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REPORT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ㆍㆍㆍ쪼개면 초성 – 중성 – 종성이 되지만ㆍㆍㆍㆍㆍㆍ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고이를 이라 일컫는다.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세종실록에 102권에 쓰여져 있는 구절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후의 내용이다.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존재한다. 한글은 대한민국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으며 국민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문자이다. 또 국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한글’이라는 정신적이면서 직접적인 유산을 남긴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신적 유산을 남긴 세종대왕이라는 인물의 생애부터 사후를 살펴보겠다.Ⅰ – 생애 초기Ⅰ - Ⅰ 출생이도는 193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원경왕후 민씨의 육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로 고쳤다.Ⅰ - Ⅱ 대군 진봉, 형들과의 전쟁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Ⅰ -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했다.Ⅱ - Ⅱ 대외 정책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ㆍ은 세공을 말과 포로 대신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하에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했다. 사령관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Ⅱ - Ⅲ 국방 정비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했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했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3포를 개항하고, 계해약조를 통해 무역을 허락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Ⅱ - Ⅴ 재상 등용, 국정 분담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했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했다.Ⅱ - Ⅵ 의정부 서사제 실시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러나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 소갈증, 풍질, 안질 등 다양한 병을 평생 앓았다.Ⅱ - Ⅶ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 일시 중지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보냈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금은광산에서 막대한 금ㆍ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부가 빠져나갔으며 세종 즉위 후 1430년(세종12년)까지 74명의 공녀가 명나라에 바쳐졌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그러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ㆍ은 조공은 다시 부활했고, 처녀 조공과 금ㆍ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Ⅱ - Ⅷ 과학의 발전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일성정시의, 해시계인Ⅸ 문물의 발전세종은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했다. 세종 자신이 지은 을 비롯하여 정인지ㆍ권제의 , 설순의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했다. 또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시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을 다했다.Ⅱ - Ⅹ 서민 복지 정책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예로 1435년 에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벼슬을 준 일이 있다.Ⅲ 생애 후반Ⅲ - Ⅰ 가정의 불행세종이 어릴 때,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요절했다.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 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화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데다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Ⅲ - Ⅱ 서거세종은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고, 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집무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조금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는 하지만, 젊은시절부터 건강관리에 신경쓰면서 국정을 돌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세종의 어릴 때로 돌아가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충녕대군은 과연 정말로 왕위에 관심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일화 두 가지 정도로 충녕대군의 마음을 예측해보겠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는 자료가 있다. 이 신하의 발언은 현재 세자인 양녕대군을 반대하는 발언일 뿐만 아니라 조정에 이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면 피바람을 불 수도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이 발언을 직접 듣고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자신이 양녕대군보다 왕이라는 자리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또 백성에 관심이 없던 양녕과는 달리 충녕은 변장을 하고 백성들의 힘듦을 직접 알아보고 조정에 알리는 등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세자가 아닌 왕자로써 백성들에게 다가가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충녕대군이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양녕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물론 진실은 충녕대군 스스로만 알 것이다. 또 궁금했던 것은 양녕대군을 심각한 비행으로 빠지게 한 일이 있을까?, 원래부터 양녕대군은 행동에 조심성이 없었을까? 이다. 사실 양녕은 경회루와 숭례문의 현판을 쓸 만큼 명필이었고, 동서고금의 전적을 두루 섭렵한 천재였으며, 타고난 무골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누구든지 마음에 들면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눴고 막걸리 한잔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성격이 호방했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 주변에 몰려드는 인물들을 극도로 경계했고, 무려 네 차례나 세자를 따르는 중신들을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양녕의 외가이자 자신의 처가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