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굴기5380109 송민경포르투갈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을까?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원, 영토, 인구 등 객관적인 조건이 아닌 나라의 주체적인 의지가 중요하다. 객관적인 조건은 주체적인 의지가 굳건히 섰을 때 빛을 발휘한다. 강대국의 핵심은 유능한 지도자의 존재 유무이다. 유능한 지도자는 사심이 없고 유능해야하며 국민 개개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유능한 지도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높은 교육수준, 관용적 이민 정책,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형성, 국민통합 여부, 혁신의 지속, 구매력을 갖춘 인구수, 인구절벽, 인구고령화, 자동화 대처능력과 산업생산능력, 국토의 크기, 군사력, 외교력 그리고 제도화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된다. 포르투갈이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핵심이 되었던 포르투갈의 해양진출 배경부터 포르투갈 제국의 붕괴까지의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포르투갈은 기원전 7세기 켈트족이 진출하고, 기원전 2세기 로마를 정복하고, 1143년에 이르러서야 군주제 국가로서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내부 불만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였다. 중앙집권 정책의 강화에는 5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 정치적인 요인에는 가톨릭교의 영향, 평민들의 환영, 부르주아지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 장자 상속제를 위한 귀족들의 관심 등 각 사회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 두 번째, 경제적 요인에는 값비싼 향료(후추), 마르코 폴로의 , 동방 상품에 대한 수요와 동경이 있다. 세 번째, 종교적인 요인에는 기독교 전파가 있는데, 교회의 승인으로 인한 대의명분 획득, 튀르크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인해 무역단절로 신항로 모색, 이슬람권과 투쟁으로 인한 기독교 전파 등이 있다. 네 번째,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술과 항해기술의 발달이 있다. 다섯 번째, 지중해와 대서양의 교차지점, 긴 해안선과 강의 하구마다 잘 발달된 항구 등 해운활동에 최적의 조건, 무역업의 발달,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유럽국가 등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포르투갈의 해양진출 동기와 배경을 요약해보자면, 대서양과 맞닿은 위치, 패권싸움과의 거리감, 조선술과 항해술의 지원과 발달, 국제적 명분으로서의 기독교 전파, 부족한 자원으로 인한 무의 발달이 있다.엔리케왕자의 해상진출을 주도하게 된 6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 쾌속 범선인 나우선이 등장했다. 두 번째, 사그레스에 조선소, 관측소, 국립항해학교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항해 훈련을 할 수 있었고, 해양 지도도 제작되었다. 세 번째, 수학과 천문학의 이론을 항해술에 접목하였다. 네 번째,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 간의 전략적 요충지인 세우타를 점령하였다. 세우타는 엔리케 왕자를 포함한 많은 귀족이 참여하여 유럽의 세력권이 그 동안의 지중해 중심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바뀌는 출발지역이 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서해안 진출 지원이다. 엔리케왕자는 아랍 상인들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서아프리카에 도착하여 황금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섯 번째, 1487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에서 희망봉을 발견하였다. 이는 주앙 2세에 의해 희망봉이라 지어졌는데, 희망봉은 향신료 독점을 위한 아시아 진출을 향한 발판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향료 무역 독점을 위해 아프키라의 모잠비크, 몸바사, 말린디를 개항하여, 인도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1차 항해 선단 4척 중 2척이 귀향하였는데, 이는 60배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2차 선단에서는 칸나놀과 동맹 채결하여 캘리컷을 정복한 후 우호조약을 체결함으로서 후추교역을 포르투갈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5차 선단까지 파견되었다.아시아해역에는 기존의 교역체계가 존재하였고, 캘리컷과 말라카가 척추 역할을 해왔다. 인구가 150만 명에 불과한 포르투갈은 물물거래를 하다가 본토의 지원군이 오면 거래지역을 점령하는 등 무력(대포)을 바탕으로 상업거점을 세우고, 요새를 만들었다. 이후 본국과 거리가 멀어 확보된 지역을 통치 감독할 정치행정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인디아국을 설치하게 되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 무역독점하게 되었다. 이에 모든 이익은 해상진출을 주도한 군주에게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왕실 독점 교역이 성행하였다. 국가에서는 인도항로가 위험하다고 선전하였고, 인도항로를 비밀에 부침으로서 정보를 100년간 독점하게 되었다. 초기 인디아국은 알부케르크 총독이 고아를 1506년에 정복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은 1510년까지 배의 갑판을 본거지로 하는 해상에 떠있는 국가였다. 부왕이나 총독은 베네치아로 가는 동양물산의 수송을 막기 위해 인도양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재정, 사법, 종교 문제를 관장하여 국가체제를 과시하였다. 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 부왕은 캘리컷을 정복하고 인도서해안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알부케르크 총독은 인도동해역을 진출하고, 바다의 지배권뿐만 아니라 육지의 정치적 주도권과 상권 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인도의 고아를 인디아국과 인도무역의 중심도시를 삼고, 1511년 인도양, 자바해, 동지나해 사이의 목 부분을 통제하는 중요 해군기지인 말라카를 정복하였다. 1515년 호르무즈의 정복이로 인해, 베네치아를 향하던 이슬람 상인들의 향신료 교역을 차단하여 무역을 연중 상시화하고, 향료 독점을 시도하였다. 1500-1509년 15만 톤의 향신료를 유럽에 들여옴으로써 향료제도를 정복하고 상관 및 요새를 설치하였다. 반다제도와 뉴기니 서부까지 확대하였지만, 완벽한 독점에는 실패하였다.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상업 국가들을 분열시키고, 식민제국을 건설하여 동양과 직접 교류를 실현하는 등 인디아국에서 동양제국으로 팽창되었다. 또한 베네치아로부터 남독일과 플랑드르로 가는 향신료 판매 루트는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흡수되어 소멸되는 등 점점 동양제국을 넓혀 나갔다. 포르투갈은 동지나해와 중국, 일본을 진출하였다. 1557년 마카오 거주를 인정받게 되면서, 마카오는 일본무역의 기지가 되었다. 1571년에는 포르투갈이 무역상관을 세우기 위해 일본에 나가사키 항을 개항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말라카, 중국,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였다. 이외에 16세기 말엽 브라질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17세기에는 담배도 경작하는 등 아메리카, 브라질, 아프리카 서해안 등에서 활동하였다. 포르투갈은 겨우 150만 명의 인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3대양과 4대륙에 걸쳐 있으면서 세계 교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포르투갈 제국은 아시아 향신료의 유통체제를 장악, 유럽에 유입되는 향신료를 독점,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의 무역거점을 50여개 건설,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역항로 차지하는 등 해상무역의 최강국이 되었다.포르투갈의 규제를 피해 이집트나 서아시아를 통해 베네치아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전달되어 독점이 크게 손상되면서, 옛 지중해 동부 연안 루트가 부활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베네치아를 경유하든 포르투갈을 거치든 간에 향신료 수입비용이 차이가 없게 되자 독점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왕실 주도 교역 시스템에는 4가지 한계가 있다. 첫 번째, 왕실 부담 선단 파견 비용이 한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초과하였다. 왕은 독일 및 이탈리아 대상인들의 자금을 빌렸고, 향료수입의 절반이 자금 대여 상인들에게 넘어갔다. 이는 민간업자에 후추 수입 사업, 유럽 후추 도매상 등의 사업 이양에 기인하게 되었다. 6세기 중엽부터 후추와 향신료의 수입의 감소하면서 카레이라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후추의 처분 루트인 리스본-안트베르펜 루트가 쇠락하였다. 도한 무리한 선박운용으로 사고가 빈발하고, 선박 건조능력이 한계에 치닫게 되었다. 두 번째, 1524년 포르투갈 왕실은 300만 크루자도의 부채를 졌다. 1528년부터 연 25%의 대여금 이자를 금융거상들에 지불하였고, 1570년부터 왕실 독점사업이었던 향료교역을 자유교역으로 전환시키면서 사양기에 접어들었다. 세 번째, 사무역 확대와 현지화이다. 동방으로 가는 포르투갈인들 중에는 모험상인, 부랑자, 교도소에서 출소한 죄인들이 다수였는데, 이들은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여 현지화 되면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미약해 졌다. 마지막으로 인디아국 내부의 공동화이다. 인디아국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본국으로부터 인재를 대량 투입해야 하나 왕실재정이나 본국의 인구 구성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인디아국 내부는 점점 공동화되어갔고, 아시아에서 포르투갈 인들은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개인적 무역활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