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과 합리론의 비교,그리고 칸트의 비판적 합리론- 차 례 -1. 경험론- 경험론의 정의- 경험론의 역사- 경험론의 주요 사상가들- 경험론의 발전2. 합리론? 합리론의 정의- 합리론의 역사- 합리론의 주요 사상가들- 합리론의 발전3. 경험론과 합리론의 비교4. 칸트의 비판적 합리론1.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경험론의 정의경험론은 인식론에 있어서 지식의 기원을 경험에 두는 학설로 모든 지식의 근간이 되는 것은 경험의 축적에 의한다고 말한다. 인식·지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철학적 입장 및 경향으로 초경험적 존재나 선천적인 능력보다 감각과 내성(內省)을 통하여 얻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여, 전자도 후자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고방식이며, 지식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는 이성론·합리론과 대립된다.- 경험론의 역사근세 철학의 기초가 된 경험론은 영국에서 시작된 학설로, 그 역사적 형태에 따라 고대적·근대적 및 현대적인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원자론자, 소크라테스파(派)의 일부(퀴닉파·키레네파 등),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이 경향에 속하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성주의·초월주의의 경향과 대립된다.중세기의 유명론 등은 경험론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경향이 유력해진 것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경험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영국은 경험론의 전통에 있어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띤다.- 경험론의 주요 사상가들 (베이컨, 로크, 흄)경험론은 베이컨, 오컴 등에서 뚜렷하였으나, 영국 경험론의 진정한 기원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고, 연역적 추리에 대하여 개별적 경험에 근거를 두는 귀납법을 제창한 베이컨이다.이후 홉스를 거쳐 로크에 이르러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본유관념(本有觀念)으로 우리의 정신에 내재하는 불변, 공리적인 것을 나타내는 데카르트의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nativism)을 비판하여 모든 인식은 경험에 의해 백지 또는 암실이며,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하여 외적으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라고 하였다. 로크의 경향은 버클리와 흄으로 계승되어 영국 경험론의 트리오를 이루었다. 특히 흄은 추상관념을 비판하여 관념의 기원을 감각인상에서 찾음으로써 칸트로 하여금 이성론의 독단이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으나, 상대주의·회의주의적인 결과도 나타냈다.- 경험론의 발전19세기에 들어서는 밀 등도 영국의 고전경험론의 흐름을 따랐다. 경험론이라는 큰 조류가 볼테르를 거쳐 프랑스에 유입되자 프랑스 계몽사상, 특히 프랑스 유물론으로서, 근대 세계사를 비약적으로 전진시키는 일대 격류로 변모·발전하였다. 또 영국 경험론은 이와 같은 프랑스의 계몽사상이나 유물론과 합류, 봉건제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던 독일을 일깨웠다. 근대 경험론으로서의 영국 경험론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영국의 부르주아 라디칼리즘의 철학적 지주가 되었다.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럽 대륙에서 이른바 ‘과학의 철학’의 여러 조류에서 핵심적인 이론이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자 논리실증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한편 미국 대륙에 건너가서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형태로 이론적인 자체 강화를 이루어 오늘에 이른다. 이렇게 경험론의 전통은 헤겔 철학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붕괴 이후, 그 반동으로서의 유물론이나 실증주의의 움직임과 결부되어, 19세기~20세기에 서양에 확산되었다.논리실증주의·프래그머티즘·분석철학 등은 대표적인 현대 경험론이다. 예를 들면, 논리실증주의는 한편으로 사실적(事實的) 여건을 모든 경험과학 이론의 구성과 환원의 기초로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선천적 인식으로 간주되어온 논리학·수학 등의 필연성까지도 감각적 기호(記號)에 관한 약정(約定)에 뒤따르게 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위의 이원론(二元論)에는 비판적이며, 일원적 연속성과 행동심리학에 의한 인식의 동적인 파악을 강조하지만, 한층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2. 합리론[合理論 , rationalism인간의 이성(理性)이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의 학설이다. 참된 인식은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하는데 인간의 경험은 사실성만을 제시할 뿐 필연성이나 보편타당성을 주지 않기 때문에 참된 인식은 오직 이성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ㆍ논리적ㆍ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철학적 태도로, 이성을 통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견해다. 합리주의ㆍ이성론ㆍ이성주의라고도 한다. 모든 지식은 감각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실체 자체가 논리구조를 갖고 있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고 본다. 또한 수학적 인식을 원형으로 하는 논증적 지식을 중시하여 논리학과 수학을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한다.- 합리론의 역사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 법칙과 영원한 구조, 질서를 이해하려 했다. 철학사에서 최초로 이성의 통찰을 강조한 사람은 BC 6세기의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모든 것은 수(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수학적 법칙이 지배한다는 합리론적 관점을 가졌다. 지각을 초월한 이성적 통찰에 대한 찬양은 플라톤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는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가 감각 사물들과 어떻게 관련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는 이상적인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이 접근해가는 비감각적 목표라고 주장했다.아리스토텔레스도 비록 이데아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견해를 같이했다. 그는 이성적 설명의 주요수단으로 삼단논법을 개발함으로써 합리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이후 12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의 합리론과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하나의 조화로운 체계 속에서 결합하려고 했다. 지식이 이성적 능력을 소유한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합리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합리론의 주요 사상가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헤겔)대표적 학자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트는 진리 탐구의 방법으로 '방법적 회의'를 주장하였는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은 사유하는 자아의 자기확실성을 나타낸 대표적 명제다.스피노자 또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수학의 방법과 같은 엄밀한 방법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참된 지식은 수학적 필연성을 지니는 것이다.라이프니츠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처럼 수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는 무수히 많은 단자(monade)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자는 자신의 성질을 갖고 있는 실체라고 생각했다.헤겔은 절대적 관념론을 통하여 근본적 실재는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질은 그것의 한 현현이고, 절대정신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다.20세기초 영국에서는 브래들리, 미국에서는 로이스, 그리고 약간 늦게 이탈리아에서는 크로체에 의해 절대적 관념론이 꽃피었다.이외에 비록 영국 관념론의 몰락을 가져오긴 했지만 G. E. 무어의 소박한 실재론을 합리주의 진영에 포함시킬 수 있고, 당시의 관념론이나 실재론과는 전혀 다른 철학을 정초한 현상학의 후설이나, 미국의 블샤드도 합리주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합리론의 발전17세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도덕적 원리는 실재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리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결과보다는 의무를 중요시하는 의무론적 윤리학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행동의 어떤 유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명한 의무를 명증한 것으로 여겼다. 윤리적 합리론자인 무어 등은 영국의 이상적 공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행동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은 실재하는 선과 악의 결과(또는 목적)라고 주장함으로써 목적론적 윤리학을 내세웠다.종교적 합리론은 중세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대두되었다. 종교적 합리론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 교의 속에 모순이 존재하며 계시된 진리는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적 합리론은 16, 17세기에 들어서 과학적·철학적인 형태수학적 엄밀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천동설과 충돌했다. 뉴턴 등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확인한 것은 합리론의 역사상 이성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데카르트는 신학으로부터 철학적 의심의 산물인 합리론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작했다. 그는 진리를 계시가 아닌 인간 이성의 판단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볼테르·디드로 등의 합리론은 당시 종교적·정치적 전통체제를 공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슈트라우스는 복음서는 계시도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3. 경험론과 합리론의 비교구분경험론합리론공통점지성을 통한 새로운 지식과 진리의 발견사유와 지식의 근원후천적 경험선천적 이성지식의 획득 과정관찰과 실험논리와 추리방법론귀납법(induction)연역법(deduction)대표적 사상가베이컨, 홉스, 흄데카르트, 스피노자인식론이란 참된 진리가 무엇이며, 그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탐구방법이다. 그리고 경험론과 합리론의 구분은 인식론적인 구분이다.인식론적인 구분이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할 때 사실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경험론의 경우 지식의 원천 및 믿음을 참된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경험이라는 보는 것이고, 합리론의 경우 지식의 원천 및 믿음을 참된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성적-논리적 정합성이라는 것이다.영국의 경험론은 경험을 중시하는 학문방법론으로 경험적인 개별적 사실에 지식의 기초를 두고 추론하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고, 로크, 흄 등이 주장하였다. 반면 대륙의 합리론은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방법론으로 지식의 기초를 이성에 두고,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는 연역적 방법을 중시하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이 주장하였다.하지만 칸트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라며 경험론과 합리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직관에 의한 감성적 경험 과 지성에 의한 개념적 사고의 결합을 통해서 지식이 형성된다는 비판적 합리론합리론
『기독교 강요』 초판 헌사 요약 및 느낌- 요한 칼빈 지음. 김광채 옮김 -- 차 례 -○ 헌사 요약1. 이 책의 저술 동기2. 박해받은 개신교도를 위한 탄원3. 적대자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새 것, 불확실한 것이라 비난하고, 기적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에 대한 논박4. 교부들의 가르침이 종교개혁에 반대된다는 그릇된 주장5. 진리를 반대하고자 관습에 호소하는 반대자들6. 교회의 본질에 대한 오해7. 개혁교리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주장8. 왕에 대한 권면과 소망○ 헌사에 대한 소감○ 헌사에 대한 요약1. 이 책의 저술 동기이 책의 집필 시 폐하께 헌정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다만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불란서 사람들의 믿음을 돕기 위함이며, 신실한 신앙인들이 악하고 광포한 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바, 폐하에게 우리의 신앙을 보여드리겠다.우리 적대자들의 음모와 거짓으로 억압당해 왔던 우리의 교리에 대해 변론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폭력이며, 반역의 누명을 씌우는 것은 사술이다. 우리의 교리가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교란한다는 등의 비방에 대하여 재판석에 앉은 자들은 잘못된 편견으로 판결하면서 정죄 받은 교리를 믿는 것이 죄라고 하지만 우리 교리가 정죄 받은 근거는 없다.2. 박해받은 개신교도를 위한 탄원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철저한 심리를 해 주십시오. 이 탄원이 나 자신의 귀국을 위한 것은 아니며, 몇몇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대의가 폐하의 왕국에서 유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횡포에 맞서 교회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들은 없었고, 다만 무지한 자들의 오류를 이해하여 주어야 한다는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오류로 말하는 자들은 있었다.진정한 왕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죄인들이지만 우리의 교리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우뚝 솟아야 한다. 이는 이 교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은 사특하게 왜곡시키지만 이는 악의에 찬 모함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서를 읽어 보면 판단하실 수 있다.우리의 성경해석을 바울의 신앙규준에 따라 평가한다면 승리는 우리 장중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덕으로 옷 입혀 주시고, 죄의 종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 많으신 아버지라 확신하는 것,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 가운데 안식을 누리는 것 등이 믿음에 합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 우리를 공격 하는바 사슬에 매고, 때리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고문을 하며, 극도의 모욕적인 취급을 하고 있는바 왕께서 두루 살펴주시기 바란다.우리의 반대자들은 교회의 수위권과 교회에 반기만 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모욕당해도 가슴 아파 하지 않으며, 미사나 연옥이나 순례 등과 같은 사소한 것에는 독하게 싸우면서 ‘명시적인 신앙’ 없이는 참된 경전에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함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오직 자기 배 채우는 일이나 왕권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3. 적대자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새 것, 불확실한 것이라 비난하고, 기적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에 대한 논박저들은 우리의 교리를 새 것이나 근자에 생긴 것으로 조롱하며, 무슨 기적을 통해 이 교리가 확정 되느냐며, 교부들의 합의한 내용과 반대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그러나 첫째, 저들의 입장에서 새 것으로 보이는 우리 교리는 인간의 불 경건으로 감추어져 있던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이며둘째, 우리 교리를 불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저들의 무지로 인함이며셋째, 예전에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진리임이 확정된 그 복음을 굳게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몰지각한 것이다. 또한 기적은 사단이 몽매한 자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마 24:24)4. 교부들의 가르침이 종교개혁에 반대된다는 그릇된 주장넷째, 저들은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하지만 교부들의 권위에 의거한 논쟁이라면 승리는 우리 편이다.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교부들의 경건한 후손임을 자랑하면서도 교부들의 오류와 실수를 상찬하는 일만 하지만, 우리는 교부들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며, 우리는 교부들의 저술을 취급하는 기준이 ‘만물이 다’(고전 3:21) 우리를 섬기기 위한 것이지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그들은 솔로몬이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잠 22:28) 명한 것을 토지와 신앙의 경계에 동시적으로 적용하면서도 교부 암브로시우스의 말에 반하여 성전을 금, 은, 보석 등으로 사치스럽게 꾸몄으며, 육식하지 않는 날 자유롭게 고기 먹었던 어느 교부(카씨오도어의)가 있었지만 저들은 사순절동안 고기를 맛본 사람을 저주한다. 어느 교부는 일하지 않는 수도사를 포행자라 했으나 저들의 수도사들은 매음굴에 구르며 남의 재산에 의지에 포식하였고, 교회당의 성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교부의 말에 반하여 교회당을 성상으로 채웠고, 죽은 자들을 편히 쉬게 내버려 두라고 말한 교부의 말에 반하여 죽은 자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계속 주입하고 있으며, 교부들 중에 성찬시의 떡을 몸의 신비일 따름이라 말하지만 저들은 화체(化體)가 일어난다 하고, 겔라시우스와 퀴프리안이 인정하지 않았던 성찬에 관한 의식을 법으로 제정하였으며, 확실한 성경적 근거에 의해서 판단할 것을 주장한 교부의 뜻에 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수많은 교회법령들을 만들었으며, 금식법을 강요한 몬타누스를 비판한 교부(아폴로니시우스)가 있으나 저들은 엄격한 금식법을 만들었으며, 교회사역자들의 결혼을 인정한 교부가 있지만 저들은 독신을 요구하며, 저들은 자기네와 다른 사람들 위에 그리스도 이외이 다른 선생을 세우는 것 등으로 지계표를 넘고 있다. 저들은 교부들의 멍에를 떨쳐 버리면서 우리에게는 지계표를 침범한다고 하고 있다.5. 진리를 반대하고자 관습에 호소하는 반대자들다섯째, 저들은 관습이란 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사람의 판단이 올바를 수 있다면 선한 관습이 기준을 제공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개인적인 악덕이 모여 악덕에 대한 공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일이 많이 있으며, 이에 대항하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같은 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의 진리만 청종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지 말며’(사 8:12)라고 악한 자들의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하였다. 온 세상이 악을 모의하고 잘못된 관습이 퍼진다 해도 그들의 결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노아의 실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6. 교회의 본질에 대한 오해여섯째, 저들은 ‘양도논법’으로 우리를 압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는 분명히 살아있으며,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그리스도는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전쟁하지 있지 않다. 저들은 교회의 형체는 항상 드러나는 것이며, 그 형체는 로마교회의 감독과 성직자들이 앉은 자리에 나타난다고 하지만, 우리는 교회는 외견적인 형체 없이도 존립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선포하고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곳이다.우리의 반대자들은 사도의 지위에 있는 로마 교황과 감독들이 교회를 대표하는 목자들이고 주님께 성별(聖別)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론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목자들이었으나 금송아지를 만드는 오류를 범하였으며, 아합 왕을 속인 400명의 선지자들도 교회를 대표했으며, 예레미야에 맞섰던 선지자들도 교회의 이름과 외견을 지녔으며, 그리스도를 죽일 모의를 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외화(外華)가 번뜩였다. 저들은 정당하게 두 사람의 교황에 의하여 소집되고 외적인 위엄 면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었던 바젤 공회의를 부정하고 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교회를 파괴하는 무서운 역병이었지만 ‘교회’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을 과시하고 있다.폐하께서 우리글을 보시면 저들의 교리가 영혼을 파괴시키는 고문실이고, 교회를 불태우는 폭발물임을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7. 개혁교리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주장끝으로, 개혁교리 때문에 수많은 소요와 난동과 분쟁이 일어났다는 저들의 책임전가는 부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할 때는 사탄이 결코 잠잠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자 거짓교리를 구분하는 믿을만한 표지이다. 거짓교리는 사람들 귀에 받아들여지기 쉬워 세상에 쉽게 퍼지며 사탄은 두 가지 방법, 즉 참된 씨앗을 폭력으로 제거하거나 자기에게 있는 가라지를 동원하여 진리의 싹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주께서는 우리에게 사탄의 궤를 방어할 수 있도록 무장시키셨다.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여, 네냐?’(왕상 18:17)는 질문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는 ‘백성을 소동케’(눅 23:5)하는 자라 여김을 받았고, 사도들에게는 백성을 ‘소요케 하는 자’(행 24:5)라는 비난을 받았다. 모든 소요와 분쟁을 우리 탓으로 돌리는 저들에게는 그릇된 것을 퍼뜨리고 난동을 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고 저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는 자들이라는 엘리야의 대답을 가르칠 뿐이다.사도된 베드로와 바울도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고 바울이 세운 교회를 파괴하고 다툼이 일어나게 하는 자들에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눅 2:34) 입었다는 말씀을 도움 받아 담대하게 전진하였다.8. 왕에 대한 권면과 소망왕이여 저들의 근거 없는 참소에 성심을 요동치 마시오. 우리가 혐의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는 반역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으며, 우리는 폐하의 통치아래 조용한 삶을 추구하고 망명생활 중임에도 폐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혹여 우리의 행실이 책망 받을 만한 것은 있을지 모르나 이처럼 엄청난 핍박을 받을 만한 악은 행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저들 반대자들에게 모든 덕의 모범이 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개혁주의 종말론 강의』독서보고서- 차 례 -○ 본서의 요약제1장‘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제2장‘이스라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제3장‘중간 상태’제4장‘그리스도의 재림’제5장‘재림을 지칭하는데 사용된 용어’제6장‘적그리스도와 대환란’제7장 부활과 휴거제8장 심판제9장 하나님의 나라* 부록‘최근의 종말론 연구’ - 안토니 후크마 -○ 본서가 주는 몇 가지 논점들본서는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이자 개혁주의 신학자로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조지 E. 래드(G. E. Ladd)가 집필하고 국제신학 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가 번역한 것으로 번역자의 표현대로 본서는 종말론 강의의 듣기와 정리와 설교에 많은 도움을 주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여기서는 먼저 본서에 대한 요약과 함께 본서가 주는 몇 가지 논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요 약제1장‘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먼저 방법론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성경은 예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과 교회를 위한 두 개의 계획을 가졌다는 해석 체제인 세대주의 해석과 모든 성경 해석은 신약 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언약 신학적 해석의 차이점을 대비시키면서 저자는 자신의 귀납적인 성경연구에서 나온 확신에 따라 언약신학을 지지한다고 밝힌다.이어 성경적 기독론을 개관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새로운 계시의 담지자였고, 그는 참된 메시아로서 다윗가의 왕이셨으며, 또한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셨지만, 그러나 그의 사명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다윗가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사람들을 죄의 멍에에서 구출하는 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 예언들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의 빛 아래에서 재해석하였으며, 이는 정복하는 어린양에 대해서‘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 이라고 언급하는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분명해진다고 보았다.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됨의 새로운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가셨지만 구약에서는 이런 메시아적 통치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없다. 구약에서는약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네페쉬’의 의미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을 지칭할 뿐 아니라, 식욕과 욕망의 자리와 감정과 사상을 지닌 자아(自我)를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은 사람이 육체라는 낮은 부분과 영이나 혼이라는 높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는 않으며, 사람은 스올로 내려간다고 한다. 이 스올은 무덤과 동일시되지는 않으나, 땅 아래 있는 깊은 곳으로 생각되며, 대체적으로 죽음과 동의어로 보인다며 장소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존재의 상태라고 진단한다.신약의 경우 사후의 존재 문제로 누가복음 16장의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는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 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당대의 개념에 기초한 비유임을 알 수 있으며,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의로운 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거주하는 축복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4 에서 하나님의 거주지를 ‘낙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결국 신약 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으며, 불의한 자들의 사후 상태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빛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신자들이 사후에 그들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제4장‘그리스도의 재림’저자는 히브리적 이원론은 비록 이 자연계가 잘못된 것이 있을지라도 이 세상은 그 본질에 있어서 선하며 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고 영혼을 개발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로 사람에게 오심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희랍적 사고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신에게 가야 하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려오신다는 것이다.구약론지을 수 있다. 휴거와 대 환난의 시작에서 도입되는 전 시기(全時期)를 포괄 한다는 것이다.재림을 지칭하는데 사용된 둘째 단어는‘계시’(나타나심)를 의미하는‘아포칼 립스’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그리스도의 아포칼립시스 또는 ‘계시’가 교회의 휴거와는 구별되는 것이며. 따라서 환난 끝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실 때를 의미한다고 본다. 세대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아니라, 휴거를 기다린다.재림을 지칭하는 세 번째 용어는‘나타남’(manifest-tation)을 의미하는 ‘에피 파네이아’이다. 세대주의적 구조에 의하면 이것은 교회의 휴거나 환난이 시작될 때의 그리스도의 은밀한 임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끝의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것 을 의미한다.저자는‘파루시아’나‘아포칼립시스’, 그리고‘에피파네이아’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이들은 모두 하나이고 같은 사건이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의 ‘강림’(parousia)은 그의 귀환(return)이고, 그의 귀환은 그의 임하심 (coming)이며, 그의 임하심은 그의 재림 (second advent)인 것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을 지시하는데 사용된 용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둘이라거나, 그 재림이 두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성경 용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하며 나눌 수 없으며 영광스러운 사건일 것임을 확언해 준다는 것이다.제6장‘적그리스도와 대환란’본서가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세대주의와 복음주의에 대한 비교를 한층 더 선명하게 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 9장 및 11장 등에 대한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로 해석하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메시야적 해석에 비중을 두고 있다며, 대환란에 대해서는 환란 전 휴거와 환란 후 선택자들을 모으신다는 것에 대한 양쪽의 견해를 함께 다루고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단 9:24-27을 적그리스도와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로 해석한다. 이장사 지낸바 된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동일성(identity)과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감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신체의 형태로 부활하셨다는 연속성(continuity), 그리고 비록 육체적 부활을 하셨지만 그 신체는 이전과 똑 같은 신체는 아니다는 비연속성(discontinuity)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이 경험했던 그리스도의 신현은‘객관적 환상’으로 이해돼야 하는 반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희망 이상의 한 사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 함은 우리의 부활을 확증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그의 부활과 같을 것임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제8장 심판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개별적인 책임이 있는바 심판의 날에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때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5:13)심판과 관련해서 우리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만 진노는 반드시 종말론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심판의 날엔 사면과 정죄의 이중적 사역이 있을 것으로 본다, 사면에 대한 성경의 통상적인 용어인 칭의(justification)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하여도 종말론적 심판은 따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구원받은 신자가 성령의 열매로 행한 선행에 대한 것이다.신약 성경은 악한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의 주님 앞에서 쫓겨나 영벌에 들어가는 최후 정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미 종말론적 심판을 받아 천상(하늘)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천년왕국 후의 최후의 심판은 흔히‘백보좌 심판’(계20:4)이라 불리는데 이때는 이중의 심판 기준이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두 시간의 중간’에 살고 있는바, 우리는 이 악한 세대와 오는 세대가 겹쳐진 새로운 세대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를 예수와 오순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라고 한다.* 부록 ‘최근의 종말론 연구’ -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은 흔히 3가지 입장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현재적 종말론, 다른 하나는 미래적 종말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미래적 종말론이다. 안토니 후크마는 이 입장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왕국의 현재적 상태,‘이미’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수립될 왕국의 완성된 상태인‘아직’사이의 구별을 가지고 있는 현재-미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는 본 장에서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넘어 오면서‘종말론’에 관한 신학적 연구의 흐름을 신학자별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인 면들을 거부했던 알브레히트 리츌과 그의 견해를 계승하여 하나님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각 개인들의 마음속에서의 통치라고 주장한 하르낙,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리츌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하나님나라를 미래적인 실재로 기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미래 종말론을 중심으로 이해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던 바이스, 그리고 예수는 파르시아가 일어날 것과 그 나라가 그의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여행을 마치기 전에 임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렇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이 소위‘연기’되었다고 믿었던 슈바이처의 바이스에 대한 비판을 통한‘철저 종말론’주장 등을 소개한다. 특히, 슈바이쳐의 철저종말론은 자유주의 기독론을 수반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이었던 찰스 해롤드 다드의‘실현된 종말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에 대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동의하면서도 일부 문제점에 대해 비평을 가하고 있다. 그는 토마스 F.토렌스의 ‘실현된 종말론은 이미 요한 칼빈(John Calvin)에게서 발견된다’는 지적으로 다드가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나라의 나타남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현재 속으로 들어왔음을 극적으로 강조했다고 하더
“낮은 자존감 극복을 위한성경적 대안”들어가는 말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가? 그렇다고 대답해야 옳은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신앙의 연륜이 30여년을 넘어서는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앙생활과 신앙인의 행복지수는 꼭 정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신실한 신앙생활, 즉 주일성수와 기도와 찬송과 성경묵상과 전도활동과 교회 봉사활동의 참여와 교회기관 활동의 참여 등으로 분주하고 열심 있는 신앙 활동을 해보지만 언제나 부족한 모습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허전함이 밀려들곤 한다. 내가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른 것인가? 내가 이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어느 부흥목사님의 말씀대로 천국 들어가서 개털벙거지라도 쓸 수 있을까? 급기야 천국 문 앞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닌가?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신앙적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더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어느 장로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역시 나와 비슷한 신앙적 고민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분은 평소 교회에서도 조용하시고 겸손하시며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본을 보이고 계신분이셨다.다행히 나는 목회상담 수업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대부분 낮은 자존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낮은 자존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본 논의도 이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본 논의는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낮은 자존감이 신앙생활에 이와 같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의에서는 자존감에 대한 정의와 분석을 하고,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우리 생활과 신앙 활동에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고,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신학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보고 성과 자기부정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성서의 인간이해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인간의 완악함과 죄 성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창세기1장은 "하나님의 형상"과 "구속"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들을 찾아와서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인간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파악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성서가 말하는 자존감의 근거인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병들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겨 사랑하시고 구속하시기에 존귀하다는 것이다."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29)는 성경말씀 속에 자기사랑의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는 트로비쉬(W. Trobisch)는 "결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 없이 이웃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4)이라는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의 자존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말이다.Anthony Hoekema 교수도“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높은 자존감을 가지라고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다.James Dobson은 열등감, 즉 낮은 자존감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전염되고 있는 심리적 전염병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는 부부관계를 포함하는 대인관계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이기도 이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존중감, 자기를 사랑하고 가치 있다고 느끼고 싶은 기본적 욕구를 주셨음을 깨달아야 한다며, 자존감성이 높고, 동조할 가능성이 낮고, 생활에 더 만족하고, 하나님과 더 긍정적인 관계를 누릴 가능성이 있다.2) 낮은 자존감의 증상낮은 자존감을 갖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상들로 칼슨의 경우 '죄책감'을 특별히 강조하고, 김중술도 다양한 증상들 즉, 허풍이나 과장, 남을 비판하는 것, 자기합리화, 완벽성, 수줍음과 소심함, 자기평가절하, 분노 등을 말하고 있다.Laura Mattis 은 우울증, 불안, 죄책감 또는 수치심, 거절에 대한 두려움, 쓴 뿌리, 우유부단,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눈치 보는 생활, 모호한 정체감, 방어적 자세 및 비판에 민감, 고집 셈, 수줍음, 알코올 및 마약남용, 성적 문란, 습관적 과로, 학습부진, 거식 및 포식 증, 탐욕,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신감 부족, 깊은 차원의 대화를 할 수 없음, 신체적 언어적 학대, 의심과 질투와 불신, 사랑이나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함, 사회적 사교기술의 부족,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을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낌,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을 믿기 어려움 등이라고 한다. (Laura Mattis, 1987)나다니엘 브랜든은 그가 40년 동안 상대한 내담자들 중에 공통분모를 찾아보다가 사람의 불평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언제나 더 깊은 문제; 즉 부족감, 만족스럽지 않다는 감각, 죄책감, 수치심 또는 열등감, 분명한 자아용납과 자기신뢰 및 자아사랑의 결여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며 이는 자존감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나다니엘 브랜든, 1994)그리고 낮은 자존감은 극심한 불안, 대인관계상의 부적응, 충동적 과식, 학업성적 부진, 부정행위, 우울증, 비행, 음주, 알코올 중독, 십대임신 등의 원인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Les Parrott)이러한 낮은 증상들은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동원은 이런 증상들이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고, 삶의 순순한 동기를 파괴하며,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끔 자녀를 나무라거나 호통치고 용서하지도 않는 변덕스러운 성격에 따라서 심리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피해는 순간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부모들의 다음과 같은 태도는 자녀들의 열등감을 오래가게 만든다.? 반복적으로 비난하고 창피를 주고 거부하고 호통을 치는 경우? 빈번하게 다른 아이들이나 형제자매들과 비교하여 부족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경우? 자녀들의 실패와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는 경우? 자녀의 행동이나 일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묵살해 버리는 경우? 비현실적인 기준이나 목표를 정해준 경우? 반복적으로 거칠게 처벌하는 경우?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의 어리석고, 부족하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 부적절하거나 지나친 방법으로 지적하는 경우? 자녀들이 골치 아프게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경우? 자녀를 잘 안아주지 않고 애정이 담긴 신체적 접촉이나 그 밖의 사랑 표현을 하지 않는 경우? 자녀의 자립에 방해가 될 정도의 과보호나 지배하면서 자녀가 혼자 하려는 것에 대해서 부모가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 자녀들이 하는 일을 항상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늘 고함지르는 경우*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의 여섯 가지 반응(1) 움츠러든다(I will withdraw)(2) 반항하며 싸운다(I will fight)(3) 현실을 도피한다(I will deny reality)(4) 동료의 압력에 순응한다(I will conform to peer pressure)(5) 어릿광대가 된다(I will be a clown)(6) 보상한다(I will compensate)6. 낮은 자존감과 신앙과의 관계이렇게 다양한 영향들을 원인으로 하여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삶의 순수한 동기를 파괴하며,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꿈을 파괴할 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은 신자의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하는 부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과정에서 이들의 사고 속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의 왜곡을 익히게 된다.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사고의 왜곡을 불러와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신앙생활도 강박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적인 관념에 의한 신앙생활은 남들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함이 없으며 "아직도 부족해"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7.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기독교적 상담하기낮은 자존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있고 가치 있는 삶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된 관계를 만들어 사람을 고립시킨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력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심리학적 통찰력이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문제와 삶의 방향과 삶의 목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등 영적인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때문에 낮은 자존감을 치유하는 근원과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펴보면서,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독교적 상담의 과정 제시해 보고자 한다.1) 진심으로 지지해주고, 수용하고, 인정하기보통 자신의 자존감이 낮다는 발견을 하게 되거나, 또는 지적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기보다 부인하거나 회피하려 한다. 또 낮은 자존감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거나 긍정해 주는 표현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퉁명스럽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려는 경향이 있다.이와 같이 반응하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완고함 때문으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한 감정과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어린 시절에 약간은 긴장되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성인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가정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이유이다. 따라서 상담자는 공감적인 이해와 따스함, 관심, 존중, 다.
칼빈의『기독교강요』4권독서보고서* 본 독서 보고서는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4권(최종판, 원광연 옮김)을 읽고 나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한 것이다.- 차 례 -1. 칼빈의 사역자를 세우는 정당한 질서에 대한 권면은 한국교회의‘교회세습’사태가 우리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깨닫게 한다.2. 칼빈의‘교회재산의 용도’에 대한 바른 권면은 비계덩이로 살찌워진 많은 한국교회들에 ‘메스’를 들이대도록 촉구하고 있다.3. 칼빈이 말하는‘거짓된 공의회’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 총회들과의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4. 칼빈의 여자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견해와 여자는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한 소견.5. 성만찬에 대한 칼빈의 견해와 그의 현대적 적용을 위한 제언1. 칼빈의 사역자를 세우는 정당한 질서에 대한 권면은 한국교회의‘교회세습’사태가 우리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깨닫게 한다.본서 4.3‘교회의 교사들과 사역자들: 그들의 선출과 직분’을 보면 교회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라고 한다.(4.3.1) 그리고 그들을 세움에 있어서는 오직 건전한 교리와 거룩한 삶이 있는 자들을 택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들을 세울 때에 금식과 기도로 임했다는 사도행전 14:23 을 통하여 최고의 두려움과 신중을 기하였다고 한다.(4.3.12) 그리고 유다를 이은 사도를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움을 받기 위하여 주께서 제비를 통해서 선언하시도록 했다고 한다.본서는 이어서 4.3.15‘회중의 선출’에서 누가의 기록(행 14:23)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거수(擧手)로 택하여”라고 기록하여 그것이 투표를 통하여 진행되었음을 진술하고 있으며, 이는 헬라의 선출 관습과 마찬가지로 무리들 전체가 손을 들어 의견을 표명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 성도들의 투표를 통해서 감독을 택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을 보게 된다며 이는 레위기인 제사장들의 경우에도 위임되기 전에 여호와의 명령에 의하여 그 당사적인 영감과 혜안을 가지고 있던 칼빈인들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도바울도 아니면 그 어느 사도들도 수 천 년이 지난 후 동방의 어느 한 국가의 교회들에서 나타날 ‘참으로 나쁜’사역자 세움의 방법을 예상했겠는가? 다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측하기를 목자 또는 사역자들이 교회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될 것임을 우려하셨고,(마 24:11,24; 행 20:29-30; 딤전 4:1 등) 칼빈은‘그들을 살펴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본서 4.9.5) 이라고 한다.본서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한국교회의 교회세습목사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심각하고도 엄중한 경고이자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해결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2. 칼빈의‘교회재산의 용도’에 대한 바른 권면은 비계덩이로 살찌워진 많은 한국교회들에 ‘메스’를 들이대도록 촉구하고 있다.본서 4.4 ‘고대 교회의 상태와 교황제 확립 이전의 교회 정치의 형태’중 4.4.6 교회재산의 용도에 대한 칼빈의 목소리는 현 한국교회가 ‘거짓 교회인지 참 교회인지’(본서 4.2)를 구별하는 표지로 작용하고 있다면 무리인가?칼빈은 교회재산의 용도에 대하여 우리는 대회들의 법령과 교부들의 글에서 땅이든 돈이든 교회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이라고 언급한다며,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자기들의 재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위하여 지정된 재물’을 다루는 것으로‘그것들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거나 낭비하게 되면 피를 범한 죄를 짓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하였다며,(4.4.6) 본서 4.4.7에서 칼빈은 교회 수입의 용도로 네 가지를 구분한다.‘성직자를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교회건물수리를 위하여, 그리고 해외와 국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이다. 교회 수입의 50%를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말이다.본서는 교황제 확립이전의 교회에서는 교회에 헌납되는 돈이 아무리 필요한 데가 있어도 여전히 가난한 자들는 사랑의 음성임도 동시에 듣게 된다. 그리고 나의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치밀어 오는 감동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와 깊은 탄식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성찰케 하고 있다.왜 한국 교회에 이런 숭고하고 바른 목회자는 없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진정 암브로시우스나 아카시우스 등과 같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바른 사역자가 왜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레고리우스나 칼빈이 말하는 교회재물에 대한 바른 사용을 보여주는 교회가 우리 한국에서 불가능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요인들로 목회자 자신의 문제와 함께 제왕적 목회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측근 장로들의 사욕이 어울러 지고 여기에 생각 없이 목회자를 따르는 것이 바른 신앙적 태도임을 고집하는 교인들의 맹목성이 빚은 결과이다. 그리고 더 근저에는 우리가 사는 현재의 사회체제가 자본주의(資本主義)체제라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라고 보여 진다.자본주의는 자본이 주인이 되는 사회경쟁체제다. 자본을 형성하고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되 철저한 경쟁과 사적이익을 보장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도 특정 인간들 이 돈이라는 자본을 주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자기 것이 되는 순간 주인이신 하나님도 어찌하지 못하는(자본주의체제 내에서는) 사유물이 된다. 처절한 경쟁에서 탈락되면 그들은 곧바로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자들이 된다. 그래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다. 부자들의 배려와 적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사탄의 도구이다.그러나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은 신본주의(神本主義)자들이다. 하나님주의자들이다. 자본(맘몬, 物神)을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거나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도리어 이 자본의 거대한 맘몬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도 장로들도 일반 교인들도 모두가 맘몬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교회에 자본, 즉 금이나 은을 쌓아 놓으려고을 묻거나 한 적이 없다) 보수와 친미와 친 우익적적 정치색깔과 일제강점기를 ‘민족 근대발전시기’로 정신대를‘자발적 매춘’으로 왜곡하고 있는 친일 뉴 라이트 단체와의 친밀성, 그리고 호전적 대북관과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경쟁을 통한 사회질서 확립(특히,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 등으로 한국의 부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색깔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한기총에서의 사회적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들은 곧바로 한국 교회의 대표적 입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들의 견해들이 대부분의 뜻있는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거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으로 바르게 검토된 견해들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는 것이다. 주로 대형교회나 보수적인 입장에 치우진 견해들이 성경적, 신학적 검토 없이 발표되고 이에 따른 지탄이나 비난은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한편, 한기총의 입장이 진정한 의미의 보수적 입장이냐의 문제도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면 보수적이거나 보수주의적이라는 바른 의미는 테두리내의 지속적 개혁을 전제하지만 한기총은 그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기총에서 나오는 견해들도 확고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특정 정치집단과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것들이 눈에 띤다. 예를 들면 대북정책에 대한 문제 등이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민족 문제에 있어서 민족주의적 색체를 드러내야 하지만, 한기총은 거꾸로 친미 사대성을 드러내면서 진보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진보적 교단인 NCC 등이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이다.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의 아이러니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성향이 친일과 친미 사대적, 친 재벌과 친 부자적 성향을 띠는 이념적으로는 잡탕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본서 4.9‘공의회들과 그 권위’를 읽으면서 계속하여 한기총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이 지나친 나의 비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칼빈이 본서를 쓸 때의 주요 타깃은 당연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과 주교들과 주요 감독들로 이루어진 공의회를 말하고4.9.7) 같은 것이라고 한다.이러한 칼빈의 견해에 따라 오늘 한국 교회의 교단이나 총회들 또는 한기총이 성령님의 권위가 함께하는 공의회가 되는지는 그 총회의 결과물을 검토하여 그 결과들이 올곧게 성경적인가를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다.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함몰되어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나 비대한 교회의 치부를 못 본체하는 교단과 총회들의 결과물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고 그 총회와 공의회에 성령님의 권위가 함께하지 않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인 것이다.4. 칼빈의 여자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견해와 여자는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한 소견.칼빈은 본서 4.15.21에서 여자는 세례를 베풀 수 없는 근거로‘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아야 하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베풀 수도 없으며, 여자는 남자의 직무를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도 안 되고, 사제의 직분은 더더욱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타툴리안의 말을 빌리면서, 마르키온(Marcion)이 여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비판하는 에피파니우스와 견해를 같이한다며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계속이어서 4.15.22 에서 여자에 의한 세례를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인 십보라의 예에 따르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한다.그러나 칼빈의 논의에 있어서 십보라의 예를 따라서 여성의 세례 베품을 주장하는 입장을 반대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문제는 칼빈의 여성의 세례 베품에 대한 반대 근거가 성경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가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우리도 목회자가 아닌 여자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마땅히 거부되어야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여자가 목회자였을 때에는 당연히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입장에 동의하여야 할 것이다.따라서 본 건에 대한 문제는 여자가 목회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고 보여 진다.우리는 여기서 본서 4.3.1에서 논의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명제와 본서 4.3.12 의 사역자의 자격에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