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서론2. 사육신과 시대적 배경2-1. 사육신이란?2-2. 계유정난(癸酉靖難)2-3. 단종의 복위 실패3. 사육신충의가(死六臣忠義歌)3-1. 성삼문(成三問)3-2. 박팽년(朴彭年)3-3. 이개(李塏)3-4. 유성원(柳誠源)3-5. 유응부(?應孚)4. 결론1. 서론우리는 최근의 뉴스들에서 국회의원이 뇌물을 주고받거나 국회 회의와 같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여 논란이 되는 것을 심심하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국회에서 진행되는 회의를 생각했을 때 여당과 야당의 말싸움 장면이나 의자를 던지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그러나 과거, 유교의 영향으로 유난히 충의가 깊었던 조선시대의 주요 정치인들의 행적을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지금 모습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 단연 최고라 일컬어지는 사육신의 지조와 절개는 그들의 시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육신의 시조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반성하고 그들의 의연하고도 당당한 지절의 자세를 본받고자 한다.그러기에 앞서 사육신의 정의와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적 배경 및 사건을 알아본 뒤 사육신 중 청구영언(?丘永言)》과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이 하위지(河緯地)를 제외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應孚)를 인물별로 그의 생애와 대표적 작품, 그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각각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2. 사육신과 시대적 배경2-1. 사육신이란?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하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2-2. 계유정난(癸酉靖難)태종(太宗)의 강력한 통치 체제는 세종(世宗인 권씨가 산고(産苦)로 이틀 만에 죽음을 맞이해 단종을 지원해 줄 모후(母后)가 없다는 점이 단종의 왕권을 약하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한편, 세종에게는 9명의 비빈과 18남 4녀의 소생이 있었는데 문종 시대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던 둘째 수양(首陽) 대군은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왕권과 왕실의 위상이 추락하자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수양 대군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과 반대 입장에 있던 여러 대신들을 왕명으로 불러 제거하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 척살한 수양 대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심복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고 거사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자신을 포함한 정인지, 한명회 등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으며 이로써, 수양대군은 강제로 단종 선위(禪位)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2-3. 단종의 복위 실패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주게 된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었다. 화려한 즉위식을 하고 조선의 왕이 되었던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궁중의 뜻있는 신하와 궁녀들은 통곡하였고 단종과 정순(定順) 왕후는 두려움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한 달에 3회씩 정기적으로 문안차 알현하였으나 단종은 이것도 부담스러워, 세조의 방문을 거절하고 조용히 지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은 단종을 조용히 두지 않았다.과거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등 문관은 무관인 유응부(?應孚), 성승(成勝), 박쟁(朴?) 등과 모의하여 상왕(단종)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들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 거사를 모의한 것은 1455년(세조1) 10월경이었고 1456년 6월 초하 못하였다. 이 때, 영월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고는 산 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하늘의 계시라 생각하여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단종의 무덤은 1517년(중종 11) 왕명으로 찾을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무덤을 찾은 후에도 계속 노산군의 묘로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가 숙종 때가 되어서야 과거사를 정리하며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의 왕위가 회복되었고 사육신의 복권을 단행하였다.3. 사육신충의가(死六臣忠義歌)3-1. 성삼문(成三問 : 1418~1456)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이다. 낳을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 번을 물어서 낳아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생원으로 14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집현전 학사들에게 정란공신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그 기쁨을 차례로 축하연을 베풀어 즐겼다. 그러나 성삼문만이 이 짓을 수치로 알고 축하연을 베풀지 않았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힘썼으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아버지 성 승을 비롯하여 갓난아기 네 아들까지 삼대가 모두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성 삼문 집안은 아주 자손이 끊기고 말았다.? 원문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劑)? 한(恨)?노라.주려 주글진들 채미(採薇)도 ??것가.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헤 낫?니.? 현대어 풀이수양산을 바라보면서, 백이와 숙제를 한탄하노라.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먹어서야 되겠는가?비록 푸성귀라 할지라도 그것은 누구의 땅에서 났던고?? 이해백이숙제(伯夷叔齊)는 은나라를 치러가는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신(臣)이 군(君)을 친다는 것은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만류했으나 이를 듣지 않자 주나라 녹을 먹는 것은 수치라 생각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은 중국 총신의 상징처럼 널리 알충신이다”라며 감탄하였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다섯 아들과 손자 등 원성계의 인사 10여명이 연루되어 처벌되면서, 박팽년의 직계 가문에 엄청난 쇠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원문가마귀 눈비 마자 희? 듯 검노?라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님 향(向)?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현대어 풀이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희어지는 듯하다 다시 검어진다.야광주(夜光珠)가 밤이라고 해서 어두울 리가 있겠는가?임금을 향한 굳은 충성심이야 변할 까닭이 있겠는가?? 이해이 시조는 단종 복위 사건 이후 투옥 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세조에게 답하기 위해 지어진 작품이다.‘가마귀’와 ‘야광명월’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세조의 위선과 자신의 충심을 명료하게 대조하였다. 까마귀가 원래부터 검은데도 눈비를 맞아 겉모양이 잠깐 하얗게 보이지만 다시 원래대로 검어지기 마련이다. 까마귀는 세조와 그에게 붙은 무리들을 암유한 것이고 김질과 같은 밀고자를 의미한다.야광주와 명월주는 본래 빛을 내는 구슬이기에 어두운 밤이라고 해서 빛이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저 구슬처럼 임을 향한 자신의 충성심이 변할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단종을 향한 굳은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이 작품은 박팽년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굳은 의지와 충절을 잘 나타내고 있다.3-3. 이개(李塏 : 1417~1456)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청보(?甫) 또는 백고(伯高)라고 불렀다. 호(號)는 백옥헌(伯玉軒)이고 한산(韓山) 출생(出生)이다.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1년 저작량(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1455년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1456년(세조 2) 이개(李塏)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붙잡혀 형문을 당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원문방(房)안에 혓는 촉(燭)불 눌과 이별(離別)?엿관?것츠로 눈과 눈물, 내면적 번뇌를 되뇌고 있다.이 시조는 영월 산골에서 귀양살이하는 어린 단종을 생각하여 눈물짓고 애간장을 다 태우는 안타까운 심정을 남몰래 읊은 것이다.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촛불’은 촛농이 흐르며 심지가 타들어가는 모양을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단종의 처지에 대한 깊은 염려를 조용하게 타오르는 촛불을 소재로 하여 피맺힌 연군의 정을 나타내었다.3-4. 유성원(柳誠源 : ?~1456)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琅?). 세종 29년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서 자기의 공(功)을 주공(周公)에 견주어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송덕문(頌德文)을 지으라 명하니, 다를 자리를 피했으나 유성원은 홀로 잡혀서 협박당하고는 송덕문을 쓰고 집에 들다가 통곡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매 성삼문이 잡혀가자 성균관에 있던 유성원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을 따르며 결별하고 그는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하였다.? 원문草堂에 일이 업서 거믄고를 베고 누어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타니門前에 數聲魚笛이 잠든 날을 깨와다? 현대어 풀이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문전 어부의 피리소리가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이해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면 이 시조는 한가로운 어촌의 풍경을 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단종 복위를 주도 하기 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빗대어 노래한 시조이다.이 시조에서의 ‘태평성대’란 세종대왕 때를 뜻하며, 그 태평성대를 꿈속에서나마 보려했더니 어부의 피리소리로 비유된 권력 투쟁의 시끄러운 소리가 꾸려던 꿈조차 깨운다며 탄식하고 있다. 태평성대의 염원을 가지고 있지만 수양대군의 횡포를 ‘문전 어부의 피리소리’로 비유하여 그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 당시 왕권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3-5. 유응부(?應孚 : ?~1456)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