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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수법
    문명에 따른 기수법일반적인 기수법의 정의는 ‘수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으로, 유한개의 기호 (ex 문자, 숫자)를 사용하여 수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십진기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기수법은 고대를 시작으로 문명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고, 각 문명의 기수법은 그 사회의 문화와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각 문명에 따른 기수법 체계와 반영된 사회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먼저,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기수법으로 세 종류가 있다.첫 번째, 단항 기수법은 가장 원시적인 기수체계로서 단위 수를 수직선, 원, 또는 점 등 기호의 반복을 활용하여 숫자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단항 기수법 초기에는 숫자를 나타낼 때 단위 기호를 동일선상에 표기하였으나 보는 이들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같은 한줄에 있는 기호가 특정한 개수를 넘으면 다음 줄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일직선 상에 나열된 기호가 4개를 넘어가게 되면 한 눈에 보고 인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 줄에 존재하는 단위기호의 최대는 4개라고 한다. 실제로 이집트 인이나 크레타 섬 주민들의 경우 초기 단항 기수법에서 한 줄에 단위 기호를 4개씩 표기하였으며 바빌로니아 인이나 페니키아 인들도 3분 원칙을 채택하였다는 고증을 들어 고대 문명의 단항기수법에서 4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타문명에선 숫자 5에 대한 기호를 만들어 초기 단항 기수법에서의 숫자 인식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두 번째, 명수법은 단위 수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큰 특정한 수들에 대해서도 기호를 붙여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명수법을 이용해서 숫자를 표현하게 되면 단항 기수법에 비해서 큰 수를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고대 이집트 숫자와 로마 숫자가 명수법을 바탕으로 기수 체계를 형성한 대표적인 문명이다.마지막으로 세 번째, 위치값 기수법은 숫자의 위치가 계수를 나타내는 방식이다. 현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숫자 체계는 아라비 발생하는데 이를 나타내기 위한 수의 표현으로 십진기수법에서 활용되는 0의 개념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0의 개념을 발명해 낸 것은 인도 문명으로 그들은 위치의 공백과 무의미한 양을 통합적으로 나타낸 기호 0을 발명해냈다.그 다음으로 문명에 따른 기수법에 대해 알아보았다.첫 번째, 바빌로니아 문명에서 기수법이 고안되기 시작한 것은 함무라비 왕 직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발전하였던 기수 체계들과 달리 위치적 기수법을 사용하였다. 바빌로니아 기수법은 60진법을 토대로 하여 한 자리에 올 수 있는 계수는 1부터 59까지 총 59개였다. 또 한 숫자의 자릿수는 60에 대한 계수를 의미한다. 바빌로니아 기수 체계에서 단위 수 1을 나타내는 못 모양의 문자와 10을 나타내는 서까래모양의 문자를 활용하여 표현하였는데 그 형태들을 못과 쐐기에서 따왔다고 하여 설형문자라고 말한다. 1부터 59까지의 수는 이 못과 서까래를 반복하여 표시하였지만 60을 넘어서면 위치값 기수법에 근거하여 10개의 못을 서까래 1개로 나타내는 부가적인 원칙을 사용하여 두 자리 이상으로 수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바빌로니아 기수법의 한계점으로는 의미 없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이를 표현하는 특정한 위치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였다. 바로 오늘날의 0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일부 바빌로니아의 서기들은 혼동을 피하고자 자릿수 사이의 띄어쓰기를 명확하게 하여 수를 표기하기도 했지만 종종 띄어쓰기 과정에서의 실수를 이유로 숫자 표기에서의 모호함은 계속되었다. 바빌로니아 기수법에서 없음의 기호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0의 의미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없음의 기호를 양적으로 없다라는 의미로 표현하지 않았고 그저 특정 위치의 공백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했다. 이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위치에서의 공백과 양적으로 없는 것을 다르게 간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바빌로니아 기수 체계는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최에서 사용되어왔다. 이 기수법은 현대인들이 주로 쓰는 10진법으로 표기 방법으로 명수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들은 1은 막대기, 10은 발뒤꿈치 뼈, 100은 감아 놓은 밧줄, 1000은 연꽃 줄기, 10000은 손가락, 10만은 개구리 혹은 올챙이, 100만은 두 손을 위로 올린 사람 등의 모습으로 나타내었으며 모두 특정 사물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수법은 각 자리마다 다른 기호를 적어내야 하므로 모든 수를 표현하려면 상형문자 기호가 무한히 많아야 했지만 실질적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10만보다 큰 수가 필요한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 기수법은 오랜 기간 동안 유지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들의 경우, 행정과 회계상의 문서들에는 기존에 사용되던 숫자 기호와는 다른 체계를 가진 신관서체라는 필기체를 사용하여 파피루스 또는 도편에 기록하였다. 이는 이집트 초기왕조 시기에 발견된 문서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관서체에서의 기수법은 1부터 9, 10부터 90까지는 10의 배수, 100부터 900까지는 100의 배수, 1000부터 9000까지는 1000의 배수 등에 각기 다른 기호를 붙여서 사용하였다. 신관서체의 숫자 기호를 사용하여 저술된 문서들 중 가장 저명한 파피루스의 예로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를 들 수 있다.세 번째, 중국 문명에서의 숫자 체계는 특정 숫자를 발음할 때 사용되던 중국의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숫자 체계는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있는 일본, 한국에서도 사용되었다. 위치 기수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고 숫자를 표현할 때 쓰였던 문자들은 상 왕조 시대의 숫자, 청동기 시대의 숫자, 막대 숫자, 표준 숫자와 같이 총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상 왕조 시대의 숫자는 갑골 문자로 알려진 거북이의 등껍질과 동물의 뼈에서 발견되었다.그리고 1,2,3,4,10,12과 같이 청동기 시대에 쓰이던 기호들이 이후 막대 숫자에도 기호로 그대로 쓰였다. 막대 숫자는 산가지라고도 하며 각 숫자들을 막대기로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막대 숫자 체계는 주로 수학자, 상인, 천문학자등에 의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표준 숫자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일반적인 생활에서 활용되는 숫자와, 경제 관련 저서에서 사용되는 숫자로 나뉜다. 경제 관련 문서에는 일부 중국 숫자의 특성에 따라 획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면 다른 숫자를 뜻하는 문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 생활에서 사용되는 숫자와 다른 숫자를 활용하였다.네 번째, 그리스 문명의 기수법은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여 숫자를 나타내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에게 숫자’라는 숫자 체계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알파벳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용되던 숫자 체계이다. 이 체계에서는 1,10,100,1000,10000에 해당하는 기호들이 존재하여 그 기호들을 조합하는 방법으로 숫자를 표현하였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에게 숫자’ 이후 두 가지의 숫자 체계를 사용했다. 첫 번째는 수를 순서대로 배열한 뒤 로마 숫자처럼 무리를 만들어 사용하는 숫자 체계로 ‘열 숫자’ 혹은 ‘아티카 숫자’라고 불렀다. 이 숫자 체계에는 1,10,100,1000,10000의 계수를 나타내는 개별적인 기호들이 존재하고 또한 5에 의한 집단화를 나타내는 기호들도 존재하였다. 여기서 10진법을 나타내는 기호들은 각 계수를 나타내는 단어의 첫 글자이고, 5에 의한 집단화를 뜻하는 기호들은 5를 나타내는 수 단어 pente의 첫 글자인 를 사용하여 나타내어졌다. 이 후 두 번째로 등장한 숫자 체계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지고 유사십진법을 사용한 학문적인 숫자 체계로 ‘이오니아 숫자’이다. 이는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의 공식적 숫자 체계로 사용되었고 이 숫자 체계는 각 일의 자리와 십의 자리, 백의 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각 자리에 별도의 문자를 부여하였다. 여기에는 총 27개의 문자가 필요하고, 그리스 문자인 24자 외에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디감마 혹은 스티그마, 포카, 삼피와 같은 옛 문자가 사용되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매우 큰 수를 표기하기 위해 만 단위의 묵음을 이 20진법 체계이다. 마야 인들의 기록인 ‘드레스드 처방전’와 같이 마야 승려 사회에서는 20으로 등급을 나누어 표기하는 위치적 기수 체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있으며 이들은 0에 대한 개념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마야 문명의 기수법에서는 총 19개의 수가 점과 선 등의 단순한 상징들을 사용하며, 점은 단위 수 1을 나타내고 가로선 또는 세로선은 5를 의미한다. 점 5개는 선 한 개로 대체되어서 5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한 자릿수에서 나타낼 수 있는 점은 최대 4개가 되며 마야 숫자에서는 가로와 세로 두 방향을 활용하여 쓸 수 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의 기수법은 일반적 위치적 기수법과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마야 문명의 기수법은 20진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3번째 숫자의 계수는 400이 되어야 하지만, 마야 문명의 학자들에게 세 번째 숫자는 360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번째의 숫자의 계수부터는 다시 20진법의 정의를 따라 계수가 20의 거듭제곱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변칙은 마야 숫자로 모든 수를 표현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변칙이 나타나는 원인은 마야의 천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마야의 천문학을 기초로 발전된 날짜 체계는 하루를 단위로 하였으며 1년을 360일로 어림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야인들은 마야 기원을 기준으로 지난 시간들을 kins 일, unials 월 (20일을 나타냄), tuns 년 (360일로 구성됨), katuns 20년 주기, baktuns 400년 주기로 하여 총 다섯 개의 숫자를 활용해 표현하였고 이처럼 천문학에서 발전한 시간과 날짜 표기 체계는 마야의 기수법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마야 시간 표기법에 따른 세 번째 숫자는 360일로 1년을 나타내는 360이 되었다. 마야 기수 체계에서 0의 의미를 가진 기호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주의에 대한 마야인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마야의 시간 표기 체계의 5개의 숫자 또한 각각 신을 대변하고 있는데 이를되었다.
    공학/기술| 2021.07.20| 5페이지| 2,500원| 조회(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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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자본주의 성격은 무엇인가
    한국자본주의 성격은 무엇인가?현재 서유럽과 미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자본주의체제’ 라는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주의’ 라는 말은 처음에 사회주의자가 쓰기 시작하여 점차 보급된 용어인데 자본주의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유제 아래에서 이윤획득을 위한 상품생산이 행해지는 경제체제처럼 단순히 화폐경제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대하여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고, 노동력이 상품화되고,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체제란 지배권을 가지며 동시에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가 시장에서 결합되어 함께 활동하고 영리주의와 경제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경제적 조직이라고 정의하였다. 막스 베버는 근대자본주의는 직업으로서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하였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하며, 자본주의체제 또는 자본주의경제란 이와 같은 태도에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는 유통경제조직을 말한다.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해왔을까?우리나라 자본주의는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큰 변화를 겪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첫번째 변화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의 변화이다. 우리나라는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여려 면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건 바로 농업사회 내부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여 점차 지방까지 확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민경제도 자급자족의 폐쇄 가계경제에서 시장을 상대로 하는 상품농업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은 화폐경제를 정착시키게 하였다. 상공업이 발달되면서 상공업자 중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18세기 후기에 들어오면서 부유한 상공업자가 늘어나고 이들은 몰락한 양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공업의 발달은 사람들의 가치관 및 경제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상공업의 경제적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정부에서도 상공업을 주요한 세원으로 삼게 되었고 국민들 중에서도 상공업계 진출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의 변화와 더불어 지식인들이 학풍이나 산업사회를 보는 안목도 달라져 갔다. 이 시기에 외래문화, 특히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영향 없이 우리나라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여 성장해온 자생적 변화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두번째 전환기는 개항 이후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이를 수용함으로써 나타난 변화의 시기이다. 18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서구 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서구 공장제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개항장에는 일상과 청상이 상주했으며 인천항에는 서구 상사도 진출하였다.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은 우리나라 정치 행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항 후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은 상공인 계층이었는데 상공업자들이 재화를 축적하면서 사회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개항후의 상공업자들은 18세기와는 달리 상공업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세번째 전환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하면서 식민지가 된 시기에 나타나 변화들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사회경제는 몇 차례의 변혁을 겪었는데 일본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따라 식민지정책이 자주 바뀌었고, 민족자본이 이에 대응하면서 발전을 시도하였다. 네번째 전환기는 광복 후 독립국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는 공업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이다. 이시기에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민족의 경제의식이 성숙되면서 자본주의 방향이 정립되어 갔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사회로부터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고정에서 네 차례의 큰 변동을 거치하면서 전개하여 오늘의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친 자본주의는 어떠한 성격을 띄고 있을까?한국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의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식민지 종속형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에 의하여 자본제화로의 길을 강유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특수성은 6.25 전쟁 전까지는 식민지 종속성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경제의 이중구조, 공업구조의 파행성, 경제활동 분야의 경제외적 성격의 두드러지고, 산업자본 단계를 거치지 않는 저차적 독점의 실현이었다. 역사적으로 나타나듯이 8.15광복에서 요구된 식민혁명의 내용은 실현되지 않은 채 전후의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적인 분업체계 속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낡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유지한 채 그 위에 전후의 미국 의존적인 경제관계를 집합시켰음은 의미한다. 한국자본주의는 관료 자본주 성격에서 드러난다. 한국자본주의는 그 축적의 계기나 산업자본 형성 과정에서 보듯이 지극히 경제외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국자본주의는 사회적 생산력의 이식형적 성격과 독점의 저차성이다. 한국자본주의는 내생적인 사회적 생산력 발전에 의존하기보다는 외국자본과 관련을 통한 생산력이 기초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본 측면의 대외의존은 산업의 이신형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산업간 기업간의 긴밀한 분업성을 없어지게 할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 부존상태에 상응하지 못하는 기술을 도입하게 하고 산업 또는 기업의 시장 점유에 상응하는 고용기회를 창출하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은 국민경제의 이중구조에서 제시된다. 한국자본주의 발전은 전후의 상황에서 외국자본을 주축으로 한 수출입국형의 외연적인 불균형 성장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출입국의 다변화와 산업의 다종화로 전환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경영/경제| 2020.08.31| 3페이지| 1,5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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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와 막스베서가 말하는 역사의 진보 비교
    마르크스와 막스베버가 말하는 역사의 진보의 의미와 내용 비교마르크스는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마르크스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존을 위해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생계수단을 생산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며 새로운 욕구를 창출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발전을 모순의 발전으로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에 관한 방향을 제시했다.첫번째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출현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상품의 물신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했다. 상품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경제학과 인간학으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르크스는 상품이 인간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서 인간이 시장의 상태와 운동에 종속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구성체를 경제영역(하부구조)과 비경제영역(상부구조)으로 나누고 경제적 토대가 본질적인 것이고 이것이 모든 비경제적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 변화의 기본 요인은 경제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두번째로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가 갈등을 기반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자로 계급이 발생한다고 보고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았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 등 한마디로 억압자와 피 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혹은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의 공동 파멸로 끝이 났다. 이처럼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들이 양극화되고 중간계급의 양극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또한 양극화된 계급들 사이의 계급 투쟁은 불가피한다고 보았다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 역사관과 인간관을 유물론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역사의 발전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먼저 '생산력'은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물질, 대상, 힘이 인간의 목적에 알맞도록 변형된 것이다. 생산력은 원재료와 생산수단을 가리킨다. '생산관계'는 특정한 생산양식에 조응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생산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성의 주요 부분이다. 마르크스의 따르면 우리 인간의 역사는 5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한다고 한다. 원시공산주의사회 ->고대노예제사회->중세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사회주의국가라는 5단계로의 발전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사회를 생산양식에 따라 봉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구분했다.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며 생산수단의 소유체계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 모든 사회체계의 토대를 형성하고 이것으로 부터 정치, 법률,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가 추출된다고 보았다.막스베버는 독일의 사회과학자로 강단사회주의자와 대결하였으며 역사학파가 가지는 이론적 약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에 노력하였다. 합리성은 베버가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사용하는 핵심 개념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계산과 측정에 따라 결정되는 과정이다. 그는 이러한 합리화 과정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중앙집권화의 증가, 독립적이고 활력을 가진 구조로서의 시민사회로로 불가피하게 이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리성의 정점에 있는 조직을 관료주의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휘체계가 명확하고 서열화 되어있으며 규정에 따라 움직이고 과업에 따라 정해진 역할에만 충실한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베버는 관료제가 합리성과 비인격성을 기반으로 하고 기술적 우월성을 가진 전문적 효율적 조직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관료제의 합리성은 기술적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규칙은 조직의 목적을 실현하는 적당한 수단을 정의하고 기술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가장 효율적인 노선에 따라 구성원의 행동을 지도한다. 이러한 점에서 관료제는 사회통제를 위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베버는 계급이 단순하게 생산수단으로만 결정된다고 보지 않았다. 특히 지위 집단이라는 존재에 주목했는데, 지위 집단은 긍정적 명예와 부정적 명예를 기준으로 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갖고 있는 공통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베버는 인간의 역사적인 지배 형태에 따라 지배양식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고 합리화 과정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중앙집권화의 증가, 독립적이고 활력을 가진 구조로서의 시민사회로 불가피하게 이끈다고 주장했다.이렇게 마르크스와 베버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비교해 보자면, 마르크스는 역사와 사회 발전에 ‘철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베버는 역사의 법칙이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했다. 베버는 사회학이란 사회적 행동에 대한 해석적 이해라고 보았고, 주로 사회적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설명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마르크스는 현대사회의 등장이 주로 ‘자본주의 경제’의 등장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에 비해 베버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특성은 인간 생활의 ‘합리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계급사이의 불평등원인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마르크스는 현대사회에서 계급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사회의 필연적 성격이라고 보았다. 이에 비해 베버는 계급이 다양한 불평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경제적 계급 이외에도 교육, 종교, 남녀의 차이가 여러 가지 불평등을 만든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차이와 불평등과 권력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던 데 반해, 베버는 경제체계에서의 권력은 다른 다양한 요소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현대사회가 빠르게 자본주의사회로 변화되지만 과도적인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베버는 현대사회의 합리화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사회조직과 경제조직등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을 동일한 형태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과학| 2020.08.31| 2페이지| 1,500원| 조회(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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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이란 무엇인가?우리는 살면서 사회학이란 말을 한번정도 들어 봤을 것이다. 사회학이란 인간의 사회적 행위, 사회관계에 따른 상호작용, 집단 및 사회구조의 변동을 대상으로 삼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는 사회적 행위를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그 행위의 경과와 결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사회학은 19세기 중엽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 격변기에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자, 이러한 사회문제들의 발생 원인과 대책을 탐구할 필요성이 생겨 발전하게 되었다.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초기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현상 속에 내재한 법칙발견을 통해 당시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사회 질서의 재구축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이를 ‘사회학’ 이라고 명명하였고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사회학을 사회정학과 사회동학으로 구분하였는데 사회정학에서는 사회 내의 각 부분들 간에는 자생적 조화가 있다는 사회유기체론을 주장하면서 가족, 언어, 종교 등이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한편, 사회동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발달과 인구증가 및 분업에 의해 사회도 진보하여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실증주의적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허버트 스펜서는 콩트와 유사하게 사회질서와 변동의 문제 모두에 관심을 가졌으나 질서보다는 변동의 측면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는 콩트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유기체로 이해하여 사회는 상호 의존되어 있는 여러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들은 전체체계의 안정과 존속을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인간 사회의 진화를 생물유기체의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인간 사회는 어느 정도 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동질적인 부분들로 구성된 미분화된 단순사회에서 점차 이질적인 것들로 분화된 복잡사회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스펜서와 동시대의 인물로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널리 알려진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을 사회학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저술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현상을 사회제도와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져 있고, 풍부한 사회학적 통찰력을 제공함으로써 현대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는 인류 역사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 집단과 그렇지 않은 피지배 집단 간의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였고 현대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가 집단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 집단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단결하여 자본주의사회를 몰락시키고 무계급 사회인 공산사회를 이룩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서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20세기 후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 몰락을 계기로 급속하게 쇠퇴했으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통찰력 있는 그의 비판은 여전히 현대의 진보사회학 연구 흐름으로 이어져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갈등과 사회 불평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에밀 뒤르캠은 현대사회학 발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회는 분업화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집합의식으로 결속되어 있는 기계적 연대에 기초한 사회와 분업화되어 있으며 개인들 간의 이질성이 높고 상호의존성이 강한 유기적 연대에 기초한 사회로 구분하였다. 뒤르켐의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사회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사회적 통합력, 즉 개인에 대한 사회 규범의 구속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점을 증명하였다. 뒤르켐과 함께 현대사회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회학자로 막스 베버가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마르크스의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그는 경제적 요인 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나 가치 등도 사회변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현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회현상을 실증주의적 접근 방법에 따라 외적으로 관찰하기보다는 개별 인간의 사회적 행위 속에 내재한 동기와 의도를 파악하는 해석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에 사회학은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걸까?사회학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되어 소개된 시기는 해방 후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과의 신설을 계기로 사회학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독립된 학문으로 서의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하면 서였다. 이러한 사회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인기 학문 이였으나 1987년 5월 항쟁 이후의 민주화, 1997년 IMF금융위기와 구조조조정을 겪으면서 사회학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점차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하다 현제에 이르러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속에서 사회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회학의 위기 인지한 사회학자라면 각자의 전공과 개인적 역량을 발휘하여 사회학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사회학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장에서 시작하는 사회학인데 사회학으로 글쓰기를 하려면 복잡한 생각이라도 간명하게 써야 하고 차근차근 또박또박 사실을 제사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점진적으로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보기를 많이 들어야 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읽는 독자가 그것이 자기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사회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왜곡시켜보는 허위의식에서 깨어나 주체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투명하게 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게 하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 사회학자들은 당연이 세계에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고 싶은 골치 아픈 주제에 호기심을 보여야 하며 하나의 기준, 하나의 규범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통일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을 상대화 시켜야 한다. 또한 폐쇄적 의식을 깨트리고 개방적 선택의 가능성을 넓혀야 하며 부분적이고 특수 주의적인 관점에 만족하지 않고 부분과 부분이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전체를 바라보려고 애써야 한다. 한마디로 사회학적 의식은 절대적 확신보다는 불신하고 회의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자세를 갖추게 되며 사회학은 위기에서 점차 벗어날 것이다.
    사회과학| 2020.08.31| 3페이지| 2,500원| 조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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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란 무엇인가의 대한 자신의 견해
    “정의란 무엇인가”오늘날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라고 할 때 ‘사회적 정의’를 떠올리며 그것은 종종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관념과 연결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정의를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바른 의의,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되어있다. 또한 지식백과에서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을 정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의 개념은 다양하여 학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을 평등,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크게 보편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나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나 고대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올바름의 문제이다. 보편적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정의이다. 이는 바로 준법으로 이 때의 법은 국가에 의해 제정되고 강제되는 법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법으로 윤리, 관습을 포함한다. 즉 넓은 의미의 사회 규범이다. 특수적 정의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되는 정의인데 여기에서 다시 배분적 정의와 평균적 정의로 나뉜다. 배분적 정의는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고, 평균적 정의는 같은 것을 같게 대우하는 것이다.그 다음으로 플라톤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플라톤의 정의는 지혜, 용기, 절제에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가 각각 자신의 본분에 맞는 덕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의 덕을 통치자는 지혜, 절제, 용기의 덕을 갖춰야 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세 계급이 조화를 이룰 때 이상국가가 실현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생각했으며 여기서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 정의까지 총 4개의 덕이 합쳐지면 이데아가 된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란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사이의 관계가 조화를 이룬 상태, 즉 '올바른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한다.공리주의 관점에서 정의는 공리나 행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견해이다. 여기서 공리주의란 공리성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이다.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에 행복이 잘 분배되고 행복이 지속적으로 창출되며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될 수 있는 사회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다수결의 원칙을 중요시하고 인간을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며 소수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롭다고 보고 있다. 그에 비해 칸트는 기존 행복의 총량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행복극대화는 도덕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리주의를 거부하고 사회계약을 기초로 한 정의론을 지지하였다. 그러기에 공정한 헌법이라면 개인의 자유뿐 만이 아니라 모두의 자유의 조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노직은 소유권리론을 주장했는데 정의로운 분배란 사람들의 자유로운 교환에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정의로운 상황에서 자유로운 이전에 의해 발생하는 분배는 어떠한 것이라도 정의롭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노동에 의한 결과뿐 아니라 타인에 의해 자유로이 양도된 것에 대해서도 정당한 소유권을 갖는다고 하였다 노직의 소유권리론에는 3가지 원칙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전의 원칙, 정의로운 최초 취득의 원칙, 부정의 원칙이 있다.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산주의사회를 잘 표현한 말이다. 그는 이러한 공산주의사회가 되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기 때문에, 모두 즐겁게 일하고 즐길 수 있다고 하였다. 존 롤스는 사회계약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사회 정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롤스 정의론의 특징은 공정으로 서의 정의관인데 이는 순수 절차적 정의관으로서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직접 답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절차에 의해 합의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공정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근거인 원초적 입장에서 무지의 베일과 원칙을 합의하는 당사자가 합리적 존재라는 데에 있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정의의 원칙은 도덕적 관점인 원초적입장에서 계약 논증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 당사자들이 정의의 원칙으로 두 개의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거기에는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제2원칙에 차등의 원칙, 공정한 기회의 균등의 원칙이 있다.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았다. 앞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본 결과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기준으로서 한 집단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게 하는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즉, 집단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의가 다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정의는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지만 개개인의 정의가 사회적 기준으로 서의 정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른 다수결 원칙에 의거한 다수의 도덕적 뜻에 따른다는 것이다.
    인문/어학| 2020.08.31| 2페이지| 1,5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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