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영국 프랑스 독일의 봉건제도와 중세도시의 특색과 세나라의 역사에 미친 영향목차1.머리말12.서유럽 중세시대1)영국, 프랑스, 독일 봉건제22)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세도시43.맺음말54.참고문헌61. 머리말중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서부터(476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1453년) 기간 대략 5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1000여년의 시기를 가리킨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고, 프랑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클로비스가 메로비우스(메로빙) 왕조를 세우고 기독교(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것은 피지배계층의 지지를 이끌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궁재 출신 피핀이 왕위에 오르며 카롤링거(카롤링) 왕조를 세웠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정복지 일부인 로마 근처의 영토를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훗날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이 사건으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와의 사이가 더욱 견고해졌고, 후대의 샤를마뉴 대제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대관 했다. 교회가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임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샤를마뉴는 황제의 칭호를 받을 만한 능력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두배 가까이 확장했고, 파괴된 서유럽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 궁정학교를 세우는 등의 노력을 하며 ‘카롤링커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이끌었다. 샤를마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충성의 대가로 혹은 충성의 증표로 봉토로 하사할 때, 한 지역에 너무 많은 영토를 갖지 못하도록 인접한 봉토를 하사하지 않고, 예전의 봉토는 돌려받고 다른 봉토를 하사하는 등 지방영주의 세력강화를 견제했다. 그러나 샤를마뉴 사후 왕권이 약화되었고 이후 베르됭, 메르센 조약에 따라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3분되고, 편입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10세기, 서프랑크는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되며 프랑스 최초 왕조인 카페왕조 하사는 '은대지 제도'를 시행하였고 이는 '봉건제'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봉건제는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했지만, 프랑크 왕국의 해체 이후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형성하였다. 특히 서유럽의 세 국가 영국, 프랑스, 독일은 상이한 특징을 지녔다.프랑스 봉건제는 봉건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0세기 말 오늘날 프랑스영토인 서프랑크 지역은 노르만족의 잦은 침략을 받았고, 이러한 위협에 카롤링거 왕들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왕은 귀족들에게 지원을 받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양의 땅을 내주었고, 왕국은 독립적인 공작령들이 붙어 있는 꼴로 변해갔다. 왕권은 매우 쇠약 해졌고, 왕의 세력 범위는 크게 줄어, 파리 근처 지역 작은 땅만이 남았다. 이후 루이 5세가 사망하자, 당시 대 귀족이자 실질적 통치자였던 위그 카페는 귀족과 성직자를 모아 회의를 열었고, 선거를 통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프랑스의 카페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선거에 대한 답례로 그의 영토 상당 부분을 봉토로 하사해야 했고, 부유하고 강성했던 프랑스 공 위그 카페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왕이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의 봉건제도는 쌍무적이고 사적인 주종관계에 기초한 분권적 봉건제의 대표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의 봉신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주종관계의 전형적 원칙이 수립되었고, 프랑스는 ‘봉토 아닌 것이 없다’는 상황 그 자체였다. 프랑스는 왕권이 약했고, 이는 왕으로 하여금 더욱 봉건제에 의존하게 하였다.영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우면서 본격적인 봉건제도가 실시되었다. 영국의 봉건제도는 ‘정복자’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윌리엄 정복왕은 프랑스를 본보기로 한 봉건제를 영국에 도입했지만, 영국 봉건제는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정복자에 의해 계획적으로 창설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윌리엄은 계획적인 봉토의 배치를 시행했는데, 이는 토지조사 사업을 기록한 『둠즈데이이 존재했다. 특히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전개된 백년전쟁은 프랑스내 영국이 가진 영토에 대한 갈등의 정점을 보여준다.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가스코뉴의 몰수를 선언했고,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와 프랑스 왕위 요구로 맞서며 백년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초기에 영국이 우세하였으나,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했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국토가 통일되고,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중앙 집권 체제가 발전했다.독일 지역은 원래 게르만의 본거지로 제후들의 영지는 왕에 의해 하사된 봉토가 아닌 태고부터 전해온 부족의 영역이었다. 독일은 봉건제도가 발전하기 어려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은 연방적 봉건국가의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오토 1세가 교회와 수도원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시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오토는 유력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부와 권력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충성과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로써 교회가 봉건적 주종 관계 속에 편입되었고, 세속적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이는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11세기에 교황이 서임권을 주장하는 카노사의 굴욕(1077)사건으로 교황권의 강화를 보여준다.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시대를 거치고 7명의 선제후에 의해 황제를 선출하는 금인칙서를 시행했는데 7인의 선제후중 3인은 대주교로, 독일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명목상 통일 군주인 독일 국왕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을 계승을 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로마제국의 옛터인 이탈리아에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고, 이는 교황과의 대립을 야기시키며 독일 내부 갈등을 야기하며 독일이 통일국가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했다. 이처럼 독일은 왕권이 약해 왕(황제)과 제후사이에 봉토를 매개로 한 봉건제는 사실상 거의 없었고, 봉토를 기반으로 하는 주종 관계는 지방 세력에 의해 세습되었다.2-2.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세도시 특징중세와 근대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국가는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실시했는데 정책 시행에서 도시의 역할은 중요했다. 도시민은 국왕에게 자금과 인력을 제공하고 국왕은 도시에 특권을 부과하면서 상호 이래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필립2세는 프랑스내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광대한 영토를 얻어, 이를 관리하는 바이이와 세네샬이라는 지방행정관을 창설했는데, 이들은 시민 계급 출신으로 봉급을 받고 왕권을 대행하는 충실한 관리였다. 필립 4세떄에는 프랑스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더 견고해지며 중앙 행정기구가 생기고 왕권에 의존하는 관료제가 성장했다 이처럼 시민 계급은 왕과 상호 의존적이고 친화적인 관계를 맺고, 귀족이나 봉건 영주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였다.영국의 윌리엄 정복왕은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실시하였고, 주(shire)법정 제도를 유지, 강화하고, 왕의 법을 국가전역에 적요하는 보통법을 실시하며 국왕정부제도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영국은 프랑스 독일에 비해 왕권이 강하고 중앙집권적 성격을 띄고 있었던 만큼 왕과 도시민간의 유착이 심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때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분되었는데 상원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하원은 젠트리와 시민대표로 구성되었다. 젠트리 계층은 일종의 지주로, 지대수입이 여유로운 토지 소유자를 말한다. 하원은 능력을 중시하는 개방적 계급이었다. 영국의 귀족은 매우 소수인데, 이는 장남에 한해서만 작위를 계승하게 하고 차남들은 젠트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귀족 차남 젠트리는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젠트리와 상인은 작위귀족과 일반 민중 사이의 중간계층을 형성하였다.독일은 중세도시가 황제권 강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황제에게 도시의 특권을 인정해줄 만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13-14세기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유력 봉건 제후들은 영방 단위로 영토의 집권화를 추진하며 독립적 성향을 강조했다. 13세기 대공위시대를 거쳐 황제는 황금 칙서로 7선제후에 의해 선출되게 되었고, 황제의 권한은 약화되어 통일국가 즉, 근대국가로의 발전과 산업혁명의 도래가 늦어지게 되었다.3. 맺음말.영국과-1377)가 일어나기도 했다. 프랑스는 초기 약한 왕권으로 강한 실권자는 아니었지만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황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독일은 카노사의 굴욕사건(1077)과 결국 서임권을 교황에게 양도하는 보름스 협약(1122)을 겪으며 명목상에 불과했던 왕권, 황제권이 더 약화되었다. 독일은 교회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는데, 교회와 갈등을 겪으며 왕권이 약화되고, 대공위 시대를 겪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황금 칙서를 통한 황제 선출은 교회의 내정 간섭과 교회 권력 강화를 의미했다. 교회의 내부적 혼란, 부패에 대응하여 종교개혁의 시대가 도래하며 근대의 시작이라고 구분되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은 영방 국가의 형태로 가장 각 영주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였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독교에 상당부분 의존했는데, 특히 의존성이 강했던 왕권은 기독교와 대립하며 약해졌고, 독일은 이처럼 기독교와의 의존성때문에 기독교와 관련한 여러 사건 발발의 요점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4. 참고문헌오흥식, 서강대 2020 1학기 서양사개론1 강의 자료[네이버 지식백과]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4434" 봉건 제도의 성립 (독일사, 2005. 4. 28., 권형진, 위키미디어 커먼즈)[네이버 지식백과]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4433" 오토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독일사, 2005. 4. 28., 권형진, 위키미디어 커먼즈)네이버 지식백과]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025" 위그 카페 (프랑스사, 2005. 8. 1., 김복래, 위키미디어 커먼즈)[네이버 지식백과]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17075" 중세 [中世, Mittelalter] (헤겔사전, 2A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