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거주율과 혼례? 거주율: 결혼 후 어디서 사는가?? 부거제: 남자 집으로 여성이 감→ 시집간다/ 모거제: 여자 집으로 남성이 감→ 장가든다? 외숙거제: 어머니의 남자 형제인 외삼촌네에서 산다→ 모계제/ 신거제: 새로운 곳에서 삼, 핵가족★남귀여가혼(=솔서혼): 남자가 여자 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르고 사는 우리나라 전통 혼례 방식, 자녀 장성 후, 분가? 고향: 출생지를 말하는데 우리 전통 혼례방식인 남귀여가혼에 따르면 외가가 고향이 됨결혼? 시집가기: 아버지와 아들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은 아들 출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고 여성은 남편 사후에도 시댁의 일원이 됨? 장가들기: 사위도 자식으로 보고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연결이라는 의미를 가짐, 남편 사후에도 본가로 귀환하여 재혼이 가능이혼? 시집가기에서 이혼: 남성 쪽에서 하는 일방적인 퇴출로 소박이라 함, 일반적인 이혼 사유로 여성적 하자를 이야기, 칠거지악을 들어 이야기* 삼불거: 칠거지악에 해당하더라도 아내를 내칠 수 없는 사유? 장가들기에서 이혼: 가와 가의 관계 파기라는 의미에서 쌍방적 행위에 해당유교적 의례? 가례: 사대부 가문의 의례? 여묘(=시묘살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묘를 조성하고 묘 옆에서 상례 기간에 기거하며 살아계실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것? 사례: 관혼상제(관례:성인식/혼례: 결혼/상례: 장례/ 제례: 제사)? 가묘: 사대부 가문에서 집안의 사당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조상신을 모시며 의례를 행함혼례절차? 의혼(혼인을 의논한다): 매파의 혼인 중매로 양가의 합의가 되면 혼인이 성립, 이때 신랑이 사망해도 시가로 들어가 수절? 납채(문서 절차를 밟음): 청혼서, 답혼서, 허혼서를 주고 받으며, 사주단자를 보냄? 납폐(예물 전달): 일종의 결혼 비용★ 친영: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서 신랑집에서 혼례식을 함→ 전통 혼례X? 묘현: 신부가 사당에 예를 올림처첩 분변? 중혼: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의 정식혼례를 통한 혼인으로 아내(처)를 맞음. 가문 단절? 왕위계승: 고려- 형제 계승의 일반화/ 조선: 적장자 계승원칙, 한계: 후궁 소생, 입후하는 경우도 생김제사? 의미: 죽은 조상에 대한 의식행위를 통해 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역할★ 봉사손: 제사권을 가지는 후손이라는 의미로 적장손이 대개 가지게 됨? 윤회봉사: 여러 자식이 돌아가며 제사를 치름, 외손봉사: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 제사를 치름? 오묘제: 시조, 고조, 증조, 조, 부 다섯 선조에 대한 제사로 실질적으로 4대의 제사를 지냄(시조 제외)? 조천: 5대가 지나면 사당에서 꺼내어 혈족 관계가 소멸★ 불천지주: 예외적으로 조천을 하지 않는 존재- 시조, 국가에 큰 공헌이 있는 존재상속? 적장자 단독상속: 종법과 관련하여 가문이 적장자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받음? 자녀 균분상속: 전통적인 상속방식으로 남귀여가혼과 관련해 딸도 결혼 후에에도 권리가 유지됨여성의 재산권? 고려 이래 자녀 균분상속으로 결혼 후에도 시댁 재산으로 합쳐지지 않고 재산권이 유지, 따라서 사망 후 증여되지 않은 재산은 본가로 귀속분재? 분재기: 상속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들의 합의를 통해 재산 분할? 화회: 토지와 노비의 가치가 다르기에 분재 대상을 골고루 분할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논의? 집주: 재산의 고른 분할을 위해 노비의 경우 노, 장, 약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에서 제비뽑기로 배분? 전정연립: 직업군인의 군역 승계와 생계용 토지의 세습과 관련호와 호적? 호: 제도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가족, 수취 단위, 노동력 징발을 위한 편제 단위를 이야기? 종류: 자연호- 가족생활 단위/ 편호: 국가 역 편제를 위한 설정으로 호적 등록 대상? 정: 1차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국가에 역을 질 수 있는 사람★ 삼정일자: 노동력을 징발할 때는 3명 중 한 명을 징발하고 두 명이 서포트하는 구조를 이야기- 향리의 과거 응시(모든 향리가 과거를 응시하면 지방행정이 마비되기 때문), 승려의 출가(역 자원이 모두 빠져나가는 활용하며 동성 집단임? 사회적 나이보다는 시조로부터의 거리가 더 중요하고 나의 존재와 무관하게 강력한 지속성을 가짐★ 킨쉽 구조? 나를 기준으로 한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며 다양한 성씨를 포괄? 집단의 지속성이 없어 내가 소멸하게 되면 함께 소멸함, 혈연관계에서 부측과 모측이 동일한 비중을 가진다고 하여 양측적 친속 조직이라고도 부름? 상속의 원리 또한 나와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상속을 받을 수 있음? 고려 시대의 친족 구조 킨십 구조에서 조선 시대에는 문중의 발달로 인해 리니지 구조로 변화하였다.촌수? 친족의 기초인 삼촌과 사촌/ 사촌의 종류: 친사촌, 고종, 외, 이종? 오복친: 상례 때, 오복에 포함되는 친척을 의미하며 망자와의 혈연 관계에 따라 상복의 등급이 5단계로 나뉨, 우리나라의 오복친은 외가의 비중이 높으며 아들의 경우 서열에 구분없이 기년(1년)예송: 복제 논쟁? 경국대전을 기반으로 한 국제와 중국 고례의 차이에 따른 해석으로 인해 발생? 1차 예송: 효종 사망 후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인해 발생: 승중자라는 점에 무게를 둘 것인지 둘째 아들에 포인트를 둘 것인지? 2차 예송: 효종비 사망 후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인해 발생: 큰며느리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친족 범위? 동고조 팔촌: 고조가 같은 경우 가장 먼 촌수가 8촌으로 리니지의 범위에서는 4대의 범위가 해당하며 킨쉽 구조에서는 8명의 고조라고 하여 모계가 섞여 있음? 팔고조: 고조(처)를 포함하여 8명이 존재? 팔조호구- 사조: 부, 조, 증조, 고조/ 팔조: 부, 조, 증조, 고조, 증조처부, 외조, 외조처부, 조처부? 팔조호구를 통해서 신분적 하자가 있는지, 음서의 권리가 있는지 확인음서? 조상의 관직과 공적에 의해 후손이 관직을 받는 인사 시스템으로 빠른 입사와 관직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 문벌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음서의 혜택 범위는 부계와 모계의 구분이 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 협녀? 여성이 끼어있다는 의미 귀화인의 활동으로 중국문화가 유입되었고 도당 유학생 출신의 신라 귀족이 정계에 참여함에 따라, 신흥 지배층이 칭성 문화를 접하며 확산? 왕건: 초기 외교문서에 왕봉규라는 인물이 임언을 당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려사에 보면 같은 해에 왕건도 임언을 당에 보냈던 것으로 보아 왕건과 왕봉규는 같은 인물로 추정할 수 있고 왕건이라는 이름은 당으로부터 책봉 받은 후에 왕건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임?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또한, 왕건 즉위 후 왕건에 걸 맞는 아버지의 이름이 필요해서 만들어 올린 것? 사성: 왕이 신하에게 특별히 성씨를 내려줌으로써 의제적으로 혈연적 유대를 맺는 것? 성씨의 중복: 성씨의 채용 방식이 중국 성씨, 토착 성씨, 이름의 첫 글자를 활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시가 이중으로 나타남, 그 예로, 태조의 즉위를 도운 유검필과, 태조 때 공을 세운 유차달의 사례를 통해 확인 가능? 성씨의 소급과 신출: 후대인에 의해 성씨가 소급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을 말하는데, 견훤과 궁예는 후대에 이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칭성집단이 출현, 이민족이 귀화한 경우에 사용, 문중이 형성되고 족보를 만들며 성씨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중국의 성씨로 소급는 경우가 증가? 족내혼과 휘칭성: 휘칭성이란 피해서 칭하는 성씨라는 뜻으로 중국과의 외교를 할 때 중국적 관점에서는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기에 왕실에서 족내혼 경우 외가의 성을 채용(,퀸십 계보도에서 왕씨가 아닌 첫 번째 인물)토성? 토성: 고적과 본도 관 두 자료에 모두 나오는 성으로 지역의 토착 성씨로 향리 가문을 형성* 고적: 언제 만든 것인지 모르는 성씨와 관련된 자료/ 본도 관: 관에서 관찰사에 대한 보고서로 별도로 조사한 문서? 속성: 대개 향리 가문으로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성씨(고적에는 없고 본도 관에는 존재)? 내성: 인구 이동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성씨(고적에는 없고 본도 관에는 존재)★ 입진성: 군사 거점인 양계에 사민 정책으로 이주하게 된 성씨로 호적에는 없지만 본래: 특정인을 조상으로한 후손들로 구성된 사회조직? 대문중: 동성동본의 혈족 총괄하는 집단/ 파문중: 중시조를 설정하여 구분되는 하위범주(파문중이 먼저 만들어지고 대문중이 만들어짐)? 소문중: 특정 지역에 혈연성을 가진 집단의 후손들이 정학하여 집성촌을 형성할 때 처음 들어온 조상인 입향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중? 종가: 문중의 중심축이 되는 집안/ 종손: 종가의 가부장, 시조의 적장 후손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봉사손? 총부: 종갓집 큰며느리로 제사와 손님 접대를 매개로 한 경제권을 지님? 문장: 가문을 대표하는 종손보다 윗대 어른/ 유사: 문중 운영의 실무자★ 재상지종: 고려 충선왕 즉위 이후 왕실 족내혼을 폐지하고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가문을 지정하였는데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만이 왕실과 통혼할 수 있었음. 이들이 자신들의 가문에서 공통의 선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는 인식을 가짐으로써 문중으로 발전하게 됨? 문중의 출현: 조선에서 종법적 질서가 강조되면서 고려 이래 위세가 높았던 가문에서 문중으로 성장? 선조 헌창과 사적 정비: 시조를 매개로 현재 문중에 가문의 정체성을 제공하고 가문의 위세를 나타내기에 문중의 제사의 의미가 커지고 제사를 시조묘나 사당에서 행해짐? 시조묘: 시조의 무덤으로 시조묘 찾기 운동으로 이어짐, 그러나 뚜렷한 근거가 없이 정해지기에 분쟁발생? 사당: 시조묘가 없는 경우 시조의 초상이나 유품 등을 두어 상징성이 높은 공간으로 만듦족보편찬? 족보: 리지니 원리에 입각하여 특정인을 조상으로 한 후손들의 계보를 모아 정리한 것? 가보: 조상과 자신의 단선적 연결? 향(가로): 시조로부터 대수/ 렬(세로): 선조와 연결되는 계보⇒ 항렬에 의해서 사람의 위치가 정해지고 위치 파악을 위해 항렬자 사용? 파보: 문중에서 나뉜 파문중 단위의 족보/ 대동보: 문중 전체를 망라한 족보? 보학: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사실성보다 문중의 연원과 계통에 대한 사회적 지식 요구에 대해 연구? 만성보: 모든 문중의 계보를 종합 정리한 족보의 백과사봄
인물1. 고려 광종에 대해 서술하시오 ( 핵심 : 왕권강화광종은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왕으로 왕권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는 고려시대의 수많은 귀족세력의 힘을 눌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살펴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히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노비를 갖고 있던 귀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켰다. 과거제를 실시하여 왕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신하로 삼아 왕 중심의 정치를 하였다. 공복제정을 통해 관직별로 입을 수 있는 옷의 색깔을 규정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살리고 귀족의 힘을 억제하였다. 이러한 왕권강화 제도에 반대하는 귀족세력은 대거 숙청하였으며 광종 자신의 대의명분을 위협하는 존재들도 숙청하였다.2. 고려 성종에 대해 서술하시오 ( 핵심 : 2성 6부 체제 = 고려의 왕권 약화 ..성종은 정통으로 왕위에 즉위한 것이 아닌 임시적으로 왕위를 맡은 인물이다. 성종이라는 시호의 의미는 ‘유교를 통해 체제를 완비했다’이며 성종 개혁의 기반이 되는 것은 최승로의 『시무28조』이다. 성종 때 완비된 2성 6부 체제는 중국의 3성 6부 체제에 고려의 특수성이 가미된 중앙제도이다. 2성 6부 체제에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진 중서문하성이 등장하는데 황제권과 귀족권은 상반대관계로 합쳐질 수 없다. 고려시대에 등장한 개별적인 기구인 도병마사, 식목도감, 중추원은 황제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중서문하성은 황제권과 귀족권의 융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귀족권이 매우 강력하여 왕권이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구이다. 성종 때 왕권이 약화되었던 이유는 외세인 거란의 침입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3. 고려 현종에 대해 서술하시오 ( 핵심 : 피난 / 돌아와서 거란의 요청에 응하지 않음 /마지막에는 거란에게 조공을 바친다는 입장을 내보임현종은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닌 강조의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옹립된 인물이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데시기에 문벌귀족은 결정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6. 최충헌- 경대승이 병사 후 이의민이 권력을 잡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당시 반란을 일으킨 김사미와 효심등과 내통하였는데, 결국 이의민 부자는 최충헌 형제에게 암살당하며 최씨정권이 들어서가 된다. 한편 최충헌은 독특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의민 일파를 모두 제거한 뒤 임금에게 10조목의 봉사를 올려서 나라가 해야 할 일을 건의하면서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것에는 유교적 관점이 잘 반영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최충헌이 원래 문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충헌의 동생이 귀족이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기를 건의하는데 최충헌이 이에 반대하자 둘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고 최충헌이 이기면서 권력은 최충헌에게 집중된다. 보통 권력을 손에 넣게 되면 귀족이 되고 싶어하는 특성을 여러 방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최충헌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또 다시 도방을 설치하고 신종을 왕위에서 내쫓으며 이규보를 발탁하면서 문신을 충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교정도감을 세우는데 이는 최씨 정권이 계속 집권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의민 일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적 장치로 작용하였는데, 점차 기능을 확대하면서 교정도감의 힘이 커진다. 이후 고려 국정 전반의 기능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변모하는데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라는 관직을 얻는데 최충헌이 오르게 된다.7. 삼별초- 최우의 개인 사조직이었으며 친 무신정권의 성격을 지닌다.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진도로 이동하여 개경정부와의 대립하였다. 이후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전하다 여원연합군에 의해 전멸한다. 삼별초는 원과 고려를 상대로 싸웠다. 그들은 최우의 사병조직으로 최씨정권을 호위하기만 했을 뿐 민족성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집단이 아니다. 그래서 반란군에 불과한 집단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원나라가 포함되기 때문에 외세에 대 내치게 된다. 신돈은 약 5년 정도만 공민왕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고 바로 처형되다 보니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10. 정몽주- 고려 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는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했으며,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를 지지하였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모략에 가담하여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정몽주는 이성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낙마한 이성계의 문병을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러나 공양왕의 옹립을 지지하는 등 이러한 행동을 했던 정몽주가 고려말 이성계와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충신으로서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거듭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일은 이방원과 시조를 주고받은 것 그러나 이것 또한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는데 그 시조가 기록된 시기가 한참 지난 뒤이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죽고 난 당시에는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고 건국하였기 때문에 정몽주를 칭송하는 글을 쓰면 이는 이성계와 조선의 개국공신 계열에 대립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정몽주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시기로 넘어가면서 정몽주는 충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정몽주가 유교적 충의를 지켰다는 것을 명분으로 들기 위함이었다. 신하의 충성스러운 마음 자체는 이어 나가자며 이방원의 정치적 시스템으로 이용하게 된다. 이후 세종대에 있어서 더욱 정몽주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하며 지금까지 충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많은 유학자들이 선죽교와 정몽주를 언급하면서 자신도 충신임을 나타낸다.1. 정도전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인임 일파 등에 의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력을 숙청하여 세종의 정치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어주었다.3. 조선 세종태종의 셋째 아들로 왕위에 욕심이 있어 양녕대군과 어리라는 첩과의 관계를 태종에게 전하며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시킴으로써 세자에 책봉되어 조선에서 태어나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임금이다. 세종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아 높은 수준의 민족 문화를 이룩하였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왕권 강화를 위해 고려왕조와 불교의 정치적 결합으로 인한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이 방법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유학화를 실천하였고, 농업, 과학, 의학, 천문, 음악, 점술 등의 학문 장려하며 학문의 다양성을 존중하였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세종은 눈이 불편하여 글자를 잘 보지 못하였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리글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왕을 대신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세종도 왕위의 정통성을 가지지 못하여 자신의 기반도 튼튼하지 않았기에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다 세자의 대리청정기간인 세종 말에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였다. 농업 분야에서는 연분9등법, 전분6등법 시행하였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관의 노비였던 장영실의 파격 등용함으로써 측우기, 앙부일구, 혼천의, 자격루 등을 개발하였다.4. 한명회한명회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정난공신이 되었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살생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상과 사를 갈라놓은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이후에도 사육신사건, 남이의 옥사, 성종 즉위 후 모두 4번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거기다 자신의 딸들을 예종, 성종과 혼인을 시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역사상 공신 책봉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을 훈구 세력이라고 한다.5. 연산군조선의 10대 왕으로 유교적 명분 없이 왕위에 오른 아버지 성종의 왕권이 신권보다 약화된 모습을 보고 자신은 강력한 전제군주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실록을 편찬할 서 결국 화친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후 물품의 일부만 주고 몽고를 철수시키게 한 다음 수도를 옮기자 다시 몽고가 침입해왔는데 이때 김윤후의 활약으로 막게 된다. 3차 침입 때에는 몽고가 금을 완전히 멸망시켰기 때문에 강도 높은 침입이 가능했을 것이다. 몽고의 3차 침입은 고려로부터 당한 패전을 보복하며 아울러 고려를 완전히 제압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침입을 해왔다. 상당히 오랫동안 고려를 유린했고, 이때 팔만대장경이 소실 되었다. 몽고는 그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인 빠른 기동력과 전투의 잔혹함으로 거대 제국을 건설해 나갔다. 4~6차 침입에는 한반도 전체가 섬멸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고, 더이상 세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후 항몽 세력의 핵심인 최씨정권이 붕괴되자 몽골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고려는 태자를 몽골의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요구했고, 몽골의 군사는 철군하였다. 그렇게 실질적 조공책봉국가가 되면서 몽고에게 조공을 바치는 지위로 추락하게 되었고, 무신정권이 붕괴되었으며 원간섭기에 들어서게 되었다.8. 고려 원 연합군의 일본정벌-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했던 사건을 말한다. 1차 원정은 삼별초를 평정한 그 이듬해에 이루어지게 된다. 뱃사공을 비롯한 병사들이 징발되어 끌려갔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였다. 후쿠시마에서 전투를 벌이고 휴식 중에 태풍으로 인해 배가 전멸되어 모두 수몰되고, 이때 일본에서는 신이 일으키는 바람, 즉 신풍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고려사람 입장에서는 징발되고 많은 물자가 수탈되었는데 정벌 성공도 못하니 억울하고 분하였다. 1차 원정에 실패한 후 남송을 멸망시킨 뒤 원나라는 재차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다. 동쪽을 정벌하는 기구, 즉 일본을 정벌하려 정동행성이라는 기구까지 설치하고, 고려에 협조요청을 하였다. 재차 일본을 공격했으나 마찬가지로 태풍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원의 세조가 사망하면서 일본원정은 더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대마도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1. ‘메리 크리스마스’는 세계 1차 대전 중 크리스마스 하루 휴전을 한 내용을 담고 있다.이의 배경이 된 것은 십자군 전쟁 이전 샤루 공의회와 나르본 공의회에서 시작된 ‘신의 평화’운동에서 출발한다. ‘신의 평화’ 운동은 여성, 상인, 농민, 성직자 등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의 금지를 담고 있는 것이고 이후 1030-40년대 일요일이나 때로는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그리고 대림절과 사순시기, 부활절과 주된 축제일 에는 전투를 금지하는 ‘신의 휴전’이 영화의 배경이 된다.즉, 십자군 전쟁 이전 신의 평화운동과 신의 휴전이 종교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기준에 대해서 제한을 한 것이다.2. 르네상스르네상스란 고전고대의 재생과 문예 부흥 운동을 말한다.인문주의에서 휴머니즘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 고대의 철학에 대한 관심을 깨우치는 운동으로 휴머니즘은 오늘날의 문과 과정 또는 문과의 교육과정을 의미하고 휴머니티란 고전연구에 필요한 교과목을 휴머니티, 이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 또는 고대 문헌을 수집 연구하는 사람을 휴머니스트라고 부름북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탐미적이고 시각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면, 알프스 이북의 유럽 르네상스는 사색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북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으며, 중세 봉건 체제의 특징이 미약했다. 그리고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크게 융성, 도시의 활발한 분위기와 풍부한 경제력은 르네상스의 배경이 될 수 있었다. 북이탈리아는 정치적 요인으로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입, 경제적 요인으로는 지중해 무역의 쇠퇴, 천문학적 요인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으로 쇠퇴하였다. (* 나침반, 활판 인쇄술, 화약- 3대 발명품)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수아 1세는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인문주의자들을 프랑스로 초빙하고 메디치 가문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여 르네상스가 북이탈리아를 넘어서 프랑스로 넘어감3. 종교개혁면죄부 : 면벌부라고도 불리는 면죄부는 잠벌을 탕감받기 위해서 행하는 속죄인를 감면해 주는 것종교개혁의 배경과 원인종교적 원인· 교황과 일부 성직자들의 부패와 세속화· 로마가톨릭 교회의 많은 관행 들→ 면죄부, 성직매매, 교회직책에 친인척을 등용하는 족벌주의경제적 원인· 십일조의 징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 국왕들은 왕국 내에 있는 면세의 특혜를 받고 있는 교회 재산에 관심을 가짐· 자본주의적 정신이 점차 고조되어 교회나 수도원의 막대한 토지 재산의 자본화 및 생산과 이윤추구를 위한 투자는 시대적인 요청사상적 원인·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교회의 신학적 사고체계와 신 중심의 역사관 비판·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원시 기독교적 인문주의를 내세우며 내면적 인간양심의 해방을 추구사상가루터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고, 신자는 누구나 하느님에게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는 만인 사제주의와 함께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반대되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독일 제후들은 루터파와 가톨릭파로 나뉘었으며 루터파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가톨릭 세력에 대항한다, 이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통치자에 의한 종교선택권이 인정되는 것으로 정리되며 루터파는 하나의 가톨릭의 분파로서 인정받게 된다.칼뱅칼뱅은 종교에 관해 휴머니스트적인 온건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나 루터 사상으로 전향하였다. 엄격한 윤리 생활을 강요하였고 교회의식을 간소화했으며 예정론자로 신은 전지전능하여 각 개인의 구원 여부를 이미 결정하였지만, 신의 은총에 순명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행위가 필요하므로 각자가 현세 생활에서 자기 직업에 근면하고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는 신흥 상공시민층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였고 이는 이후 영국에 들어와 청교도로 자리 잡는다.쯔빙글리루터의 종교개혁보다 과격하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고 실전에 옮겼으며 교황의 세력을 배제하고 가톨릭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영국의 종교개혁요인:순수한 종교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표면상으로는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인한 것이지만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의 의도는 국가 이익의 증대와 왕권 강화를 위한 수도원 재산의 활용을 위했던 것이다.전개 과정: 헨리 8세가 ‘카트린느’와의 이혼문제를 승인을 교황에게 요구했으나 교황이 결혼 무효승인을 주저하여 영국의 국교회의 우두머리가 헨리 8세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한다.결과: 튜더 왕권이 근대적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국가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왕이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토지를 몰수에드워드 6세 시대에 영국 교회의 개혁적 요소는 두드러지게 되었으나 그의 뒤를 이은 카트린느의 딸 메리 여왕은 가톨릭 부활운동을 일으켜 영국 교회는 희생을 겪게 되지만 앤 부울린의 딸 엘리자베스시대에 이르러 영국 교회의 프로테스탄티즘이 확립로마카톨릭의 종교개혁카톨릭의 전통적 교리의 합법성과 통일된 조직체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행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지위책인 동시에 교세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체 개혁운동종교개혁의 결과 및 의미경제적으로는 시민 계급을 성장시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요인종교개혁으로 중세의 통일적인 그리스도교 세계가 분열되어 종교적인 관용이 출발4. 영국혁명(청교도 혁명+명예혁명= 개인의 주도가 아닌 의회의 주도로 인한 혁명으로 입헌 군주제를 탄생시킴)영국의 입헌 전통(양원제의 배경)존 왕의 실책으로 인한 봉건 귀족들의 대헌장(왕의 명령만으로 세금을 징수 할 수 없다.)⇒ 시몽 드 몽포르 의회 소집⇒ 모범의회 소집(의회 구성원의 불규칙을 시정 하기 위해 귀족은 상원의원으로 기사와 시민은 하원의원으로 구성하였다,)⇒ 상·하 양원제의 전통화합(14세기 중엽)헨리 8세의 절대왕정 확립청교도 혁명배경: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전제정치 실시의회에서는 젠트리와 시민 계급 등의 청교도가 대거 진출하여 국왕과 충돌찰스 1세는 더욱 전제주의 정책을 강화하여 의회와의 대립이 격화프랑스와의 전쟁에 말려든 찰스 1세가 의회에 새로운 과세 승인을 요구하자 의회는 승인을 거부하며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과세나 공채도 강제할 수 없다는 권리청원을 제출하였고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권리청원을 승인을 하였으나, 다음 해에 의회를 강제해산시켰다. 이후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를 하자 국민의 반발이 일어났다.찰스 1세+ 왕당파 vs 의회파(청교도파)로 된 2차례의 영국 내전에서 승리한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크롬웰의 호국경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명예혁명크롬웰의 공포정에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국왕파를 중심으로 찰스 2세를 왕위에 추대하여 왕정복고를 일으키지만, 찰스 2세는 절대주의를 원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구교도들을 관리로 등용하고 왕에게 저항하는 국교회 주교들을 불법체포하는 등 억압적인 통치를 강화하여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이를 견디지 못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토리당이 그를 배척하는 진보적인 성향의 휘그당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제임스 2세의 딸인 신교도 메리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여 의회의 승인 없이 법률을 만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는 권리장전에 서명하였다.영국혁명의 결과 및 의의절대왕정 타도, 영국 입헌군주국 수립의 발판, 근대 시민혁명에 영향, 신앙의 자유 추구5. 프랑스 혁명프랑스 대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혁명은 귀족 혁명, 부르주아 혁명, 대중혁명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프랑스 혁명의 배경은 제1신분과 제2신분(2%)이 제3신분(98%)에게만 의지하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17-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사상의 보급과 함께 사치스러운 궁중 생활과 특권계급의 면세 특권으로 인한 왕실의 재정위기라는 가장 결정적인 혁명의 배경이 있다.
시험 주제: 문화와 문명, 아테네의 민주정, 포에니전쟁폴리스의 형성국토의 약 70-80% 가 산지 1400여 개의 섬→ 분절된 지역마다 자급자족추구→다각적인 생업 한사람이 여러 가지의 직업을 가짐→ 다 기능적 인간형 추구폴리스의 구성과 형태구성: 아고라(agora)와 아크로 폴리스(acropolis)형태: 아테네(attica)형과 스파르타(laconia)형폴리스의 중심부는 언덕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라는 성채를 중심으로 신전이 건축되고 아고라(광장) 시장과, 사교, 재판과 공공회합의 장소로 이용 폴리스는 정치, 군사적, 경제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였기에 그들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국토를 헬레스, 언어가 다른 이민족은 바르바로이라 부름. 언제나 식량문제를 겪던 폴리스들은 BC 8~6에 걸쳐 활발한 해외 식민활동을 전개, 지중해를 통해 교역을 촉진하여 상공업을 크게 발달시키는 아티카형과 농업을 통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라코니아형 폴리스로 크게 나뉨아티카형-아테네, 라코니아형- 스파르타아크폴리스: 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공간.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곳(신의 공간)이자 전쟁 당시 폴리스의 구성원들이 모여서 전쟁을 하는 곳아고라: 세속적인 곳 즉, 폴리스는 성과 속이 공존함왕정→ 귀족정 →드라콘의 입법→ 솔론의 개혁(금권정)→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클레이테네스의 민주정 기초→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형성1) 왕정→ 귀족정(B.C800~600)왕정→ 아레오파고스라는 귀족 회의제사장의 위치가 철제무기와 말을 탄 세력들에게 흡수되어가는 것(전쟁에서 세속권력이 힘을 쓰기 시작함):화폐의 도입, 과수재배 일반화, 폴리스와 식민지 사이의 교역 활발→부의 집중현상 심화, 부익부, 빈익빈2) 드라콘의 입법· B.C 621년 드라콘의 성문법으로 귀족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 제재→평민 보호자신도 귀족이지만 객관적 메뉴얼으로서 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함- 아테네 안에서는 세금은 동일하게 걷음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중형주의3) 솔론의 개혁· 채무 탐강법(세이사크테이아)에 의한 노예 해방과 토지 소유 상한제 실시· 재산 소유에 따른 4계급의 신분 구성→ 이에 따른 정치 참여권 제한· 배심원 제도· 400인회:각 부족으로부터 100인의 선출,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심의하는 상임위원회 역할아테네의 경제 발전에서 뒤처진 무상자(화폐를 얻을수 없는 자)들은 빚이 쌓이고 채무노예가 됨, 이들을 해방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음.채무탐강법: 토지소유상한제:솔론 상업귀족, 아르콘이며, 귀족들의 토지소유를 막아줌으로서 아테네 시민들의 인기 오름재산 소유에 따라서 4개의 계급 (신분X)을 나누고 여기서 사람을 뽑아서 400인 회를 구성.테테스(무산자)는 정치참여에 제한. 재산 소유에 따라 정치참여를 제한해서 금권정치이다.재산소유에 다라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이유 :군사력을 제공하느냐 제공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따라서 여성, 노인, 어린이, 외국인은 정치참여를 할수 없는 것.결혼이나 상업을 통해서 재산을 얻게 된다면(경제적인 지불능력이 가능하면) 400인회에 들어갈 수 있음-4)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페이시스트라토스의 등장으로 참주정상공업의 장려 진흥.왕: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귀족 회의와 구성원들의 동의를 통해서참주: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권력을 얻은자-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음거부감이 큼.언론을 통제하고 독재정치를 추구5) 클레이테네스의 개혁· B.C 500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민주정의 기초 완성· 기존의 4개 부족을 10개의 행정구역으로 개편· 데모스: 선거구에 속해 있는 구성원 중에서 만 18세 이상의 성인 남성- 선거권을 가진 사람18세가 된 사람은 구민의 투표로 시민권이 결정되고 구민으로 등록. 데모스의 성원은 아테네 민회의 성원* 민주주의 : 데모스에 의한 통치·6000명의 시민배심원· 500인회 구성: 10 X 50- 민회· 도편추방제 실시- 참주정 재출현을 방지하기 위함참주나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파편 도자기에 적어 의결정족수 6000명이 되면 그중 최다 득표자를 아테네로부터 10년간 추방하는 제도 →다수의 선택으로 인해 중우정치로 이어질 위험이 존재민주주의의 키워드- 데모스: 데모크라치아- 귀족정치6)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완성B.C 5세기 수당제와 추첨제를 통한 민주정치의 완성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 VS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분, 그리스 세계의 성장을 주저앉게 만듦아테네 민주정치의 성격과 한계점직접 민주정치 VS 간접 민주정치노예, 여자, 이방인은 제외중우정치의 위험성을 내포세계시민주의 사상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진출로 바빌론, 수사, 이란 등 동부에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 건설하게 되면서 대제국에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을 함께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고 불리는 세계시민주의 사상이 등장하게 된다.이 시기에는 개인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고 개인의 쾌락과 욕망을 어디까지 충족시킬 수 있냐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인간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여기서 출발 된다.(인간의 이성발견과 세계 시민주의 사상코스모폴리타니즘 : 그만큼 폴리스가 많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함께 살아감을 의미개인의 삶, 개인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조건 아래에 동물과 구분되는 갓 이성: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힘,그 구성원의 그 개인들이 평등하며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함.금욕주의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코스모폴리시즘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카르타고와 로마가 지중해패권을 둘러싸고 3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1차 포에니전쟁배경과 원인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와 당시 북아프리카 연안 및 이베리아반도 일부를 거느리는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해협을 비롯한 이탈리아반도 주변의 해상을 장악하며 대부분의 지중해 교역로 및 경제권을 관할.·시칠리아를 둘러싼 카르타고의 로마와 전쟁결과시칠리아에 재차 파견된 카르타고군을 지휘하던 대 한노가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로마에 완패하면서 카르타고는 로마와 휴전협정을 맺고 시칠리아를 포기강화 조약을 통해 로마는 3천 2백 달란트의 배상금과 시칠리아, 그리고 그 외의 섬들을 획득그 당시까지 해전의 주된 공식이었던 상대편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방법 대신 코르부스 배를 이용한 로마인들의 해상전 승리 → 로마인들의 서부 지중해 진출2차 포에니전쟁배경과 원인카르타고- 1차 포에니전쟁 후 카르타고 내부는 국내파와 해외 파로 나뉘었는데, 특히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하스피니아로 이주하여, 기원전 228년에는 히스파니아 동쪽에 ‘카르타고 노바’를 건설로마-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카르타고를 접수하여 서부 지중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일리리아의 해적을 소탕하여 아드리아해로 진출, 남하하는 켈트인의 침입에 맞서 북이탈리아, 알프스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
서양 사학 개설? 서양 고대: 오리엔트 문명+고대 그리스 문명+기독교=고대 로마? 서양 중세: 프랑크 왕국은 고대 로마의 구조와 질서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고전고대의 질서와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어려움을 그리스도교라는 매개체로 해결? 서양 중세의 시대구분: 1. 중세 형성기(민족 이동기)- 5세기 말~10세기2. 중세전성기-11세기~13세기3. 중세해체기(근대로의 이행기)-14세기~18세기? 중세형성기(민족 이동기): 프랑크 왕국-메로빙거 왕조(486-751)와 카롤링거 왕조(751-888)클로비스의 개종-피핀의 도유식(751)-카롤루스 마그누스의 대관식(800)카롤링거의 르네상스베르딩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주종제와 고전적 장원제 수립? 카롤링의 르네상스: 프랑크 왕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추진된 사회 개혁 운동8세기 말에 시작되어 9세기 말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를 거쳐 계속되었으며 유럽 사회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교 적 사회로 변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주요 목표는 실제적 종교교육을 통해 프랑크 사회의 모든 국면을 변형시키는 것카롤링거 르네상스는 문화부흥을 수반수도원과 교회의 부속학교를 설립하고 라틴어를 교육카롤링 ‘소문자’체는 주로 코르비 수도원에서 개발된 것으로 오늘날의 ‘소문자’체는 여기에서 기원? 870년 메르센 조약샤를르 대머리왕은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는 870년 8월 8일 메르센에서 엑스라샤펠, 브장송, 강브레, 리옹과 비엔느는 서프랑크로 귀속되는 새로운 협약을 체결.중세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서프랑크, 중세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이 확정→ 서유럽 세 국사의 근대 국가의 출발? 중세전성기: 정치- 현재 유럽국가의 기초 정립, 영주권의 강화사회 경제- 장원경제에서 교환경제로, 도시와 시민층의 성장종교- 교회 내부의 개혁 운동과 교황권 확립과 교황권 확대, 십자군 전쟁과 고딕 양식, 스콜라 철학? 중세 해체기(근대로의 이행기): 중세의 가을정치- 교황권의 쇠퇴와 군주권의 강화→ 국민왕정고리우스 7세의 개혁과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1차 십자군 원정 설파는 교황권의 보편적 권위를 더욱 공고히신의 평화운동과 신의 휴전운동은 공권력과 봉건 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선 새로운 사회 운동? 교회법: 『로마법』 재발견 →교회법은 초법률적 교황의 지위, 중앙집권적 교회정부, 지역제 교구체제, 위계적 사제조직에 관한 기본 원리를 갖춤그리스도교적 시간과 공간 체계, 7성사와 파문이라는 실천력으로 교회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규제와 구속력을 가짐? 교황의 보편적 권위- 보편성부: 붕괴된 중앙집권적 공권력과 성문법 체계에 대신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와 그리스도교 왕국에 공통된 소속감으로 서양 중세는 결속권력→ 이 기반 위에 교황권의 보편적 권위 확립혈통전사의 속성2. 싸우는 자(BELLATORES)? 중세 귀족: 백을 포함한 봉건 세속영주들과 기사노빌리스라는 수식어를 가진 귀족들을 정의하는 당 시대의 법률 용어가 없음? 중세기사: 11세기 봉건사회의 안정으로 분할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게르만의 상속관습에서 장자상속제 관습을 선호엘리트 집단인 전사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증가 → 신의 평화운동을 주도한 교회는 세속의 기사가 아닌 그리스도의 전사라는 새로운 기사도의 성전관 대두당 시대인들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제안된 기사도에 관한 표준화되고 합일된 기준은 없음? 주종관계봉토, 불수불입권가신주군군사의무와 기타 서비스? 왕권 강화와 중세대학: 교회의 보편적 권위에 대한 개별적 군주권을 찾기 위한 왕들의 노력은 지속적→ 카롤링의 르네상스를 경험한 왕들은 중세대학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카페 왕조의 필리프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파리 대학을 적극적으로 후원→ 법학을 비롯한 인문학에 대한 후원3. 일하는 자? 경작하는 사람들, 도시민, 제철과 제염? 경작하는 자: 농사짓는 이들은 크게 자유농과 농노로 구분? 도시와 길드: 도시 상민과 수공업자들은 길드로 공동체적 운영제품의 품질과 가격 등을 통제→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저해? 제철과 제염; 봉건 영주들이나 십자군 전쟁에서 수도승과 성직자가 참여한 이유: 전쟁참여자에게 사기를 북돋고 멘탈 정리 , 수도승-소극적인 치료행위를 함, 십자군 전쟁은 성지순례라고 칭했기 때문(예루살렘을 향해 성지순례를 간다고 칭함)??18세기 이후 역사가들이 십자군전쟁이라 칭함Q.왜 십자군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을까?필요하니까, 18세기-팽창의 시기,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시기, 이것에 대한 명분이 필요)? 비잔틴 제국: 32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에 '새로운 로마'를 창건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칭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두 아들에게 줌그리스 문화+오리엔트 문화=동로마문화1453년 5월 29일 투르크에 의한 비잔틴 멸망1054년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로 나뉨726년 성상파괴운동레오 3세의 개혁- 이민족에 대한 군사력 확충이 필요했고 이를 뒷받침 할 재정확충의 필요성787년 니케아 제2공의회를 통해 여황 이레네는 성상 숭배제도를 부활시키나 레오 5세가 성상파괴 정책을 다시 부활 ?교회를 국가 교회로 {로마 카톨릭의 수장: 교황, 동로마(비잔틴 제국)수장:황제?국가 교회}? 이슬람과 비잔틴: 10세기에 중앙아시아 방면으로부터 이슬람제국의 동부로 이동하여 이슬람교도가 된 셀주크 투르크족이 11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예루살렘유대교: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예루살렘은 남조 유다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이르 2세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 억류되었다. 기원전 537년 페르시아 왕 키투스 2세에게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70년, 135년의 두 차례 봉기 후 로마는 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의 도시’라 했다.기독교:기독교의 핵심사상인 예수의 부활이 재현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므로 최고의 성지이다.이슬람교: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죽고 승천한 곳이 예루살렘이며, 이슬람교의 3대 성지중 하나이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상업 활동이 전 유럽에 파급,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국가의 분열과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던 덕분, 성전기사회와 요한 기사 수도회 등의 기사 수도회의 창설-제2차 십자군 원정(1147-49)투르크의 예루살렘왕국 동북방의 에데사 점령 소식과 함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의 설교에 의해 다시 십자군이 결성?프랑스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가 참전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의 의심과 예루살렘 라틴왕국의 군주 제후들의 질시로 완전히 실패-제3차 십자군 원정(1147-49):실패이슬람의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어 예루살렘을 함락(1187)?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영국의 리처드 사자왕, 프랑스 필리프 2세의 참전1192년 리처드 사자왕 살라딘과 휴전조약 체결'제왕의 십자군'이라 부름-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플랑드르백 볼드윈과 북 프랑스의 기사들이 호응 ? 육로가 아닌 해로를 택하고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수송과 식량 공급을 의뢰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에게 점령된 자라시의 점령. 이에 교황은 이들을 파문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볼드윈을 황제로 옹립하여 라틴제국을 수립-제5차 십자군 전쟁(1218-1220)이집트를 공격 ?다미에타점령-제6차 십자군 전쟁(1228-1229)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인솔 ? 외교적 절충에 의한 예루살렘 획득- 제7차 십자군 전쟁(1249-1254)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튀니지로 원정 ? 유행병으로 병사그 후에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1274년 십자군을 제창했으나 교황이 사망함으로써 그 계획은 중지시리아에 남아있던 예루살렘왕국은 내분과 분파로 내부적 약화를 거듭1291년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십자군 전쟁의 결과 및 역사적 의미-서유럽정치: 로마교황의 권위 추락과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후와 기사들의 대거 몰락 ? 군주권의 강화와 국민감정의 대두로 군주국가의 출현경제: 동방무역의 활발로 화폐 경제와 도시의 발달? 장원 경제의 해체군사: 기병과 보자적인 입법권을 가진 자치적 행정단위주교가 거주하는 종교적 중심지인구증가와 경제력 향상으로 상공업 중심지의 성격중세도시 유형? 이탈리아 도시- 주변 농촌 지역을 도시의 경제적인 요소에 법적 정치적으로 일원화시킨 형태로 나타난 사회 경제적인 또는 시민적인 조직을 구성하지 않고 영역 국가 형태? 알프스 이북 도시-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며, 사회적으로나 영역적으로나 주변 농촌 지역과 고립해서 상공업 중심지교회의 상업? 교회는 상업은 탐욕의 소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모든 상업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달로 상업이 일반화되자 이에 대한 반대는 크게 완화? 경제 윤리의 초점은 빈민구제와 공정가격 그리고 이자로 압축?대부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인 태도로 대금업은 주로 유대인에게 맡겨짐중세 도시민? 도시민은 대체로 공인과 상인으로 양분? 공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며, 도시민의 생활규제는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대체로 공통된 기본적 양상을 나타냄? 도시민은 자유로운 신분을 갖고 있었으나 그들 도시는 봉건영주의 관할 하에 있었고 도시민이 자치관을 획득하기까지는 오랜 시일과 끈질긴 투쟁이 필요조합(길드)? 도시민의 이익 또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 고용문제와 생산품 가격 및 노임의 통제 그리고 생산과 판매에 관한 공동규제를 목적? 상인 조합과 공인 조합으로 나뉘고 그 목적은 대외적 경쟁을 막고 대내적 상업행위를 조합원 간에 균등하게 안배하고자 하는 데 있음? 회원에 대한 일률적인 규제는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을 막은 요소로 작용하였고 자유경쟁에 허용되는 근대적인 상업과 도시로의 발전을 지체? 공인 조합은 노동조건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며 그 조직이 지역적으로 통일된 것도 아님.? 공인 조합은 조합원들에게 가격이나 노동 시간 등에 관한 규제를 가하고 가격은 제품에 따라 일정? 품질의 감정은 조합의 전문직 ‘감독’이 하고, 노동시간이 정해지고 기술적 향상은 집단적인 승인을 받아야 함? 친목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회원 간의 문 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