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르네상스 ‘재생’ ‘부활’ 이라는 의미 서양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다시 생명을 얻어 부흥하면서 새로운 인문주의적 문화 창조를 지향하는 문화 운동이다.14-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부분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고 이는 중세식의 표현 방식과는 전혀 다른 근대로 이행을 상징한다, 신 중심의 종교적 색채가 강한 문학과 예술적 성향에서 벗어나 마치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이 인간 중심적 사고와 표현이 이루어지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탈리아는 로마 문명의 중심이었고, 특히 헬레니즘 문화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동방과 그리스의 문화의 혼합 체계를 받아들이게 된다.십자군 원정 시 사용했던 원정 경로가 무역 통로로 활용이 되고 특히 해상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이탈리아에 무역 도시들을 중심으로 중세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공업과 도시 발전이 잇따르게 되면서 중세적 요소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중세 도시들은 마치 그리스의 폴리스 시대처럼 작은 도시들이 서로 독립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면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나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같이 각 도시마다 유력 가문이 대두하는 변화가 생긴다, 각 도시들의 주요 가문들은 대체로 신흥 부르주아 귀족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출생신분 태생적으로 귀족이 아닌 자수성가를 통해 얻은 재부와 교양을 통해 귀족으로 발돋움한 사람들이었음. 따라서 자신들이 대표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구체적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적 교양과 재산을 과시하고 도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의 일원으로서 ‘예술가 후원제’를 행했다. 당대의 주요 가문들이 능력있는 예술가를 고용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이나 그림을 맡겼다. 자신들의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하고 확립하는데 예술가들의 능력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탈리아에서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적 예술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인쇄술의 발전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쇄술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쇄술은 유럽의 지식 보급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는데, 1450년대에 금속활자 기술이 정착한 이래로 단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1480년에는 파리, 리옹, 베네치아와 같이 인구 분포도가 높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110여개의 도시에 인쇄소의 설립이 확산된다. 16세기를 기점으로는 인쇄된 책은 약 20만 종에 2억 권에 달하는 책이 출간되는 도서문화의 대대적인 확산이 이루어진다. 즉 인쇄술의 발전은 지식 보급의 양적 측면에서 상당히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쇄술은 지식의 ‘정확성’ 이라는 질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중세까지의 지식 보존의 형태가 대체로 수도자들의 필사본 위주였다면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검증받은 형태의 책인 ‘정본’이 등장한다. 수도자들의 손에서 탄생한 필사본은 그들의 신학적 소견에 따른 고전의 의도적인 생략이나 왜곡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지식의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고전 연구가 활발하게 시행됨에 따라 수집한 책을 검토하고 비교하는 과정에서 원전의 재구성과 확인 과정이 필수적이었으며, 출판이 가능해짐에 따라 지식의 정확성이 상당부분 확보된다. 즉, 지식의 양적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정확도와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는 질적 개선도 일어났다.이처럼 활판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고전 문헌이 대중적으로 유포되는 과정을 통해 공고한 기반을 갖춘 인문주의의 확립과 인문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우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고전주의의 양태로 나타났는데, 신 중심의 세상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고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들이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당대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경향이 생겨나는데, 문헌의 연구와 예술 작품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지식도 쌓이게 된다. 특히 이전보다 저렴한 가격에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서재를 만드는 도서 문화가 발달하기도 한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그 동안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독점했던 어려운 권력 언어인 라틴어로 쓰인 성서의 내용을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만 듣던 폐쇄적 울타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그대로 비판 정신으로 이어졌으며 문자에 대한 접근성의 확산과 함께 세속적 지방언어인 ‘속어’의 발달과도 결부되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작품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단테의 신곡, 최초의 인문주의자라 불렸던 페트라르카,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와 감정에 집중한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 작품 중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있었다. 당대의 예술 분야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인체의 미를 명백히 구현하여 묘사한 작품들이 다수 탄생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있다.한편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중세의 신 중심적 사회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가치와 물질주의에 관심을 갖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여기에 교황과 교회마저도 세속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며 물질주의와 세속가치를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의 카톨릭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선와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받는 존재였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성직자가 베푸는 성사를 통해서 가능하면 선행을 선택하고, 따라서 성직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선행을 선택하고 구원의 삶을 얻는 것을 강론하게 된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구교의 신앙체계에 맞서 인간의 원죄론을 내세우며 예수의 희생에 의해 구원의 기회를 부여받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신교는 구원의 여부가 신의 결정에 달려있으며, 자유의지조차 신이 예정한 구원 여부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예정설이라는 신교도의 교리이다.특히나 다른 절대주의 국가들과 달리 국가적 통합이 미비했던 독일은 상대적으로 교황의 권세를 펼치기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교황의 주도하에 당대 독일 경제에 타격을 입힐 정도의 노골적인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자 루터를 중심으로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서 만인평등의 원칙과 신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확립을 강조하며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 당시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던 독일 영방군주들이 루터를 지지함에 따라 그는 보름즈 국회에서 교황에게 파면당한 이후에도 스스로의 입장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개혁이 독일 전역에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인쇄술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대자보의 형태로 게시되었던 95개조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수천 장씩 인쇄되어 많은 대중들에게 확산되면서 독일 사회 전체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작센의 제후의 비호 속에서 바르텐부르크 성에 기거하면서 대중들이 직접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 힘씀과 동시에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팜플렛을 적극적으로 제작하였다. 이처럼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대중 선전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민중적 기반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절대왕정]16~17세기에 이르러 서유럽에서는 국왕의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즉 절대주의 국가가 출현했다. 이들 국가들은 서유럽 절대주의 국가들은 세습권이 확립되어 있고, 중세의 봉건제와는 다르게 모든 힘과 권력이 중앙에 집권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제도상으로는 왕명에 의해 움직이고,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왕을 보좌하는 군대인 상비군이 있었고, 왕명을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관료제가 있었다. 또한 사유재산권과 소유권을 법으로 인정해주며 백성들에게 재산에 대한 징세를 시행해 재정을 확보했던 전국민적 과세 정책이 존재했다. 이러한 왕의 절대적인 권한을 정당화시키는 왕의 권한은 신이 부여해준 것이라는 이론인 왕권신수설과 주권은 왕에게 있다는 주권론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더불어 이 시기는 여러 절대왕정국가들이 서로 무역을 통해 경쟁하면서 부를 많이 확보하고자 하는 소위 ‘중상주의’ 와 ‘보호무역’ 경제 체제의 양상을 띠고 있다.①프랑스의 절대왕정프랑스는 백년전쟁 이후 루이 11세 이래 국왕의 지배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에 있어서 국가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16세기 후반의 신교와 구교 사이에 일어난 종교 분쟁인 위그노 전쟁이었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통해 신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줌에 따라 30년간의 종교 내분을 종식시키며 절대왕정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 나갔다. 프랑스 절대왕정은 부르봉 왕가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치세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루이 13세는 재상 리슐리외의 조언을 기반으로 국제 분쟁에서 유리한 편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면서 국제적, 외교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또한 ‘태양왕’이라 불리며 프랑스 절대왕정을 구가했던 루이 14세는 재상 콜베르의 적극적인 보호무역주의 정책과 중상주의 정책을 기반으로 국부를 빠르게 증가시키며 절대군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굳히게 된다. 이처럼 이 시기에 재정적 장치가 뒷받침됨에 따라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이 증축되었으며, 당대 유럽의 주요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불어가 공용화되고, 프랑스의 예술이나 음식 문화를 모방하는 풍토가 유행하게 된다. 이처럼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유럽의 궁정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유럽의 문화와 국제 정치를 주도해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권 말기에는 불필요한 외부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재정의 손실을 불러일으키며 본격적인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앙리 4세가 발령한 낭트 칙령의 철회는 그의 가장 큰 정책적인 실책으로 손꼽힌다. 신교도를 향한 강한 압박이 전개되자 이들은 프랑스에서 대거 이탈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신교도 중심의 상공업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그 결과 프랑스는 상당한 국부 유출로 인한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베르사유 궁전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가량 떨어져 있는 사냥용 별궁이었다. 그가 이러한 외진 숲 속에 궁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이유로는 그의 유년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 중 하나인 ‘프롱드의 난’을 흔히 언급하는데, 프롱드의 난은 귀족의 중심으로 하여 파리 시민까지 합세하여 일어난 봉기로 이 봉기는 상당히 격해져 루이 14세의 침실의 문까지 두드리는 상황까지 오는데 이는 10세의 어린 나이였던 루이 14세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과 공포를 갖게 되고 이는 파리에 대한 증오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건축과 관련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 데 그 중 하나는 바로 푸케의 성인 보르비콩트 성에 초대받을 후 상당한 감회를 받게 되고, 한편으로는 국왕인 자신보다도 더욱 화려한 주거 생활을 누리고 있는 귀족 신하에 상당한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푸케의 성 건설에 고용되었던 사람 건축가와 정원사, 화가들을 고용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시공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의 터는 습지대였으며 건축을 하기에는 상당한 악조건의 토지였다. 따라서 건축 당시 인부의 상당 수가 사망하면서 루이 14세에 대한 평판이 악화되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전반적인 구조를 보면 철저하게 루이 14세의 정치권력을 상징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남북으로 뻗은 구조에 서쪽에는 운하와 정원, 숲 등을 조성하고 동쪽으로는 베르사유 시에서 파리가 연결되는 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특히나 왕궁 주변에 조경을 통해서도 인위적으로 조성된 정원의 모습은 자연마저도 왕에게 복종하고 통제되어야 한다는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폴론 분수는 균형과 권위를 상징하는 태양신인 아폴론의 전차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루이 14세의 태양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형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앙 2층에 위치한 거울의 방은 거대하고 화려한 회랑인데 천장의 벽화에는 흔히 신화나 성서의 인물을 그려 넣는 것과는 달리 루이 14세의 모습으로 채워지며 왕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 거울의 방은 주로 외국의 사신이나 국빈을 대접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던 공간이었다. 이 공간의 남쪽 끝에는 왕비의 처소인 평화의 방이 있고, 북쪽 끝에는 왕의 처소인 전쟁의 방이 있었다. 이는 베르사유 궁전 내부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위치라고 볼 수 있음. 사실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닌 절대주의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권위를 실현하는 공간이었다.②영국의 절대왕정한편 영국은 헨리 7세, 8세 치세 아래 중앙집권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영국의 절대 왕정은 프랑스와 같은 대륙 국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왕권이 취약했던 근원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먼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영국 상비군의 구성 자체가 해군이 주를 이루는 군체제였다. 따라서 왕이 필요로 할 때 재빨리 동원되는 기동력이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영국의 의회가 건재하여 귀족들의 발언권이 매우 강력했던 터라 유럽의 다른 대륙국가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무기 삼아 귀족을 일방적으로 제압하기 보다는 귀족과의 타협을 통해 중앙행정의 담당자로 흡수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특히 지방행정에 대해서는 신흥 지주 귀족인 젠트리 계층을 치안판사로 임명하며 정책을 일임하는 형태를 취했다.
1. 토리에 관하여 서술하시오.토리는 민요의 지역적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 음계를 구성하는 각 음의 기능이나 성질을 고려한 선법의 개념에 더하여 각 음의 요성이나 퇴성, 나아가 특징적인 장식음이나 선율형 등을 포함하는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토리로는 경기지방 민요의 토리인 경토리와 서도지방 민요의 토리인 수심가토리, 남도지방 민요의 토리인 육자배기 토리, 동부지방 민요의 토리의 메나리토리, 제주도 지방의 민요의 토리인 제주 토리가 있다.먼저 경토리는 서울과 경기지방의 민요의 토리로, 주로 5음음계로 되어 있으며, 선율은 순차진행이 많아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경기민요는 처럼 솔-라-도-레-미 의 5음음계를 취하며 최저음과 마침음이 솔인 솔 선법이다. 이 토리로 된 민요는 ??창부타령?, ?노랫가락?, ?늴리리야?, ?방아타령? 등이 있다. 이처럼 솔이 주음인 경토리를 ‘진경토리’라 라며 이를 ‘창부타령조’ 또는 ‘노랫가락조’ 라고도 한다.반면에 널리 알려진 신민요 ?아리랑?은 그 구성음이 솔-라-도-레-미의 5음음계이지고 최저음 역시 솔이지만 음계의 중간에 있는 도가 마침임이다. 따라서 이 토리는 도가 주음이 되는 도 선법이다. 이 토리는 솔 선법과 구성음은 같으나 주음이 서로 다르다. 이 토리는 이나 등의 신민요에 많이 보이며, 이러한 음계를 진경토리와 구별하기 위하여 ‘신경토리’라 부른다.경기민요의 하나인 은 라-도-레-미-솔 의 5음음계이며, 마치는 음은 최저음인 라이므로 라가 주음인 라 선법에 속한다. 그러나 , 등은 라가 주음이지만 과 달리 라보다 낮은 음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경기민요 중 라가 주음인 토리를 진경토리와 구별하기 위하여 ‘반경토리’라 한다.다음으로, 수심가 토리는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의 민요의 토리이다. 서도 지방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던 서도명창의 대표적인 연주곡목이 인데, 수심가는 레-미-솔-라-도 로 구성된 무반음 5음음계이지만, 솔은 주로 생략된다. 이 음계의 마침음은 주음역의 맨 아래 음인 레이므로, 레가 주음이 되는 레 선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음보다 5도 높은 음인 라를 깊고 격하게 떠는 것이 특징이다. 이 경우 떠는 음의 바로 아래 음인 솔은 대부분 생략된다. 이 같은 구조를 지닌 서도지방의 토리를 ‘수심가토리’라 한다.반면에, 황해도지방에 바탕을 둔 민요 은 라-도-레-미-솔 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다. 최저음인 라가 종지음이므로 이 음계는 라가 주음인 라 선법이다. 그리고 주음보다 5도 높은 음인 미를 깊고 격하게 떠는 것이 특징이다. 이 경우 떠는 음의 바로 아래 음인 레는 대부분 생략된다. 이러한 음조직이 황해도지방에 바탕을 둔 에 많이 보이므로 이를 ‘난봉가토리’라 한다.한편, 호남지방의 민요의 토리인 육자배기 토리의 구성음은 상행과 하행 시의 구조가 다르다. 상행 시에는 미-라-도-(레)-미의 4음음계이며, 하행 시에는 미-레-도-시-라-미의 유반음 5음 음계이다. 이 토리의 가장 큰 특징은 하행선율에 등장하는 반음이다. 도-시의 급격히 하행하는 선율은 대부분 도에 강세가 있고, 시로 꺾어 내리므로 이를 ‘꺾는 음’이라 한다. 반면에 최저음인 미는 굵고 폭넓게 떨기 때문에 이 음을 가리켜 ‘떠는 목’이라 하며 종지음인 라는 떨거나 꺾지 않아서 이를 ‘평으로 내는 목’이라 한다.우리나라 동부지역, 즉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도 지역의 민요의 토리를 ‘메나리 토리’라 한다. 메나리 토리의 구성음은 상행과 하행 시의 구조가 다르다. 상행 시에는 미-라-도-(레)-미의 4음 음계이며, 하행 시에는 미-(레)-도-라-솔-미의 무반음 5음 음계이다. 이 토리의 가장 큰 특징은 상행 시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솔이 하행선율에서는 라와 미 사이에서 경과음처럼 사용되는 점이다. 메나리토리로 구성된 민요로는 강원도 지방 민요인 , , 함경도지방 민요로 알려진 , , 경상도지방 민요인 등이 있다.마지막으로, 제주도 민요의 토리는 어느 한 가지 선법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제주도 지방의 통속 민요에 드러나는 음조직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지방 민요는 5음 음계 구성음이 비교적 골고루 활용되고 있으며, 특정 음을 일관되게 생략하거나 요성음으로 고정적으로 활용되는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 민요의 특성은 서울,경기지방의 민요의 토리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토리의 대표적인 민요는 와 ,, 등이 있다.2. 토리의 접변현상에 관하여 서술하시오.먼저, 경토리와 서도토리의 접변은 난봉가토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난봉가토리는 경기도와 평안도의 음악적 특성이 혼합된 토리이다. 난봉가토리는 반경토리의 구성음인 라-도-(레)-미-솔의 5음 음계 구성을 바탕으로 하며, 수심가토리처럼 주음역의 최저음인 라가 주음이 되고, 그 5도 위의 음인 미를 떨며, 그 바로 아래 음인 레를 생략하는 경향이 짙다. 황해도지방의 대표적인 민요인 이 이에 해당한다.경토리와 수심가토리의 접변 현상이 나타난 또 하나의 토리는 에 보인다. 이 토리는 진경토리처럼 솔-라-도-레-미의 5음 음계로 되어 있으며, 주음역의 최저음인 솔이 주음이고, 그 5도 위의 음인 레를 떨고, 그 아래 음인 도를 주로 생략한다. 개성지방의 민요 , 혹은 가 이 토리이며, 평안도지방 향토민요 중에도 이러한 토리로 구성된 노래가 많다.다음은 경토리와 육자배기토리의 접변은 남도경토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토리의 구성음은 진경토리의 솔-(라)-도-레-미 5음음계를 바탕으로 하지만, 도가 주음이 되고, 그 4도 아래 음인 솔이 굵고 폭 넓게 떠는 요성음이 된다. 그리고 요성음과 주음 사이의 라는 대부분 생략되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같은 토리는 호남지방의 민요인 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한편, 경상도와 충청북도 일부지역의 향토민요 중에는 도-레-미-솔-라의 5음음계로 구성되며 음계의 최저음인 도가 마침음이 되는 노래가 발견된다. 충청북도 중원지방의 과 경상도 지방의 , 등에 자주 보이는 이 토리는 '어사용토리' 라 명명된 바 있다. 이는 주음역의 최저음이 마침음이라는 점이 경토리와 닮았고, 라를 솔의 앞꾸밈임처럼 사용하며 레를 미에서 도로 하행할 때, 경과음처럼 주로 활용하는 점이 메나리토리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메나리토리의 최저음인 미가 반음 높아진 형태이며, 특히 하행 시에 종지음이 반음 높아지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또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토리인 육자배기토리와 동부지방의 대표적인 토리인 메나리토리가 접변되어 새로운 토리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은 본래 경상도지방에 전승되던 노랫말을 바탕으로 남도명창들이 작창하여 널라 알려진 노래이다. 이 곡에서는 남도음악의 특징인 도-시의 하행 반음, 즉 꺾는 음을 특징적으로 활용하면서 동부민요의 특징인 라-솔-미 하행에서 솔을 경과음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난다.3. 판소리와 산조에 사용되는 조에 대하여 서술하시오.판소리와 산조는 전문음악인이 공연을 목적으로 연주하는 예술음악이다. 산조는 그 발생과정에서 판소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므로 산조의 악조는 판소리의 악조와 대동소이하다. 판소리와 산조에 사용되는 조에는 계면조,평조,우조를 비롯하여 경조 (경드름), 설렁제, 메나리제, 추천목,석화제 등 다양한 조가 사용되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계면조,평조,우조 세 가지이다.먼저 계면조는 판소리와 산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조이다. 판소리와 산조의 계면조는 라가 주음이며, 구성음과 각 음의 기능 및 성질은 남도민요의 육자배기 토리와 같다. 주로 슬픈 느낌이 난다고 해서 ‘설음조’ 또는 ‘애원성’ 등으로 불리던 판소리의 계면조는 조선 후기 풍류방의 대표적인 성악곡인 가곡의 악조명 중 계면조라는 명칭을 차용하여 불리게 되었다.
수제천은 본래 고려 시대 때부터 궁중 정재인 무고의 반주곡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 가요로 알려진 정읍사를 노래 부르던 성악곡이었으나, 지금은 가사 없이 가악곡만 전한다. 또, 현재 이 곡은 처용무의 반주에도 쓰이고 있다. 무고 조에 의하면 정읍은 만기, 중기, 급기로 되어 있어, 느린 것, 중간 정도의 것, 빠른 것 이렇게 세틀 형식을 갖추고 있다.현재 <수제천>의 형식은 전 4장으로 1~3장은 각각 여섯 장단, 4장은 두 장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구장단을 보면, 1장과 2장의 셋째 장단과 3장의 둘째 장단은 쌍(雙)·요로만 구성된 짧은 장단이고, 나머지는 모두 쌍·편·고·요의 긴 장단으로 되었다.그리고 1·2·3장의 마지막 장단은 피리와 타악기가 쉬고 대금·해금·아쟁·당적 등으로만 연주하는 여음(餘音: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정읍>은 특징적인 연음(連音)의 방법을 쓰고 있다.수제천의 조(調)는 남려를 기음(基音)으로 하고, 남(南, C)·태(太, F)·고(姑, G)·임(林, Bb)의 네 음을 주로 사용하는 계면조이며, 1장이 2장에서 반복되고 3장에서는 완전4도 위로 변조(變調)되어 나타나고 있다.악기 편성은 향피리·당적·대금·해금·아쟁·장구·좌고·박 등으로 편성되며 처용무를 반주할 때에는 삼현육각으로 연주하기도 한다.전강(前腔) 달하 노피곰 도드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후강(後腔) 全져재 녀러신고요어긔야 즌디를 드디욜세라어긔야 어강됴리과편(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김선조(金善調) 어긔야 내가논imagefont 졈그imagefont셰라어긔야 어강됴리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대악후보≫의 <정읍>과 ≪악학궤범≫의 <정읍사 井邑詞>, 그리고 오늘날의 <수제천>을 비교하면 대체로 형식이 서로 일치하는데 전강(前腔)은 오늘날의 1장, 후강(後腔)은 오늘날의 2장에 해당하고, 과편(過篇)은 3장의 1·2 장단, 금선조(金善調)는 3장의 제3·4·5·6 장단, 즉 1장을 4도 높게 변조한 부분과 비교될 수 있다.따라서 금선조란 금(金)자의 훈(訓)인 ‘쇠’와 선자의 종성(終聲)인 ‘ㄴ’을 취한 ‘쇤가락’, 즉 ‘쇠어서 부는 가락’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고려시대부터 아박무(牙拍 : 고려시대 궁중무용의 하나)의 반주에 쓰이던 음악으로, 월령체의 노래이다. 현재 전승되는 동동은 임종을 주음으로 삼는 계면조이므로 ‘세가락정읍’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남려를 주음으로 삼는 수제천을 ‘빗가락정읍’ 이라 부르는 것에 대응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국악 이론 정리문묘는 문선왕 칭호를 받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 증자, 맹자 등의 학덕이 높은 사람들을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치원, 설총 등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문묘제례악은 이러한 문묘제례에 수반되는 음악과 춤을 이야기 한다.1. 역사한국의 문묘제례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 하례사로 중국 송(宋)나라에 갔던 왕자지(王字之)·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휘종(徽宗)이 보내준 대성아악에서 비롯된다. 이 대성아악은 환구(?丘)·사직(社稷)·태묘(太廟)의 제향과 더불어 문묘제례에 썼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전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제례절차·악기·악장 등이 어지럽고 무질서해졌다.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박연(朴堧)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가 《주례(周禮)》 《통전(通典)》 ≪악서 樂書≫·≪석전악보 釋奠樂譜≫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의 정비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옛 주나라 때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산일(散逸)되어 광해군 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준하여 복구하였으나, 연이은 병자호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펴다가, 영조 때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성종 때보다 규모가 축소된 것이며, 이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이어진 문묘제례는, 중국 본고장에서는 없어진지 오래고, 유일하게 한국에만 남아 있다.2. 악기 편성악기는 아악기만을 사용하고 당악기나 향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아악기는 그 제작 재료에 따라 쇠[金]·돌[石]·실[絲]·대[竹]·바가지[匏]·흙[土]·가죽[革]·나무[木] 등 모두 8종의 재료로 된 것인데, 문묘제례악에는 이 8종의 악기, 곧 팔음이 하나도 빠짐없이 고루 사용되는 것이 우선 다른 음악과 크게 다르다.편성악기는 반드시 8음(八音:8가지의 재료)을 구비해야 하며, 연주형식은 당상(堂上)에 악기를 배치한 등가와 당하(堂下)에 악기를 배치한 헌가 두 곳에서 교대로 주악을 담당하는 형식이다. 등가는 편종·편경·금·슬·노래, 음려의 남려궁(南呂宮)을 주로 연주한다. 헌가는 노고·노도·진고·훈·지 등의 비교적 음량이 큰 관악기·타악기 편성이고, 양률의 고선궁(姑洗宮)을 주로 쓴다. 특히 악기 배치는 음양사상에 따르는데 동쪽에는 음악을 시작하는[樂作] 악기인 특종과 푸른색을 칠한 축이 배치되고 서편에는 음악을 그치는[樂止] 악기인 특경과 흰색을 칠한 어가 배치된다. 현행 문묘제례악에 쓰이는 악기의 특징을 보면 12율(12반음)만 낼 수 있는 악기(훈·약·슬·생)와 12율4청성(16반음)을 낼 수 있는 악기(편종·편경·지·소)로 되어 있다.3. 음악적 특징중국계 아악에 속하는 악곡이므로 음계는 7음음계 구성이고, 주음(主音:宮)으로 시작하여 주음으로 끝난다. 형식은 4음이 1구(句)를 이루고, 8구가 모여 한 곡을 이룬다. 1구의 끝마다 북을 두 번 치기 때문에 구절 떼는 법은 비교적 쉽다. 선율에는 장식음이 없고, 리듬은 규칙적으로 각 음의 길이가 일정하며, 단순음 하나 하나를 길게 뻗다가 그 끝을 올려 끊는 독특한 음악이다. 그리고 이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악장이라고 하는데, 4언 8구의 형식이며, 한 음에 한 글자씩 4자 1구로 모두 32자로 되어 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악사를 도창악사라 한다.원래 문묘악은 위의 황종궁을 이조하여 얻은 12곡과 송신 황종궁, 송신 협종궁, 송신 임종궁 등 3곡을 더하여 총 15곡인데 오늘날 실제 제례에 사용되는 곡은 황종궁·중려궁·남려궁·이칙궁·고선궁·송신 황종궁의 6곡이다.4. 문묘제례의 무용적 특색제레에는 항상 악, 가, 무가 동시에 연행되었는데, 이러한 제례에 연행되던 무용을 일무라 한다. 일무는 제사를 받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그 인원이 결정되는데 공자는 천자의 예를 갖추어 64명의 무원들이 8일무를 춘다. 이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다시 나뉘는데, 문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요, 무무는 무공(武功)을 찬미한 것이다. 문무는 머리에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왼손에 약을 들고 오른손에는 적(翟)을 든다.:방패), 오른손에 척(戚:도끼)을 들고 춘다.5. 문묘제례악의 절차① 영신(迎神):당상의 집례(執禮)가 헌가에서 <응안지악>과 <열문지무 烈文之舞>를 연주하라고 청하면 집사악사(執事樂師)는 ‘드오(擧麾:휘를 들라)’를 불러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집박이 박을 한번 치고 고축(鼓?) 3성(聲)이 있은 다음 진고를 1통(通) 치는데 이것을 세번 반복한 뒤 박을 한번 치면 비로소 모든 악기가 영신악을 연주한다(헌가의 음악을 시작하는 절차는 모두 이와 같다).영신악은 황종궁을 세 번, 중려궁을 두 번, 남려궁을 두 번, 이칙궁을 두 번씩 반복하여 모두 아홉번(九成) 연주하는데, 여덟번째 즉 이칙궁 1성 처음에 초헌관 이하가 함께 사배(四拜)한다. 곡이 다 끝나면 악사는 ‘지오(偃麾:휘를 내리라)’를 불러 악지(樂止)를 지휘하며 집박은 급히 박을 세 번 이상 치고 동시에 어(?)를 세 번 긁은 뒤 음악이 모두 끝난다(헌가음악의 끝은 모두 이와 같다). 일무는 문무(文舞)를 춘다.② 전폐례(奠幣禮):집례가 등가에서 <명안지악 明安之樂>과 <열문지무>를 연주하라고 청하면 악사는 ‘드오’를 불러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등가에서 남려궁을 연주하는데 그 행례의 느리고 빠름에 따라 주악과 일무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헌관이 예를 마치고 나오면 급히 박을 치고 동시에 특경을 한 번 치고 어를 세 번 긁은 뒤 음악이 끝난다.음악을 시작할 때도 대개 영신의 경우와 같으나 첫째 박소리 다음에 특종을 한 번 치고 다음 박소리 앞에 특종을 또 한번 치는 것이 다르다. 일무는 문무를 춘다.③ 초헌례(初獻禮):초헌관이 준소(樽所)에 가서 감작(監酌)을 끝내면 집례는 등가에서 <성안지악 成安之樂>과 <열문지무>를 연주하라고 청하고 악사는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남려궁이 연주되고 초헌관이 공자(大成至聖文宣王) 신위 앞에 나아가 술을 드린[獻爵] 뒤에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 꿇어앉으면 음악을 그친다.대축(大祝:축문 읽는 사람)이 축문을 다 읽고 나면 박소리와 동시에 절고를 세 번 쳐서 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 신위 앞에 헌작하고 나오면 음악이 그친다. 그 행례의 지속(遲速:느리고 빠름)에 따라 주악과 일무에 정수(定數)는 없다.④ 공악(空樂):초헌관이 예를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오면 집례는 헌가에서 <서안지악 舒安之樂>을 연주하라고 청한다. 그러면 고선궁을 한 번 연주하고 그 사이에 문무가 나가고 무무(武舞)가 들어선다.그러나 요즈음은 인원은 교체하지 않고 문무 때 쓰던 진현관(進賢冠)을 피변관(皮弁冠)으로 바꾸고 손에 든 약(?:대나무로 만든 관악기로 중국 아악기의 하나)과 적(翟:우리 나라 전통 관악기. 저)을 무무의 간(干:용을 그린 널조각)과 척(戚:용 머리를 새긴 나무에 대로 자루를 끼워서 만든 춤출 때 쓰는 제구)으로 바꾸어 들 뿐이다.⑤ 아헌례(亞獻禮):아헌관이 준소에 가서 감작을 끝내면 집례는 헌가에서 <성안지악>과 <소무지무 昭武之舞>를 연주하라고 청한다. 음악은 헌가에서 고선궁을 연주하고 아헌관이 공자와 그 종향(從享:배향)의 신위 앞에 차례로 나아가 헌작하는 절차는 초헌례와 같다. 다 끝나면 음악이 그치는데 주악과 일무는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일무는 무무를 춘다.⑥ 종헌례(終獻禮):행례의 절차와 음악의 절도는 아헌례와 같고 예식이 끝나면 일무는 퇴장한다.⑦ 철변두(徹邊豆):삼헌(三獻:술을 세 번 올림)이 끝난 뒤 참배자들의 첨향례(添香禮)가 있고 다음에 초헌관이 음복(飮福)하는 곳에 나아가 술과 포(脯)를 음복하고 제자리에 돌아오면 헌관이 사배한다. 다음 집례가 등가에서 <오안지악 娛安之樂>을 연주하라고 청하면 남려궁을 한 번 연주하고 이 사이 제관은 제기를 철수한다. 집사는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음악을 그치게 한다.⑧ 송신(送神):집례가 헌가에서 <응안지악>을 연주하라고 청하면 송신 황종궁을 연주하고 초헌관 이하 사배한 뒤 집사는 그 곡이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음악을 그치게 한다. ⑨ 망료(望燎):초헌관이 망료하는 자리에 가면 집례는 헌가에서 <응안지악>을 연주하라고 청한다. 그러면 송신 황종궁을 연주한데 예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종묘는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제례악은 종묘 안에 각기 임금과 왕족의 신위를 모신 정전[政殿]와 영녕전[祖廟] 두 사당에 제사 지낼 때 연행되는 악(樂), 가(歌), 무(舞) 일체를 가리킨다. 전체 음악은 세종이 작곡한 보태평 열한 곡과 정대업 열한 곡으로 구성된다. 종묘제례 의식의 구성 형식은 제례 절차나 연주 형태, 악장과 일무 등은 문묘제례악과 거의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르다.1. 역사고려시대부터 이미 연주되다가 조선왕조로 전승된 종묘제례악은 중국계 음악인 당악과 우리나라의 향악(鄕樂)을 섞어서 연주됐다. 세종(1418~1450) 때 아악정비가 이루어지자 한때 아악(雅樂)이 쓰이기도 했다. 세종 때 임우(林宇)의 『석전악보』(釋奠樂譜) 곧 『대성악보』(大成樂譜)에 의거하여 정비된 종묘제례악의 등가악현(登歌樂懸)과 헌가악현(軒架樂懸)은 『세종실록』 권128에 전한다. 오늘날 전승되는 종묘제례악은 1463년(세조 9) 새로 채택된 "정대업"과 "보태평"이다.세종 당시 중국계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을 참작해 창작된 본래의 "정대업"과 "보태평"은 문무백관이 모이는 회례연(會禮宴)에서 연주됐다. 그렇지만 세조 때 개작한 "정대업"과 "보태평"은 1464년(세조 10) 정월에 종묘제례악으로 사용됐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종묘가 불타버리고 1608년(선조 41)에 다시 중건될 때까지 종묘제례악은 잠시 중단됐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이후 10년 동안 정악(停樂)됐다가 1647년(인조 25)부터 복설(復設)됐다.임진왜란 이후 "보태평"의 11곡에 중광장(重光章)이 첨가된 것이 종묘제례악의 변천 사항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이룩한 광국중흥(光國中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1626년(인조 4) 종묘의 선조실(宣祖室)에 따로 악장을 지어 쓰기로 정하였다. 그 종묘악장이 중광장(重光章)이다. 17세기 종묘악장에 대한 황정욱(黃廷彧)·권우(權?)·이정구(李廷龜)·송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