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6월 민주항쟁1.사건의 배경1980년 간접 선거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제5공화국이 들어섰으나,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였다. 1987년 직접 선거를 원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전개 과정1987년 초, 전두환 5공화국은 여전히 군사정권을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운동권들을 붙잡으며 탄압할 때였다. 당시 운동권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던 박종운의 행방을 캐기 위해, 그의 후배였던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은 물고문을 가한 끝에 그가 사망하자 은폐할 목적으로 뻔한 공작을 펼쳤다. 바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더라”이다. 하지만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한 결과,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결국 정권에서는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 대통령마저도 체육관 선거로 뽑고, 그 뒤에 개헌논의를 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논의를 묵살했고 민심은 분노로 휩쌓이며 격앙되었다. 유신 독재 시절부터 철저하게 탄압을 받으며 사형선고를 받고, 구류조치를 당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손을 잡고 신민당을 탈당 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며 본격적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들을 폭로하게 되면서 여론은 폭발했고, 이에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 집회를 시작하였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생들은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열었는데, 당시 연세대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에 직격하게 되었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년이었던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피신하여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다. 당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하는 장면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리기도 하면서 현재까지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사진이 되었다. 이한열의 죽음으로 학교는 뒤집어졌고,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들을 막으려고 대학내 예비역 출신부터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가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6월 10일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데,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고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하지만 저녁 6시 차량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명동성당에는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기수환 추기경이 경찰을 막아섰는데, 성당 안으로 경찰을 투입할 수 없었던 이유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유럽 및 남미와 같은 가톡릭 국가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18일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려고 했으나 당시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이를 말리며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제압하겠다며 설득하였다. 하지만 경찰력은 전국적인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16일 경남 진주에서 파출소 4곳이 불탔고, 17일 진주시에서도 파출소를 불태웠고 철도를 점거하였으며, 같은 날 마산에서는 산호 1파출소, 의창군청, 노동부 마산사무소가 공격받았고 방범초소가 전소되었다. 또한 18일 부산 남포동 일대를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장악하여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고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되는 중에 회사원 이태춘 씨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자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부산방송국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19일 대전에서는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면서 전의경 박동진 일경이 숨졌고 26일 경기도 안양에서는 경찰관사와 파출소가 불에 탔고 민정당 건물도 전소되었다. 6월 20일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계엄을 선포하면 한미 동맹이 훼손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당시 미국대통령 레이건은 한국의 군사 정권의 계엄 선포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6월 21일 민정당은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인 22일에 전두환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김영삼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24일 김영삼은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지만 전두환은 끝내 거부하며 회담을 결렬시켰지만, 그 다음 날 25일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고, 6월 29일 드디어 당시 민정당의 대표이자, 전두환의 후계자로 이미 각광받고 있었던 노태우가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6월 항쟁은 수많은 시민들의 승리가 되었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이 때 100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건국 이래 역대 최대의 집회 참가 인원수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