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 크리스천 독서보고서우리는 슬픔, 두려움, 기쁨과 같이 감정과 같이 분노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고전 철학자들은 정서를 긍정적으로 바라 보지 않았다. 정서는 이성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후기근대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정서는 새롭게 다뤄진다. 정신과 의사는 정서는 자아발달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또한 정서가 있기에 삶에 의미가 있다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다. 신경과학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정서를 느끼도록 설계 되어있다고 설명한다. 신피질은 정서를 일으키는 외부사건에 대한 인지적 판단에 관여하고 또한 정서에 의해서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이성과 정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정서는 영향을 받는다. 과거에 좋지 않은 기억의 상황이 또 발생할 경우 우리는 그때의 정서를 다시 느끼게 된다. 우리의 이성과 정서는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우리의 모든 정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신경과학에서 보듯이 우리의 몸은 정서를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 몸을 설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분노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분노를 우리의 단순히 죄의 산물로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육체를 잘 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정서적이시기 때문에 슬픔부터 분노에 이르는 모든 인간감정을 느끼셨다.“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다. 슬픔의 정서를 느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보고 분노를 터뜨리셨다.분노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다. 분노를 공격성이라는 행동으로 표출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격성의 개념은 복합적이고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괴롭힐 때 사용되는 공격성은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소매치기에 저항하는 공격성은 자기방어의 긍정적인 요소이다. 또한 어떠한 폭동을 경찰들이 진압할 때 사용되는 공격성도 있다. 이렇듯 공격성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어지는 는다. 즉, 우리의 경험적 기억을 통해서 우리의 분노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표출되거나 억압받을 수 있다. 과거에 부모의 무차별적은 폭행에 반항하여 분노를 표출했는데 그 분노로 인하여 더욱 강한 폭행이 일어났다면 이 사람은 아무리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억압하고 억제할 것이다. 문제는 이 분노의 정서를 억압하면서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자아의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분노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우리의 건강한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분노는 희망, 용기, 친밀항과 같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과 연결될 수 있다. 서로에게 화가난 부부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부부보다 관계의 회복의 희망이 더욱 크다. 이 부부의 서로에 대한 분노는 변화를 가져오는 역동이 될 수 있다. 또한 불의를 보았을 때 우리는 분노로 인하여 올바르게 잡을 수 있도록 행동하게 하는 용기를 가져다 준다.억압과 제압을 통해서 상실된 분노는 자아를 형성하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데 분노를 회복시킴으로써 자아를 회복하는데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자아의 회복은 또한 어떤 관계에서든 자아에 중심을 둔 자기자각을 가져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충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찾아내도록 도울 수 있으며, ‘진단하는 창’이 될 수 있어서 우리가 무엇에 분노를 하는지 식별하게 도와주고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한다. 어떠 사물이나 이념이나 사람들에게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것들이 위협을 받게 되면 우리 자신도 위협을 느끼며 그것들을 대신하여 분노한다. 이것을 단순히 분노에서 끝내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 본인이 왜 분노를 내었는지 깨닫고, 복음안에서 수정되고 변형된다면 분노는 우리의 영적 협력자가 될 수 있다.분노가 미움 혹은 적개심으로 바뀌고 정상적인 욕구들이 질투, 탐욕, 정욕으로 악화되어 타인의 안녕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촉발될 때 분노는 마귀적이 된다. 그러나 분노가 극심한 고통에 대한 저항의 동기가 기 위해서는 첫째, 분노가 일어날 때 알아채는 능력을 개발하고 둘째분노를 알아차린 후에 그것을 인정해야한다. 셋째는 우리의 몸에 가능한 한 많은 통제를 유지 해야한다. 넷째는 우리가 왜 분노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다섯째는 위협받는 다는 느낌이 필요하고 적절한지 분별하는 것이다. 여섯째 단계는 위협에 취약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개정하거나 재구성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분노에 대처하는 이전의 패턴 바꾸기이다. 여덟째 단계는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동감이 되고,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분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를 다니며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언제부터 분노라는 것은 부정적이고 믿음이 커질수록 분노는 억제되고 느껴서는 안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신앙 공동체가 아닌 사회에서 분노의 표출은 그 사람의 인성 및 성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그것을 죄로 다루고 있기에 내 자신을 죄인으로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정의 내리게 되는 척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꼭 부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죄인이라는 죄책감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불행하게도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교사로 섬기시던 성도님 중에 한분께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화를 내서 문제가 되고 결국 교회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된 사건이 있기도 했다. 분노를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출한 것은 분명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성도님을 죄인이 아닌 돌봄의 영혼으로 봤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돌봄과 상담을 통해서 분노를 다룰 수 있도록 격려하고 죄책감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역할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혼돌봄과 상담이 되어지지 않았기에 그 성도님은 공동체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에 공포와 두려움을 평생 가지고 살아 갈 수 있겠정의 공의로 어떻게 연결하고 설명할지는 막막하기만 했다. 책은 그 부분들을 잘 다루어 주고 있다. 2018년에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굉장히 침체되었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교회를 보며 우리 교회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20년간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 영적인 침체는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성도들의 어려움과 신앙적인 문제들을 방관하는 교역자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성도들을 만나서 현재 교회의 상황들과 문제점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분노를 표출했다. 심지어 교역자에게도 현 상황에 열을 내며 생각들을 토해내었다.나는 이런 나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죄의 모습이 아닌 나의 위협에 대한 나의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동안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무너질까봐 두려웠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나는 나름의 소리를 내었던 것이다.우리는 몇 년 전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다. 이는 국민들의 분노가 시초가 되었다. 정부의 비선실세 사건과 세월호라는 처참한 사고의 대처를 보며 국민들은 분노했다. 분노가 국민들을 광화문 앞으로 모이게 했다. 하나의 촛불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이 분노들이 모여서 결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불의를 정의로 바꾼 것이다.나는 이때 국민들이 보여준 촛불시위가 비폭력적이며 정의롭고 높은 수준의 창의적 분노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이 촛불 시위는 누구를 해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통해 불의를 정의로 바꾸어 가는 역할을 하였다.분노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책에서 말하듯 신경과학적으로 봤을 때에도 또한 성경에 나온 하나님과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분노는 어떻게 다루느냐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처음부터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의 쳬화된 존재의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사렛 예영적 여정의 동반자로 보아야한다.책을 읽으며 ‘분노는 정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11:6-8)이 말씀 구절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이 전적으로 통치하는 나라에는 분노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물의 분노는 공격성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말씀의 구절을 보면 동물들의 공격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죄가 없는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은 분노가 전혀 없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분노를 내시는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안에서 우리에게는 분노의 감정은 원래 있었지만 그것을 죄가 없을 때는 온전한 모습으로 다룰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분노에 대해 억압받고 통제되며 자아 내면의 깊숙히 숨겨 놓음으로 자아의 올바른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전 성도의 입장에서는 나 하나만 온전한 성도로 살아가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의 영혼을 돌보고 때론 책임도 지는 입장에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와 문제들에 얽매여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 해주며 하나님을 오해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을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게 하는 것이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성도를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한 단순한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분노를 스스로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과제가 생긴 것 같아 막중한 책임감이 같이 느껴진다.아직은 나 자신도 어떠한 상황에서 어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