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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사와 미학-한국 사진사
    한국 사진의 발전-한국 사진의 시작과 현재의 발전 과정에 대해-강의사진사와 미학지도교수이00 교수님학부학번이름제출일목차1. 서론2. 한국 사진의 역사3. 주요 사진작가4. 주목할 행사5. 결론6. 출처 및 인용1. 서론우리는 사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카메라, 퓰리쳐 상, 외국의 유명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마 사진술을 처음 발견하고 발명한 사람들이 외국의 사람이며 한국에서는 사진작가, 사진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한국의 사진역사 전개는 서양과는 다른 독자적 과정으로 이뤄졌다. 포토그라피(Photography)를 새로 번역하지 않고 사진(寫眞, 베낄 사/참 진)이라는 말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또한 일제 강점시대와 전쟁, 독재의 과정을 모두 겪은 한국 근대사와 역사의 특수성이 더해져 사진이 다채롭게 발전하는 것에 큰 영향이 끼쳤고 기술적 기반과 제도 또한 근본적으로 서양과 달랐다.사진이 탄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에 의해 사진술이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가장 큰 이유는 이미지를 소유하고 생산하는데 직접 참여하고자 했던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사진은 귀족층에 한정되어 있던 범위를 일반인들에게 까지 작용하게 되었고 지금은 누구나 사진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일상을 기록하고 남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이번 한국 사진사를 알아보는 레포트를 통해 서양에 한정되어 있었던 사진의 역사를 한국으로 확장시키며 독단적으로 발전된 한국의 사진역사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을 것이다.또한 한국의 여러 사진작가들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단지 풍경사진, 초상 사진 뿐 만 아니라 사진의 더 많은 용도와 역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2. 한국 사진의 역사우리나라에서 처음 찍은 사진은 1871년에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와 통상을 요구한 미국공사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이중요한 날이다. 역사상 최초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은 기념비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신문물로 사진을 수용한 사실은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어진이나 국가의 기록화 등의 제작을 사진에 의존하게 만드는 계기였으며 사진을 통해 궁중 생활을 일반인도 볼 수 있는 기회의 시작이었다. 이를 통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사진 문화가 서서히 뿌리 내리게 되었다.고종은 이후에도 자주 사진을 찍었으며 사진을 가장 많이 남긴 국왕이 되었다. 사진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고종을 비롯해 순종, 영친왕, 의친왕, 왕비들, 왕족들의 사진이 이 시기에 많이 남게 되었다.그림 4 고종황제의 초상사진 그림 5 고종황제 사진 그림 6 대한제국 황실사진촬영국은 이후 사진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진관은 사진 도입 무렵부터 공공성을 띠면서도 영업적인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18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진관은 서양 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갑작스런 근대화에 성난 군중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기도 하였고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존립의 위기를 가지기도 했다.하지만 1895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자신의 전통적 모습을 남기려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사진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신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이후 사진관은 1940년대까지 사진 문화 발전을 담당했고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초상사진에서부터 결혼, 약혼, 환갑, 돌 등 기념사진, 일상의 기록과 풍경사진의 모든 작업을 하기도 했다.초기 사진관 시대의 초상사진이 대중들에게 자연스런 문화가 되면서 사진의 기능과 범주는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몇몇 선구적인 사진가들에 의해 예술사진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그림 7 경성사진관 그림 8 1920년 기생사진 그림 9 부유한 자제 돌사진 그림 10 1940년대 남매부유층 자녀는 사진관에서 돌사진을 촬는 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사진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수상하는 작품에 따라 사진의 흐름과 유행이 바뀌는 시기였다.일제 식민지 시기의 공모전이 주로 통치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선보이는데 이용된 반면, 해방 이후 계속된 사진가들의 국제공모전에서의 입상은 개인적인 영예를 넘어서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실추된 한국의 이미지를 드높인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진가들의 작품은 리얼리즘사진으로, 미적 탐구와 사물을 관조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진가들의 작품은 살롱이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각각 서로 다른 사진의 본질론을 주장했다. 1950년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획득한 리얼리즘에 대한 사진가들의 현실 자각은 사진의 사회적 기능을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고 살롱사진가들 또한 일제시대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예술사진의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한편으론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 유행의 흐름 속에서도 주관적인 경향의 사진과 사물의 본질론에 접근하려는 독자적 세계를 추구한 사진가들이 나타났으며 다양한 형식실험들이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사진 표현의 폭을 확장시켜 나갔다.50,60년대 리얼리즘 사진으로 시작한 월간잡지의 사진가들은 소외된 계층의 삶에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들의 사진은 정부의 관용아래 제도권내의 잡지 속에서 이뤄졌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시화하여 독자들로부터 끝없는 관심을 유도하였고 급격히 밀려오는 산업사회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자생터를 잃어가는 서민들의 나락에 빠진 자괴감을 사진에 나타내고자 노력했다.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계속된 개발독재 시대에는 우리 사회의 아픔과 부정적인 면을 사진가들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사진이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드러낸다.70년대 한국정부는 획일적이고 전체 주의적인 모습으로 사회를 통제했고 70년대 시작된 대중과 권력의 이념적 대립은 무분별한 산업화 정책과 개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 속어 광고사진, 사진 인쇄분야가 크게 발전했다. 1980년대에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에서 사진을 공부한 사람들이 귀국해 대학 사진학과의 강의를 맡고 상업사진 분야에서 활동한 점도, 상업사진이 기반을 잡고 국제적 수준으로 발돋움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디지털 사진의 보급과 컴퓨터 사용의 일반화로 영상이 미지의 활용 범위가 늘어나자 디지털 사진 산업이 크게 번창했다. 광범위한 수요층의 형성, 영상커뮤니케이션의 대중적 확산으로 사진이 더욱 발전했다.2000년대 이후에는 사진가들의 해외 전시나 외국 사진가들의 국내 전시가 이전에 비해 열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의 빠른 성장은 작가와 일반인의 경계를 급격히 허물고 있으며 아날로그 사진 재료의 생산 중단을 초래해 재현의 위기와 표현의 위기가 찾아오고 있기도 하다.현재는 수많은 기기들의 발전으로 사진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꽤 수준 높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누구나 원하는 사진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사진 공모전의 수도 많아져 전공자들과 프로 포토그래퍼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공모전에 응시하고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3. 주요 사진작가조선조 말기의 서화가 지운영은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술을 배웠다. 귀국 후에는 종로 단성사 근처에 사진관을 성립하였고 1884년 3월 16df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고종의 어진을 사진 촬영했다.황철은 사진도입의 선구자다. 1876년 중국 천진에서 사진술을 배웠고 1883년 개화기의 서울을 중심으로 촬영하다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지운영과 함께 외국에서 사진기재를 수입, 판매하기로 했고 귀국 후 사진관을 설립했다.김용원은 조선조 도화서의 화원 출신으로 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1880년 부산에서 일본인 사진사로부터 사진술을 배웠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을 공부한 후 귀국해 촬영국을 개설하였다. 일반인 상대로 영업을 하기도 한 한국 사진의 개척자로 고종의 밀사로 러시아에 파견되기도 했다.사진관은 사진 도입 무렵부터 공공성영 사장을 개업하여 초상사진가로 활동했고 경성 사진학 강습원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서울의 동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한 제 3회 개인전람회를 시작으로 약 15년에 걸쳐 사진을 발표했다.예술사진 운동 시대였던 1920년대~1940년대에는 공모전과 개인 사진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해외에서 유입되는 사진에 대한 정보들은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동시대 사진의 세계사적 흐름을 알 수 있게 했으며 예술사진의 유행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유행하는 공모전은 상투적인 사진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지평을 넓힌 일이나 사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정해창은 우리나라의 사진가중 최초로 사진개인전람회를 열었다. 1929년 광화문빌딩 2층에서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약 5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사진 개인전람회를 개최해 한국사단의 큰 전환기를 만들었다. 그 후 약 10여 년간 그는 4회에 걸친 개인전람회를 통해 독특한 한국적 미의식이 깃든 사진작품을 발표했다.임응식은 우리나라의 아마추어리즘을 개척한 사진작가이다. 일제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회화주의 사진의 틀을 따르는 작품을 했고 해방 후 생활주의를 주장하면서 사진계의 가장 주목받는 사진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6.25전쟁에 종군하면서 찍은 사진을 전시한 1952년의 경인전선보도사진개인전은 회화주의 또는 단순한 살롱사진에 머물러있던 한국사진계에 신선한 미학적 충격을 준 사실주의 사진이 선보인 자리였다.일제시대 때 당시에 유행하던 살롱 풍의 사진작품 활동을 한 이형록은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일원이 되면서 생활주의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리얼리즘이라는 뚜렷한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신선회(新鮮會)를 등장시켰다. 신선회는 확실한 철학과 방법론의 부재로 혼미를 거듭하던 리얼리즘 사진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4. 주목할 행사1920년대에 일본일들 주도의 사진계에 한국적인 사진 문화를 정립할 것을 선언하는 모임이 형
    예체능| 2021.08.05| 13페이지| 3,000원| 조회(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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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사와 미학-사진술의 기원과 미친 영향
    사진술의 발전과 사진술의 영향-사진술의 기원과 그 시대적 상황에서 사진발명이 끼친 영향에 대해-강의사진사와 미학지도교수이00 교수님학부학번이름제출일목차1. 서론2. 사진술의 기원3. 사진발명 전과 후의 시대적 상황4. 사진 발명이 사회에 끼친 영향5. 결론6. 출처 및 인용1. 서론지금 나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면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가장 생생한 방법으로 현재를 보존하는 방법은 사진이다. 사진과 동영상은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언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욕구, 간직하고 싶은 욕구는 존재하며 이를 사진과 동영상이 채워주기 때문이다.특히 사진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그림으로 그 시대의 사실을 표현했고 남겼다. 하지만 그림은 화가의 생각과 견해에 따라 다른 요소가 첨가될 수 있다. 글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위인들은 일기를 써 자신의 생애를 후대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누군가 그 시대적 상황을 쓴 글이 현 시대에서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하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그들의 표현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과 글은 얼마든지 덧붙이거나 덜 붙여 제작할 수 있는 매체이다. 하지만 사진은 아니다. 사진과 동영상 매체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우리가 1900년대의 미국이나 크루즈선 안의 상황을 알고 영화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사진 자료가 남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 찍힌 사진과 동영상 자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이번 과제는 사진술의 기원과 사진 발명 전 후의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 이해하며 사진 발명이 그 당시의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다. 한 분야의 유래와 역사, 현 시대까지의 발전 상황을 아는 것은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중요한 지식이 된다. 이번 과제를 통해 사진술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서 앞으로 발전된 사진술이 어떤사용하였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림이 최고라고 인정되는 시기였기에 사진은 그저 밑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될 뿐이었다.그 후 1807년 윌리엄 하이트 율리스턴이 카메라 옵스큐라보다 더 세련된 기술적 장치를 고안해냈다. 이는 ‘카메라 루시다’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카메라 옵스큐라보다 더 자세하고 간편한 상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옵스큐라에서 루시다까지의 발전은 보다 정확히, 보다 빨리, 보다 값싸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려는 열망은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카메라 스스로가 속에 맺힌 상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는 이상을 갖게 했다. 하지만 맺히는 상을 정착시키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자세가 사진술 발명의 시발점이 되었다.사진술의 원리는 니엡스가 발견하였고 다게르가 발명, 공표하여 사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가 만든 사진 기법인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는 빛을 받은 유태역청을 라벤더 오일로 지우면 빛을 받은 부분은 그대로 굳어서 남고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오일에 녹는 현상을 이용 한 것으로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에서 헬리오 그래피라고 불렸다.하지만 상을 정착 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빛에 반응하여 비투먼(아스팔트의 일종)이 경화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최초의 사진은 빛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8시간에 달하는 등 상당한 오랜 시간을 들여야지만 한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태양은 늘 한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촬영하는 동안 태양의 위치가 변화하여 사진상에서 그림자의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그림 1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그림 2 니엡스 최초의 사진 [르 그라의 집 창가에서 본 조망, 1826]본래 디오라마 화가였던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는 카메라 옵스큐라와 관련ㄴ해 사진 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1829년 니엡스와 10년동안 공동 연구를 하기로 계약했지만 4년 후 니엡스가 사망한 후 사진을 얻을 수 있다.다게레오 타이프 기법은 선명한 세부 묘사와 풍부한 톤의 표현이 특징이다. 하지만 단 한 장만의 사진만 얻을 수 있고 좌우가 바뀐 사진을 얻을 수 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다.그림 3 다게레오 타이프 카메라 그림 4 다게레오 타이프로 찍은 링컨한 편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진술 발명에 고심하고 있었다. 과학자였던 탈보트는 1834년, 종이를 식염수에 담궜다가 건조시킨 후 질산은 용액으로 처리하고 그 위에 나뭇잎이나 반투명의 물체를 놓고 햇빛에 노출 시켜 물체의 윤곽을 나타내기에 성공하고 염화은을 바른 종이에 상이 맺히게 하는 방법, 종이의 음화에서 ?수의 양화를 인화하는 사진술의 기본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1839년에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이프를 발표하자 3주 후 탈보트는 영국 왕실 학회에 이 방법을 발표하게 되었다. 탈보트는 종이에 찍는 칼로 타입(Calo-Type, Talbo-Type)을 다게레오 타이프 처럼 금속판에 찍힌 사진보다 스스로 더 높게 평가했다.하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당시 종이의 품질이 선명하지 못했고 약간 결이 있는 사진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그림 5 칼로 타입1 그림 6 칼로 타입2이후 1851년, 프레드릭 스콧 아처가 콜로디온 습판법(Collodion Wet Plate)을 발명한다. 초상 사진가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허료를 지불해야 했는데 칼로 타입은 종이의 재질상 선명하지 못했고 특허료도 부담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유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유리에 점액질 용제를 사용해야 했는데 발견한 것은 콜로디온이라는 재료다. 이는 젖은 상태에서는 점액질이지만 건조하게 되면 단단하고 투명해진다. 콜로디온과 유리를 사용해 사진을 찍을 때 콜로디온이 마르지 않게 골고루 퍼지도록 하고 축축한 상태에서 현상과정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완전한 암실에 밀착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많은 불편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게레오 타이프에서 이룰 수 없었던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모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금 더 빨리, 선명한 상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은 결국 간편하고 선명하게 여러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데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3. 사진발명 전과 후의 시대적 상황사진이 본격적으로 발명되기 전의 시대는 문예 부흥, 학예부흥의 시대, 르네상스 시대였다. 르네상스 기대는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문화 혁신 운동이다. 이 시대는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르네상스 정신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 등지로 퍼져나갔다.르네상스의 빛나는 성과 3가지로 불리는 것에 해부학, 인체비례, 원근법이 있다. 우선 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사물(3차원)을 평평한 면(2차원)에 묘사해 그리는 기법이다. 이 시대의 미적인 가치는 비례, 균형, 조화 등으로 분석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에서 발원하여 시각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로 발전되기도 했다.서구 철학에서는 ‘보다’는 ‘사유(생각)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안다’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감각기관중 시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르네상스 회화 구성도 이 시각 논리에 따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원근법이다.또한 이 시기에는 미술의 리얼리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자연을 얼마나 정확히 묘사하는가가 중요했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림이 최고라고 인정되었기에 화가들은 더욱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이러한 관점으로 그들은 3차원으로 보는 것을 2차원 평면에 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보이는 장면을 전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그리고 혼돈의 시대가 도래 한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약 1760년~1820년)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공정으로의 전환으로 사회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 온 산업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산업 혁명에는 과학과 기계적 장치가 대량적으로 생산되었고 이를 중요시 했다.산업 혁명을 통해 왕족과 귀족 지배 체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실세를 장악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중상계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초상화를 원하는 반면 화가들은 그림이 하루 만에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즉 쉽게 그림을 그릴 기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진술이 발명되고 르네상스 시대가 끝난 이후 사실주의의 시대가 자리 잡게 된다. 사실주의는 형태의 사실보다 진실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발전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4. 사진 발명이 사회에 끼친 영향처음에 사진은 회화의 스타일이 적용되는 것이 유행이었다. 표현의 목표를 미학적이고 감정적, 지적인 효과에 중점을 두어 감성을 사진에 끌어 들인 예술 사진인 회화주의 사진은 초기 사진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예술을 생산할 수 있다는 매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사진을 기록만이 아닌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고 유럽 자본주의 시대의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자리잡혀갔다. 하지만 회화주의 사진은 사진의 기록성 보다는 예술성을 추구했고 회화적 표현기법에 따라 제작하며 어느 정도 회화 작품을 모방하는 등 기존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사상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보를 걸었다.이는 화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황금만능주의로 인해 지나친 모방과 감상적인 사진을 제작하기도 하였다.하지만 이는 또한 화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사진의 사실적 형태를 모방한 세밀화는 일부 화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려졌고 19세기 말에는 사진과 회화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실적 회화가 성행하게 되었다.사실주의가 사진과 같이 세상을 모사하고 작가의 상상력이 없는 미술로 천대받게 되지만 화가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새로 배우고 공부할 수 있었으며 시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진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었으며 20세기 중반, 사실적 회화가 다시 부활했고 1960년대에는 극 사실주의라고 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이 나타다.
    예체능| 2021.08.05| 10페이지| 3,000원| 조회(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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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사와 미학-사진과 회화의 비교, 사진과 영화의 비교
    사진과 타 장르의 이해-사진과 회화의 비교, 사진과 영화의 비교-강의사진사와 미학지도교수이00 교수님학부학번이름제출일목차1. 서론2. 사진과 회화의 비교2-1) 사진과 회화의 개념2-2) 사진과 회화의 관계2-3) 사진과 회화의 공통점2-4) 사진과 회화의 차이점3. 사진과 영화의 비교3-1) 영화의 개념3-2) 사진과 영화의 관계3-3)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3-4) 사진과 영화의 차이점4. 결론5. 출처1. 서론현대 사회의 과학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사진과 영상매체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핸드폰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사진을 찍는 것에 조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또한 그에 따라 SNS가 활성화 되면서 계정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장소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업로드 하고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또한 1인방송의 대 유행, 영상 플랫폼의 대거 등장으로 직접 구상한 컨텐츠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자신만의 방송을 시작할 수 있다.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남기고 싶어 한다. 자손을 퍼뜨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으며 점차 이는 사진을 찍는 것으로 진화되어 갔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의 발전 이전에는 애초에 그림이 있었다.그림은 원시인들의 벽화에서 출발했으며 색과 주제가 있는 벽화로 성장했고 점차 크기가 작아지고 소유할 수 있도록 캔버스, 종이에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졌다.사진사와 미학 강의에서는 사진의 역사에 대해 학습하며 미학, 의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과제에서 사진과 회화를 비교하면서 회화에서 사진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사진과 회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고 사진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며 사진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2. 사진과 회화의 비교2-1) 사진과 회화의 개념회화(繪?,Painting)는 캔버스, 종이, 나무, 유리, 비단, 콘크리트 등의 표면에 색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특히 미술에서 회화는 작업자의 미적 동굴의 벽화 등이 선사시대의 회화로 유명하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그려진 벽화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현대 회화는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였으며 추상화, 입체파,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예술 사조에 따라 다양한 표현 기법이 등장했다.사진(寫眞,Picture)은 ‘빛’과 ‘그린다’는 그리스 어의 포스(phos)와 그라포스(graphos)의 합성어로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물의 빛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카메라를 사용해 사물이나 풍경 등의 현실을 기록하고 표현한다. 사진 발명의 초기 시대의 거대하고 복잡한 방식들은 점차 간편하고 쉽게, 더 편하게 발전되어 왔다.카메라는 BC 4세기경부터 옵스큐라(어두운 방)에서 유래되었으며 어두운 방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단대편 벽에 비춰 밖의 사물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14세기 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늘 구멍 옵스큐라부터 카메라 루시다를 거쳐 현재의 카메라로 진화되었다.영국이 산업혁명을 앞세워 유럽 경제를 휘저을 때 특정 계급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시기에 사진이 나타나게 되었고 급성장한 신 중산계층의 그림에 대한 예기치 못했던 수요가 비등해짐에 따라 자극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이 점차 초상화 소유에 대한 욕구가 금전적으로 여유로워 지면서 급증했기 때문이다.그림 1 쇼베 동굴의 벽화 그림 2 대표회화 모나리자 그림 3 카메라 옵스큐라 그림 4 카메라 루시다2-2) 사진과 회화의 관계사진과 회화의 관계는 다양한 사고 및 세계관과 결합하여 있다. 예술이 사회에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19세기 특수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진과 회화의 관계는 시각 형식 상호간에 미친 영향 뿐 만 아니라 시대적, 문화적 상황과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사진과 회화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시대적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해를 해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다.19세기, 사진의 원리는 그림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옵스큐라로 그 인물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곧 발전되어 초상화의 영역을 지배했다. 화가들은 대상을 무엇보다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진을 이길 수 없었다.이러한 그림의 잠식기에 화가 폴 세잔은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을 화폭에 그리기 시작했고 회화는 재현(representation)에서 표현(expression)으로 변화되어 갔다. 세잔의 영향으로 회화계는 피카소, 고흐, 클림트 등 천재적인 화가들을 배출하면서 회화의 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현대 미술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그림 5 1838년 다게르의 탕플대로 그림 6 1882년 다게르의 한 귀부인의 초상화그림 7 1854년 앙드레 아돌프 디스테리의 인문사진2-3) 사진과 회화의 공통점사진과 회화의 공통점 첫 번째는 두 가지 매체 모두 외부로 드러난 대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며 대개는 사실주의 방식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사진의 경우 카메라로 우리가 실제 볼 수 있는 상황을 찍어 표현하는 것이다. 회화의 경우에서는 직접 보고 그리는 정물화나 초상화 등이 존재하며 그 방식으로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묘사한다.그림 8 오드리햅번 초상화그림 9 오드리햅번 사진두 번째는 2차원 세계라는 것이다. 카메라는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을 사진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회화 또한 3차원 상태의 것을 2차원에 표현하는 것이다. 즉 현실은 3차원이지면 최종적인 이미지화 작업이 끝나고 결과가 나오는 것은 2차원 화 된 평면이라는 것이다.그림 10 밤 하늘 사진그림 11 고흐 별이 빛나는 밤세 번째는 이미지가 물체화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실제로 한강을 만질 수 없다. 물론 물에 손을 담글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만질 수는 없다. 하지만 카메라로 찍어 한 장의 사진이 되면 우리는 그 이미지를 직접 만질 수 있다. 또한 그림으로 그리는 행위 후 나오는 결과물로도 우리는 물체화 된 현실을 만질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사진과 회화를 액자에 걸어 소유할 수 있다.네 번째는 두 가지 다 시각 예술이라는 것이다. 사진과 회화는 그 행위메라에 이르기 까지 여러 과학적인 방법들이 결합 된 방식이다. 빛의 직진성과 반사성, 기계의 조합, 사진 현상, 필름 등 사진을 찍는 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에 과학이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 하지만 회화에서는 특별한 과학적 연관성 없이도 활동을 할 수 있다.그림 12 화가의 작품 활동두 번째는 사진은 주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지만 회화의 경우 주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과에 차이가 크다. 사진을 찍는 것에는 같은 장소에서 찍을 때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다. 사과를 찍으면 사과가 찍힌다. 하지만 회화에서는 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사과를 그리는 것이 목적일 때 A라는 사람은 사과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고 B라는 사람은 추상적인 사과, 또는 입체적인 사과를 자신의 개성에 따라 다르게 그릴 수 있다. 또한 사진은 기술적인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지만 회화의 경우 초보와 화가의 차이는 어마무시하다.세 번째로 사진은 시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 하지만 회화에서는 시간은 그저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얼마나 걸리는 지일 뿐, 직접적으로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진은 예를 들어 봄인 현실에서 여름을 담을 순 없다. 사진은 현실을 담을 수 있지만 과거나 미래를 담을 수 없고 결과물에 의해 그 순간이 분석된다. 하지만 회화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시간과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봄인 현실에서 여름을 그릴 수 있으며 집에 있지만 외부 공간이나 직접 가보지 못하는 우주를 상상해 그릴 수 있다.네 번째로 복제의 가능성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원본(originality)이 배경이 된다고 볼 때 사진은 주체자가 똑같은 사진을 순식간에 많이 찍어낼 수 있다. 하지만 회화의 경우 완벽하게 똑같은 작품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시간이 오래 걸린다.3. 사진과 영화의 비교3-1) 영화의 개념영화(映畵, movie)는 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스크린에 투영하고 영상과 음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을 말한다.영화는 과거까운 뤼미에르의 시네마토 그라프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본다.시네마토 그라프는 움직이는 영상을 스크린위에 영사하는 장치, 또는 영사하는 장소를 말한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레르 형제가 발명한 최초의 영화촬영 겸 영사기에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시네마토 그라프가 시네마(cinema)로 줄여 불려졌다.그림 13 움직이는 그림, 플립북3-2) 사진과 영화의 관계영화는 기술적으로 사진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이 기술적 배경이 되기는 했지만 사진이 포착할 수 없는 움직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카메라 옵스큐라가 상황을 담아내는 시초가 되었고 이는 영화를 찍기 위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대상의 이미지를 수신하는 장치인 카메라가 생겼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의 송신장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사진이 시각적 이미지를 광학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방법과 대량으로 복제하여 전송하는 방법의 기틀을 다져 발전할 수 있었다.3-3)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사진과 영화의 공통점 첫 번째는 보는 사람은 작가가 선택한 시야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사람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함에 따라 사진 속 장면과 장소가 달라지게 된다. 영화 또한 작가가 선택한 시점과 시야를 보게 된다.두 번째는 구도, 색감 등에 의해 분위기를 바꾸거나 연출할 수 있다. 똑같이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라 뷰 창의 구도, 카메라의 기술적 부분에 따라 결과물을 바꿀 수 있다. 또한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해 분위기를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 단순히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도 구도나 색감에 따라 로맨틱한 분위기가 될 수 있으며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로 만들 수 있다.그림 14 미포철길, 바닥에 붙어서 찍은 사진그림 15 미포철길, 위에서 아래를 찍은 사진세 번째는 특정 상황만 보여 지며 보는 사람에 의해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진의 경우 한 사람의 얼굴을 찍어 올렸을 때 우리는 전후의 상황과 그 순간을 알 수 없고 얼굴만 보인다. 어떤 사람은 그 얼굴을 다.
    예체능| 2021.08.05| 12페이지| 3,000원| 조회(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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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가 한반도의 땅임을 증명하는 역사 자료 고찰
    독도가 한반도의 땅임을 증명하는 역사 자료 고찰-이영훈 교수의 독도 반일종족주의 상징 발언에 대한 반박-과목명지도교수제출일학부(과)학번이름목차서론본론2-1) 조선왕조와 우산국, 독도의 관계2-2) 독도장군 안용복2-3) 대한제국과 독도결론참고 문헌 및 출처서론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이자 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땅, 독도. 독도는 국제적인 문제로 도마위에 올라 있다. 우리는 말을 배우고 동요를 알기 시작할 무렵부터 ‘정광태-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통해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에 있다는 사실, 대구 명태 꼴뚜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고 누가 뭐라고 우겨도 우리의 땅이라는 사실을 당연시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오랜 역사부터 한반도를 뒤흔들 기회만 노려온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칭하며 역사 속부터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여러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우리 민족은 이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실제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3위에 오른 남자 축구 대표팀의 박종우 선수가 세리머니 당시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경기장을 거닐었고 이에 IOC는 메달 수여를 보류하고 조사에 나섰다. 국제적인 경기에서 정치적인 성향을 나타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처럼 독도 소유권 분쟁은 국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이러한 와중, 국민들끼리 똘똘 뭉쳐 독도가 우리땅임을 주장해도 부족할 판에 전 서울대 교수인 이영훈 전교수는 독도가 반일종족주의 최고의 상징이라 말하며 독도는 일본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출판하고 영상을 업로드 하였다. 우리 역사의 사료들이 잘못되었으며 이러한 자료들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환경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우리는 이번에 역사속의 독도 수업을 통해 이영훈 전교수의 주장들에 대해 역사 자료들을 종합해서 반박하며 새로운 주장들을 내세울 수 있고 이로 인해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알릴 수 있다. 이 강좌를 통해 많은 대학생들이 독도에 대해 알고 독도에 대한 인지는 우리나라가 훨씬 앞서 있다.이 외에도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와 1808년의 만기 요람, 1904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우산국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동국문헌비고] : "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다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 이다"(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 謂松島也)[만기요람] : 울릉도가 울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송도(松島)라고 하였다.또한 일본의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 교키도(최초의 일본전도) 에는 일본의 신들의 계시 하에 만들었다는 일본 영토가 적혀 있는데 그 범위에 울릉도와 독도, 심지어 홋카이도조차 빠져 있다. 이 정사에서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가 아님을 진작부터 인정한 셈이다.신라의 우산국 정벌 이후 고려사 권4, 현종9년 11월조에는 우산국에 여진이 침입해 이원구라는 관리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로써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후부터 울릉도등지,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가 쭉 통치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다.이영훈 전교수는 우산도는 조선시대에 걸쳐 또는 떠도는 섬이었다. 환상의 섬이었고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우산도를 그린 지도는 단 한 장도 없으며 조선 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반박해 보겠다.우선 왕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의 특징이자 필수 목표는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고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다.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공도정책을 실시하였고 그로 인해 울릉도 주민 본토 송환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 울릉도에서 도민 12명을 태운 배가 고성의 어라진에 정박했는데 타고 있던 도민들이 울릉도에 대해“자신들이 무릉도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곳의 호수는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 살고 있다.”라고 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또한 조선 조정은 17세기 말 일본과 울릉도분쟁을 겪으며 이 문제를 해결한다.그리고 모든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국 총도라는 지도는 정조때 그려진 지도로 조선이 관할하는 모든 영토를 그린 지도이다. 물론 완벽한 거리수준은 아니지만 이 지도에는 울릉도의 동쪽에 정확하게 독도가 그려져 있으며 또한 남쪽 해상에는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이 외에도 과거 역사속에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외국 국가들, 심지어 지금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또한 독도와 동해를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자료들이 남아있기도 하다.가장 좌측의 지도는 1810년 에도막부가 편찬한 지도로 한반도 동쪽 영해를 정확하게 한자로 朝鮮海(조선해) 라고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나머지 두 지도는 서양의 지도로 한반도 동쪽 영해를 마찬가지로 Sea of Korea(Corea)라고 표기한 것을 보아 이미 과거부터 동해를 조선의 것이라고 인정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12년 광해군 시기, 에도막부가 제작한 일본 최초의 공식지도에 독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1877년과 1894년 고종의 재위기간, 일본 공식 지도인 ‘대일본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는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일본이 직접 만든 ‘신찬 조선국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와 같은 색인 황색으로 정확한 위치에 그려져 있다. 오래전부터 일본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것임을 인정해오고 있었다.2-2) 독도장군 안용복두 번째로 다룰 사항은 최초의 독도 지킴이, 독도 장군이자 우리의 영웅 안용복과 관련된 독도 사안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영훈 전교수는 안용복은 스스로 우산도를 봤다고 믿은 한국사 유일한 사람이며 조선은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693년 안용복은 일본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갔다. 일본은 오키섬에서 안용복을 조사했고 그의 주장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그것이 2005년에 공개되었고 원록각서, 백기주(伯耆州)에서는 안용복을 불러 필담을 나누고 다. 이에 조선측도 독도와 울릉도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정사(正史)인 『숙종실록』(1696년 9월 25일자)에 안용복이 일본으로 갔을 때 있었던 일과 우산도 즉, 독도에 관해서도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다.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에 대해 유배된 뒤 조선은 대마도로 한 통의 서계를 보냈다. 태정관 지령문 부속문서 3호에는 울릉도는 원래 조선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에도막부가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린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태정관 지령문은 일본의 최고 의결기구인 태정관에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서면의 다케시마 외 한 섬의 건은 본방과 관계가 없음을 명심할 것 (書面竹島外一嶋之義本邦關係無之義卜可相心得事)"이라고 작성되어 있었다. 이에 태정관은 1877년 3월 29일부로 내무성의 의견에 따라 "질의한 다케시마 외 한 섬의 건은 본방과 관계가 없음을 명심할 것(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卜可相心得事) 이라는 지령을 공포했다. 한편 태정류전에는 일본해 내의 다케시마 외 한 섬을 판도 밖으로 정함(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卜定ム)으로 전하여, 울릉도·독도가 일본의 영토(판도) 밖이라는 점을 보다 확실히 하고 있다. 이로써 울릉도·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이 일본 정부에 의해 명백하게 확정된 바가 있다.2-3) 대한제국과 독도세 번째로 다룰 사안은 대한제국, 특히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에 대한 내용이다. 이영훈 전교수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의해 우산도가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우산은 어느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칙령 41호는 우산도는 환상의 섬이라고 공포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제국은 새로운 행정구역을 선포하면서 울릉도 주변의 죽도와 석도를 군역으로 지정했는데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와 같으며 석도는 독도가 아닌 관음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박하여 보겠다.고종은 태종 때 실시한 울릉도 주민 쇄환정책을 버리고 울릉도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를 통르는 사람들은 동해에 홀로 떠 있는 돌섬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왜 우리의 영토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도는 위치상으로도, 우리의 자원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우선 독도는 황금어장을 형성한다. 북한한류와 대마난류의 흐름이 교차하는 독도 주변 해역은 좋은 어장을 형성해 어민들의 소중한 생활 터전이 된다. 또한 별도의 독립생태계 지역으로 분할할 수 있을 정도로 특유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지질학적으로서 독도는 해저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유적이고 연구대상이며 독도 주변 해역에는 천연 가스층이 존재한다. 하이드레이트 자원이 알 수 없는 방대한 양이 잠재되어 있고 독도 인근 수역의 석유매장 가능성 등이 점쳐지고 있기도 하다. 독도에는 여러 조류와 천연기념물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황금 생물 서식 구역이기도 하다.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땅이라고 주장했던 고지도와 오랜 사료들이 위에 서술한 것 이외에도 조선왕국전도, 한국 전도, 조선 총람도 등 매우 많으며 한국인들의 얼과 정신을 뒷받침하고 자존심으로 자리잡은 소중한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아마 경제 자원적,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라 생각한다.말로만 독도는 우리의 영토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며 일본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는 언급하지 않은 채 우리 자료의 빈 틈 만을 공략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우리는 독도를 오랜 우리의 영토로서 기본적인 사안들,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를 알아 놓아야 한다.이번 과제를 통해 독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며 미디어 매체에서 대강 듣기만 했던 세종실록지리지, 태정관 지령 등이 자세하게 무슨 내용인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제 누군가 독도에 대해 묻는다면 왜 우리의 영토인지, 우리는 이를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줄 자신감이 생겼다. 나뿐만 아니라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독도가 역사적으404
    인문/어학| 2020.04.12| 12페이지| 3,0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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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강도 강재와 고강도 철근에 대한 고찰 평가A+최고예요
    강의 명지도 교수학부(과)전공학번이름고강도 강재와 고강도 철근에 대한 고찰목차1. 서론- 주제 선정 배경- 이론적 고찰1) 강재와 철근2. 본론- 고강도 강재(Steel Material)1) 고강도 강재의 종류2) 고강도 강재 사용 사례- 고강도 철근1) 고강도 철근의 종류2) 고강도 철근 사용 사례3. 결론4. 참고 문헌 및 출처1. 서론- 주제 선정 배경하나의 건축물을 지을 때 과정은 매우 복잡하며 그 속에서 사용되는 자재들은 다양하고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자재들은 건축물을 튼튼하고 안정감 있게 지지해주며 수많은 재해와 사고에서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 또한 내·외부의 마감재로 사용되면서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기까지 한다.현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경쟁 구도에 들어선 것은 초고층 건축물의 건축이다.초고층 건축물이란 높이 200m 이상, 50층 이상의 건축물을 말하며 여러 나라는 도시 경쟁력 강화, 도시 이미지 향상, 관광·경제 이미지 활성화를 위해 초고층 건축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대한민국만 해도 555m의 롯데월드타워가 현재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571m의 현대글로벌비즈니스 센터가 완공 예정에 있다. 이외에도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중국의 상하이 타워는 고개를 들어 보기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한다.대륙 넓이의 한계에 따라 더 이상 옆으로 넓어질 수 없어 건축물들의 형태가 수직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높아지는 높이에 따라 가중되어지는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강도의 재료가 개발되어져야 할 것이다.그 중에서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강재와 철근이다. 앞선 강의에서 시험하였듯이 강재와 철근은 구하기 쉽고 강도에 따른 종류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또한 현재 고강도의 강재와 철근이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알아놓는다면 실제 건축에서 사용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어 고강도 강재와 고강도 철근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였다.- 이론적 고찰1) 강재와 철근강재는 95% 이상의 철분과 함께 탄소, 크로뮴, 망가니즈 가지며, 상대적으로 파단이 일어나는 변형도가 작으며 항복점이 명확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구조용 합금강은 열처리 강에 비해 절반 정도의 강도, 탄소강에 비해 약간 더 높은 강도를 가진다. 열처리 강에 비해 파단이 일어나는 변형도가 크고, 탄소강에 비해서는 약간 작은 변형도에서 파단이 일어난다. 항복점이 명확하지 않다. 탄소강은 구조용 합금강보다 약간 낮은 강도를 가지는 반면, 파단까지 변형도는 제일 크다. 항복점이 명확하다.강재 앵글의 종류역할H형강구조물의 기둥, 강도부재, 고층빌딩 등T형강구조물의 트러스, 기둥보 및 2차 보강대 등ㄱ형강구조물의 보강재, 선박 스치후나 부재ㄷ형강구조물 강도 부재 및 보강 부재, 트러스, 가새 등C형강샌드위치 판넬 외벽 고정용, 조립식 건물의 트러스 등I형강복공판 받침, 호이스트 가이드 레일 등철근은 철을 막대 모양으로 만들어 주로 인장력을 맡는 건설 재료로, 토목 공학, 건축 공학 등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역학 구조체 중 하나이다. 보통 재료는 탄소강이며, 따로 쓰기 보다는 압축력을 받는 콘크리트와 합쳐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다.철근의 종류는 원형철근(SBC) 2종, 이형철근(SBD) 5종이 있다.원형철근은 철근 표면에 마디가 없는 것을 말하며, 이형철근은 마디와 리브(rib)가 있다. 이형철근은 원형철근보다 콘크리트와의 부착력이 크며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길 때는 균열 폭이 작아지는 장점이 있다.기호색상SD300녹색SD400황색SD500흑색SD600회색SD700하늘색SD400W백색SD500W분홍색SD400S보라색SD500S적색SD600S청색철근의 종류·치수·재질 등은 KSD 3504(철근 콘크리트용 봉강)에 규정되어 있다. 표면에 녹비늘이 생길 정도로 녹슬었거나 기름·흙·먼지 등이 묻으면 콘크리트와 부착이 잘 되지 않으므로 닦아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약간의 녹은 표면이 거칠어서 오히려 콘크리트와 부착이 더 잘 되므로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이형 철근 중 D4, D5, D6, D8 호칭 명에 대해서는 길이 1.5mmMSTL-0205(Japan)630~750780~9300.85이하22~1000.16~~0.6~0.3MSTL-0175(Japan)630~750780~9300.85이하9~1000.16~~0.6~0.35ASTM A709(USA)690~760~895-~1000.16~--EN1005-6(Europe)690~770~9400.95이하3~1500.14~~0.65-고강도 구조용 강재는 높은 항복강도에 의한 단면감소의 구조적 장점과 이로 인한 공간 활용성 증대의 디자인 효율성 증대, 중량 감소에 의한 용접량 절감 그리고 이동 및 크레인 장비 사용 시간 절감 등의 시공적 장점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그 사용은 증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고강도 강재를 이용한 구조물의 경우 건축물 안정성 확보가 가능한 저항복비, 고용접성을 갖도록 개선되었다.고강도 강재는 유강혼합구조, 합성구조 등의 이용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유강혼합구조란 고강도 강재와 일반강도 강재를 동시에 사용하되 고강도 강재는 탄성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구조 시스템을 의미한다. 합성부재의 사용은 고강도 강재의 적용에 따른 강성저하를 최소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하지만 강재는 열에 대해 강도의 저하가 커 열에 취약하다. 그리하여 구조용 강재를 적용한 강구조 건축물의 경우에는 화재 발생 시에 내력적 성능의 급격한 저하 방지를 위해 내화 피복을 요구하고 있다.고강도 강재 SM 520은 온도가 20℃에서 900℃까지 상승시켜가며 고온 인장시험을 실시하였을 때 항복강도는 390MPa -> 35MPa 까지 감소하였고 인장강도는 560MPa -> 56MPa로 감소하였으며 연신률은 30% -> 65%까지 증가하였다.그림 6 강재의 고온에서 탄성계수 감소 곡선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고강도 구조용 강재와 일반 구조용 강재의 탄성계수를 비교하였을 때 세 강재 모두 전 구간의 온도범위에서 유사한 감소 성향을 보였다. 따라서 고강도화가 될수록 온도증가에 따른 강성변화는 일반 구조용 강재와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감소될 것으로 판단 하고 경제적이다.2) 고강도 강재 사용 사례일본은 지진피해에 대한 심각성과 내진성능의 강화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정부가 주도하여 고강도 강재의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다.그림 7 도쿄 타워 그림 8 소니 센터 그림 9 래티튜드 타워일본의 도쿄 타워의 경우 하단부에 두께 100mm인 강재를 이용한 외경 2300mm의 강관 기둥을 적용하였다. 높은 설계 강도를 이용하여 기둥부재의 물량을 절감함과 동시에 용접 및 양중의 용이성을 제고하였다.코쿠라 역의 경우 인장강도 800MPa급의 강재와 항복강도 60~120MPa 급의 콘크리트를 이용한 CFT(Concrete Filled Stell Tube) 기둥을 이용하였다. CFT는 강관에 콘크리트를 채워 넣어 강관과 콘크리트를 일체화시킴으로써 부재내력 및 강성을 증가시킨 것으로 주로 기둥부재로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미들랜드 스퀘어의 경우 저층부에 800MPa급 강판벽의 사용을 통해 강성, 강도 및 인성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는 지하와 지상 구조물간 강성의 연속성확보를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강도 강판 벽체의 경우 탄성거동만을 염두해 두고 설계하였다.독일의 소니 센터에서는 큰 인장력을 받는 부분인 케이블 지지단부 및 트러스 연결부에 고강도 강재를 적용하였고, 호주의 래티튜드 타워에서는 횡력 저항 시스템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아웃 리거를 고강도 강재를 적용한 합성 트러스로 설계하였다. 한국의 신도림 테크노마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SN 강재가 적용되었고 약 3,300t이 사용되었다.그림 10 고척돔 야구장 지붕 구조대한민국에서는 숭의운동장과 남이섬의 짚 와이어, 고척돔 야구장에 고강도 내진 강관을 적용하였다. 고강도 내진 강관은 내진성이 우수하고 용접성이 우수하다. 그 중 고척돔의 상부는 금속성 지붕 마감 재료를 지지하는 철골 스페이스 프레임과 중앙부분의 테플론막을 지지하는 철골 트러스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구조는 단축 약 157m, 장축 약 215m 의 달걀모양이며 최고 높이는 운동장 바닥으로부터 67이상180°3호18이상SD 500W500~650항복강도 1.15배~2호12이상180°3호14이상SD 400S특수내진용400~520항복강도 1.25배~2호16이상180°3호18이상SD 500S500~620항복강도 1.25배~2호12이상180°3호14이상SD 600S(신설)600~720항복강도 1.25배~2호10이상90°3호고강도 철근은 항복강도 400MPa(SD400) 이상을 말한다. 항복강도 상한 값은 강종의 특성에 따라 기준 값의 1.3배 또는 120MPa을 더한 값으로 일반용 및 용접용은 1.3배를 기준으로하고, 특수내진용은 120MPa을 더한 값으로 하되 SD300의 1.3배를 할 경우 범위가 협소함으로 120MPa을 더하고 400계열은 1.3배와 120MPa을 더한 값과 동일한 범위가 되었다. SD500이상의 고강도에서는 항복강도의 1.08배 이상으로 한다.고강도 철근은 건설해체 현장과 각종 공장 등에서 회수한 폐재를 전기로에서 용해시키고 부자재 등을 첨가하여 성분을 조정한 후 빌레트(주편)로 주조하여 롤로 늘리는 과정을 거쳐 고품질의 철근으로 재생시킨다. 고강도 철근 생산은 재활용 사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사회 구축에도 공헌할 수 있다. 고강도 철근은 일반 철근에 비해 직경이 약 30% 감소하며 그로 인해 피복두께를 확보하기 유리하다. 이에 사용하는 철근 개수도 줄어들어 내진 설계를 행하기 유리하다. 또 콘크리트 충전성이 우수하며 탄소당량 관리를 통한 품질향상, 용접성능을 확보하며 충격을 흡수하는 연신률을 높여 건축물의 안전성을 개선시키고 강재 사용량 절감으로 경제성이 높으며 CO2를 저감한다.하지만 항복강도가 너무 큰 철근을 사용할 경우 과도한 균열이나 처짐이 발생할 수 있고, 휨 저항성능, 연성능력, 피로 저항성능, 전단 및 비틀림 저항성능, 정착 및 부착 성능, 내진 저항성능 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해법이 필요하다.2) 고강도 철근 사용 사례고강도 철근은 작은 단면으로 고강도가 필요한 구조물(건축구조물, 고가수조 등) 있다.
    공학/기술| 2020.04.12| 12페이지| 3,000원| 조회(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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