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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4.3 사건 및 여순 사건
    제주 4.3 사건제주 4.3사건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 사건에 공감을 나누고 이해를 하기 위해 일어났던 시기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우선, 제주 4.3 사건의 간략한 정리를 해보자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 촉구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이 사건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1948년보다 3년 더 앞선 시대상황을 간단히 말해보겠다.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을 함으로 일왕이 항복을 하고 그토록 우리가 원하던 광복의 그날. 우리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데 소련이 북쪽으로 내려와있었다.이것을 본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한반도 남쪽으로 들어온다. 이 모든 상황은 광복한 다음달에 모두 이루어진다.따라서 우리는 광복이후에 즉각 독립이 아닌 미소 군정상태를 맞이하게 되고 이에 따라 38선이 생긴다. 이 모든 상황의 이유는 우리민족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냉전이 시작되면 소련과 미국 사이의 회담이 결열이 되고 만다. 당시의 미국편에 있던 이승만박사가 전라도에서 정읍발언을 한다(1946년 6월 3일)“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이 발언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안될 발언이었으니,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민족지도자들의 반대가 빗발쳤다.이 상황속에서 미국은 소련에게 제안을 하였다그내용은 “우리끼리는 어차피 대화가 안돼니까 유엔한테 물어보자” 하지만 소련은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자 반대를 하였고,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 불구하고 유엔에게 물어보았다.유엔은 임시정부말고 독립을 하기 원했고 결국 국제연합에서는 1947년 11월 14일 UN감독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즉, 이말은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현실화된 것이다.따라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에 나선 김구선생님이 등장하였고, 남에 있는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남북조선제정당, 사회 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하여 평양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만나 합의를 본다.그 결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우리 민족은 하나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물러가라는 결정을 내렸다.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선거 절차를 밟았고 결국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최종적으로 5월 10일로 결정된다. 이 결정에 따라 김구선생님등은 5월10일 선거 불참, 거부에 나섰다.선거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뜻까지 무시하고 계속해서 선거를 더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남한 200개 선거구에서 투표가 실시된다.하지만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불발되고 초대 국회위원이 200명이 아닌 198명이 되었다.이 결과 제주도는 그 당시에 빨간 섬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우리는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야한다.“여기서 왜 유독 제주도에서만 선거구가 불에 타고 선거를 치를 수 없었을까?” “과연 4.3 사건 이전 제주도에는 어떤일이 있었을까?” 라고 말이다.해방공간의 제주도! 조선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어왔던 제주도! 제주도에 대한 역사를 좀 더 살펴보자면, 일제 감정기때 더더욱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하고 가까워서 일제 강점기때 징용과 징병의 인적 수탈을 당하였다. 또한 일본은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제주를 군사 기지화하였다.제주도를 군사 요새화한 일본, 강제 노역으로 고통을 받고 드디어 광복의 날이 찾아온다.하지만, 제주도는 미국이 9월에 들어와야하지만 한달 늦게 들어옴으로서 광복은 됐지만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광복 이후에도 날로 심해져가는 일본군의 횡포와 수탈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군수물자를 뒤로 빼서 팔아버리거나 총칼로 제주도민을 위협하는등, 도민들이 생산물을 내면 일본인들이 뺏어가고 배급을 나눠주는데 배급은 커녕 도민들 보는 앞에서 곡물에 석유를 붓고 다 태워버렸다.이러던 시기 혼란스러웠던 제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창립된다.그리고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이 들어오는데 이것이미군정 시대라 한다. 미군정 시대가 시작되자 제주도민은 희망을 가졌지만 미군정은 제주도 뿐 아니라 전국의 남한의 친일파경찰과 친일파 공무원을 그대로 등용하였으니..미국이 왜 그랬을까? 더 이상 미국의 적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었기 때문이다.즉 미국은 남한에 있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소련과 대결향상을 펼칠 생각을 한 것이다.시간이 흘러 1946년 말 군정경찰 간부 82%가 일제 경찰 출신이 되었다. 그리고 제주도를 도에서 도로 승격시켜 섬이였던 제주도를 경상도, 전라도와 같은 급으로 만들었다.이것은 도로 승격되니 섬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지원이 끊기고 범위가 커지니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높아진 실업률, 전염병 창궐, 흉작등 경제적인 어려움이 나타났다.또한 도의 개념이 됬으니 더 많은 치안 유지를 통해 육지에서 경찰을 더 불렀는데 이 경찰을 응원경찰이라한다.응원경찰 역시 친일파 출신이었고 이러한 상황들이 결국 제주도민은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증가 되었다.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다.1947년 3월 1일 3.1 발포사건이 시작된다.1947년 3월 1일은 3.1 운동 28주기를 맞이하는 기념행사일이였다.관덕정에서 평화 가두 시위를 하였는데 제주도 경찰은 시위라는 것 자체가 두려웠는지 응원경찰 100명정도를 더 불렀다한다. 시위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경찰이 말을 타고 갈 때 아이를 실수로 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지만 경찰은 아이를 치고 그냥 달려가고 그 모습을 본 도민들은 화가나 경찰을 쫓아가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한다.그것을 본 경찰은 폭동으로 오인하고 그 자리에서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한다.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사망자 중 아무 죄없는 어린이, 부모등이 피해를 입자 도민들은 더더욱 분노를 하기 시작한다.결국 도민들은 제주도 경찰서로 쳐들어가 경찰 진상규명과 발포 경찰 책임 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하지만 경찰들은 제주도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거치하고 당장 발포할 태세를 취하는데..당시 제주 신보 기자들의 중재로 마리가 되는가 싶었지만 경찰의 책임규명과 사과가 없자 도민들은 참을 수 없어 9일 후에 3.10 총파업에 돌입한다.이사실은 제주도뿐 아니라 서울지역, 당시 중앙경무부까지 알려지게 된다.중앙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까지 와서 제주 공무원을 불러놓고 이러한 발언을 한다.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즉 사회주의자로 몰아간 것이다.그 이후에 수많은 응원경찰이 제주도로 몰려들고 서북청년단도 제주에 도입된다. 서북청년단 중에서도 건달끼있는 사람에게 완장을 채워주고 경찰의 면목으로 제주도로 보낸 것이다.따라서 1947년 한 해 동안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검거와 고문을 당하고 그리고 나서 드디어1948년 4월 3일 운명의 제주 4.3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서 봉화불이 불타오른다. 그리고 좌익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한다라는 명분으로 무장봉기를 한다.즉 총:총 전쟁발발의 위기를 격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정부에서는 김익력 연대장에게 군대를 투입해 토벌하라 하지만 김익렬은 제주도 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니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주장을 한다.그러자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 경비대 제 9연대장 김익렬이 서귀포시 구억리에서 협상을 하게 되었다.(4.28 평화협상)하지만 약속이 지켜지는 듯하였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얼마 않있다가 우익청년단원들에 의한 제주음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가 아직도 존재한다.이 사건은 미군이 항공촬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중 이므로 깊게 말은 하지 못하지만 확실한 점은 미군 대토벌작전의 계기가 제주읍오라리 방화사건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제주도사태 관련회의가 개최되는데 회의 결과 김익렬 연대장 해임 그리고 후임으로 박진경 연대장 부임이 되었다. 즉 제주도민은 사회주의자라는 의견이 결정된 것이다.박진경은 이렇게 주장한다“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결국 박진경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시간이 지난후 미군정이 끝이나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다(이승만정권수립)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로 대대적인 토벌 명령을 내린다.“제주도는 군대를 더 동원해서 토벌하라”이러한 명령 때문에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 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미군철수를 주장하자 여수, 순천등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한다.끝으로.. 결국 제주도민들은 학살당했는데 이것이 삼진작전이다.“좌익세력들을 태워죽이고 굶겨죽이고 죽여 없앤다”해안선으로부터 5km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가 내려졌는데 이 이유는 좌익은 힘이 없으므로 총을 들고 산위로 올라가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산간에 있는 사람들을 해안가로 내려보내 주소지를 옮기도록 소개령이 내려졌다(제주도 중산간 소개령)제주도 중산간 소개령은 중산간 주민들이 무장대의 가담할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집단 이주명령으로 무장대 보급의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웠다. 이중에 중산간에 있던 사람중에 소식을 못듣거나 그냥 남은 사람들은 이유불문하고 총살을 당한다.이것은 끔직한 학살극이 벌어진것이다.(제주도민 30만명 중 1/10인 3만여 명이 학살을 당함)하지만, 제주도민들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이후 1963년 4.19혁명으로 하야를 하게되는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사과를 기대했지만 바로 50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반공과 친미를 외친 군부정권이 등장한것이다.이것은 즉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사건이 된것이다.제주 4.3사건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으로부터 알려지게 되는데 현기영은 이 사건을 쓴다는 것 만으로 끌려간다.계속해서 침묵이 계속되다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고개숙여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회과학| 2019.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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