山東)과 화북의 개발이 크게 진전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측천무후가 관롱집단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물론 정치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는 실패하였고 중국의 수도는 다시 장안이 되었다. 심지어 당 후기인 8세기 초에 조운체계의 개혁으로 강남과 장안을 직결하는 운송체제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장안과 산동·강남을 연결하던 낙양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이후 낙양은 더 이상 중심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왜 당은 장안성을 고집했는가? 관롱집단의 권력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무측천 이후에 다시 정치수도가 장안으로 옮겨갔다는 점에서 장안이 관롱집단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 단순한 추론인 것 같다. 장안은 점차 황폐화되어가고 있었기에 굳이 관롱집단이 장안 일대를 고수할 필요성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대의 중국이 북방 유목세력간의 관계 때문에 장안을 고수한 것으로 생각한다. 당은 내륙지향국가였다. 물론 당대에 해양무역의 비중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당의 황제는 천가한(天可汗), 즉 유목세계와 농경세계 모두를 거느리는 군주였다. 따라서 이들에겐 북방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이를 위해선 낙양보다는 장안이 더 효율적이었다. 특히 당 후기에 중국은 안으로는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에, 밖으로는 토번의 침공에 직면했다. 이 때 당 조정에서는 위구르를 원군(援軍)으로 끌어들였고, 위구르의 군사원조는 앞으로도 계속 되었다. 이에다.
    인문/어학| 2019.02.26| 7페이지| 1,0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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