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Ⅳ. 독일의 근대건축운동(Modern Movements in German Architecture)[ 제 8장 . 독일 표현주의 건축 : 실패한 유토피아 ]1. 개관 : 반 근대의 표상 ? 표현주의(Expressionism)2. 독일표현주의 건축의 배경과 주변(1) 세기전환기(2) 제 1차 세계대전 이후3. 독일 표현주의 건축의 조형(1) 조소적인 조형(2) 규칙적인 패턴에 의한 표층적인 조형(3) 결정과 유사한 조형(4) 화장조적벽돌에 의한 조형4.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조형이론5. 독일 표현주의 건축의 종언1. 개관: 반 근대의 표상-표현주의(Expressionism)표현주의란 1900년대 초기부터 1920년대 말에 걸쳐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예술사상을 총칭한다. 표현주의는 음악, 문학, 연극, 영화, 건축 등 여러 예술영역 전반에 걸친 혁신적인 경향이었다. 단, 이 현상은 하나의 통일된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양예술사조의 큰 흐름에서 보면 어떤 공통적인 특질이 나타난다. 결국 란 외계의 “인상(Impression)”에 기초를 둔 와는 달리 인간의 “내면 표출(expression)”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게된다. 즉,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와 대립개념이며, 서양예술사조에서 이후 예술동향의 가장 나중에 위치하며, 1920년대 후반에 등장한 나 의 초창기를 형성하고 있다.표현주의(Expressionism)라는 말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에 대치되는 사조의 개념으로 독일에서는 1911년 베를린의 분리파전 출품에 대해 W. 보링거가 처음 사용하였다. 1914년 이전까지 아방가르드 운동은 유겐트 스틸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후 10여년 간은 표현주의와 중첩된다. 당시는 여전히 절충주의적인 빌헬름 양식이 있었고, A. 메셀의 (1869), 피터 베렌스의 베를린 (1909-10), 테오도르 피셔의 (1911), 파울 보나츠의 (1913-17)과 같은 적인 작품으로부터 표현주의는 시작되었다. 유겐트 스틸에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인상주의가 실은 연실의 모순에서 눈을 떼고 허구를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인간이 소외된 근대세계에 대한 저항을 “표현”이라는 미적 실천을 통해 수행하려했다는 점에 표현주의의 본질이 있었다.따라서 표현주의는 그것이 전개된 도시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건축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한편, 다른 예술과 달리 건축은 현실사회에 강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표현주의를 숭상하던 건축가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게 되었다.2. 독일표현주의 건축의 배경과 주변이상과 같은 조형이 나타난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의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부터 독일 혁명을 거쳐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전쟁의 위기감과 어려운 경제상황하에서 혁명에 의한 구체제의 붕괴와 신질서 도래의 예감이 떠돌았던 시대였다.(1) 세기전환기19세기 세기말적 상황은 여러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비관적이고 허무적인 정신상태를 가져다주었다. 표현주의라는 예술사조가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보불전쟁(1870-71)에서 승리한 독일제국은 외견상으로는 국력의 정점에 달해 있었다. 전신기술의 실용화와 기차, 기선, 자동차의 발전 이외에도 엄청난 발명, 발견이 있었다. 그러나 비약적으로 성장한 독일의 산업력을 배경으로 도시에 집중된 인구는 열악한 생활환경과 사회병리를 야기하고 있었다.이와같은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인간사회의 진보, 발전을 신뢰하는 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사회의 배후에 잠재된 모순을 느끼며, 근대화의 결실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가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도 있었다. 이러한 인식들은 그리스도교적인 과거의 윤리관이나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회의, 또는 속류시민 모델에 대한 혐오, 그리고 관능적 도취에 대한 동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이러한 분위기에서 힘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은 니체와 베르그송의 이었으며, 슈타이너의 인지학 아니라, 예술을 근거로 건축의 변혁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저변에는 세기전환기에 배가된 반근대를 표방하는 정신이 있었다.(2) 제1차세계대전 이후제1차 세계대전은 표현주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국제적인 균형의 붕괴가 표현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정치적 차원을 초월해 세계질서의 개혁의 조망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세계대전 전애, 독일 제국주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3국의 격심한 군비경쟁을 배경으로 고립과 위기감을 높이고 있었다. 1918년 8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동자계층도 제국주의적 국수주의의 애국적분위기에 젖어들어 제2제정과 거국일치의 분위기로 돌아섰으며,내셔널리즘에 박차를 가했다.개전 당초 다수의 지식인들은 전쟁의 발발에 영합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모순과 악폐로 가득찬 현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불가피한 시련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1911년에 창간된 정치, 문학, 예술을 위한 주간지인 과 같이 반전 태도를 보인 그룹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그 저변에는 정신의 변혁과 사회의 변혁을 의도하고,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는 과격한 유토피아 사상이 공유되고 있었다.그러나, 세계대전이 장기화 총력화해 감에 따라 전선의 참상과 국민들의 식량부족과 인플레가 민중의 불만과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1917년에는 독일에서도 데모와 같은 과격한 행동이 고양되고 있었다. 총력을 다한 서부전선에서의 총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패전을 맞게 되었다.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가 단독 휴전한 후 곧이어 독일도 휴전 조건에 조인하게 됨에 따라, 4년 3개월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전쟁을 비판하고 평화를 추구했던 노동자와 군인들에 의한 11월 혁명으로 제2제정이 붕괴되고 1919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립되었다.독일 혁명에 의해 각지에서 노동자, 군인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직접민주주의의 대중운동이 일어났다. 표현주의자들의 과 그것에서 파생한있다. 한편, 현실의 건물이외에 몽상적인 시설이나 이상적인 도시상을 그린 구상안도 역시 발표되었다. 이러한 예들은 제1차세계대전과 독일혁명이라는 사회질서의 변동과 혼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다가올 세계, 넘치는 생명감, 예술과 민중의 이상적인 관계 등, 건축적 조형에 근거하여 표현된 결과였다.(1) 조소적인 조형엘리히멘델죤(Erich Mendelsohn, 1887-1953)의 (1921)는 태양관측용 망원경을 내장한 관측시설이다. 이 건물은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일반상대성 이론을 검증할 목적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사용했다. 외벽의 도려내듯 설치된 창의 디자인, 흙으로 빚은 듯한 디자인의 탑신, 입구에 이르는 계단을 양측으로 둘러싸듯이 늘어진 벽, 곡면을 많이 사용한 물결치듯 한 디자인은 본래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성질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었으나, 제1차대전 이후 자재부족으로 인해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 벽돌을 사용되었다.멘델죤은 1897년 동 프러시아의 아렌슈타인 (현재 폴란드의 오스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뮨헨대학과 1908년 베를린의 샬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1912년 졸업과 동시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무대 예술과 건축 설계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참전하여 러시아 전선이나 서부 전선에서도 많은 스케치를 남기는데, (1920-1924)의 최초 스케치는 1917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선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다음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발전시켰다.멘델죤은 1919년 예술 노동 평의회인 에 참가하며, 1925년에는 데어 링크(Der Ring)의 창설 회원이 된다. 그는 발터 그로피우스나 미스 반 데어 로에보다 젊었으며 표현주의의 다른 건축가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작업 활동이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부르노 타우트(Brunu Taut)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적인 스케치를 남긴 혁명적인 건축가였다. 그는 타협 없는 디자인을 하는 동시에 베를린의 출판사 와 의 후원을 얻어 활약했다. 그는 아인 설치되지만 휜스테린의 상상도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설명하기를 “의 실내에서 사람들은 기관에서 기관으로 거대한 화석화된 모체가 주어진 공생생물의 유기체 안을 헤메면서 살게된다.”고 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상상도 자체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휜스테린은 의학, 물리학, 철학 등을 공부한 후 뮨헨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실제의 건축물은 설계하지 않았으며, 상상도나 모형만을 게속 발표했다.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의 (1920-28)은 인지학의 신비극을 상연하기 위한 극장이다. 1910년경에 구상이 시작되어 1920년에 완성되지만, 192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928년에 복구되었다. 구분상 1920년 것을 이라 부르며 1928년의 것을 이라 부른다. 은 목조였으나 큰 돔과 작은 돔을 조합시킨 형태가 잘라내듯이 시공된 벽면장식과 상호 어울리며 건물에 조소적인 인상을 부여한다. 은 철근콘크리트조이며 조소적인 표현이 더욱 강하게 되어 있다. 슈타이너는 독일의 사상가로, 건축설계는 대부분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는 괴테의 유기체 사상, 특히 형태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통합문화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며, 인지학을 제창했다. 슈타이너에게 있어 의 조형은 인지학의 기초를 이루는 그의 세계관, 우주관의 형상이었다.(2) 규칙적인 패턴에 의한 표층적인 조형한스 펠찌히(Hans Poelzig, 1869-1936)의 (1919)은 “극장의 마술사”라 불리운 연출자 마쿠스 라인하르트(1873-1943)의 기획에 의해 써커스 건물을 개축하여 만들었다. 건물외부와 내부의 표면은 연속 아치로 처리되어 있다. 특히 오디토리움의 천장은 종유석과도 닮았다. 라인하르트의 연출은 프로세니움 극장을 포기하고 무대와 객석이 일체가 되어 진행되는 환상적인 스펙터클에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을 덮는 큰 천장의 조형은 극적인 연출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펠찌히는 (1911)과 (1912) 등 산업용 건축에서 세계대전이전부터 표현주의적인 조형을 사용하는 한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