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르 - 코르뷔지에1-1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1-2 필명, 르 코르뷔지에2. 발상2-1건축의 다섯가지 요소2-2모듈러 이론2-3도시계획 참여2-4가구3. 작품3-1 건축물3-2 주요작품 – 세계문화유산4. 평가와 고찰4-1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고찰1. 르 – 코르뷔지에1–1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르 코르뷔지에는 1887년 10월 6일 스위스 서북부에 있는 쥐라 산맥에 위치한 작은 마을 라쇼드퐁 (La Chaux-de-Fonds)에서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 (Charles-Édouard Jeanneret-Gri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작은 마을인 라쇼드퐁에서 태어난 그의 유일한 취미는 그림 그리기 였는데 풍경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스케치하는 것이 아닌 본 것들을 추상화 해서 자신만의 특징을 살린 스케치를 즐겼다. 순수미술에 흥미가 있던 르 코르뷔지에는 시계 장식미술을 가르치는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장식 미술학교에서도 그의 그림 실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했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스승 샤를 레플라토니에(Charles L'Eplattenier)는 꾸준히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가가 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오직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레플라토니에가 소개시켜준 젊은 건축가 샤팔라(R. Chapallaz) 밑에서 건축을 배웠다. 그리고 건축가 샤팔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주택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르 코르뷔지에는 작은 마을인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자주 유럽 곳곳을 여행 다녔다. 그리고 1970년 경 지방적 색이 강한 스위스는 너무 좁다고 여겨 30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이주를 결심한다. 파리에서 프랑스의 철근 콘크리트의 선구자인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는데 1910년엔 6개월동안 베를린 근교에있는 건축가 페터 베렌스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독일어를 익혔고,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경험은 나중에 그가 건축 실무를 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에서 19상정원으로 나뉜다. 필로티란 건물 1층을 기둥으로 세우고 건물을 띄워 올려 1층을 비워두는 방식이다. 자유로운 파사드는 건물의 정면부 파사드에 기둥을 세우면서 파사드를 자유롭게 배치하는 것이다. 수평창은 기존의 좁은 창을 가로로 크게 배치함으로써 더욱 많은 자연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이며 또한 1층에 필로티로 인한 공간손실을 옥상정원으로 보충해 줄 수 있다.건축의 5원칙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1. 필로티‘필로티’란 철근콘크리트 기둥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며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린다. 개방된 1층은 주차장이나 휴식처로 사용되고, 이러한 구조는 벌레와 습기, 열기를 막는 효과가 있다. 요즘은 많은 건물들이 1층을 비워두는 필로티 방식을 채택하는데, 이것이 바로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방식이다.2. 자유로운 파사드(입면)파사드란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내부 공간구성을 표현하는 것과 내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런한 파사드에서 뒤로 물러난 기둥들이 건물 하중을 받침으로써 기능면에서 자유로워진 파사드를 회화의 화면처럼 자유롭게 꾸밀 수 있게 되었다.3. 수평창수평으로 길게 연속창을 내어 수직 창보다 자연광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파노라마적인 전경을 즐기자는 취지에서 제안되었다4. 자유로운 평면건물 하중을 벽이 아닌 기둥이 받침으로써 단절성과 폐쇄성, 고착성의 상징이었던 벽이 연속성과 개방성, 가변성을 나타내는 칸막이로 바뀌어 더욱 자유로운 근대적 공간의 창출을 가능케 했다.5. 옥상정원1층을 필로티로 만들어 생긴 면적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옥상을 정원으로 꾸며 휴식 장소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오늘날에는 옥상을 여러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방수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로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제안이었다.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의 5원칙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물이 바로 그가 1887~1965년에 건축한 ‘빌라 사보아 [Villa Savoye]’이다. 날렵한 기둥 위에 올모듈러 이론은 르 코르뷔제의 많은 건축물에 잘 반영되어있다.라 슈타인 (villa stein) : 왼쪽부터 외부 , 부분, 모델그 중 하나인 르 코르뷔지에가 1927년 가르슈에 설계한 빌라 슈타인(Villa Stein)은 모뒬로르 체계가 적용된 예이다. 빌라 슈타인의 직사각형 평면과 입면, 그리고 내부 구조의 비례는 거의 황금비의 사각형과 비슷하다. 이러한 모듈이 적용된 건물은 사람의 황금비율에 의해 설계된것이므로 시각적 편안함을 줄 수 있다.2-3 도시계획당시 프랑스 파리는 산업화로 계속 늘어가는 도시 빈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 주택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거를 제공할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빈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공동 주택’을 기획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로 눈을 돌려 300만 명이 살 수 있는 ‘현대 도시’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안의 핵심은 십자 모양의 60층 고층 건물의 커튼월로 둘러싸인 강철 뼈대 구조의 사무용 빌딩이다. 이 고층빌딩들은 넓은 직사각형 녹지 안에 있다. 한가운데는 거대한 교통 센터가 설치된다. 그 센터의 각 층에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교차로가 있고 맨 위에는 공항이 위치한다. 그는 여객기가 거대한 고층건물들 사이로 상업용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를 차도와 분리하여 교통수단으로서의 자동차의 사용을 찬미했다. 중앙의 고층건물들의 밖에는 더 낮은 층의 지그재그 모양의 집합주택들이 길에서 훨씬 뒤쪽의 녹지 중앙에 배치되어, 주민들이 살 수 있게 하였다.현대도시(ville contemporaine)계획 1922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에 대해 프랑스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발상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그 계획안에는 비판적이었다. 비현실 적이며 도시의 비좁고 불결한 환경을 해결할 구체적 방안이 없다고 본 것이다. 코르뷔지에는 실질적인 도시 계획안에는 실패했지만, 도시계획의 범위를 확장ㆍ재정립해서는 대목이다. 이러한 유네스코의 등재는 현대 건축물이 과거의 방식을 넘어 새로운 건축언어의 발명 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롱샹성당(ronchamp 1950~1954)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롱샹성당의 외부와 내부에서 보이는 창 그리고 롱샹성당의 색유리로 이루어진 체광이다.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롱샹성당이다. 1954년에 지어진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현대의 교회건축물에서도 대표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이때까지 지어진 성당건물의 틀을 깬 새로운 모험이라 할 수있다. 이 성당은 건물 전체가 거의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네스크 풍의 두꺼운 벽을 속이 빈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고 지붕엔 곡면을 넣었다고 한다. 조형적이나 구조적으로 그 당시 전 세계에 큰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이 건축물은 건축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을 담는 첫번째 건축물이라고 칭하고 있다.유니테다비타시옹_마르세유(1952)유니테 다비타시옹(주택 집합)은 르 코르뷔지에의 선례가 없는, 과격한 아이디어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건축물의 치수는 모두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에 따르고 있다. 현대 아파트의 효시이며 미래사회에 대한 르코 르뷔지에의 비젼이 구체화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많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으며 후대에 많은 분야 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 건물중 하나이기도 하다.수직으로 높게, 근대의 건축 기술을 사용하여, 조경을 마친 개방 공간에 그것도 집합으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유희와 여흥을 위한 건강한 녹지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택 밀도는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당시 햇빛과 신선한 공기는 건강과 연결되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세유의 유니테는 이러한 모더니즘 주택 건설에서 최초이자 가장 확실한 예로 꼽힌 것이다.337채의 아파트로 구성된 12층짜리 슬래브가 지상에서 7미터 높이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수직 도시'는 길이 137미터, 너비 20미터, 높이는 61미터나 된다. 5층에는 건물 내부에 상점가와 르 코르뷔지에 호텔이 있다. 거절했지만, 인도정의 끈질긴 설득 끝에 르 코르뷔지에의 마음을 돌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프로젝트를 잘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사촌인 피에르 잔느레를 합류시키면서 프로젝트르 시작했다.이렇게 시작된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국회의사당, 고등법원, 행정부가 모여 있는 사무국,대학교,호텔 및 상업지역 등 10여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도시로 계획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설계에 관여하고 고문역할을 한 것은 고등법원(1952)과 미술관(1952), 사무국(1953), 국회의사당(1955)그리고 예술학교(1959)였으며 나머지부분은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르 코르뷔지에가 쌓아올린 건축적 역량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것을 평가 받고 있다.5. 평가와 고찰5–1 르코르뷔지에의 현대 건축대한 영향과 고찰르 코르뷔지에는 현대건축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단연 최고의 건축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대 건축의 아버지, 현대 건축의 한 획을 그은 건축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건축을 인간을 위해 했다는 점이다. 그 집에서 인간에게 쾌적함을 제공하기 위한 배려는 효율적인 건축을 보여주었다르 코르뷔지에는 다른 건축가들과는 달리 많은 글과 책을 썼다. 그는 건축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책으로 폈는데 그 저서들은 현대 수많은 건축가들이 필수로 읽어야 하는 독서로 간주된다. 그는 건축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이러한 결과로 수많은 이론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건축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은 현대 건축의 주축이 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의 본보기가 되고있다고 생각한다.현재의 이런 평가와는 반대로 르 코르뷔지에는 당시 보수적인 건축가들로 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고집은 당대 건축가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이고 합리적인 설계와 시대를 앞서 나가는 이론으로 현대 건축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현재에도 그를 에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